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앙리 마티스(1869-1954)
1869년에 태어난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르 카토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유한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는 데생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 대학에 가서 변호사가 되었다. 졸업 후 고향의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였다. 1891년에는 법률 사무소에서 사직하고 파리에 가서 미술학교의 야간부에 등록하였다. 이때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서 지도를 받는다. 모로는 마티스와 루오를 아주 좋아하였다.
1895년에는 모로가 교수로 있는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마티스는 신경향 미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아서 화면을 밝게 하였다. 1896년 경부터는 인상파 미술에 관심을 보였다. 피사로와는 친구가 되었다. 특히 고흐와 고갱을 좋아 하였다.
이때는 자신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풍경화를 그렸다. 1899년경부터 화려한 색채를 내면의 투사로 이용하여 풍경화를 그렸다. 초기 야수파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이다.
‘스트디오의 누드(1899)는 이런 경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여인의 인체는 묘사적인 색채에서 완전히 행방되어서 붉은 색이다. 푸른 색과 붉은 색, 즉 찬색과 따뜻한 tord의 대비는 명암 대비를 대신하여 보여준다.
1901년에 마티스는 고흐 전시회(약 70여점)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자신의 방법에 자신감을 가진다. 여기서 블라멩코를 만난다. ‘사치, 고요, 관능’은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으로 그렸다. 이후로는 신인상주의에 회으를 느끼고 더 이상 이 방법으로 그리지 않는.
신인상주의에서 벗어난 후로는 짤막하거나, 길기도 하고, 굵기도 멋대로인 선을 그으므로, 색채를 순간의 기분에 따라서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색면이 등장한다. 색채는 실제의 시각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분에 따라서 색을 선택하므로 주관적인 표현도 가능하다. 그래서 꼭히 객관적인 색채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1905년에 살롱 도튼느에서 마티스를 위시한 일군의 화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가진다. 이때 이 그림을 비난하는 의미로 야수라는 말을 사용하므로, 미술운동의 명칭이 되었다.
‘모자를 쓴 여인(마티스의 부인이라고 한다)’ 은 얼굴에 원색 물감을 그대로 사용하여서 충ㅇ격을 주었다. 모델의 자세는 전통적인 양식 그대로 이지만 원근법과 명암을 배제하고 초록과 빨강, 찬색과 따뜻한 색조의 대비와 병열에 의해서 인물과 배경이 연결된다. 화면이 마치 색채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마티스는 자연과 인물 등의 자연의 시각에서 시작하면서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였다. 즉 훨씬 더 주관적이고, 추상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표현은 인상주의자들처럼 순간의 인상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려 하였다. 따라서 ‘오래 동안 집약한 감정의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더래도 색채의 선택은 객관적인 근거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직감에 의하였다.
‘살롱 도톤느’ 전시 이후의 작품들도 오래 동안 구도를 구상한 후에 그렸다. 마티스와 야수파 화가들은 세잔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야수파의 그림에는 원시주의를 도입하였다. 아프리카 조각을 야수파 그림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1907-8년이 되면 야수파 주요 화가들은 관심이 색채에서 입체감과 양감, 중량감으로 옮겨가므로 생명력을 잃개 된다. 브라크처럼 입체파로 돌아선 화가는 야수파 시절을 부끄러운 시절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마티스는 1906년에 북 아프리카로 여행하면서 그곳의 옷의 문양을 오달리스크 그림에 도입하여 장식성이 강화된다. 그의 그림은 색채가 주도를 이룬다. 그러나 색채 사용에 어떤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티스의 그림에서 색채를 통한 감정의 표현은 아수파 시절 이후에 그린 춤 시리즈의 나체화에 잘 나타난다.
최후 시기의 작품은(1950년대 전후) 색종이를 오려서 붙이는 그림을 제작하였다. 색채와 단순성이 결합한 것이다.
남불의 니스에서 1954년에 숨을 거두었다.
마티스의 작품들
1) 후식(1897) -- 인상주의 기법이 남아있다. 1906년에 피사로의 영향으로 인상주의 그
림을 그렸다. 물감의 색채가 풍부하다.
2) 정물(1899) --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주의 양식이 나타난다.
색채는 사실적이지 않고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한다. 색면이 나타난다.
이 시기를 선-야수파 시대라고 한다.
3) 스튜디오의 누드(1899) -- 마르케의 작품과 비교가 된다. 마르케와 같은 그림이나 마
르케는 신인상주의 기법이다. 색조의 대비로 공간감이 느껴진다.
마티스는 배경과 인물에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평면이다.
4) 사치-고요-관능(1904-5)
보이는 풍경을 상상의 풍경으로 바꾸어서 그렸다.
가족들과 남불의 해안에서 보내면서 그린 것으로 나체-해안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
고 마티스가 상상하는 이상향이다. 즉 보들레르의 시에 자기 애인에게 보내면서 ‘
사치, 고요, 관능이 흐르고 있는 땅으로 가자.‘라는 문구에 대한 그림이다.
5) 해안 가에서 (1905)
색면이 더욱 심화된다. 가족이 쉬고 있는 풍경으로, 인상주의의 보색의 대비를 강조
했지만 여기서는 색점이 하나, 하나 독립하여 색면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6) 클리우드 풍경(1905) 색면이 더 뚜렷해진다.
햇빛과 그림자 모두 밝은 색으로 표현하였다.
7) 열려진 창 (1905) 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작품이다.
인상주의 기법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창 바깥의 풍경과 창 안쪽의 풍경이 구분이
안된다. 굵은 선묘라기보다는 색면에 가깝다.
8) 모자를 쓴 여인(1905) 초록색의 여인(1905)
원근법을 배제하고, 색채도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하였다. 콧잔등의 색이
푸르고, 얼굴도 대비되는 두 색으로 그렸다.
색채의 밝기 만으로 뒷 배경과 얼굴을 구분하였다.
--->고흐, 고갱, 세진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9) 생의 기쁨(1907)
야수주의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색채가 얇아지고, 굵은 선으로 윤곽선을 둘러
싼다. 누드를 도입한다.-->고전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10) 청색 누드(1907)
야수주의를 끝내고 3차원의 구조를 살려내려 하고 있다. (율동적인 선과 색채 사용)
세잔의 영향으로 입체적으로 되려는(세잔의 수욕도) 얼굴이나 몸의 표현(아프리카 미
술의 영향이 나타난다.)
11) 빨간색의 하모니(1908)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원시적이다. 문양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