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발원지인 대구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둘러보면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의 끈은 '삼성의 사업보국과 시대의 배반 역공'이었다.
대구 한 복판 삼성 소유 금싸라기 땅에 삼성은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대구시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대구 북구 침산동 제일모직 공장 부지 정가운데 뒷편 2600여평에 500억원을 들여 지었다. 전문가들은 이 오페라 전용극장은 음향설비로 국내 최고라고 자신한다. 주변의 메가박스 영화관과 쇼핑몰과 더불어 대구의 신흥 테마파크로 부상하고 있다.
대구인들은 이곳을 예전에는 제일공원이라고 불렀다. 대구 공장 인근에서 만난 한 노파는 "70년대까지는 달성공원이나 대구 어느 공원보다 제일모직이 보기 좋았다"며 "그 안엔 수십년된 느티나무와 오엽송,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잣나무같은 유실수가 그득했고 꿩과 공작이 노닐고 식물원, 연못, 분수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선대회장은 호암자서전에서 "공장 부지 전체를 잘 다음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공장이라고 할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다. 그 때 심었던 갖가지 수목은 지금 공장을 거의 뒤덮을 만큼 훌륭하게 잘랐고 잔디도 곱게 자라 대구 시민들은 우리 공장을 제일공원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고 했다.
제일모직 창립 50년이 되던 올해 9월 그 곳을 다시 찾았다. 유럽의 고성같기도 하고 미국 동북부의 아이비 명문대학 캠퍼스 같기도 한 담쟁이 덩쿨 천지의 기숙사 건물 옆으로 섹시한 모습의 대구 오페라 하우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원 우대의 상징 기숙사와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최첨단으로 세웠다는, 그러나 지금은 썰렁하게 방치돼있는 공장건물들, 그리고 그 너머로 보드랍게 낮즈막히 자리잡은 오페라극장. 잘 어울리지는 않는 3가지 이질성의 조화. 원래 현실은 부조화의 조화이러니.
전쟁의 폐허를 딛고 54년 설립된 제일모직 대구공장은 국내 최초로 현대적 생산시설을 갖춘 대규모 공장으로 한국 최초로 순 국산 양복지를 생산하던 곳. 오늘날 삼성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호암은 타계하기 직전 제일모직이 케미칼 사업에 참여하게 한다. 마직막 유산이었던 셈이다. 현 이건희 회장은 전자재료 분야 진출도 결심했다. 이회장은 모직을 삼성의 명예로 생각한다. 화학과 전자재료등 두 분야는 이제 원단과 패션을 초월하는 주력분야로 커가고 있다.
의피창생(依被 蒼生 :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
57년 제일모직 대구공장에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내린 휘호와 이박사가 입었던 제일모직 옷들
삼성은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이건희 회장의 결단으로 오페라 하우스 무상 기증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회장은 삼성의 모태기업인 삼성상회가 대구에서 시작했고 이어 설립된 제일모직도 대구를 근거지로 삼성이 성장하는데 든든한 자금줄, 기업인수나 설립의 젖줄이 된 것을 감안해 '부의 대구 환원'을 결심했다. 대구는 이회장이 태어나 자라고 유치원을 다니며 유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대구시는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기념해 인근 도로 이름을 옥산로에서 제일모직로로 변경했다. 하지만 한해 순익에 맘먹는 규모의 기증으로 제일모직 주가는 한때 출렁거리기도 했고 지금도 곱지않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애널리스트들도 있다. 오페라 하우스 박스오피스의 한 여직원은 "공연장은 정부가 짓고 운영해 값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게 맞지만 삼성 정도라면 지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고마운 것은 인정하지만 고마움보다는 '삼성이니 만큼 당연히 할 걸 했다는 당위'가 앞선다는 감이다.
삼성의 부의 사회환원 활동은 삼성미술관설립, 복지재단을 통한 직접적인 지원, 스포츠 언론 지원등 사회 전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달초에는 서울 한남동에 거액을 들여 리움(이건희 회장가문의 영문 리, 미술관의 뮤지엄)을 완공하고 무료 관람을 시작했다.
'집안에서 니가 장남이니 너만은..'하듯 국내 1등, 그리고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만큼 삼성은 달라야 한다는 사회일반의 인식과 기업인 삼성가 사람들의 인식에 차이가 있고 여기서 삼성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파생된다 할 수 있겠다.
삼성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일시적으로나마 때로는 민족의 죄인으로 내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기업을 통째로 빼앗기기도 했다. 한일합방되던 1910년에 태어나 해방, 5.16 , 5.17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국제적인 민족 대기업 삼성을 일궈낸 호암.
