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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거스틴의 생애를 적은 글이다. 그의 성경해석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든 어거스틴의 생애를 읽노라면 감동받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생애를 쓰면서 이러한 분에 대한 연구가 보다 많이 되어야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다. 그의 생애는 모든 이들에게주는 복음이다. 그는 신학의 거성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거성이기도 하다. 이 신앙의 세계에 있어 그 만큼 감동과 영감을 준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확신한다.
어거스틴의 생애
44세에 이른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Confession) 안에는 자신이 체험했던 처음 사랑의 뜨거운 열정, 성령의 불길,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 아직도 넘쳐흐른다. 구약성경에서 51시편을 쓴 다윗처럼 어거스틴은 젊을 때 지었던 죄들을 숨기지 않고 오고 오는 세대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진실하게 고백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온 생애를 통해 찬양하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이끈다. 또 기독교는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임을 알게될 것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생애를 연대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의 비옥한 땅에서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고 히포(Hippo, 지금은 Bonna)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타가스트(Thagaste, 현재는 Souk-Ahras in Algeria)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트는 당시에 행정적으로 칼타고(Carthage)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누미디아(Numidia)의 옛 왕국에 속했다. 타가스트는 문명이 발전된 도시였고1) 그 곳의 시의회원이었던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이교도로서 신경질 많은 자였으며 가난한 자였다. 또 그는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는 시민이었다.2)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어거스틴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고전적 교육이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이런 중대한 교육을 받도록 부친은 강요했다. 모친 모니카(Monica)는3)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역사 중 가장 훌륭한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지성과 영적 경건을 함께 갖춘 분이었다.
370년 타가스트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후, 대학교 마을인 마다우라(Madaura)에서 처음으로 문법과 수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곳의 교수들은 이교도들이었고 신들의 동상들이 있는 공개토론(forum)하기를 즐겼다. 다음 해, 타가스트로 되돌아와서 부친 파트리키우스가 칼타고에서 교육을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재정을 마련할 때까지 머물렀다.4) 머무는 동안 좋지 못한 행동들을 일삼았다.
371년 어거스틴은 모친과 친구이자 10세 많은 로마니아누스(Romanianus)의 후원 받으면서 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칼타고(Carthage)로 갔다. 그 곳의 학생들은 난폭하였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호사스러운 삶을 일삼게 되는데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었던 때였다. 극장에 찾아가서 자신의 불운함을 달래곤 했다.5) 칼타고에서 지난 1년도 되기 전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모니카가 그의 학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법관이 되기 위한 수사학을 배웠지만 곧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소유했던 희미한 기독교 신앙 마저 점점 포기했다. 그 곳에서 불법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 향후 15년 동안 같이 했던 여인을 17세에 취했다. 372년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가 태어났다.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에 나는 수사학을 가르쳤고 탐욕으로 가득 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말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보다 세상적 학자들을 본받았으며, 기교도 없으면서 기교를 가르쳤으며 범죄한 삶을 일삼으면서 범죄치 않는 삶에 대해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 하나님, 미끄러지는 가운데 거침돌에 걸리는 모습을 보셨고 맑은 빛들을 막아버리는 연기 가운데 있는 저를 보신 주님, 나는 허무한 것을 나의 지침으로 삼았고,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그 때 나는 법적인 결혼이라 할 수 없지만 제 마음대로 한 사람을 택했습니다만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결혼에 관련된 일들, 욕정으로 충동된 것간에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 가운데 자녀들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6)
373년 어거스틴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에 이르는 것은 고전7)을 접하면서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은 학교의 교과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시기에 키케로의 작품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참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기 때문이었다. 칼타고에서 허무한 것을 배워 저명해지려고 온갖 힘을 쏟았다. 그러는 가운데 수사학을 배우는 과정에 철학으로 가득찬 『호르텐시우스』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에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정말 이 책은 나의 애정을 바꾸어 놓았고, 나의 시선을 당신께 향하도록 했으며, 오 주여, 다른 소망과 욕망을 갖도록 했습니다.”8) 여기에서 그는 참된 행복이 영적이고 그것을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때부터 어거스틴은 지고선(supreme good)으로서 지혜를 찾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어거스틴의 “첫 번째 개종”이라 부르기도 한다.9)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다시금 기도하게 이르렀고 무엇인가 변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 의식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키케로의 작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 주여, 오직 당신의 자비, 나의 구세주이시고 당신의 아들으로만 당신의 이름을 내 마음속에서, 마치 모유로 익숙해 있는 것처럼 부를 수 있었습니다”고 고백한다.10)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11) 또 성경으로 진리를 깨달았을 때 키케로 내용의 부족을 발견하였기에 미련 없이 돌아섰다.12) 하지만 성경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망을 더해갔다. 젊은 수사학자였던 그에게 성경의 형편없는 번역들이 혐오감을 안겨다 주었다. 키케로의 문체와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13) 지혜를 갈구했던 어거스틴은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권위에만 의존하고 싶지 않았고 카톨릭 신앙이 지성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구약성경은 그에게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아직 어거스틴은 처음 신앙, 즉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가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하여 그리스도, 즉 카톨릭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영적 기독교를 찾고 찾았기 때문에 마니교에 마음을 갖게 되었다.
