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의 나전칠기, 세계의 별이 되다
나전칠기의 세계화를 꿈꾼, 근대 공예가 수곡 전성규 2/5
글 황정수 업데이트 2015.11. 출처 : koreanart21.com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나전칠기의 발전을 위해 물심 노력을 하던 전성규는 1924년 겨울 느닷없는 소식에 가슴 설레게 된다. 이듬해인 1925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만국미술공예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당시 일본의 압제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스스로 박람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침 박람회 주최 측은 일본 정부에게 한국의 공예도 일본의 출품작의 일부로 출품할 수 있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일본은 당시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던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의뢰하여 조선 공예품을 출품하도록 한다. 외부의 눈을 의식한 일본은 극히 일부분만 한국인에게 자리를 주고자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새로운 기술로 압도적인 작품을 만들던 전성규에게 작품을 출품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이미 전통적 공예에서 벗어나 근대적 미술품으로까지 격을 높이며 호평을 받던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어, 박람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전성규
김봉룡
그러나 기회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쉽게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품 절차가 까다로웠고,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들었다.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였던 전성규는 경성부청에 도움을 청하였지만 그들은 도움을 거절하였다. 실력이 출중하였던 전성규의 출품이 행여 일본인 공예가들의 수상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일본 측의 의도적인 방해가 있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는 <삼청동 전성규씨 만국미술공예박(萬國美術工藝博)에>라는 기사에서 전성규가 작품 제작을 위해 돈을 구하는 급박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년 오월에 불란서(佛蘭西) 파리에서 만국미술공예박람회를 여는데 조선에서도 여러 가지 미술 공예품을 출품하기로 되었으나, 대개는 조선미술품공작소 등 일본 사람이 만드는 조선 미술품을 출품하기로 되었고, 조선 사람 측으로서는 오직 시내 삼청동 141번지 전성규씨가 만드는 나전 칠기를 출품하라고 경성부로부터 부탁이 있었으나 이것을 정교히 만들려면 삼천원이 필요한데 그 것을 부청에 교섭하였으나 부청에서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음으로서 씨는 방금 변통에 초심중이라더라.”1)
자금이 없었던 전성규는 할 수 없이 주변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시작한다. 비밀리에 겨우 일천여원을 모금한 전성규는 제자 김봉룡과 함께 밤낮을 잊고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본래 삼천여원을 모아 꽤 큰 규모의 작품을 제작하려 하였으나, 모금한 돈이 적어 작은 크기의 작품으로 주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돈의 규모에 맞추어 화병 한 점과 작은 서랍과 합 모두 세 점을 만들었다. 작가로서의 포부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작품의 제작이 끝나자 전성규는 이 작품들을 직접 들고 도쿄 농상무성으로 출품을 위해 떠난다. 돈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작품을 제작하기도 힘들었고, 이제는 출품 기한이 촉박하여 경성부에 출품하지 못하고 도쿄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는 <나전칠기 제작자 전성규가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할 것을 일정부에 의뢰코자 동경으로 향발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는데, 전성규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져 있다.
“금년 오월에 불란서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 사람이 만든 물품으로 다만 한 가지 나전칠기가 뽑혀가게 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출품하는 가지 수는 담배합, 화병, 수함(手函) 세 가지로 이것을 만들기에는 두 사람이 주야겸행으로 일을 계속하야 두 달 만에 겨우 손을 떼었는데, 출품할 기한이 임박하여 옴으로 그 것을 맡아 만든 전성규씨는 자기가 제작한 것을 친히 휴대하고 재작이일 오후 일곱 시 차로 동경 농상무성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출발할 임시에 삼청동 공장으로 전성규씨를 방문한즉 그는 겸손한 태도로 말하되 ‘내가 만든 물건이 만국박람회까지 출품을 하게 되었으니 영광스럽기까지도 합니다마는 한 편으로 생각하면 조선에서 출품되는 것이 나전칠기뿐이라니 우리 조선의 공예가 얼마나 빈약한 것을 드러내는 듯하여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만큼 만들어 세계의 자장거리가 되기까지는 근 이십년 동안이나 여간 고심한 것이 아니올시다.’ 하더라.”2)
전성규는 단지 나전칠기를 만드는 장인으로 머문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 공예의 현실을 자각한 선각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의 공예품 중에서 오직 나전칠기만이 선발된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선발된 것이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분야의 공예품들이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는 식민지 현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자의식이 담겨져 있다.
