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분 째.
병원 앞에 놓인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껄렁대는 듯한 표정으로 나뭇가지
를 물고있는 은형이..
그 앞엔. 조용히 미소짓는 내가 있고..
광민이와 동영인..은형이의 양옆에 앉아. 4개월 전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수원바닥을 당당하게 누벼대던 4개월 전의 그 모습을...
"봐...나...담배...문 거..."
"잎사귀 달린 담배두 있냐!?!!"
"...그...래도. 병...신...비슷...하잖...아..."
입에 문 나뭇가지를 담배라고 우겨대는 은형이.
그런 그의 모습에 할말을 잃은 듯..
상체를 의자 밑으로 늘어뜨린 채 쓴웃음만 짓고있는 광민이.
그와는 대조적으로 끝까지 상대를 하려는 동영이.
"개 코도 안 비슷해. 거따가 불붙이면 니 코 훌렁 다 탄다."
"아..우리..담배 피다..맨날..걸리면..화장.."
"화장실 청소 맨날 했지. 니가 대걸레질 젤 잘해서 맨날 너만
집에 먼저 가구 그랬잖냐. 그래서 청소 상 받았잖아. 우리 중에 첨으로
상 받았어."
"하하..맞..아.."
"그것 땜에 나랑 광민이 놈이랑 샘 나가지고.
가방에서 니 상장 몰래 쌔비다가. 너한테 걸려 가지고.
진짜 그때 너 진정으로 화난 거 첨 봤다."
"..하하..."
"상장 하나 때문에. 소심한 새끼."
"그리고......우리...바다. 놀러 가면..."
"바다 놀러가서 헌팅하면 작살이었지..
고1때...술집에서 대포 까다 걸려서 너만 인질루 잡혀 있었잖어.
비틀대다 넘어져서."
"..맞...아...킥..."
동영이의 어깨에. 기대앉아...옛 추억을 하나씩 꺼내놓고 싶었던 은형이.
그러나...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입은...
5분에 걸쳐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고...
그런 그의 맘을 충분히 안다는 듯. 동영인 알고 있는 모든 기억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은...안됐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고..
선선한 가을바람은...눈물 가린 내 머리카락을 자꾸만 걷어내려 한다.
"남문 코끼리 분식에서. 누가 더 많이 먹나 내기하다가...
9만원 어치 먹었던 건 생각 나냐?!"
"..하하..맞...어...맞...어..."
"그래서 돈 없어서 핸드폰 맡기고. 맞다. 북경반점에서 배달하는 새끼들이
자꾸 시비 걸어서. 짜장면 40그릇 교무실 앞으로 배달시킨 것도..."
"..응...."
"남문사거리에. 삥 뜯는 중학생들 혼내준 것도...
그때 우리 정의의 폴리스 3인 방이었어...생각나지..."
"...내가...대빵..."
"지랄은. 무슨 니가 대빵이여..!!!"
"...그때. 돌아가고..싶...다..."
"돌아올 거잖아!!!!!!!"
".....그....래....."
은형이의 힘없는 대답이. 또다시 날 불안하게 만들 때..
잠자코 앉아있던 광민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주차장 쪽을 향해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 광민아!?"
"카메라..사러..."
"..카메라..?"
"10분 안에 올께.."
사진 찍기. 그림 그리기를 자랑스런 취미로 가지고 있는 광민이가.
이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찾으며..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눈앞의 두 남자는 계속되는 추억회상에 여념이 없고..
"정류장에서. 수원여고 애들 명찰 얻는 거 내기한 건?! 생각나지!?!"
"..생..각..안..."
"무슨 소리여!! 니가 신기록 세웠었잖어!!!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색깔별로 다 얻어 놓구선. 너 강순이 있다고 발뺌하는 거지!?"
"...꼴통..."
"아!! 작년 가을엔. 병훈이 형 양호실에 누워있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뒷땅
까다가. 진짜 먼지 나게 맞았었는데. 그래서. 호프 가서 또 뒷땅 까다가.
알바생이 병훈이 형 친구여서. 또. 맞고. 그치."
"..너..울...었어...그때..."
"..맞아...근데. 지금 와서 말하지만 .맞아서 운 게 아니라. 배고파서 운 거야.
그때 그 새끼들이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패서 저녁도 굶었거든."
"식..충이.."
물론. 5분전에 나왔던 명찰얘기는. 잠시나마 날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소재거리였지만...
철들지 않은 유치원생 마냥 즐겁게 웃는 은형이의 얼굴은.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수원에서 제일 멋있다고 소문난 우리학교 동복을 입고서...
자꾸만 날 울게 만드는 남자친구 은형이.
하나씩 터져 나오는 추억에...뭐가 그리 즐거운지...헐렁한 교복바지를
붙들고 힘겹게 웃고 있는 은형이...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약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이곳에 나온 뒤부터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은형이...
"이건 카메라 사러 간 놈이 카메라 장사랑 눈이 맞았나 왜 안 와!!"
"....재미...없어..."
