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그린 잿빛 설경화
2005년 12월 4(일요일)
전북 완주군 구이면 오봉산
< 오봉산정에서 바라본 옥정호반 >
밤새 내린 눈이 나뭇가지에 소담스럽게 쌓였습니다.
첫 눈 치고는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토요일 100포기에 이르는 김장을 끝마친 아내
파김치 된채로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애원을 무시하고
앞세워 아침 늦으막이 집을 나섭니다.
사실 집에 눌러있으면 더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아내도 알고 있기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붙습니다.
뜨겁게 끊인 오미자 차와 빵 한조각 귤 댓개 배낭에 넣고
오봉산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오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옥정호의 설경이
무지 아름답거든요
오늘 내린눈이 첫눈이니 만큼 굽이진 산야와 어우러진 호수의
설경이 마음을 잡아당겼습니다.
모악산은 운무에 휩쌓여 정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나무들은 욕심껏 짊어진 눈으로 비틀거립니다.
아직 녹지 않은 길을 조심스레 달려
구이면 백여리 오봉산 입구에 닿습니다.
산 자락을 따라 이어진 마을길은 빙판이 되었습니다
요리조리 비틀며 오르는 길이라 그런지
차량 엉덩이가 춤을 추려합니다.
오봉산장 앞 주차장엔 벌써 여려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서둘러 배낭을 매고 초입길에 오르니
싸라기 눈이 토록토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잔뜩 구름낀 날씨라 첫 눈인데도 눈부심이 적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만개한 설화가 그득합니다
마치 바닷속 산호초를 보는 듯 아름답습니다.
슬렁슬렁 눈길을 걷습니다.
올 겨울들어 첫 눈산행이라 걸음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아이젠은 무릎이 부실하여 가급적 착용치 않기에
걸음이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키 작은 잡목 숲 길은 눈속 터널을 이룹니다.
기분이 눈 색깔에 맞춰 하얗게 변해가고 마냥 즐거워집니다.
기쁜마음 챙겨가며 낙엽송 숲을 지나 계곡을 건너고
참나무 사면숲을 따라 산죽밭도 지나칩니다.
하얀 눈속에 숨어있는 진록의 잎새가 싱그럽습니다.
얹혀진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휩쓸리고 널부러진 산죽밭은
그야말로 전쟁터 처럼 아비규환 입니다.
능선에 올라서기 직전 된비알 사면을 맞이합니다
곧추세운 사면길이라 땀을 뻘뻘 흘리게 합니다.
한 걸음 오르고 두 걸음 미끌려 내립니다.
겨우겨우 네발 걸음으로 능선 안부에 올라섭니다.
알싸한 삭풍이 가슴에 맺힌 땀방울을 거둬갑니다.
오싹해져 잠시의 쉼도 없이 다시금 능선길을 따릅니다.
바람이 쓸어놓은 적설에 발목까지 푹푹 빠져듭니다.
한 겨울 누리던 심설럿셀 산행맛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어젯밤 불었던 바람이 북서풍인가 봅니다
북사면 참나무 줄기는 말끔한데 남사면 참나무 줄기는
올록볼록한 눈발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바람자국이 새겨진 눈 둔덕은
곱게 빚어내린 긴 머리결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려
만져보고픈 충동이 듭니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거칠어져 가슴이 아파오지만
첫눈의 아름다운 설경에 빼앗긴 마음은
그저 즐거워 콧노래 흥얼거려 봅니다.
오봉산 정산은 옥정호 조망을 위해 나무들이 베어져 있습니다.
툭 터진 시야가 드넓게 펼쳐집니다
발 아래 보이는 옥정호반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산야가 흑백의 명암만을 대비시켜
무채색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비취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던 호수도
오늘은 잿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절제된 색감이 은은하여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단애진 오봉산 암봉위에서 첫눈의 설렘과 풍취를 마음껏 음미하며
닫혔던 가슴을 활짝 열어봅니다.
한 잔의 뜨뜻한 차를 마시며 동행한 지인과 애기를 나눕니다.
아름다운 설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가 봅니다.
모르는 산객들과도 웃을꽃을 피웁니다.
오랜 머무름이 실증 나지 않습니다.
주름진 산자락에 꽃혀진 무수한 나목들은
쓸쓸함 보다는 정겨움으로 다가옵니다
하얀 눈에 반사된 그 모습들이 또렷하게 드러나
가슴속을 훈훈하게 뎁혀줍니다.
호수가운에 자리한 섬마을이 두 눈을 사로잡습니다
세상시름 잊고서 사랑하는 아내와 남은 반 평생
살아보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희나리 장작 쪼개어 담장 두르고
군불지펴 구들장 달궈 놓을때
뒤안 굴뚝은 하얀연기 뻐끔뻐끔 담배피운다.
숯불에 올려진 된장투가리 뽀글뽀글 소리높혀 울적
어둠내려 기어든 아랫묵 솜이불 밑으로
밥사발 뜨겁게 익어가는
돌아가 살고픈 심향이여...
언제나 처럼 산정을 뒤로하는 마음은
그리움과 허전함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리움과 허전함이 덜 합니다.
발목까지 빠져드는 능선길을 따라
첫눈 내린길을 신나게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관목줄기에 달려있는 눈은 목화처럼 탐스럽습니다.
솔잎에 얹혀진 눈은 막 쪄낸 백설기처럼 먹음직스럽습니다.
이름모를 열매에 엉겨붙은 눈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보입니다.
감나무 끝에 매달린 홍시가 입안을 간지럽힙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쩍 벌리고
감나무를 흔들어 보는데 얼굴위로 떨어지는건
차거운 눈 뿐입니다.
잠자던 바람이 한번씩 기지개를 킬때마다
숲은 뿌연 눈보라를 일으킵니다.
첫눈 내린 오봉산의 아름다운 정취가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질쯤 산행길은 끝이나고
날머리에 이르자 다시금 눈발이 거세어집니다.
눈에 짓눌려 쓰러진 대숲을 돌아
오봉산장에 이르고 청국장 백반을
곁들여 밥 한그릇 뚝딱 해치우니 졸음이 밀려듭니다.
- 감사합니다 -
아름다운 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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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정에서 바라본 옥정호반
별난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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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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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이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