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손자선(孫~) 토마스(1844-1866년)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1752-1801년)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여사울에서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년)는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양민 신세이나 가세가 넉넉하여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성장하면서 변혁의 열의가 깊어져. 마침내 학문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삼남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하던 권일신의 형제들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 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스승은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질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존창은 그가 얻은 신앙을 혈족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열의에 찬 마음으로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사도적 열의에 불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얼마 뒤에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그를 따르는 신자수가 삼백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외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 천주교회는 한국 복음선교의 효시가 되는 명례방 집회 다음의 시자 공동체로서, 그뒤에 생긴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열심했다. 그리고 이후 백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가 있었다. 이렇게 내포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한 그를 우리는 '내포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더욱 열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창설된 한국 초대교회의 평신도의 임시 성사 집행기에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과 함께 평신도 임시 성직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내포교회를 이끌었다. 그후 북경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채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연락을 받고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로 여전치 열성적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을 도와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놀라운 전교활동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들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 노동자, 서민, 빈민들까지 확대되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를 지어왔고, 종종 다른 신자들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산,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지방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놀라운 활동은 결국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잔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충청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극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다 쇠약해진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비록 한때나마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되었다.
이 한때의 나약함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이존창은 베드로 사도처럼 뉘우치며 배교에 대한 가책과 고통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 이곳에서 다시 전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형이 나서서 그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이존창은 자신의 땀이 어린 내포교회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사시로 결심하고 홍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회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계명을 지켰고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홍산과 금산 지방에서도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김대선 신부님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12년 동안의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큰 기여를 한 최양업 신부님은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처럼 그가 전교한 친인척 가운데에서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교로 입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우의 상당수가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8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최인길 회장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 색출소동이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에게 충직하게 협력했던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충청감영으로 연행되었고, 신문을 받고 천안으로 이송되어 이번에는 연금생활을 겪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연금 생활은 큰 시련이었지만 그는 감사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주님께 향한 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제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벽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대질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가 국청에서 거듭 신문을 당하였다. 이미 한차례 뼈아픈 실수를 경험했던 이존창은 이제 순교의 열의에 불타올랐다. 스스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모진 곤장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굴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과 초대교회 지도자 최창현 등이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틀 뒤인 4월 10일에 여섯 번이나 내리친 칼날 아래 치명하였다. 며칠 뒤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이존창의 목에는 칼자국만이 흉터로 남았을 뿐 잘리 목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전교업적은 교회사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새 삶이 그를 영원한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내포를 열심한 순교자들의 못자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이존창은 그곳의 사도로 함께 기억될 것이다. [출처 : 김길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순교자 이국승(李國昇) 베드로(1771-1801년)
순조 원년인 정유년 5월 22일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한꺼번에 사형결안이 내려진 하루였다. 이날 강완숙, 문영인 등 다섯 명의 여교우와 김현우 등 네 명의 남자교우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다른 여러 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들은 '압송원적관정법'의 방침에 따라 각각 그들의 출생지로 이송되어 처형당했다. 이는 그들의 처형을 봄으로써 지방 주민들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날 선고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국승(1771-1801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겸'이라고 불리었는데 충청도 음성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충주로 이사한 뒤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더 분명히 알고자 서울로 가서, 그 무렵 경기도 양근의 명문가 권일신, 철신 형제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교리를 공부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움직임을 느끼고 곧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변화를 보고, 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지방 박해가 시작되자 이국승 베드로의 신앙생활이 알려져 관아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너무나 긴장하고 두려워하여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났다. 그는 너무도 나약하여 쉽게 배교했지만, 곧 뉘우쳤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함을 이겨보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자주 단식하며 보속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삶을 잘 알지 못한 부모는 자식을 결혼시켜 세속의 일상적 삶 속에서 여생을 지내게 하려 했다. 이국승은 결혼하여 아내를 갖고 자녀를 두게 되면 더욱 계명을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한 차례 배교를 경험한 그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자 하여 부모의 결혼 권유를 끈질기게 거절하였다.
