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쉬어가는 고택에서 나를 찾다
홍석주
늘 정신없이 시간에 쫓기어 귀에는 mp3이어폰을 꼽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리를 단절한 채 에스컬레이터로 혹은 엘리베이터로 바쁘게 이동하면서 한 손에는 휴대폰으로 연실 문자와 전화를 눌러대는 지금의 현대인,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겨울 kbs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안동에 위치한 400년전통의 고택 옥연정사에서 고택지기로 살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겨울내내 그 정적이고 고즈넉한 풍경과 시간이 멈춘듯한 재래식 생활상 등이 머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질 않았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여유’에 목이마른 저는 여유를 가득 머금고 있는 고택에 따뜻한 봄이오면 꼭 가보리라 다짐했습니다.
항상 그렇듯 시간에 쫓겨 푸른새싹이 파릇하니 돋으며 만물이 정기를 받는 싱그런 봄날들을 흘려보내고 선들부는 가을 바람이 그리운 초여름 입새에 집 근처 ‘여경구 가옥’으로 겨우 시간을 내어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찔끔찔끔 지루하게도 내리었던 봄비들이 깨끗이 갈아입힌 산천초목들의 옷 색깔들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희가족은 진접 ‘여경구 가옥’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경구 가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에 위치한 전통가옥으로,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 1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약 25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고택으로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합니다. 고택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나즈막한 언덕길을 숨차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올라가다 지칠 때 쯤 길의 끝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뒤편으론 웅장한 자태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천견산 한자락을 병풍인양 두르고 앞편 으론 아담한 마을과 저 너머 실개천이 흐르는 제가 고등학교 때 배운 최고의 입지조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었습니다.
고택을 둘러보기에 앞서 동네 분으로 보이는 노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여경구 가옥은 내곡리에 있는 모든 가옥들 중에서 풍수지리 적으로 가장 좋은 명당자리 라 하셨습니다. 예전부터 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분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듣고는 아버지께서 제 동생을 가리키시며 “특히 석진이는 여기서 하루정도 자고 와야겠다” 라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셔서 저희가족 모두 얼굴이 벌개지도록 웃었습니다.
여경구 가옥은 지금 보수 중 이었습니다. 사랑채를 제외한 사당과 안채 모두 보수가 한창 진행중 이었습니다. 다음에 방문 할때는 비와 태풍도 끄떡없이 막아줄 튼튼한 지붕과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더욱 단단하게 보수된 사당의 모습을 볼 수 있을겁니다. 보수중이어서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순 없었지만 서운함보다는 어떻게 바뀔 것 인지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컸습니다.
가옥의 구조는 보통의 가옥들과는 조금씩 다른 점 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랑채며 사당, 안채가 붙어있지 않고 모두 떨어져 있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짧고 효율적인 동선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요즘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왠지모를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구성 방식 이었습니다.
들어오는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되어있었고 대문채 양옆으로 외양간과 행랑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솟을대문이 인상적 이었는데 솟을대문은 요즘과 같은 단순한 대문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집주인의 지위와 능력을 상징하는 만큼 웅장하고 무게감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대문채에 연결되어 있는 담벽에도 돌들이 일정한 무늬를 만들며 단순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으로 조화롭게 수놓여져 있었습니다. 대문채를 지나 가옥으로 들어서면 가장먼저 들어오는것은 아담한 집에비해 널찍한 마당의 모습입니다.
마당에는 몇백년 세월을 집과함께 보낸 덩치 큰 나무들은 없지만 아기자기 작은 꽃나무들이 몇 그루 옹기종기 무리를 형성하여 조화미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마당을 구경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곧 사랑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크진 않지만 가옥의 정가운데서 앞쪽으로 조금 나온곳에 위치하여 안채를 가려주는 제2의 대문 역할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정면4칸 반측면 1칸반 정도의 대청마루를 갖추고 있는 아담한 건축물입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안정감 있으면서 옛스러웠고 몇 백년이 지나도 끄덕없이 사랑채를 떠받히는 기둥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바라보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그리 넓지 않았고 단정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사랑채 앞쪽의 대청마루는 굉장히 넓은 편이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청마루에 앉아보았습니다.왜 여기다 집을 지었는지? 왜 풍수적으로 여기가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 하는지? 대청마루가 왜 이렇게 넓은지? 그 의문들은 대청마루에 앉는 즉시 해결되었습니다. 대청마루에 앉아보는 그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장관이다 못해 경건함 마저 들었습니다. 마을의 약간 고지대에 위치한 까닭에 마을의 밭이며 집들이 한눈에 들여다 보이고 저 멀리 실개천이 흐는 모습, 그 뒤에 또다시 색색으로 물든 산들이 한폭의 동양화 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집의 주인도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을 즐겼으리라. 이 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신념을 되새겼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즐비하는 도시 한복판에 사는 저에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상쾌했습니다. 옛 선조들의 넉넉한 인품과 넓은 시야를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을 찾은듯 했습니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람에 감탄하며 한참을 쉬다 목을 축이고 안채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가옥의 안주인에 해당하는 안채는 한창 보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2칸의 부엌과 2칸의 안방, 곳간과 뒷간 등으로 공간구성이 되어있었습니다. 화려함의 멋은 없었지만 조선후기 사대부의 기상과 같이 검소하면서 꼿꼿한 심지가 그대로 투영된 듯,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신 안채를 둘러싼 벽면은 각각 다른 모양으로 생긴 자연석으로 기하학적 무늬를 수 놓은 약간은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안과 밖의 화려함과 단정함이 적당히 어우러진 조화로운 모습이 아주 인상적 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늘 ‘나’ 혹은 ‘나의 가족’ 만을 중요시 했던 조화롭지 못한 생각들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안채를 따라 쭈욱 걸어 올라가다 보면 사당채가 나옵니다. 사당채는 사랑채 뒤편으로 자연석으로 된 계단을 몇 개 올라간 곳에 정성스럽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사당채는 보수중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겉모습만 보아도, 항상 ‘효’ 를 강조하던 옛 선조의 조상공경의 마음과 정성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져 왔습니다.
집안의 가장높은곳에 정성스럽게 지어진 건물, 제사를 지낼때마다 상황이 허락하는 최고의 재료로 정성스럽게 조리하여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추었을 집주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그 깊은곳에서 우러나오는 ‘효’의 진정한 의미를 아로 새기었습니다.
먹을것, 입을것, 탈것등이 부족함없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고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1분안에 세계일주가 가능한 편리한 스피드시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때론 그 어떤것으로도 채울수 없는 목마름을 느끼곤 합니다. 그 목마름은 물리적인 결핍으로 오는것은 절대 아니요, 바로 제 안에서의 스스로 느끼는 본질적인 목마름입니다. 이번에 가옥을 방문하여 느끼고 보았던 모든 것들은 감로수가 되어 앞으로 제가 살아가면서 느낄 목마름을 해소해 줄것입니다.
가옥은 인간이 직접 만드는 입체적 역사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역시 의미가 깊지만 가옥을 방문하여 내가 집주인 되어 보기도 하고 스스로 역사책을 만들듯, 현실에 비추어 예전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만족감과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지치고 자신의 무력감과 마주하게 될 때, 나와 비슷한 희노애락을 거쳤갔을 선조들의 고택을 찾아 슬기로운 지혜를 배워 스스로 해법을 찾는것도 좋은 해결방법일 것입니다.
이번주말 가족, 혹은 친구와 가까운 근교의 고택으로의 답사 어떠신가요?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