그는 살아생전 직접 낸 단 한권의 책 호암자전 서문에서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장의 심정으로 기업과 자본을 내놓아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사업만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뒤돌아보고 "사회의 곡해는 한 개인에게는 때로 과중하였다"고 술회했다.
호암은 "이런 생각을 되새기면서, 분노와 비애를 내일에의 용기로 바꾸려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몇 밤 이었던 가"라며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이 말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중앙일보에 연재중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좀처럼 휘어질 줄 모르는 성품 때문에 오해를 사고 모함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이 회장은 속상해 하는 후배를 이말로 위로했다"고 회고했다.
호암은 "최고의 도덕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한뒤 "험난함에 지친 나머지 이따금 찾아드는 좌절감을 극복하면서 스스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봉사야말로 최고의 도덕이라는 나의 신조 때문"이라며 "인간에게 이처럼 실천하기 어렵고 엄숙한 과제도 없다"고 말한다.
제일모직 대구공장에서 차로 10분거리에 있는 대구 서문시장 입구 삼성상회 터 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삼성상회는) 삼성정신의 뿌리이며 사업보국의 이념이 발원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내면의 의미까지도 공간 속에 함축하고 조용히 자리를 지켜왔다"
"행복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생이란 석재에 신도 악마도 새길수 있다. 다만 나는 그 석재 속에 사업을 위해 살다 간 한 사나이로 새겨졌으면 한다"
호암 자서전엔 이런 말도 있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기량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남보다 특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 기량에 맞는 분야에서 국가 사회의 진운에 공헌한다는 신념아래 새로운 사업을 궁리하고 끊임없이 기업을 창설해왔을 따름이다. 혼란이 거듭되는 사회와 역사의 와중에서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곡해와 애로를 딛고 전진을 계속했다"
일제치하든 쿠데타 정국 속이든, 디지털시대이든지간에 사업가로서 남길 바랬던 호암은 사업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게 자기의 기량에 맞는 최고의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호암은 타계하던 해인 87년1월 일간지에 기고한 '부국론'에서 레이건 미국대통령이 기업가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부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이 시대의 영웅"이라고 찬양한 것을 소개하면서 "기업가를 이처럼 영웅시하는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올바른 이해와 정당한 평가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고 술회한 바 있다.
사회의 편견과 곡해를 풀기 위해 기업본연의 활동에 부가하여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의 싸늘한 눈초리와 시대의 치우친 인식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인들을 맘껏 기업하게 자유를 줄수는 없는 것인가.
삼성이 하면 달라도 뭔가는 다르다는 삼성이 해결못한 유일한 미완의 지상과제. 외부의 M&A(기업인수합병)공격에 대비하는 경영권 방어와 계승문제. 이재용 상무에게로의 적법하고도 과세가 완료된 사전 증여가 시민단체 등에게는 불법으로 비춰지고 있고 그런 여론은 최근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업보국과 사회공헌 활동에 돌아오는 게 고작 이런 반기업정서이냐며 삼성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할지도, 모든게 법대로 했는데 '몰라도 너무 몰라준다'며 이런 세태에 야속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더러는 선대회장때처럼 억울하고 분노와 비애가 사무칠수도 있을 것이다.
사업보국의 기업이념으로 한국경제의 대들보이자 기둥이 된 삼성. 호암 말대로 '최고의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자문에 삼성가 사람들은 물론 시민단체, 정치인들도 귀기울이면 답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을 듯하다.
그 실패를 겪은 후 이병철은 사업원칙을 만들었다.
‘사업에는 국내외 정세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하고, 무모한 과욕과 투기는 지양돼야 하며,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해야 하며, 실패할 때에 대비해 제2, 제3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원칙이 삼성에서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원칙이고 보면, 그 원칙 자체가 삼성의 돌다리두들 기식 경영의 뿌리인 셈이다.
삼성상회 경영을 통해 사업에 자신을 얻게 된 이병철은 사업지를 서울로 옮겨 1948년 종로2가 에 두 번째 삼성회사인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다. 삼성물산은 홍콩과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에 오징어와 한천 등 농수산물을 수출하고 면사와 재봉틀, 실 등을 수입하여 판매한다. 이 사업을 통해 이병철은 한국경제의 중심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창업 다음 해에 삼성은 무역 랭킹 7위를 마크하다가 곧 천우사, 동아상사, 경향실업 등을 창업 1년 6개월만에 따돌리고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이병철의 승승장구는 제동이 걸린다. 결국 그도 모든 사업을 접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의 당시 사업가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병철에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부산은 피난지가 아니라 새로운 사업 기지였다.
