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텔레비전을 사러 나갔다가 구타당해
증언자 : 김경환(남)
생년월일 : 1951(당시 나이 29세)
직 업 : 일신방직노동자(현재 일신방직 노동자)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19일 오후 퇴근길에 텔레비젼을 사러 가다가 광남로에서 공수부대에게 폭행당했다. 부상 이후에도 시내 곳곳의 상황을 목격했고 궐기대회에도 참가했다.
5월 18일 회사(일신방직)에 출근하여 근무하고 있는 동안 시내의 소문이 속속 들어왔다. 금남로 통행은 못 하고 있고 군인들이 삼삼조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곤봉들고 쫓아다니는데, 젊은 사람이 도망을 가면 끝까지 쫓아가서 방망이로 피가 나도록 때리고 쓰러뜨려서 차에 싣고 간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이 "도망간 사람은 놔 두어야 할 것 아니냐. 도망간 사람을 끝까지 추격해서 붙잡아 쓰러뜨리고 붉은 피를 보고 너무한다"고 한결같이 말한다는 것이었다.
5시 퇴근하여 일반인은 괜찮겠지 싶어서 신혼 5개월인 난 그날 텔레비전을 사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90시시 오토바이를 타고 누문동 파출소로 해서 광남로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보니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들이 지금의 주택은행 건너편에 국방색 차를 5, 6대 정차시켜 놓고 있었는데, 차 안에는 사병들이 가득 있었으며 인도에는 중사, 중위 서너 명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 군인 중사가 "야! 너 이리 와봐" 하길래 군인이 오라 하는데 설마 날 죽일까 싶어서 그대로 오토바이를 받쳐놓고 걸어서 그들 앞으로 갔다.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증명 내봐" 하길래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막 꺼냈는데 꺼내기가 바쁘게 보지도 않고 "야! 개새끼야, 우리가 할 짓이 없어서 광주에 온 줄 아느냐"면서 그때부터 서너 명이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 어깨쭉지, 팔 등을 내리치고 발목을 깠다. 피가 흘렀다. 인도에서는 젊은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고 나이드신 7, 8명의 아저씨, 아주머니들만 계셨는데 내가 맞는 동안 놀라서 모두 가버렸다. 그들이 인도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일어나 갑자기 때렸으므로 한참을 그렇게 맞다가 악을 쓰고 몸을 비틀고 발악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따라오며 발로 차고 때렸다. 그러다가 담 벽에 부딪혀서 더 이상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막판에 부딪히자 있는 힘을 다해서 머리, 어깨쭉지 등 가리지 않고 때렸다. 그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들이 한숨 돌리는 틈에 빠져나와서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손은 어떻게 맞았는지 마비가 되어 폈다 오무렸다도 할 수 없었다. 양팔에 오토바이를 걸치고서 밀고 골목으로 들어왔는데, 일고 정문까지 1백 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신들린 사람처럼 왔다.
겨우 정문에 도착하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전신이 굳어버린 듯 걸을래야 걸을 수가 없고 견딜 수 없이 통증이 와 오토바이에 기대 서서 엉엉 울고 있었다. 몇 명 되지 않는 행인들이 8시가 통금시간이니 8시 가까이 되면 큰일나니까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누문동 파출소를 지나 조산소(현재 경희조산소) 부근의 집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꽤 시간을 소요해서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겨우 대문까지 와서 벨을 누르니 아내는 나를 보고 장난치는 줄 알고 "뭔 이런 장난을 다 치고 그래요" 하며 피식 웃었다. 아프다고 말하자 "엄살도 떠네" 하면서 군밤을 주었다.
언뜻 장난이 아닌 줄 알았는지 놀라서 방으로 들어가게 하여 나를 눕히고 피를 닦아주었다. 오른쪽 약지의 살이 찢어지고 손톱이 빠져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 때 살이 찢어진 흉터가 남아 있다. 집에 있던 비상약품으로 응급치료를 했지만 너무 온몸이 쑤시고 아려서 집 앞 한약방에 가서 운동하다 다칠 때 삶아먹으면 어혈이 풀린다는 당귀뿌리를 사오라고 했다. 그러나 약방은 모두 문을 닫아버렸다면서 저녁내 아내가 한숨도 못 자고 찜을 해주었다.