그는 부모의 끊임없는 결혼 재촉을 피하려고 마침내 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독신생활을 하며 집안일에 마음 둘 일이 없어 온전히 착한 일을 하는 데만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삶을 보고 차츰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의 어려운 일에 헌신하였다. 교우들은 그의 모범을 보고 따랐으며, 외교인들 가운데 그의 행실을 보고 천주교를 신봉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행복했던 기간은 짧게 끝이 났다. 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이 최초의 전국적인 대박해 때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국승은 일찍이 충주 본관에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배교했던 때를 회상하며 몸서리쳤다. 그런 때 그가 옥에 들어서면서 금방 옥고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한 한 교우를 보게 되었다. 이국승은 순간 자신의 배교와 그 동안의 회한의 삶을 생각하며 뜨거운 연민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배교자에게 "뉘우쳐 회개하라."고 외쳤다. 뜻밖의 외침에 놀란 배교자는 낯선 충고자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배교자가 바로 고광성이었다.
고광성은 황해도 평산지방의 양민 출신으로 손인원이라는 교우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한 뒤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고 계명을 지키며 본분을 행하고자,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곧 체포되어 관아에 투옥되었으나 배교하지 않아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청으로 이송된 뒤 더 가혹한 형벌을 견디지 못해 그만 순간적으로 배교하고 말았다. 그때 이국승 베드로가 포청으로 오게 되어 이렇게 옥중에서 만났던 것이다.
이국승은 고광성의 배교에 피를 토하듯 열렬히 권면하며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는 준엄하게 꾸짖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그대가 배교한 것은, 자네 자신이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서 말하게 한 것이라고 포장에게 이야기하게."
여러 차례 권고를 받고 고광성은 마침내 배교한 것을 철회한 뒤 다시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고, 더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해지는 혹독한 형벌을 달게 받으며, 더욱 굳게 신앙을 고백하는 영웅적 모습을 보였다. 신앙심을 버리는 말 한마디도 받아내지 못한 형리는 고광성을 형조로 옮겨 사형선고를 받게 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평산으로 옮겨 1801년 7월 2일 처형하였다. 지방민을 위협하려는 조정의 법에 따라 그는 고향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도끼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아버지의 장렬한 순교를 본 고광성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1839년 12월 29일 순교하였다. 그분이 103위 한국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고순이 바르바라 성녀이다.
이국승 베드로는 이렇게 열절한 신앙으로, 배교한 신자를 권면하여 순교의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오래지 않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동료를 옥중에서 격려하여 순교하게 한 그 자신은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나약함을 보였다. 관원은 즉시 고문을 중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때 이국승은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지금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나는 곧 전처럼 천주교를 신봉하겠소." 하고 외쳤다. 관원은 이 어이없는 태도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 감정이 크게 상해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했던 의지를 뉘우치며 어금니를 깨물고 형벌을 견뎌내려 하였다. 그러나 참혹한 형벌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선혈이 튀는 곤장에 뼈가 으스러졌다. 인간의 의지는 잔학한 고문 앞에 너무도 약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주님을 배반했다. 고문을 중단하고 관원이 배교를 확인한 뒤 그를 풀어주려 하였다. 이국승은 거듭 자신의 배교를 철회했고 이렇게 배교와 취소가 거듭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은 여러 번 주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배반하고 또 뉘우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교리를 생의 의미와 가치의 지표로 승화시키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에 기대려던 열정을 바꾸어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 갔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못난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당신 종이 일체의 교만과 과신을 버리고 겸허하게 의지해 왔을 때 그에게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대들이 나를 동정하지만, 참으로 불쌍한 것은 주님 은총에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였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으며, 그의 시신은 조카들이 공주에 묻었다. [출처 : 김길수 요한, 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5월호]
하늘의 큰 광채에 둘러싸여 순교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1743-1798년)
1797년, 충청감사 한용화(韓用和)는 공주에서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천주교인들에게 체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를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난폭한 조처로 충청도의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희생된 증거자들에 대한 시록은 단 한 사람 정산일기(定山日記)의 주인공 이도기(李道起, 1743-1798년) 바오로의 것이 있을 뿐,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고통당한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 그때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도기 바오로의 행적으로 보며 그 동료 무명 순교자들을 함께 기리고자 한다.
