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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인사동을 지나 청계천 가는 길 : 봄볕이 그늘을 밀치고 자신의 영역을 점차 확대하듯 당신도 그러하길.
지난 5일 오전 10시 30분 안국역에 내렸다. 점심 겸 아침식사가 필요했다. 창덕궁 내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점심을 먹자면 12시나 1시경에 창덕궁을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건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었다. 되도록 천천히 걸으며 구석구석을 살피자는 생각으로 안국역에 내린 터였다. 안국역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나와 10여 미터를 걷자 현대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을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각이어도 회사 주변 식당이라면 식사가 가능할 것이다. 현대사옥 왼편으로 난 길에 접어든 순간 카메라를 대신해 휴대폰을 꺼냈다. 두 컷 찰칵. 6미터 도로 왼쪽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이 드러낸 풍광은 기억 저편에 있던 소년의 심상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난 초등학생 시절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수유리와 쌍문동에서 살았다. 퍽퍽한 삶에 지친 도시노동자들이 몸뚱이를 누이던 그곳은 퍽퍽한 일상을 위로하듯 높고 낮은 산과 구릉이 둘러쳐있었다. 그 덕에 난 수시로 그 산과 구릉을 올랐고, 지금도 그 시절 자연과 동네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가 됐다. 추억이 늘 그렇듯 그 때의 일을 세세하게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절 기억은 지금처럼 계기가 마련되면 툭툭 튀어나오는 ‘어떤 것’이 되곤 한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 길 끝자락에서 순대국집을 찾았다. 순대국은 밋밋했다. 하지만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다.
3천원을 주고 창덕궁 입장권을 구입했다.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예상 외로 많은 인파가 몰린 데 놀랐다. 그들도 한창 일할 시간에 양복 차림으로 나선 나를 보고 적잖이 의구심을 드러냈을 것이다. 설혹 오늘 내가 휴무일인 줄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상대방의 입장을 적당히 상상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도시 삶의 표준이라고 다들 믿고 있으니 시비 걸 일도 아니다. 사람 생각하며 살던 때의 기억은 아쉽지만 점차 쇠락해갈 위 풍경처럼 얼마간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잊힐 일이었다. 오히려 창덕궁을 찾은 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를 별스럽다고 볼 일이다.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세상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이 무덤덤하게 전해지고 있어 안타깝다. 사랑이 천지만물과 사람을 낳게 하였음을 안다면 사랑의 위대함에 다소 눈뜨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치 내가 도심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광경을 보고 잠시 옛 추억에 빠졌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단 몇 번만이라도 그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측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지나치게 바쁘다.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양도하고 그 휘하에 들어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차다. 가슴 안쪽 깊숙이 요동치는 봄볕을 갈망하는 이들의 가슴에 계절을 따라 변하지 않는 뜨거운 사랑이 임하길 기도한다.
그새 낙선재다. 400미터 가량 진행한 듯싶다. 수년전 여섯 살과 네 살 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다. 당시 창덕궁은 하루 너덧 차례만 입장을 허용했다. 너른 들판에서 맘껏 뛰놀던 아이들 모습이 스쳐갔다. 지금 그 자리를 단체로 여행 나온 초등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좋다. 낙선재 내부 부부가 사랑을 나눴다던 안방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져온 책을 폈다. 마루의 질감과 석까래에 부딪는 바람 냄새에 취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나왔다.
왕의 집무실과 의식 거행 장소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난 건물 뒤편을 찾았다. 드러나지 않는 곳. 하지만 언제나 존재했던 그곳. 후원이 좋은 건 투박함에 있었다. 이곳에서 투박함은 양각으로 도드라져 있곤 했다. 전면에선 늘 음각형태로 숨겨진 풍경이 이곳에선 주인자리를 차지한다. 화려하지도, 그래서 주목을 끌지도 못하지만 사람 사는 것 같은 풋풋한 맛이 일품인 건 아는 사람은 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불로문’을 찾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접기로 했다. 후원 계단에 앉았다. 전형적인 조선 후원. 계단식으로 배치한 정원에 각양 꽃과 나무들이 조화 속을 이룬 그림을 상상했다. 굴뚝에 핀 꽃과 참으로 많이 닮았으리라. 주변을 휘 둘러 보았다. 좋다는 찬탄 이상을 떠올릴 말을 찾지 못했다.
어느 때보다 느릿느릿 걸었다. 이 구석 저 구석을 매만지고 둘러보는 동안 피곤했을 다리를 쉬자고 관광 상품 판매점 겸 매점을 찾았다. 창가에 비친 창덕궁 모습이 또 달랐다. 사물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다름을 새삼 확인했다. 건물마다 배흘림기둥을 차용한 선조들의 지혜에서 이미 그 시대에 착시현상을 보정할 건축양식이 만연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달리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집의 가치가 사람이 깃드는 데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어떤 구조와 양식을 차용해도 사람이 들지 않으면 빠르게 쇠락한다. 달리말해 폐가란 물리적 효용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집이 아니라 사람이 깃들지 않은 집을 말한다. 과연 아이들과 찾았던 때의 창덕궁 모습보다 지금 창덕궁이 확실히 활기차 보인다. 현재 창덕궁은 시간 제약 없이 오후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인사동에 들었다. 500여 미터 남짓한 길에 사람 천지다. 터키 아이스크림을 파는 점원의 너스레로 길가에 한참 발이 묶였다. 건너편 호떡집에서 전통 호떡을 하나 샀다. 다소 작지만 소가 무척 단 탓에 오후 3시의 주전부리로는 제격이었다. 이곳에서 종각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선회했다. 5년여전쯤 꽁치백반 한상을 받았던 먹자골목에 다다랐다. 기억마저 새로운 곳. 서울 곳곳엔 밖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들어와 보면 정감 넘친 곳이 꽤 있다. 이곳도 그중 하나다. 길이는 고작 30미터 남짓. 피막골처럼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이다. 잔해조차 남지 않은 곳에선 추억마저 되살리기 어렵다.
교보문고에 들러 책 한권을 샀고, 이어 청계천 초입 바위에 앉았다. 그늘진 곳은 춥고 햇볕 든 곳은 따뜻하다. 선문답처럼 봄은 온 듯 안 온 듯 오기도 하는가 보다. 내쳐 걸음을 옮겨 동대문 상가까지 내려갔다. 헌책방에 잠깐 들를 예정이었지만 지나치며 흘끗 본 바로는 마땅한 책이 없어 그마저 접었다. 이것만은 꼭 하리라는 생각을 접어둘 때가 있다. 바로 오늘 그 경구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래서 팔다리, 마음 모두 자유롭다. 두타 쇼핑몰 7층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고 6시 30분에 전철에 올랐다. 찾아갈 곳과 기억할 일이 남은 사람의 일상은 초라하지 않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넉넉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살만하다. 그러니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지 마라. 화살은 과녁에 꽂혀야 한다. 당신은 과녁이 아니다. 어느 때보다 소소한 즐거움이 필요한 시기다. 봄볕이 그늘을 밀치고 자신의 영역을 점차 확대하듯 당신도 그러하길 참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