374년 향후 9년 동안 몸담게 될 이단 마니교(Manichaeism)에 빠지자 그를 위해 모친의 열렬한 기도를 하면서 되돌아올 것을 확신하였다. 이원론적 마니교는 빛과 어두움, 하나님과 물질이라는 두 개념이 영원하다는 것 말하였다. 그래서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14)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력을 주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말하는 진리를 말하면서 나에게 그 진리를 말했습니다. . . . 오 진리, 진리여, 내 깊은 영이 얼마나 당신을 갈망 하였는가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거듭해서 말하였습니다. 건전하게도 보였고 어떤 때는 두꺼운 책을 소개하면서 말입니다.”15) 당시 마니의 제자들은 북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비밀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16) 율법적인 기독교 진리에 반해 영적 기독교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런 철학적 종교적 체제와 관련을 가진 마니교가 어거스틴에게 지적으로 보였던 이유는 모친이 말하는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악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 도덕적인 면에서 기독교보다 조금의 부담감이 적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금욕적인 삶이었다. 원하는 것을 행하면서 마니교적 원리들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17) 더욱이 성악과 기악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터라 그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은 그들의 예배시간에 열정적으로 시편을 노래하였기 때문이다.18) 끝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던 이유는 마니교의 신비성이 그를 넋을 잃도록 했다. 이상의 모든 것보다 어거스틴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은 바로 악의 문제를 그들의 가르침에서 해결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실체에 관해서 무지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들이 ‘악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나님은 육체적 모양을 갖추셨으며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으시냐?’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죽이고, 생물들을 희생시켰던 자들을 의인이라 칭할 수 있느냐?’ 이런 질문에 나는 정말 혼돈을 가졌고 답답했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4세기의 아프리카 교회는 어거스틴에게 ‘참 지혜’의 형태를 제공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자연스럽게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9) 많은 실망감을 받았을 뿐이다. ‘세련되고 다듬어진’ 책으로 기대했고:20) 고대 저자들에 대해 박식한 라틴적 용인된 방법으로만 사람들과 교통하도록 훈련받았다. 속어와 사투리는 그와 같은 자들에게 혐오감을 줄뿐이었다. 아프리카의 라틴어 성경은 무식하고 무명의 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속어와 사투리가 많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키케로가 사랑하라고 명했던 차원 높은 영적 지혜를 성경에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천박하고 부도덕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21) 신약성경에서도 지혜이신 그리스도는 모순되는 모습을 갖고 있었다. 또 아프리카의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성경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심지어 감독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22)
어거스틴의 신학과 주석에서 마니교의 시절을 회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도시』에서도 그들의 잘못들을 계속해서 비판한다.23)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 주석적 작품들을 통해 밝힌 것은 창세기만 아니라 일반적인 구약성경에 대한 편견이었다. 창세기에 시작되는 모든 말씀들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난후, 성경을 읽으려는 매력을 상실하고 마니교의 비판을 수용했었다. 『고백록』에서 그는 말하기를 성경이 사실이고, 영감 받았다는 것을 고백했고 시편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한층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24)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다고 고백한다.25) 마침내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였다: “오 주여, 당신께서 진리이시기에 당신의 말씀도 진리이십니다.”26)
376년 고향 타가스트로 돌아와 문법과 수사학을 한 동안 가르쳤지만27) 곧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 칼타고로 되돌아와서 시인으로서의 포상을 받았다.28) 탁월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이론적 실천적 원리들 과정에 수사학을 발전시키고 후원했다. 동시에 이교도 학문을 완전히 접하기도 하였다.