충청도 청양 고을에서 태어난 이도기는 글을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천주사랑의 덕행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외교인을 입교시키는데 썼으며, 박해를 피해 대여섯 번씩이나 이사를 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열심한 신자들이 생기게 했다. 그렇게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정산(定山)고을의 한 옹기촌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며 살게 되었는데 그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그러던 1797년 6월 8일, 갑자기 무장한 포졸들이 들이닥쳐 가택을 수색하고 집에서 일하던 그를 마을 근처 숲속으로 끌고 가 매질하였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관장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읍내 저잣거리를 돌며 군중들에게 모욕을 받는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도기는 공맹의 도에 젖어 편견에 찬 관장의 심문에 지극히 겸손하고도 간절한 태도로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였다.
"너는 성현의 도를 아는 자로서 어찌 사교를 믿는단 말인가!" "저는 사교를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은 천주교인인데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라 만인이 믿어야 할 참 종교입니다." "그래, 공맹의 도를 버리고 거짓을 따름이 옳단 말인가?"
관장이 거듭 다그치자 이도기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태도로 "저는 무식한 탓으로 선비들의 몫으로만 되어 있는 공자와 맹자의 도는 알지 못합니다. 불도는 스님들에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창조주와 창조질서 그리고 십계명 등 천주교의 기본 교리에 대해 차례로 설명했다.
관장은 빈틈없고 조리 있는 이도기의 흐르는 물 같은 논설에 속으로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따져 물었다. "너의 말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는 하다마는 너는 결국 속았다. 중국에서 리마두(마태오 리치 신부)는 자신의 놀라운 지식으로 백성을 속였다. 너는 어째서 그 속임수를 보지 못하느냐!"
"리마두가 비록 박식하다고는 한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전파한 도리는 그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지대군의 도리요, 천주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진리인 것입니다. 임금님의 말도 지극히 조심하여 전하고 따라야 하거늘 하물며 이 세상 임금과는 비길 수도 없는 천주님의 말씀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이도기는 그가 믿고 있는 리마두의 지식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임을 분명히 하였다.
관장과 포졸들은 이도기 바오로의 겸손하고도 열절한 신앙고백에 깊이 감동하여 어떻게든 이도기를 풀어주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도기가 도망가기를 은근히 바라 옥문도 잠그지 않고 한눈을 팔며, 밤사이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날이 하얗게 밝아 포졸들이 와보니, 옥문이 절반이나 열려있었는데도 이도기는 옥중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옥쇄장이 매우 딱하게 여겨 물었다.
"여보시오, 어찌 그리 물정도 눈치도 없단 말이요? 참으로 딱하시오. 보면 몰라서 그렇게 버티고 앉아 계시는 거요?" "이보오, 옥쇄장. 당신은 죄수를 지킴으로 국록을 먹는 사람이 아니요?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이나 하시오. 나는 내가 옥안에 있든, 옥 밖에 있든 주님의 진리만 증거하면 그만이요."
옥쇄장이 더욱 안타까워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모두 당신을 동정하고 있음을 그렇게도 모르시오. 겉으로 한번만 주를 모른 척하면 될 일을 그렇게 고집을 피우시오. 고집을 피우니 우린들 어찌하겠소. 그러다가는 매 맞아 죽기 꼭 알맞소." 이도기는 이 유혹을 준엄히 물리치며 답했다. "이보시오, 내가 매를 맞아 죽을 지, 굶어 죽을 지, 혹은 어떻게 죽을 지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요, 나는 내가 어떻게 죽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다만 기뻐할 뿐이요."