19일 아침 7, 8시경에 회사에서 당분간 출근을 못 하므로 오늘은 출근을 하지 말고 자주 연락을 취하자는 내용의 전화를 받고, 9시경에 임동에 있는 삼일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손목에 붕대를 한 채 집에 돌아와 누워 있었다. 21일이 되니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아서 바람도 좀 쐴 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싶어 집 앞 골목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9시경 도로에 나가니 젊은 사람들이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최규하는 각성하고 물러나 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했다. 그때에는 도청에서 집회한다며 시민들을 도청으로 실어다주느라 왔다갔다하는 차들이 있었는데 어디 방향으로 간다고 하면 태워주었다. 나는 10시경 타이탄 트럭을 타고 회사 정문 경비실에 가보았다. 그리고 회사 출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왔는데 회사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실내체육관 앞에 사람이 많이 죽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울분이 나고 시위에도 참여하고 싶어서 천변을 따라 시위대 차를 타고 현대극장 좀 못 가서 내렸다. 들었던 바와 같이 철모를 쓰고 총은 '어깨총' 한 상태로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들이 3, 4명씩 짝을 지어 길가에 서 있었다. 현대극장 앞에 갔을 때 3명의 공수부대가 남학생 한 명을 쫓아가고 있었다. 학생은 잡히지 않기 위해 공원다리로 힘껏 달려갔다. 거의 다리를 다 건넜을 때 두 명의 공수부대는 포기를 하고 돌아서 다시 공수부대원이 있는 충장로 쪽의 원래 서 있던 위치로 되돌아갔고 한 사람의 군인만이 끝까지 쫓았다.
얼마 후 그 남학생은 완전히 다리를 건넜고 그 쫓던 군인은 다리 중간쯤 달려 갔을 때 공원 쪽에서는 학생들이 다리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현대극장 쪽에서는 일반시민들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갔다. 누가 그렇게 하자는 말도 없었는데 그 군인의 태도가 괘씸했기에 모두 합세하였다. 그 군인이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끝내는 꽤 높은 다리였는데 5월이라 풀이 무성한 천변으로 다치지 않고 뛰어내렸다. 그러고서 계속 천변 위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민, 학생들이 위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그 군인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학생들 몇 명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돌을 던지고 하니까 나중에는 군인이 착검한 총을 들고 뒤따라오는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위협을 하면서 조금씩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적십자병원 좀 못 갔을 때 그 군인이 얼마나 맞았는지 쓰러져버렸다. 나는 길을 계속 따라가면서 보았는데 하천 정리가 안 된 상태여서 풀이 굉장히 우거져 쓰러진 군인 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젊은 사람 몇 명은 그 군인이 쓰러지자 돌멩이를 몇 번 더 던졌다.
얼마 후 누가 신고를 했는지 적십자병원에서 하얀 가운 입은 남자 의사가 손을 흔들면서 돌 던지지 말라며 나왔다. 그리고 풀 속에 있는 군인에게로 가서 팔을 들어보고는 병원 쪽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병원에서 들것을 가지고 나와 그 군인을 들것에 실어 병원 안으로 데리고 갔다. 어느새 소식이 들어갔는지 도청 쪽에서 적십자 병원 앞으로 오는 길목으로 최루탄을 쏘며 공수부대들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군중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도 집에 와버렸다. 그때 군중 속에 있을 때 군인들이 취기가 있다느니, 약물을 복용해서 이리같이 눈에 핏기가 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도 직접 당해 보았기 때문에 군인들이 제정신으로는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때 이런 말도 들었다. 경찰과 군인이 한통속인 줄 알았는데 경찰들은 군인이 잡아다놓은 학생들을 놓쳐버린 척하고 풀어주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나중에도 경찰 집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또한 며칠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으나 며칠 뒤 학생들 2, 3명이 손수레에 죽은 학생 시체 한 명을 싣고 다니면서 죽은 게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려고 했다. 그것을 본 시민들은 안쓰러워 하는 표정들이었다.
며칠인가 국무총리서리가 광주에 온다는 소문을 듣고 2시경에 도청에 나갔다. 그때도 팔에는 붕대를 감았다. 군인들은 분수대 앞에 쭉 줄지어 있고 관광호텔쯤에 단상이 있었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이 올라가서는 상부에 건의해서 잘 해결하도록 할 테니 제발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금남로 아래쪽에서 갑자기 장갑차 한 대가 도청으로 밀고 들어왔다. 시민들은 얼른 비켜주었는데 그대로 도청 쪽으로 달렸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군인 몇 명이 깔려 죽었다고 했다. 시장은 장갑차가 나타나자 말하다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고, 군인들은 최루탄과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충장로 어느 가게로 들어갔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치약과 마스크를 주었다. 계속 총소리가 요란해서 집으로 얼른 가야겠다 싶어 충장로를 거쳐 집에 왔다. 그때 시민들이 총에 맞아 많이 죽었다고 했다.
