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재(養正齋)에서 추구한 학구성현(學求聖賢) 인문학 정신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의문에 의문이 하나 둘 해결될 때이다. 오늘은 셋째 형님 생신날이다. 모두 건강하게 양정(養正)했으면 좋겠다. 존심양성(存心養性: 存其心養其性)이다. 맹자(孟子)가 “자기의 심(心)을 다하면 자기의 성(性)을 알게 되고, 자기의 성을 알면 천(天)을 알게 된다. 심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면 하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盡其心者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한 것인데, 그 말뜻이 혼연(渾然)하여 조금도 보완할 것 없이, 심(心)과 성(性)의 진면목이 우뚝 눈앞에 드러났으니, 심절(深切)하고 저명(著明)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파악하여 판단한다면, 《대학》 제1구(句)의 ‘명덕(明德)’이라는 두 글자도 다름 아니라 단지 이 물건을 가리켜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중용장구》 제20장 18절에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의 경지에 이르면 굳이 애쓰지 않고도 중도를 행하며 생각하지 않고도 터득하여 자연스럽게 도에 합치되니, 이런 분이 성인이다. 반면에 성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선한 것을 선택해서 굳게 잡고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변해야 하며, 그러고는 독실하게 실천해야 한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人之道也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는 말이 나온다.
이만부(李萬敷, 1664~1732), 息山先生別集 卷1, 노곡기(魯谷記)
시내의 남쪽 십여 걸음쯤에 작은 집이 있는데 학자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양정재(養正齋)라고 하였으며, 또 서너보 위로 가서 숲이 우거진 곳에 터를 닦고 축대를 쌓아 작은 정자를 지으려고 하였는데 겨를이 없었다. 간지정(艮止亭)이라고 한다.
이만부(李萬敷, 1664~1732), 息山先生別集 卷1, 누항록(陋巷錄), 養正齋
양정재(養正齋)
雖患爲師 스승 노릇하기는 걱정되지만
亦樂其來 또한 그들이 찾아오니 즐겁네
非我求童 내가 동몽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나
蒙以養開 교육을 통해 바르게 길러 개도하려 함이네
* 내가……아니나 : 내가 배우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이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주역》 〈몽괘(蒙卦) 괘사(卦辭)〉에 ‘내가 동몽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한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라는 구절이 나온다.
* 교육을……개도하네 : 《주역》 〈몽괘(蒙卦) 단(彖)〉에 “교육을 통해 바르게 기름이 성인의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는 말이 나온다.
*죽계지(竹溪志) 권5 잡록
회암의 여덟 자 큰 글씨[晦菴八大字] 주세붕(周世鵬)
하루는 교수(敎授) 진택(秦澤) 씨의 집에서 회암선생의 「學求聖賢 鳶飛魚躍」 여덟 자 큰 글씨를 보게 되었다. 교수가 말하기를,
“나의 외숙 재상 변수(邊修)가 연경(燕京)에서 구해온 것이다.”
하므로, 곧 모각(模刻)하여 찍어다가 잡록(雜錄) 끝에 철해두고 경건하게 글씨를 감상하니 방안이 훤하였고,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되어 후인으로 태어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대개 앞의 네 글자는 학문하는 길은 모름지기 바르고 사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곧바로 가리켜 준 것이고, 뒤의 네 글자는 오묘한 이치가 숨겨져 있지 않고 항상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아, 지극하도다.
* 회암의 …… 글씨 : 《武陵雜稿》 卷8에 수록되어 있으며 제목은 〈書晦菴學求聖賢鳶飛魚躍八大字後〉이다.
*유희춘(柳希春), 미암집(眉巖集) 제17권, 경연일기(經筵日記) ○갑술년(1574, 선조7) 2월
대답하기를, “고(故) 부제학 이정(李楨)은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을 적에 주자의 글씨인 ‘학구성현 연비어약(學求聖賢鳶飛魚躍)’ 여덟 자와 《역경》 〈계사(繫辭)〉 첫 대문을 판자(板子)에 새겼으니 이번에 인출(印出)해서 가져다 올리겠습니다.”하였다.