그는 유혹을 물리치고 모진 매를 맞으며 비참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아내에게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면회 오지 말도록 부탁하였다.
"앞으로 누가 당신더러 무슨 말을 내게 전해달라 하더라도,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할 성질의 것이라면 내게 전하지 마시오. 마음이 약해질지 모르니까 말이요. 그 동안 나 때문에 수고가 많았소. 이제 내일부터는 면회 오지 마시오."
아내는 남편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알 수 없었으나 옥바라지해온 수고에 대한 인사말로 생각하고 다음날도 조심스레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면회를 갔다. 이도기는 아내가 계속 면회 오는 것을 보고 다시 아내를 불렀다.
창살을 가운데 두고 부부가 마주앉았을 때, 이도기는 옷자락을 펼쳐 살이 터져 으깨어진 참혹한 상처를 보여주며 말하였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어찌 이 상처가 아프지 않겠소, 내가 단지 주님만을 향해 있을 때는 이 고통을 이길 수가 있고 그러나 부인께서 오시면 내가 어찌 부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부인을 보게 되면 사랑하는 아내를 보는 기쁨은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은 이길 수가 없고, 그러니 면회를 오지 마시오."
아내는 남편이 왜 면회를 오지 말라는지 그제서야 알아듣고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도기의 옥고는 계속되었다.
사형집행일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쁨으로 가득차 창백하던 얼굴이 환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 밝은 얼굴을 보고 포졸들은 감탄하였다. 모진 매를 맞고도 그는 합장하여 기도하며, "주님께서 내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매를 쳐서 뜨겁게 채주신다"고 오히려 감사했다.
더 견딜 수 없는 고문으로 기진했을 때, 포졸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하며 유혹하였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다. 배교하겠느냐?" 순교자는 외쳤다. "결코 할 수 없소." 그의 입술은 새카맣게 타고 생명의 입김도 겨우 붙어있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르던 그는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 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이 몇 차례 거듭되는 동안 관장은 그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도록 엄격히 다루었다.
1798년 6월 12일 저녁, 이도기에게 포악한 형벌을 가하라는 관장의 명을 받고 포졸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심한 매질에 거룩한 순교자의 온몸으로 짓이겨지고, 정강이가 부러져 하얗게 드러난 뼈에서는 골수가 흘러 땅을 적셨다. 손바닥을 제외한 몸 전체 어느 한 곳도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이던 증거자는 이윽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내리면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면회를 눈물로 참았던 부인은 포졸의 전갈로 남편의 죽음을 알고 통절히 울었다. 그때 옥쇄장이 부인을 위로하여 말하였다. "부인,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열 이튿날 밤에 하늘에서 큰 광채가 비추어 당신 남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소." [출처 : 김길수,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경향잡지, 1997년 11월호]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이미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와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전갈을 받은 발래기 신자들은 대부분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관청의 분부대로 서적을 갖다 바치고, 관장 앞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때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서적도 갖다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의 신자들까지도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스테파노를 원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원망을 감수하였다.
1866년 10월 4일(양력 11월 10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말하였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들 중에서 김원중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즉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10월 30일(양력 12월 6일)에는 모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이때 스테파노는 공주로 압송되기에 앞서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아울러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스테파노 일행을 인도 받은 공주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후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1783-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아버지.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忠北 堤川郡 白雲面 花堂里) 출신.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충청목사(忠淸牧使),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한 그의 입교시기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부터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켜온 것 같다. 그의 아들 남종삼이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大院君)에 진언한 사실을 말했을 때, “너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형선고 서명을 요구하면 천주교에 욕된 표현을 일체 지우도록 명심하라”고 하며 천주교 신앙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였다. 아들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순교하자 그는 고향에서 잡혀 공주(公州)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의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