또한 그동안 나전 칠기를 위해 노력한 기한이 20여년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가 본격적으로 나전칠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29세부터라는 아들 전창한(全昌漢)의 증언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출품 당시의 나이가 47세였으니 20여년 나전칠기를 공부한 것이 맞는 셈이다.
전성규와 김봉룡의 작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파리공예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전성규와 김봉룡의 작품은 은상과 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쾌거를 <만국박람회에 입상된 조선의 미술 공예품>라는 기사로 축하하는데, 한국에서 나전칠기 세 점이 출품되어 모두 입상하였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다,
“불란서 정부에서 일억 프랑의 경비를 들여 개최한 만국장식미술 공예품 박람회에 조선 나전칠기를 출품하였다가 이번에 명예 있는 은패와 동패를 탄 두 조선 사람이 있다. 이 명예 있는 두 사람은 작년 이월에 본보에 소개한바 시내 삼청동에 사는 전성규씨와 그의 제자 김봉룡씨로 작년 오월부터 파리에 열린다는 전기 박람회에 당국으로부터 출품을 하여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하는 교섭을 받고는 숨어 있는 조선의 고유 미술품을 세계에 자랑할 때는 이 기회라는 결심을 하고 고심참담한 끝에 겨우 약간의 자금을 얻어 둘이 두 달 동안을 불면불휴의 정력을 달하여 화병(花甁, 가격 구백원), 담배 서랍과 수함(手函, 가격 삼백원)의 세 가지를 화병은 김봉룡씨 명의로 수함과 서랍은 전성규씨 명의로 일본 상공성을 경유하여 박람회에 출품하였든 것이다.
진열되기는 일본관에 된 것이었으나 세계 중에서 가장 미술의 감상이요 고상한 꽃도 히라는 파리에서 만인의 칭찬을 받았다는 통지가 일본 상공성을 경유되야 총독부 상공과에 도착되자 상공과에서는 작일 오전에 이 사실을 발표 하였는데 이 박람회는 실로 전 세계의 공예품을 한 곳에 모아 각국의 문화적 양식을 참작하여 써 불국 공예에 새 기원을 지으려는 목적으로 열린 것으로 세계 각국의 공예품이 별 같이 모여든 중에서 조선에서 개인이 출품한 것이 입상한 것은 조선 공예 미술을 위하여 크게 경하할 바 이라는 바 조선에서 출품된 것은 이 밖에도 고려자기 삼 점과 완초제편물(莞草製編物) 삼 점도 있었다더라.(현대어로 윤문 : 필자)” 3)
당시 전성규 공방에서 만든 세 작품은 만드는 경비가 모두 일천 이백원이 소요되었다. 본래 전성규는 박람회에 대작을 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전람회를 준비하며 마련하고자 하였던 경비는 삼천원이었다. 그런데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여 겨우 마련된 일천 이백원으로 소품 세 점을 만들어 출품한 것이다. 만일 그가 삼천원이 준비 되었다면 어떠한 작품이 제작되어 출품되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 기사를 통해 다른 한편 우리는 전성규의 인간적인 대범함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번 박람회 출품은 오로지 전성규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출품을 따낸 것, 출품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 모두 오로지 전성규의 몫이었다. 돈을 마련한 것도 그요, 작품을 제작한 것도 그의 공방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작품 중 한 종류는 그의 이름으로, 한 종류는 아끼는 제자인 김봉룡의 이름으로 출품하도록 하였다.
보통 여럿이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수공업 형식의 공예 작품은 여러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만 대개 출품할 때에는 스승의 이름으로 출품하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의 이런 현실을 고려해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전성규는 전통 미술 공예품을 단지 한 제작소에서 만들어지는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 창작물이라는 개념에서 발전하여, 예술품은 한 개인의 창조적 정신이 주가 된 개인 창조물이라는 근대적이 의식이 강한 순수한 예술가 정신을 가졌던 것이다.