"니가 못 본 사이에 내 유머가 레벨 높아져서 그래. 인제 적응될 꺼야."
"....그..래.."
푸우 잠옷을 입은 동영이와. 용덕고 동복을 입은 은형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광민이를 찾는다..
울고 있는 날 모르는 척 하기 위해..
이들은. 몰라보게 변한 은형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당하기만 했던 1년 전 그 모습을 재연하고 싶어서..
죽음. 아픔. 눈물. 이란 눈앞의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야! 나 왔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바램대로..
가쁜 숨을 헐떡이며..광민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 손엔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서..이미 저 뒤에서 실컷 울고 온 듯.
눈물기 가신 눈으로..
"어우. 카메라 사는데. 애들이 막 쳐다봐!! 아무래도 내가 춘천스타일인가
봐!!"
"진정 넌 멍청이냐!?! 대낮에 푸우 잠옷입고 뛰어가는데 니 같음 안보냐!?
"그런가..내가 잘생겨서 본 게 아닐까?"
"걔들이 히로뽕을 10대 맞지 않은 이상."
"이 새낀 말을 해도 진짜 적나라하게 하더라!?!"
"잔말 말고 사진이나 찍어!!"
"아. 맞다. 사진."
동영이의 퉁명스러운 말에. 카메라를 만지작대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광민이.
그러더니...
"강순아!!은형이 옆으로 붙어!!!"
"..아...어..."
광민이의 고함에, 화장기 하나 없는. 눈물만이 잔뜩 적시고 간 추한 얼굴을
하고서. 조심스레 은형이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러면. 잠시 동안 손아래 떨구었던 나뭇가지를 다시 입에 물고.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는 은형이..
"..폼..나게...찍자..."
은형이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난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절대 찬성이라는 듯...턱을 들어 건방진 표정을 해 보이는 동영이.
카메라에 가려진 광민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그맣게 들려오는 웃음소리로 보아선.
나와 마찬가지로 실없이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몇 분의 부산스런 움직임 끝에. 광민이가 셔터를 누르려 할 때..
"야. 너도 저기 가서 서라. 내가 찍어줄게."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하늘의 태양보다 더 밝은 미소로 나타난 강윤언니가.
머뭇대는 광민이 손에서 휙 카메라를 빼앗아 들더니..
다짜고짜 그 아일 우리 쪽으로 밀어낸다..
"아이씨...내가 찍어야 예술사진이 나오는데..."
투덜투덜 대면서도 은형이의 등 뒤에 바짝 다가서는 광민이.
그리하여 그 세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 얼굴을 비스듬히 들어 터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우스꽝스런 모습에.
난 빠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은형이 옆에 철썩 붙어 앉았다.
"자. 찍는다.!! 김동영 김광민. 너네 입에 문 담배 안 내려놔!!!
은형이 넌 입에 문 거 그거 뭐야!!"
"우리 사진 찍을 때 원래 이렇게 찍는단 말이에요!! 이번 사진 컨셉
똥폼인데. 왜 자꾸 판 깨요!!"
"어린것들이. 아주 그냥. 턱 좀 내려!! 그리고 좀 웃으란 말이다!!"
"웃으면 폼 안 나잖아요!!!!"
"기가 막혀서. 꼭 그렇게 허리춤에 손 얹어야 되냐?!"
"이래야 도도하지."
"얼씨구. 얼씨구. 꼴 보기 싫어 죽겠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셋...그리고.......찰칵.....
순식간에 터진 플래시와 함께..걸작이 될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고.
눈앞의 세 남자는 심각해야 할 이 상황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그건. 이들에게 있어서..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실..
친구와 애인의 차이점...
같은 상황에서 눈물과 웃음으로 나뉜다...
약해지려는 나를 느끼며...은형이의 헐렁한 교복 깃을 꾸욱 잡았다.
웃는 얼굴은 동영이와 광민일 향한 채...
깡마른 한 손으론. 눈물 젖은 내 손을 꽈악 감싸쥐는 은형이.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는
은형이.
"어머. 아직도 밖에 있음 어떡해요!!!!"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올 때까지..
세 남자는 정신나간 듯 웃고 있었고..남아있으려는 은형일 억세게 일으키
는 간호사 때문에. 잠시 동안 이곳엔 실랑이가 벌어졌다.
"안돼요. 안 된다구요. 바람 쐬면 안돼요. 감기 걸리면 큰일난다구 했지요!?"
"감기 안..걸려요..."
"지난달에도 걸려서 고생했잖아요!! 얼른 일어나요!!"
"...좀만..더..있..."
"안돼요. 친구 분들도 빨리 도와요. 환자분 악화되는 거 보기 싫으면!!"
송곳같이 매서운 눈으로 간호사를 노려보다가,
환자의 악화라는 한마디에 은형이의 양쪽 팔을 척척 붙들어 매는 광민이와
동영이.
나 역시. 조금씩 흥분하려하는 다혈질 남자친구를 억지로 병원입구로
끌어댔고...