22일 10시경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싶어 공원 앞으로 갔다. 청년들이 카빈총을 들고 군중 속에 있었다. 앞에서 메가폰을 든 청년 한 명이 지원동 길이 막혀 그곳으로 교전하러 가니까 총을 든 사람들은 4열종대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 고등학생은 자기가 총을 들고 있으면 총 쏠 수 있는 예비군 아저씨들께 주라고 했다. 총 들고 모인 수는 20명 정도 되었다. 나는 일반대열에 서서 그런 상황을 보고 있었다. 내 옆에 30대 후반쯤 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가지 않길래 "앞에서 총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 모이라고 했는데 왜 당신은 안 나갑니까?" 했더니, 내게 ズ纂璣?실탄 20발을 건네주면서 "옛소, 당신이 가지쇼" 했다. 난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진 상태여서 총을 쏠 수도 없고 어제 회사에 들렀을 때 우리 회사 총을 잃어버렸으니 어떤 총이든 있는 대로 회사로 가지고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교전하러 가지는 않고 회사로 가서 총과 실탄을 반납했다.
그때는 군인들은 시내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고, 시민, 학생들만이 있었다. 그리고 차량 통제를 위해 번호가 페인트로 씌어진 시위대 차가 민간인을 수송하고 있었다. 또한 각 동 주민들이 음료수, 빵, 딸기, 박카스, 라면, 밥 등을 시위대 차량에 올려 주거나 손수레에 임동, 유동... 하는 식으로 00주민 일동이란 팻말을 붙여가지고 아저씨, 아줌마들이 꼭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이면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주는 것을 아세아 극장 앞, 금남로, 한일은행 사거리, 관광호텔 앞에서 봤다. 나도 타이탄 트럭을 탔을 때 박카스, 딸기 등을 먹었다.
23일 도청에서 집회가 있다고 목소리 좋은 여자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알렸다. 점심을 먹고 도청 광장으로 나가 보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나중에는 빠져 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집회에서는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자, 농민 압살하는 권력층과 부조리 척결하라'는 등의 구호를 분수대 앞에서 남학생이 선창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며칠이었는지 학생들 7, 8명이 선동을 일삼는 불순분자가 있거나 개인적인 피해라도 입은 것 있으면 도청 상황실로 연락을 해주고 공공질서를 지키자고 가두방송을 하며 지나가는 것을 유동 삼거리에서 봤다. 그리고 그 즈음 도청에 갔을 때 간첩이라며 군중 속에서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을 색출해 내었는데, 손을 뒤로 하게 하고 24, 25세 가량의 사람을 전남매일 신문 건물 안으로 데리고 갔다. 금남로 한일은행 사거리에서도 한 명이 잡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젊은 사람들이 언론이 바로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비디오, 카메라 촬영을 못 하게 했다. 모든 것들이 꽤 자율적이고 질서정연했다.
그날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는 내용의 16절지 크기의 삐라를 오전, 오후에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정부측에서 뿌렸다. 그 즈음에는 유언비어가 많이 떠돌았는데, 경상도 사람은 다 죽여야 한다면서 전라도 기사들이 경상도 가면 푸대접받고 우리 전라도 차만 보면 불태워버렸다고 말하는 운전기사복 입은 아저씨를 신역 부근에서 보았는데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차가 경상도 차라고 하여 광주역 앞에서 화물차를 불질러버렸다.
22일 밤부터 27일 도청에 계엄군이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 완전히 치안이 공백 상태이고 일반인, 학생들이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치료도 안 하고 문까지 내려버린 병원 앞에서 문을 두들기고 시위했던 것 외에는 어디서 무엇을 가져갔다든가, 누가 총 들고 와서 위협했다는 소문은 들어보지 못했다.
27일 도청에 계엄군이 다시 들어오던 날 새벽 3시 반쯤이나 되었을까 총소리가 굉장히 요란하게 들렸다. 아내와 둘이서 잠도 못 자고 총알이 날아올까봐 솜이불로 가리고 앉아 날을 새웠다. 정말 이러다가는 다 죽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내에게 "광주로 시집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했다.
날이 밝았을 때 무장한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안방으로 들어왔다. 수색 나왔다면서 농, 찬장, 벽장, 부엌, 옷장 등 샅샅이 뒤지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우리는 무서워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막 나가려 할 때 밤새 큰집 사람들도 무사한지 연락을 해보려고 전화 좀 하게 경희조산소 앞까지만 데려다달라고 했다. 그러자 우리들이 왔다 갔다고 밖으로 노출시키려고 그러냐며 안 된다고 했다. 한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안 되고 집 밖으로 나오면 군인들이 발포해 버린다고 해서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 있었다. 집 밖에는 사람들 통행이 일절 없는 듯 조용했다. 그 군인들은 옆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날 오전은 '난 학생, 데모대가 아니오' 하는 표시로 회사 증명이나 공무원증 등을 가슴에 달고 다닌 사람만 통행을 할 수 있었는데, 난 사원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나갈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은 골목에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봤다.