파리공예미술 박람회 수상 상장
전성규와 김복룡이 받은 상장은 프랑스에서 일본을 거쳐 경성에 이르는 긴 여정을 거쳐 전성규의 손에 오게 된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전성규가 출품한 작품들은 한국 대표로 출품된 것이 아니라 일본 대표로 출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는 <수륙만리(水陸萬里)를 거쳐 온 광채(光彩) 있는 상장>이라는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작년 봄 에 시내 삼청동 일백 사십 일번지 전성규(47)와 그의 제자 김봉룡(25)씨가 조선나전으로 만든 화병과 수함과 담배갑 삼 점을 불란서 파리에 열린 만국미술공예장식박람회에 출품을 하여 기쁘게 이등, 삼등으로 입상까지 되었다 함은 그 당시 소개 하였거니와 영예스러운 그 상장이 멀리 불란서로부터 일본 외무성을 거치며 다시 총독부를 거쳐 경성부 권업계(勸業界)에 도착되었음으로 출품자인 전성규씨는 작일 아침 열시 경에 경성부 권업계에 가서 그의 제자 김봉룡의 이등상과 자기의 삼등 상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더라.
상장을 받은 전성규씨는 ‘이것이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조선이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구히 보존하여 두겠습니다마는 한편으로 기쁜 반면에는 슬픈 생각이 소스라쳐 납니다. 얼마 전 불국(佛國) 영사 부부와 미국(美國) 영사까지 나에게 찾아 와서 치하까지 하여 줍디다’라고 말하더라.”4)
상장을 받은 전성규는 ‘이것은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조선이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조선의 전통을 가진 작품을 출품하여 상을 받았지만,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담고 있는 말로 보인다. 그런 탓에 기쁜 일이지만 한 편 ‘슬픈 생각이 소스라치게 난다’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행간에 담긴 상을 받아 슬픈 상황은 ‘빼앗긴 조국의 현실’같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마라톤 선수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고 시상식에서 고개를 들이지 못하던 모습이 겹쳐진다. 전성규는 공예가 이상의 지사적인 측면도 있었던 의식 있는 작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한국 사람들은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즐길만한 경제력도 갖지 못하였다. 전성규의 박람회 수상은 당시의 국가적인 자랑거리였지만 당사자인 한국인들은 영광의 실체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에게는 특별한 수상으로 느껴져 프랑스와 미국 외교관 부부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 또한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슬픔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전성규의 남다른 면은 장남인 전창한이 증언하는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1940년 그가 죽기 얼마 전 동아일보에서 특집으로 실은 기사 <일의정진(一意精進)의 금일(今日)! 나전칠기(螺鈿漆器)를 공예화(工藝化)한 전성규씨(全成圭氏)>에서 장남 전창한은 상을 받은 후 특이한 반응을 보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대정 14년(1925년) 파리 만국 공예품 전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에 품었던 이상의 일단이라도 풀어 보겠다고 출품하였던바 당당 특선은 동보 별항과 같은 상장과 아울러 동 감사원으로부터 최고의 찬사까지 받았다.
이에 씨는 나전칠기의 심오 우수한 조선색을 비로소 세계에 자랑하였다고 감격 흥분하여 며칠 동안은 집일도 않고 집에 앉아 무엇인지 심각한 명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5)
전성규는 상을 받고 ‘심오하고 우수한 조선색(朝鮮色)’을 세계에 자랑하였다고 감격하여 흥분하였지만, 며칠 동안 집안일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 심각한 명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한 심각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나전칠기의 발전을 위한 고민이었을까? 그동안 나전칠기를 위한 노력의 결과에 대한 허탈함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그러기엔 그의 고민의 강도가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든다.
분명 그는 좀 더 다른 차원의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계에 보이고 싶었던 것은 나전칠기라는 ‘공예미술작품’을 보이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면면히 흐르는 ‘조선색’을 나전칠기라는 공예품을 통하여 세상에 내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나라를 빼앗겨 힘은 없지만 아직 우리에겐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세상에 부르짖고 싶었을 것이다. ‘기쁜 반면에는 한편 슬픈 생각’이 들고, ‘심각한 명상’을 하던 전성규의 마음속에는 광복된 조국의 공예가로서 자랑스럽게 상을 받는 모습을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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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청동 전성규씨 만국미술공예박에 나전칠기를 출품하려 하나 삼천원 공비 없어 걱정」, 『동아일보』, 1924년 11월 15일자.
2) 『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자.
3) 「만국박람회에 입상된 조선의 미술 공예품」, 『동아일보』, 1926년 01월 17일자.
4) 「수륙만리(水陸萬里)를 거쳐 온 광채(光彩) 있는 상장」, 『동아일보』, 1927년 03월 06일자.
5) 「一意精進의 今日! 螺鈿漆器를 工藝化한 全成圭氏」, 『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 조간.
글 황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