그 덕분에. 20분이라는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야...다혈질 은형일
병실 안에 눕혀 놓을 수 있었다.
\ 병실 안.
"아우. 땀나. 저 새끼 살 쪽 빠져도 힘은 여전하네."
"그러게. 아주. 그냥. 십 년치 땀을 한꺼번에 다 뺐네."
"그건 오버야."
"알아. 나도."
의자 위에 앉아.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은형이 친구들.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은형인...웃음기 가신 얼굴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
그나마 제정신을 갖고 있는 언니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 섞인 말투로
은형이의 화를 풀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그래. 은형아. 바람이 차서 그런 거잖아. 화 풀어라. 응?"
"해 더..보고..싶..었..."
"그래..알아. 해는. 퇴원해서 보면 되지. 뭘. 안 그래?"
천연덕스러운 언니의 대답에..갑작스레 슬픈 얼굴을 해 보이는 은형이..
아무도 몰래..부정하고 있다..
난..알 수 있다. 퇴원에 관한 은형이의 눈이..무엇을 의미하는지..
저 아이가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난..다..알 수....
"..아..빠.."
"응? 아빠?"
"..어딨어요..."
"..아..아저씨?! 담배 피러 화장실 간 거 같던데. 불러다드려?!"
끄덕끄덕..
이것으로 은형이가 화를 풀었을 거라 생각하며. 헤벌쭉 웃으며
병실을 나가는 언니.
헥헥대던 동영인 옆에 놓인 바나나를 집어 들고..
난 조심스레..은형이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건넸다.
"은형아. 교복. 벗어. 불편하지 않아?"
"..아니..."
"아니긴. 불편해 보이는데. 나 나가있을까?"
"아니..!!"
...
.......
고개를 홱 돌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은형이.
이곳에 온 뒤로 그렇게 힘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으므로.
우리 세 사람은 적잖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그 아인..
멋쩍은 듯..다시 고갤 돌려버린다.
"나..가지..마.."
"갈아입어야지. 그거 공기도 잘 안통하고. 덥잖아.
환자복 입어."
"..싫..다..."
"..퇴원하고 입으면 되잖아.."
"..이거..입고..죽..을 거..야.."
....
........
"뭐.....??"
벌떡 일어난 되묻는 나..
엉겁결에 뱉은 대답에. 자신이 더 당황한 듯..굳게 다문 입으로 침묵
을 지키는 은형이.
그리고,
광민이와 동영이가 양옆에서 말리는 가운데. 또다시 흥분해버리고 만
이강순.
"그거 입고 죽는다니. 너 무슨 뜻이야!!!!
그럼 니가 당장 죽기라도 한단 소리야!?!?"
"......"
"말해봐. 그거 입고 죽는다니!? 빨리 갈아입어!!! 나 나가있을 테니까!!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구!! 교복은 퇴원해서 입으란 말야!!"
"........"
대답 없는 권은형의 얼굴은. 날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몰고 갔다..
기가 찬 눈물에 그 아이를 쏘아보는데..
병실 문이 열리며 호들갑스런 언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은형아.!! 아저씨 모셔왔다!!!!"
눈치 없는 사람...
아직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발견치 못한 듯.
아저씨를 침대 옆으로 끌고 오는 강윤언니.
"인제 화 풀 거지? 누나 안 미워할 거지?!"
"...아..빠..."
철없는 언니에게 몇 초가량 웃어주곤..지금 막 침대 옆에 다가선
아저씨를 힘주어 부르는 은형이..
"그래. 무슨 일이야."
"..내일..수원..간..다.."
?!?!?!????!
그 순간. 앉아있던 동영이와 광민이마저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오르고.
모두가 놀란 가운데.
혼자 침착한 은형이가..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할..꺼..있...어..
수원..가서..할..꺼 있다..꼭..해야 돼..."
8분에 걸쳐..겨우 마지막 글자를 중얼대곤..힘없이 배게 위에 머리를
떨구는 은형이.
"무슨 소리야. 그 몸으로 어디를 간다 그래."
"..꼭..할..꺼..있어..꼭...해야 돼......."
"여기서 못해!?!?"
"...여기선..못..해............"
단호한 은형이의 말투..
우린 불길한 예감에 서로의 눈을 보며 스스로를 안심시켰고..
아저씬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병실을 나가셨다.
"야. 임마. 그 몸으로 어딜 가.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딜 간다 그래!!!"
첫마디를 연건. 우리 중 가장 심하게 떨고있는 동영이..
고개를 돌린 은형인..말없이 이불을 끌어올리고..
"할게 뭔데!! 할게 뭔데. 퇴원하고 나서 하면 되지.
왜 꼭 내일 해야 되는데!!!!!"
"........."
"왜 꼭 내일인데!!!! 일주일 있다 해도 되고. 한달 있다 해도 되는데!!
왜 꼭 내일인데!!!!!!!!"
바닥으로 떨구어지는 동영이의 눈물은..대답 없는 은형일
저 구석으로 내몰았고..
그 아이의 결심은. 완강했다.
꼭......내일이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