28일부터는 완화되어서 그런 증명서 없이도 통행을 할 수가 있어서 회사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내가 근무하고 있는 전기과 소속 정민구 씨가 자기 남동생이 대학교에 다녔는데,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붙잡고 있다가 동생이 어느 새 나가버려서 동생 찾으러 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부장님이 우리에게 입관시키라고 하면서 사람 죽으면 싸는 천, 장갑 등을 준비해 주어 우리 전기과 직원 7, 8명이 10시경에 회사 차를 타고 상무관으로 갔다. 상무관 밖 도청 광 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상무관 안에 들어서니 시체가 마룻바닥에 쭉 늘어져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너무 놀랐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어 있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본 탓도 있었지만 말로만 들었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비참했다.
시체를 둘러보니 어린 아이도 있고 청년, 엄마. 아빠. 딸 셋이서 온 가족이 죽었다는 시체도 있었다. 상무관 안에는 시체 찾는 사람과 정말인가 싶어 보러 온 시민들도 있었는데 분향소를 마련해 놓고 분향을 하고 있었다. 정민구 씨 시체는 상무관 좌측에 놓여 있었다. 시체를 보니까 왼쪽 어깨쭉지를 총알이 관통해 버렸고 오른손에 피가 많이 묻어 있는 것을 보니 스스로 지혈을 했던 흔적이 보였다.
정민구 씨가 총에 맞아 조대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담당 의사에게 "난 일신방직에 다니는 정민구라는 사람입니다"고 해서 신원이 쉽게 확인되엇다. 입관을 시키고 사진을 올려놓고 일부 몇 사람만 대표로 남아 가족들과 함께 장례를 치르게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중에 적십자병원에도 사람이 많이 죽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인가 싶어서 동료 세 사람과 함께 5시 퇴근길에 적십자병원으로 가보았다. 후문으로 가니 영안실 밖에 아직 보호자가 안 나타났는지 시체가 관에 넣어져 뚜껑이 닫히지 않은 채 계단, 바닥 등에 15구 정도 있었다. 영안실에는 가보지 않고 하천을 따라 집에 왔다. 오면서 군인들만 엄숙하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전에는 군인들이 살벌했는데 온화한 모습이라고 할까 그런 표정이었다.
그 후에 회사에서 들으니 화순에 사는 우리 회사 공원 아가씨가 희생이 되었는데, 버스를 타고 화순 가기 위해 22일, 23일쯤에 지원동을 막 지나는데 느닷없이 양쪽 산에서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전멸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 경비원 아저씨께 직접 들었는데 30살 된 남동생이 송정리 상무대 쪽으로 데모하러 갔다가 옆마을에 사는 공수부대 청년이 착검한 총으로 그를 찔러서 전남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며칠 후에 죽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서로 화해했지만 서먹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5·18이 지난 얼마 후 내가 알고 있는 40대 중반의, 수기동에 있는 수도사에서 일하는 보일러공 아저씨가 안 보이길래 물었더니 동명동 자택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총알이 날아와 죽었다고 했다.
나는 5·18이 끝나고도 18일 두들겨맞은 통증이 계속되었다. 오른쪽 팔은 힘이 없어서 잘 못 쓰게 되어 계속 보광당한약방, 광명당한약방, 계림동에 있는 남성한의원, 구역에 있는 한약방 등에서 약을 지어다 먹었다. 그래도 잘 듣지 않아 시골 부모님께서 갔다 주신 개똥으로 약처럼 한 것, 우슬뿌리, 사주 등 각종 양약, 한약을 먹었다. 3년 전에 머리의 통증은 잡혔으나 비가 오려고 하면 온몸이 쑤시고, 특히 오른쪽 팔이 심하다. 지금도 한약은 계속 복용하고 있다.
5·18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군인의 적이 학생은 아닐진대 칼로 찌르고 인도에 무릎꿇게 하고 꼭 피를 봐야만 했는지? 적에게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음모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너무나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에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광주에 사는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설마하면서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처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으나 젊은 사람들을 너무 잔인하게 때리고 피가 흐른 채 차에 태워가지고 가버리니까 시민들이 열이 나서 쇠스랑, 낫 등을 가지고 데모를 했던 것이다. 유동 삼거리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물론 도청에서 공수부대들이 철수하게 하는데 학생들 힘도 컸지만 일반시민들이 그렇게 모두 일어서는 것이 무서워서 철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5·18도 8년이 지났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198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지나간 일이니까 진상을 밝히고 사죄할 것은 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정부가 되어야만 그동안의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김문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