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자랐던 나였다. 문명의 혜택은 받을 수가 없었지만 자연의 혜택은 누구보다도 많이 누리고 자랐다.
지금 들판이 누런 색깔로 변했다. 태풍으로 인하여 흉작이라고는 하나 색깔만큼은 황금색으로 풍요한 가을색이다.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낫으로 벼를 베고, 발로 밟아서 곡식의 낟알을 떠는 탈곡기가 있었다. 재미 삼아 옆에서서 밟아 보기도 하고, 탈곡하고 나오는 짚단으로 성을 쌓아 놓고 놀면서 친구들과 즐거웠던 기억도 난다.
그 때는 농약 사용도 없던 때라 논배미 물들어오는 질퍽한 곳에서는 가을이면 통통한 미꾸라지가 끝없이 진흙을 뒤집어 쓴 채 꾸물꾸물 나오기가 일쑤였다. 바께스에 주워모으는 일이 우리의 놀이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은 미꾸라지를 소금에 호박잎으로 문질러 추어탕을 끓이면 온 식구의 보신탕이 되었다.
학교 갔다오면서 길가의 긴 풀을 뽑아 메뚜기를 잡아 꿰어오기도 하고 병에다가 담아와서 후라이판에 볶아서 먹는 것은 즐거운 오락이었고 간식이었다.
어른들이 일하는 논 옆 냇가에는 다슬기가 얼마나 살이 올라 통통하던지... 참으로 내어간 막걸리 주전자를 씻어 가득 담아오면 파아란 국물이 우러나오도록 삶아 식구대로 둘러 앉아 바늘로 알맹이만 빼어서 간식으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찾아 볼 수도 없는 풍경이다. 미꾸라지와 피래미가 놀던 냇가에는 붕어떼가 몰려 다니고 다슬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기차 기적소리로 지금 몇 시쯤 되었을거라 짐작하면 일하시던 시골 어른들은 이제 자식들 소식을 듣기 위해 핸드폰을 들에 일하시면서도 목에 걸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
가끔 시골을 가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렇게 커보이던 초등학교 운동장은 폐교된 후 잡초만 무성하고 몇 안되는 아이들은 읍내에서 스쿨버스가 실어서 등하교를 시킨다고 한다.
초가 아니면 기와였던 시골집들이 모두 양옥으로 바뀌고 게다가 비닐하우스가 즐비하고,찜질방까지 생겼으니... 나의 어린 시절은 세월 속에 다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