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을 한 아이가 가정환경조사서를 들고 와서는 저녁을 먹고 난 식탁에 앉아 쓰기 시작했다. 저녁상을 치우고 난 나는 아이의 맞은편에 앉아 책을 보면서 아이가 쓰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내가 어렸을 적,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걸 가장 아프게 실감했던 때가 바로 이때였다. 부모 학력, 재산상태, 월 소득,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나 자가용 등등 세밀하게 분류된 항목에 동그라미를 쳐야하던 그 때. 썰렁하고 초라한 가정환경조사서를 내면서 참 기분이 그랬다. 그래도 써서 가져가는 것은 괜찮은 편에 속했다. 때론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상대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집엔 자가용이 있어요~ 하는 사람 손들어 봐." "집에 TV 있는 사람" "전화 있는 사람 ~" ....... 계속 손을 들고 내리지 않는 친구도 있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한두번 손을 들었다 놓는 친구, 혹은 한번도 손을 들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나, 없었나...
그 가정환경조사서를 지금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아이는 두장으로 된 그것을 놓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그때 만큼은 아니지만 부모의 학력, 주택소유여부, 과외나 학원의 과목수, 시간 따위를 적게 되어 있었고 부모님과 동거를 하는지, 엄마가 언제 집에 계시는지, 통화할 수 있는 시간대는 언제인지, 부모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내가 원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등등 좀 더 세심하게, 어쩌면 좀 더 인간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생활 침해에 해당될 수도 있는 질문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부모와 나와의 친밀도에 대해서는 '최상' 이라고 즉시 답을 하고 집안 분위기에는 '화기애애' 라고 번개같이 써 내려가던 녀석의 손이 어느 한 곳에 이르자 자리를 못 잡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좋은 점과 싫은 점, 아버지의 좋은 점과 싫은 점을 나열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가만히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 뭐라고 쓰지 ? 뭘 이렇게까지 자세히 쓰라 그래..." 아이는 앉은 자세를 바꾸더니 물을 한모금 마셨다. "망설일 것 뭐 있어 ? 그냥 평소에 네가 좋거나 싫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쓰면 될 것을... 왜, 엄마가 보고 있어서 불편해 ? 자리를 피해 줄까 ?" "아니예요, 괜찮아요. 엄마도 다 아시는 건데 뭐..." '딱 부러지는 엄마의 성격이 좋으면서 또한 싫은 점이기도 하다.' '아들을 잘 챙겨주시는 아빠. 단, 연설할 때 좀 지루하다." ' 동생 : 나와 잘 놀아준다' 하하하.... 나는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아들아, 고3 씩이나 된 학생이 동생에 대해 쓴다는 게 '나랑 잘 놀아준다' 라구 ? 심하다 ~ 동생이 형에 대해 쓴 거라면 또 모를까." 옆에 있던 남편도 둘째 녀석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계속해서 존경하는 사람 (연예인, 위인, 친구 등 누구든지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이유와 함께)을 쓰는 곳에는 '부모님' 이라고 쓰더니 이유에 대해서는 '새삼 말 할 필요 조차 없음' 이라고 쓰는 것이 아닌가. 순간 기분이 아주 묘했다.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부모를 믿고 좋아하는데, 나는 과연 아이에게 신뢰받을 만한 부모였던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슬쩍 남편의 눈치를 보니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짐짓 못본 척 일어나 책을 집어 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도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남편에게 내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저녀석이 나를 찌르네..." "찔릴 게 뭐 있어 ?"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 나는 찔리는데. 난 참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고 자식에게 부모로서의 권위만 내세우는 그런 엄마잖아. 존경하는 사람에 거침없이 부모님이라고 쓸 때 깜짝 놀랐어. 엄마니까 좋아는 할 수 있겠지만 존경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야. 나는 내 부모를 존경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랬다. 지금까지 나는 내 부모를 존경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려운 세월을 살아내신 나의 부모님.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먹을 것 입을 것 풍족하게 살아본 적도 없는 그분들의 팍팍한 삶이 내게로까지 전해져 오는 순간순간마다 원망을 하긴 했었지만 그 어려운 와중에도 우리 다섯 남매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시고 거두어 내신 그 분들의 노고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본 것은 얼마나 될까. 어느 정도 커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면서 부터는 그저 맨몸으로 세상을 살아 내신 내 부모님에 대해 애틋함과 안쓰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것 역시 존경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도 몰래 엄마에게 하나 둘씩 쌓았던 벽돌을 다시 하나 둘씩 내려 놓으며 놀랄 만큼 엄마와 닮은꼴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미래의 나의 모습은 지금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여자로 때론 친구로 혹은 오히려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애틋함으로 내 앞에 계시다. 부모를 존경한다는 내 아이.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그 존경의 대상이 무심함으로, 애틋함으로 혹은 짐으로도 여겨질 때가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지금 아이의 그 마음을 오래오래 지켜주는 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내가 영원히 존경받는 부모로 남아 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가정환경조사서를 다 작성한 아이가 그것을 들고 식탁에서 일어섰다. 이것이 아이가 쓰는 마지막 가정환경조사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학에 가고 또 사회에 나가고 나면 그 때 부터는 가정 환경과 상관없는 자기 스스로 일군 자기의 이력으로 평가받게 될 아이의 삶. 부디 그 아이가 살아낸 인생환경조사서 또한 지금처럼 그렇게 구김없이 당당하게 써 내려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오늘따라 아이의 키가 쑤욱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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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나무집 원문보기 글쓴이: 통나무
첫댓글 스위트홈입니다. 부럽습니다. 성공한 부모상입니다. 글 짜임새가 옥양목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아이들 덕분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부모가 오히려 칭찬을 받습니다.
자식농사 성공했어요. 부럽습니다.
황송하옵신 말씀이십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