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시인을 만나다|시집속 대표시-박상봉
일식 외 4편
사랑은 기척 없이 왔다
여름은 문 앞에 신 포도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달이 태양을 가릴 때 먼바다로 뛰쳐 도망가 아이를 낳았다
밤새도록 애 우는 소리에 시달리고
어수선한 거리의 소음을 피해 방문을 꼭 닫고 지내던 일식(日蝕)의 시절이었다
갓난아기한테 먹일 우유 살 돈 얻으려 담요공장 면접 보러 가는 날
무단횡단으로 체포되어 경찰서로 법정으로 오랏줄에 엮여 끌려다녔다
빈방에 혼자 남은 아기는
아비 찾아 얼마나 방바닥을 기었는지 온몸에 실꾸리 칭칭 감고 있었다
외진 바닷가 더는 갈 곳 없는 세상 끝에 와서
청춘은 오간 데 없고 길을 잃었으나
살아야 할 이유가 목숨보다 질긴 탯줄 때문이라는 사실 알게 되었다
아이는 훌쩍 커 애지중지 키운 그 아이와 쏙 빼닮은 아이 둘 키우며 잘 살고 있다
청춘은 일식으로 어둡게 잘려 나갔지만
달이 태양을 다 가려도 아이는 지울 수 없었다
아이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나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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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의 바다
시간이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
크게 들리다가 전혀 들리지 않다가
종일 말방울 소리 듣기도 한다
거슬리는 소리 듣지 않으려
귀를 빼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다
어느 날 우연히 서랍을 열었을 때
잃어버린 귀를 발견한 그 순간
눈물이 핑 돌 만큼 반가운 까닭은
너무 오래 듣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
귀를 꽂고 나니 먼 바다가 가깝게 들린다
한때 나의 연인이었던 바다
언제 미닫이문 열고 들어와
서랍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던가
먼 곳의 풍경만 바라보다가
곁을 살피지 못한 불찰 뒤늦게 후회하며
서랍을 이리저리 뒤져보는데
삐걱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어쩌면 파도였는지도 모른다
파도가 바다의 귀였을 것이다
옛사랑의 기억 손바닥 가득 실금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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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다는 것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
물에 빠져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어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겨우 구조된 아이는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고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데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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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빗속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젖은 발목이 더 젖어 슬프기도 한 여름이다
장마가 들면 바지를 까내리 듯 눈꺼풀 풀어놓고 망연자실 문밖을 내어다 본다
밤이 되면 컹컹 더욱 거세게 짖어대는 빗소리
는개가 밤에 가지런히 발비를 남몰래 벗어놓고 갔다
그런 날, 신발장에서 늦은 오후를 꺼내어 신는다
작달비가 채찍으로 땅을 후려치듯 굵고 세차게 작살을 쏘아댄다
이 산 저 골짜기로 산돌림을 돌다가 세상의 집들과 거리의 자동차를
모조리 휩쓸어 버릴 기세다
시가 비보라 친다
자박자박 시의 빗방울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 가만 들으며,
시가 고인 물웅덩이 찰방찰방 발끝으로 걷어차며 걸어도 보고
그렇게 시에 젖다 보면 무엇에 젖는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메마른 가슴이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들고
뭇매 치듯 급작스레 쏟아지는 모다깃비
여름 콩밭에 심은 열무, 푸른 새잎 돋게 하는 거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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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사다리
아침 8시에 버스가 왔다
목적지 없이도 무작정 버스를 탄다
함덕에 내려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 있어 홀로 지는 섬과 은결에 물든 너울과 지평선 너머를 살피는 것은 아니다
너는 먼바다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지
해 저물기 전에 집에 돌아가라고
말없이 담뱃불 붙이고 한 모금 연기를 들이쉬고 내쉴 뿐
네 마음을 알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
네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뺨에 흐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어
저녁이 슬퍼지면 네게 주려고
함덕 오일장에서 단팥빵과 삶은 옥수수를 샀지
계절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말없음표로 길게 이어져 있었어
사람은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지만
나무는 정작 사다리가 없어 다른 나무에 건너가지 못하지
나는 오래된 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 된 일인지 모른다
너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잡아 달라는 뜻이지 싶어 버스에 올라탔는데
차창 밖에 멀찍이 선 은행나무가
샛노란 단풍잎 후드득 떨어뜨리고 있다
마치, 눈물 떨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