피난지 부산에서 이병철은 51년 다시 ‘삼성물산주식회사’란 간판을 내 걸고 재기를 다진다. 부산에서의 사업은 우선 국내에서 고철 등을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고 대신 홍콩으 로부터 설탕과 비료 등을 수입하는 일이었다. 당시 이병철이 선택한 수입품이 전후의 상황에서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업 품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이른바 전쟁특수를 누리는 품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휴전 이후 정부는 물자부족 타개와 복구를 위해 제당ㆍ 제분ㆍ섬유 등 생필품 위주로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에 주력했다. 정부로서는 의식주 해결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에 당연한 정책이었다. 덕분에 소비재산업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기업 설립 붐이 일기 시작했다.
50여만 평의 대지 위에 관련 계열기업, 부품업체 등을 거느리고 전자왕국을 이루고 있는 삼성전자 단진 이병철에게도 또 다른 기회였다.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이병철의 제당업 진출에 대한 계기가 된다. 제당업 진출은 이병철의 제조업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동안 여러 사업으로 돈은 벌었지만 결국 남의 물건 팔아주는 일이 매출에 비해 실제 소득이 없다 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때문에 제조업 진출을 꾀했고, 제당업은 그가 생각한 세 가지 고려업종의 하나였다. 하나는 제당(製糖)이고, 다른 하나는 제지(製紙)였으며, 또 하나는 제 약(製藥)이었다. 종이, 설탕, 약은 거의 모두 외국 수입품이나 밀수품에 의지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제당공장을 짓기로 했을 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1979년 제일제당 인천2공장을 시찰하는 이병철 회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한사람 건너)이건희, 홍진기 사장
당시의 그 사업들은 성공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필품을 내다 파는 상인들의 대부분 이 호황을 맛볼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이병철의 제일제당 역시 큰 성공이었고, 제일제당의 엄청난 성공은 사업 다각화의 자신감으로 작용하여 56년에는 통조림공장, 57년에는 제분공장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병철은 무엇보다 미래를 예측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길이 막힐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는 놀라운 돌파구를 만들어 냈다. 주저앉지 않았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땅에 빈손으로 피난하여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세워 그 시대에 이미 수입대체산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기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미래가 있다고 판단되면 저돌적으로 투자하고 밀어붙인 것이다.
그런 이병철에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부정축재자로 몰리기도 했으며 한국비료밀수사건과 관련해 책임을 지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하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그 위기들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1969년 설립한 삼성전자에서 이병철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45만평의 공장부지를 수원시 매탄벌에 조성했다. “전자 산업이야말로 기술과 노동력, 부가 가치, 수출 전망 등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경제 실정에 꼭 맞는 산업”이라고 했던 이병철의 삼성전자 설립은 그의 나이 73세에 이루어진 결단이었다. 이병철은 삼성전자를 설립할 무렵, 수십 번이나 일본을 방문하며공부했다. 설립 후가 아니라 설립 전이었다.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려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설립한 삼성전자를 당장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고 스스로 공부하며 이끌었던 것이다. 철저했으며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일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 엄청난 부자였는데 누군들 그만한 사업 못할까.” 하지만 그 누구에게 그만한 돈을 맡겨본들 과연 누가 그만한 사업을 일으킬 수 있을까. 기업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병철이 사업을 시작할 무렵, 한국에는 이병 철 그 이상의 부자가 수없이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돈이었다면 지금 한국에는 하나의 ‘삼성’이 아닌 수십 개의 ‘삼성’이 있어야 할 일이다.
(2007.6.21 마이다스)
1980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집무실에서 서예를 연습중인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 이건희 회장은 79년 삼성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병철(1910~1987)
오늘날 거대 글로벌 기업 삼성을 일으킨 기업인. 정주영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기업인 중 한 명.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안정적이고 치밀한 성품의 소유자였음.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다소 보수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뛰어난 상황 파악력에 탁월한 "환경 적응력"을 갖고 있었음. 치밀한 시장 조사와 품질 제일주의라는 두 가지 전략을 고수했으며, 상당수의 사업이 적자로 시작됐음에도 결국 매번 업계 1위를 만들고 마는 뛰어난 운영 능력을 보여줌. "믿지 않으면 쓰지 말고, 일단 쓰면 믿는다"라는 철학을 가진 용인술의 귀재이기도 했음. 그러나 현대 그룹 정주영과는 달리 직원들에게 사무적이고 차가운, 개인주의적인 취향이 강한 인물이었음.
경남 의령의 유명한 부자집의 4남매 중 막내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당시 집에서 보내오는 하숙비가 일반 월급쟁이의 5개월 봉급과 맞먹었음.
지병으로 와세다 대학 중퇴. 한국으로 돌아온 후 26살에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 분의 토지를 물려받아 사업을 시작. 정미소, 운송사업, 부동산 투기를 통해 승승장구 사업을 넓혀 나감. 그러나 중일 전쟁의 발발로 사업은 순식간에 몰락, 현금 2만원만 수중에 남음.
