|
입력 : 2023.10.19 03:30근대 의사 교육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1904년 애비슨과 학생들의 외과 수술 모습. /문화재청
정부가 의사 부족 문제를 풀고자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릴 계획이라고 해요.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근대적 개념의 의사를 양성했을까요?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병원은 광혜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혜원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문서로만 일주일 정도 존재했고 실제로는 제중원이라 했어요. 제중원 설립과 초기 의료 인력 양성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갑신정변과 제중원 설립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 의학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지석영의 종두법 도입, 서양 의학 도입을 언급한 개화 상소, 서양 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한성순보' 기사로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어요. 당시 정부 관료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동양의 정신문화를 계승하되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관점에서 한의학에 바탕을 두고 일부 서양 의학을 도입해 한의학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양식 병원 설립은 정부 의지와 관계없이 우발적 사건에서 시작됐습니다.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1858~1932)이 갑신정변 시기 급진 개화파에게 습격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병원 설립 계기가 됐어요. 당시 알렌의 일기에는 '상처는 한쪽은 머리 뒤쪽으로 나 있고 다른 한쪽은 얼굴을 향해 세로로 아주 선명하게 나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요. 이때 한의사 10여 명은 부상 부위에 송진을 바르자고 했으나, 알렌은 끊어진 동맥을 연결하고 부상 부위를 페놀 용액으로 소독했어요. 소독 후에는 상처 부위를 비단실 바늘로 22번, 그리고 은실 바늘로 5번 꿰맸다고 해요. 민영익은 3개월 치료 기간 상처가 재발해 위험한 시기가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죠.
알렌은 1885년 1월 병원 설립안을 작성해 당시 주한 미국 대리공사인 포크를 통해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알렌은 병원 설립안에서 정부가 병원 설비를 제공해준다면 자신은 무급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할 것이며, 나아가 병원에서는 조선 청년에게 서양 의학과 공공 위생학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어요. 포크 대리공사는 병원이 한미 양국이 우의를 증진하는 증표가 될 것이라 생각했죠. 미국 대리공사 포크의 주선, 민영익의 자금 후원, 고종의 결단으로 제중원이 설립됐어요. 고종은 알렌을 어의(왕실 의사)로 초빙하고 이후 명예직이지만 정3품 참의 벼슬을 하사했어요.
제중원은 알렌이 맡았기 때문에 서양식 병원으로 운영됐어요. 정부가 병원을 전적으로 운영했다면 한의사를 중심으로 고용하고 일부 서양 의사를 참여시켜 한의학의 한계점을 보완하도록 했겠지요. 병원은 설립 초기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우선 당시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스크랜턴 등은 병원보다 기독교 복음 전파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심지어 알렌의 병원 운영을 돈벌이 의료 사업이라 비난했고, 제중원 운영 내내 비난이 계속됐죠. 또 제중원은 설립 초기부터 재정난이 심했어요. 병원 운영자들은 환자 급식 중단, 파견된 하인 6명 철수, 기부금 모금 등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제중원은 홍영식의 집(현재 헌법재판소 인근)에 처음 자리 잡았다가 1886년 남촌 지역 구리개(현재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로 확장 이전했습니다. 알렌은 1887년 병원을 떠났고, 이후 헤론·빈튼·애비슨 등이 병원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전쟁으로 정부 재정 위기가 더 심각해졌고, 결국 조선 정부는 1894년 9월 제중원 운영권을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와 애비슨에게 넘겼어요. 애비슨은 제중원 경영권을 넘겨받은 후 병원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1900년 미국 부호 세브란스에게 1만5000달러를 지원받아 새로운 병원을 남대문 밖(현재 서울역 인근)에 짓기 시작했어요. 바로 1904년 개원한 세브란스 병원이죠.
정부는 제중원의 경영권을 넘긴 후 관립 의학교와 병원을 세우려 했어요. 광무개혁 시기 관립 의학교를 세워 한의학과 서양 의학 교육을 시작했고, 내부 병원을 세워 한방 중심으로 진료를 시작했어요. 당시 정부는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결합을 통해 고유의 의료 체계를 수립하려 했어요.
의료인 양성과 의료 면허증 발급
알렌은 제중원 설립 당시부터 의료인을 양성하려 했어요. 병원 규칙에 학생 4명을 선발해 병원에 배치하고, 학생은 의사를 도와주면서 의사 감독 아래 의약품을 조제·투약한다고 규정했어요. 1886년 3월 의학당을 개설했고 7월에는 이진호·이의식 등 학생 12명을 교육하기 시작했어요. 알렌은 화학, 헤론은 의학, 언더우드는 영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학생 대부분은 교육 도중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다른 기관에 취업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떠났어요. 북 장로회 선교부와 애비슨이 제중원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에도 학생 소수가 의학 교육을 받았으나 여전히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정상적 의학 교육은 애비슨이 1900년 교육 연한과 교과과정, 학생에 대한 학교 측의 경제적 보장 등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면서 이뤄졌습니다. 규정에는 '학생은 8년 또는 정해진 교과목을 모두 이수해 유능한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교육받아야 하며, 만약 그러한 규정 연한 이전에 학교를 떠난다면 그때까지 든 비용을 학생이 환납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의학 교육 정상화와 더불어 의학 교과서가 번역됩니다. 애비슨은 김필순·홍석후·홍종은 등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된 의학 교과서를 번역했어요. 1905년 '약물학 상권 무기질', 1906년 '해부학 권일' '신편 화학 교과서 무기질과 유기질' '신편 생리 교과서' '진단학1' 등이 번역됐죠. 1909년쯤 의학 교육에 필요한 교과서가 대부분 번역됐어요.
1908년 6월 3일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만에, 애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약 10년 만에 졸업생 7명을 배출하고 의사 면허를 발급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의사 면허를 받은 7명은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 김필순, 김희영,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입니다.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제중원 전경. /서울대병원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1908년 세브란스병원(제중원) 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최초 전문의 7명. 제일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박서양, 주현칙, 김희영, 홍종은. 가운데는 당시 외과 교수였던 허스트 박사. /연세의료원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김희영의 졸업장. /연세의료원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제중원을 설립한 알렌. /남대문교회 제공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