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들
이성렬 (시인, 경희대 교수)
네온간판들이 현란한 거리를 지날 때나, 토크쇼에서 쓰잘 데 없는 말들의 잔치에 자막까지 가세하는 광경을 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여인의 울긋불긋한, 들떠버린 화장을 연상하게 된다. 혐오광고 비슷한 말과 시각을 동원하여 서로 얼굴 내미려는 것들로 가득한, 차라리 욕먹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잊혀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이 두려워하는 세태 속에서 요즘 들어 얻은 습관은, 좀 더 천천히 걷는 것, 뜸하게 낮게 말하는 것, 고개를 느리게 돌리는 것. 그러면 사물들은 두꺼운 색을 털어내고 그 속에 깃들었던 그림자들을 고백한다.
아키라 구로사와의 흑백영화 <천국과 지옥> 클라이맥스에서 공장굴뚝으로부터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듯, 사물의 그림자에서 희미한 단색조의 무늬가 떠오를 때, 나는 흑백의 장면으로 남아 있는 소중한 기억들에게 비로소 느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시절 동네 극장에서 보았던,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김지미 주연의 영화. 시어머니에게 소박맞은 며느리는 길거리로 쫓겨나고, 비 내리는 대문간에서 흑백의 눈물을 흘리는 배경에 <동심초>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이 장면을 어느 작품에 슬쩍 끼워 넣었다). 달빛도 없는 밤에 산장을 찾아 헤매다 바위에 긁힌 손목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흘렀다. 다락방 한켠에 앉아 있던 색 바랜 나무상자 안에는, 어머니의 남동생이 소유했던 일본말 화학교과서, 작은 시험관들, 그리고 아마도 공무원시험 준비용 서적이었던 <物權法>이라는 제목의 책…
중학생 시절, 신림동 산동네에는 인왕산, 청계천 등지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이 통 반 번호도 없이 A지구, B지구 등으로 구획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우리는 알량한 판잣집 한 채 없어 철거민집의 월세를 살았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서울역 뒤편 만리동에 있었는데, 지금도 운행하는 한남운수 버스가 유일한 등교수단이었다. 여자승차원(차장이라 불리던)이 차에 매달린 채 출발신호를 울리면 (오라잇~~~) 운전사는 곡예 하듯 버스를 회전하여 사람들을 차 안으로 구겨 넣었다. 몸집이 작았던 내가 버스 안에서 어떤 곤욕을 치렀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떠밀려서 버스 유리창이 부서질 정도였으니. 학교가 끝나고 언덕을 비스듬히 오르면 모친은 저녁노을을 받으며 외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력사정이 형편없었던 시절이어서 유일한 문명의 이기인 소형라디오는 밤이 되면 소리가 죽어버렸고, 전등도 침침해져 책을 읽기가 어려웠다. 가장 괴로운 때는 아침이었는데, 공동화장실 앞에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
티비를 가진 집은 몹시 희귀해서, 아마도 월남전에 다녀온 예비역이 있는 집에서나 볼 수 있었을까. 어느 날인가, 동네를 배회하다가 (이 때 이미 시인기질이 있었나보다) 티비가 있는 집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들려오는 노래가 정훈희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담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 집 마루를 들여다보니, 청초한(그때 내게 그렇게 보였다) 여가수가 물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당시 한참 인기를 누리던 <쇼쇼쇼>였는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이 여가수의 인상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두 번째로 부른 노래는 <강건너 등불>. 그 노래들의 멜로디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제목과 맞춰보았으니, 내 음감도 꽤나 좋지 않나, 싶다.
그 후, 칠팔년 정도 지나 우리는 산동네가 아닌, 큰길 입구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티비도 장만했고 과외로 돈을 벌어 별표전축도 월부로 샀다. 정훈희에 대한 내 기억은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아름다웠고, 그녀가 부른 주옥같은 노래들이 대부분 이봉조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봉조는 오랫동안 <쇼쇼쇼>의 악단장을 맡고 있었지만, 그가 작곡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중에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던가… 고혈압이 심하였던가… 어느 해 설날 그 걸쭉한 목소리로 <떡국>을 불러제낀 이 색소폰 주자는 딴따라기질을 가진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사실, 용기가 없어 연예기획자로 진출하지 않았지, 예비스타를 집어내는 내 눈은 족집게였다. 전도연, 김지수, 문소리,
등등을 집어냈으니… 물론, 실패한 적도 있다, 예를 들면 이정화의 경우. 이 잊혀간 여가수의 노래 <꽃잎>은 나중에 신세대 밴드에 의해 리바이벌되었는데, 그 쇳소리 울리는 목소리가 끔찍하여 나는 이빨을 덜덜 떨 지경이었다.
작고한 밴드마스터 이봉조를 꺼내는 이유는 그의 <질박함>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개인생활이 깨끗했다거나, 차림새가 산뜻했다는 말이 아니고 (사실은 그 반대였을 거다) 재능을 남발하지 않은 몸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만든 노래는 아마도 많지 않으나, 현미, 정훈희 등의 목소리에 실어 세상에 내놓은 그 하나하나가 주옥같다는 표현을 주기에 부족하지 않기 때문. 그러한 절제가 과묵함과 잘 어울렸다. 나는 오늘, 흘러간 옛 여배우 문정숙의 노래 <나는 가야지>를 듣고 있다.
결코 예쁘지 않은 얼굴, 곱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묘하다, 그녀의 노래와 표정에는 화려한 분가루로 치장한 야함과 경박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당시 사진들이 거의 흑백이어서 그럴까), 그저 어둑한 슬픔과 절제된 몸짓이 드러날 뿐. 모두들 가벼운 재주와 허한 언변, 쓸모없는 다산(多産)과 교묘한 화장술로 저자에 얼굴을 내밀려는 이 色스러운 아수라장에서, 무채색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들이 몹시 그립다. 어쩌면 나는 시대를 잘못 택한 것인가.
나는 이 흑백의 노래들을 나만이 아는 작은 방에 모아 넣고 자물쇠를 채웠는데, 이따금 들르면 열쇠소리가 찰칵, 울리기도 전에 나를 만나려 와글와글 댄다. 노래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래 잠들기는 싫을 것이다. 나는 질겁하며 이 노래들을 다시 잠재운 후, 하나씩 깨워 백세주 한 잔을 마시며 함께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