이때 이병철은 사업이 단순 투기나 돈벌이가 아닌 국내외 정세와 밀접히 연관된 복잡한 것임을 깨달음. 그리고, 사업가의 과욕과 자만은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 올 것이란 교훈을 얻음.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 삼성상회는 첫 사업 아이템은 국수와 과일. 이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됨. 이병철은 이때부터 치밀한 시장 조사와 품질 제일주의로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 양조업과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 몇 년 만에 국내 1위의 무역회사로 발돋움함.
이순근이라는 전문 지배인을 영입해 그에게 사업 관리의 전권을 위임함. 이는 오늘날 삼성 경영의 전통으로 이어짐. 사업은 호황을 거듭했고, 1941년 삼성상회는 주식회사로 등록, 개인 사업이 아닌 기업으로 발돋움함.
1950년 한국 전쟁 때 이병철은 "안심하고 피난 가지 말라"는 이승만 정부의 말에 속아 서울에 남았다가 공산당이 점령한 서울에서 모든 재산을 압류 당함. 이때 무일푼으로 전락한 이병철은 대구로 뒤늦게 피난을 갔고, 이곳에서 자신이 시작했던 과일 사업을 운영하던 이창업으로부터 그간의 이익금 3억원을 받음.
이 돈을 바탕으로 설탕 제조업을 시작, 1953년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설립함. 설탕 제조업은 이병철의 운명을 결정지은 일생일대의 "대박 아이템"이었음. 1954년 순이익은 80억환, 1960년엔 한국 설탕 시장의 70% 가까이 점유하는 독점기업이 됨. 시장을 독점한 뒤에도 이병철은 장기적인 신용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끝까지 설탕 값을 올리지 않았다고 함.
(왼쪽부터)이병철 회장, 김상협 문교부장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한사람 건너 홍진기 사장
1954년 제일모직 설립, 제일모직 역시 수년 만에 국내 섬유시장의 70%를 점할 정도로 급성장함.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세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고, 그가 추진하던 사업이 모두 초기화 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음. 특히 정권의 이해 관계에 의해 10년간 중단과 시작을 반복했던 한국비료 사업은 공장이 가동하자마자 "사카린 밀수" 사건에 휘말려 국영화 되고 맘. (삼성이 주도했다는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사실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로 진행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그 내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 삼성은 1994년 민영화 된 한국비료를 기어코 되 사옴.)
맨 왼쪽 두번째 홍진기, 김옥길, 이병철 회장, 김상협
1964년 동양방송 TBC를 설립, 1965년엔 중앙일보를 설립해 미디어 사업을 시작함. 특히 TBC는 주력 프로그램인 "쇼쇼쇼"를 필두로 기존의 KBS를 제치고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방송국이었음. 그러나 TBC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통폐합당하고, 중앙일보는 1999년 삼성으로부터 분사해 독자적 언론기업으로 독립.
1969년 삼성전자 설립, 수원에 대규모 전자단지를 건설함. 초창기 만들어진 삼성의 가전제품은 고장투성이로 악명 높았으며 약 4년간 적자만 보고 있었음. 그러나 1973년부터 TV와 냉장고, 세탁기, 진공 청소기 등을 국내에 시판하면서 흑자로 돌아섬.
1984년엔 삼성 반도체 공장 준공. 이병철은 전자 사업의 핵심이야 말로 반도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에 반도체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함. 반도체 시장에 먼저 뛰어든 일본은 한국엔 1986년까지도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기 어렵다고 평가했으나, 삼성은 단 6개월 만에 (일본이 20년 걸린) 64KD 램 생산에 성공함. 이후 삼성의 반도체는 IBM PC에 탑재되는 등 세계 시장에서 승승장구, 오늘날 세계 제일의 반도체 생산 기업이 됨.
일본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고 일본 시장을 먼저 참고하는 습관이 있었음. 이병철은 평소 일본과 한국이 생활양식이 비슷하다고 판단, 일본에서 통한 사업은 한국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음. 그래서 이병철이 처음 시작한 사업은 대부분 일본 아이디어를 가져와 일본 기업의 기술을 끌어들인 것들임.
이병철 회장은 유교적 전통의 집안에서 자라 상하 관계 등 예절 관행을 극도로 중시했으며,남 앞에 나서는 것도 매우 꺼렸다. 극도로 말을 아끼고 칭찬과 비난을 극도로 삼가는 성격에 사원들과 별다른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편도 아니어서, 업무 시간 이외엔 거의 만나는 법이 없으며, 회의는 마치 신하와 군주간의 어전 회의라 할만큼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함.
근엄한 분위기의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이병철 회장은 조직 내의 화목함보다는 철두철미함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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