권별(權鼈), 해동잡록(海東雜錄) 권3, 본조(本朝), 주세붕(周世鵬)
○ 자는 경유(景游)요 호는 신재(愼齋)다.
○ 나는 6살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회암(晦菴) 선생이 공자를 계승하여 후학을 계몽함을 알았으며, 10세에는 사서의 주해를 외고 곧 오경을 읽었으니, 더욱 선생께서 평생의 고심함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교수(敎授) 진택(秦澤) 씨의 집에서 회암 선생의, ‘학문은 성현을 구함이요,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學求聖賢 鳶飛魚躍].’는 8자의 큰 글씨를 얻어 보았다. 교수가 말하기를, “우리의 큰 외숙 재상 변수(邊修)가 연경(燕京)에서 얻어온 것이다.” 하므로, 곧 모각(模刻)을 박아다가 잡록(雜錄) 끝에 철해 두고, 깊이 성찰하여 주자보다 뒤에 태어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개 앞의 4자는 곧 학문하는 길을 지시함이요, 뒤의 4자는 요긴하고 묘한 이치가 나타난 것이다. 아아! 지극함이여. 옛날 소강절(邵康節)은 검속(檢束)이라는 두 큰 글자를 썼는데, 선생은 일찍이 그 글씨에 발문을 쓰기를, “강절 선생은 스스로 말하되, ‘큰 글씨를 씀은 뜻을 쾌하게 함이다.’ 하였으나, 그 필적의 근엄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지금 선생의 8자의 큰 글자는 선생이 우리 유학에 심력을 소모시킴이 매우 대단하건만 선생이 소자(邵子)의 글씨에 발문을 써서 발양한 것 같이 선생을 위하여 발양한 바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하랴. 앞의 4자는 학자들에게 다른 학문을 구하지 말고 반드시 성현을 구하라는 것이며, 연어(鳶魚)의 말씀 같은 것은 더욱 느낀 바 있으니, 이는 진실로 자사(子思)가 잘 당겨서 비유한 것인데 선생이 다시 4자로써 가르침을 삼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군자의 도는 시초를 부부(夫婦)에서 시작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를 살피게 되나니, 그런 후에 그 가르친다는 바가 될 것이다. 《죽계지(竹溪志)》
박장원(朴長遠, 1612~1671), 久堂先生集 卷16, 題跋, 晦庵八大字跋
南來無事。廣求未見書。隣有鄭生名堉者。持示竹溪志雜錄別錄幷附一卷。未知此冊本幾卷。而幸此卷偶免於兵也。披閱覽觀則退陶先生集中所稱周武陵世鵬守豐基時。爲晦軒安文成公肇創白雲書院而作也。卷內首引晦庵夫子白鹿洞書院締搆始末。因次其賦。其下雜取先儒所作箴銘贊詩以繼之。終綴古聖賢格言明訓及學術邪正之辨而附以自述。其用意之勤苦。作事之精密。猶可想見。而卷之中間。以晦庵夫子手筆學求聖賢鳶飛魚躍八大字。模刻而附之。開卷肅然。恍覩海闊天高之氣像也。敬玩字畫則屈鐵交錯。快劍斫斷。雖傳刻失眞。而凜凜猶有生氣。此可見敬直義方之形見於遊藝之餘者。而亦可驗夫天生德於朱夫子。幾於天縱之多能也。范石湖所謂世傳字書。似其爲人云者。殆不足以喩此也。且朱子自云余少時曾學曹操表。劉共父謂公所學a121_367d漢之簒賊。未知所取。取其氣耶。余未見操帖。未知其如何。而見取於夫子也。又未知此八大字之寫。於老少何居。姑倂記此。以俟知者。抑所以寫此八字之意則周文盡之。余不復云。歲甲午端午前二日。後學曲江旅人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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