382년, 즉 373년부터 시작되어 마니교에-9년간-젖혀 있었던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잘못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382년 여름 서방 마니교도들 중 명성을 가진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가 칼타고에 이르렀다. 기대에 가득찬 어거스틴은 그와의 만남을 가졌지만 마니교에 대한 의심만 증가시켰을 뿐이었다.29) 그 결과 그는 회의주의(scepticism)로 빠지고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383년 로마에서 수사학 학교를 개설했다. 그러는 동안, 마니교 제자들과 접촉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지속했다.30) 384년 가을, 기독교의 적대자인 로마의 심마쿠스(Symmachus)와 중개인들로 역할 했던 마니교도들은 어거스틴에게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직을 제안했다.31) 어거스틴은 마니교들과의 교제를 끊기 위해 이 직책을 수락했던 것이다.32) 분명한 것은 밀라노로 떠나기 전까지, 즉 384년 말까지는 마니교도들과 교제를 가졌다는 것이다.33)
드디어 385년,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제자들의 권면을 받고 교수직을 위해 밀라노(Milan)로 옮겼다. 밀라노에 오기 전까지는 플라톤 철학적 사고, 즉 절대 진리를 가지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사고에 젖혀 있었다. 그래서 철학적 질문을 가지면서 마니교도들의 견해와 키케로와 천문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들의 이론은 의문만 더했고 천문학자들은 분명한 것을 제시했다. 점점 쌓여 가는 의심을 그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마니교는 신자가 지식을 얻은 후 자아를 완전히 주장할 수 있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수많은 신비들을 말했지만 이 세상의 신비로움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모순들이 많았고 실망하기에 이르렀다.34) 이제 어거스틴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의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한 동안 플라톤 학파(Academics)의 회의주의에 매력을 느껴 보았다.35) 키케로를 통해 그는 이미 철학에 눈을 뜬 상태였기 때문에 진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36) 하지만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답변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회의적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마니교의 가르침이 회의주의의 질문에 무기력했다는 사실이었다.37)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플라톤 회의주의로 극복하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상황에 어거스틴은 이르렀다. 얼마 후에 기독교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가 되었다. 밀라노에 온 그가 마니교에서 벗어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갑자기 마니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긴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 첫 번째가 점점 자유적 예술, 즉 철학을 연구하게 됨에 따라 마니교의 불일치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나 다른 철학자들과 교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에 생애를 주도했던 플라톤 철학, 즉 회의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카톨릭 신앙, 즉 세례 지원자(a catechumen)가 되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마니교도들의 범죄를 증명해볼 수 있는지 모든 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영적 본질을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요? 모든 신앙의 거점들은 압도되어 내 마음에서 멀리 떠나버렸지만; 영적 본질을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의 위대한 면이 보다 폭넓은 견해들을 수용했다고 판단하면서 더욱 깊숙이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Academics)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였고 흔들리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마니교들을 멀리해야만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받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기소침한 나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그 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께서 명하셨던 카톨릭 교회의 세례 지원자가 되어 무엇인가 나의 진로가 밝혀질 때까지 그것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38)
세례 지원자로서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Ambrose, ca. A.D. 339-97)의 설교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설교는 마니교적 어려움들을 소산시켰고 알레고리적 해석학을 사용하므로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어거스틴에게 제공했다. 암브로스의 영향39)을 받으면서 어거스틴은 성경에 대한 어려운 점들을 해결했으며 신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그 과정은 매우 빨라졌다. 암브로스 영적 존재와 악을 비 존재로 보는 플라톤적 작품에 익숙했던 자였다. 악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며,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견해는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인 동시에 그의 사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또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인 장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40)였다. 그는 암브로스보다는 훨씬 중요한 어거스틴에게 영적인 지도자며 친구였다. 그를 통해 밀라노에서 신플라톤주의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로 통해 어거스틴이 놀랍게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말씀이 무형이라는 것,41) 하나님은 존재 자체며,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피조물들은 선하며,42) 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거나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독립적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의 의지로부터 말미암는 다는 사실들이었다.43) 또 심플리키아누스는 그에게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이 들어있는 견해들이 있는 요한복음을 접하도록 했고 바울 서신들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는 많은 부분들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육욕으로 인해 주저하였다:
“어디서부터 악이 들어왔을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형성하셨고, 명하셨던 어떤 악이 있었을까? 왜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시지 않으시고 방관하고만 있으실까? 왜? 어떤 악이라도 선 안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하는 변화시킬 능력이 없고 무능하신 하나님은 아닐까? 끝으로 그는 왜 전능하심으로 그런 것을 만드셨을까? 혹시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과거에 무한한 시간동안 그것을 허락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일까?44) . . . .
. . .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어떻게 “베푸시는지”를 나에게 먼저 보이셨으며 당신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겸손한 면을 사람들에게 보이셔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플라톤주의자들의 책들에 심취해 있던 자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나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안에서 같은 말씀을 읽었지만 많은 이유들로 동일한 결과들을 갖지 못했습니다. [계속하여 요한복음 1:1-12의 말씀이 진행된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45) . . .
. . . . 나에게 경고를 받으면서 내면의 자아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를 인도하시면서 나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의 눈으로 내 영혼의 눈보다 위에 계시고, 내 마음보도 위에 계신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모든 육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기름이 물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상 위에 있는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위에 있는 빛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그 아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 빛을 알며,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것을 압니다. 오 영원하신 진리여! 참된 사랑과 사랑 받으시는 영원하심이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께 나는 주야로 행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나를 높이 드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를 막고 있던 연약함을 뒤로하시고, 나에게 강력한 빛을 부으실 때 나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떨렸으며; 위에서부터 들여오는 이런 음성을 듣는 것처럼 나는 당신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강한 사람들의 음식이며 너는 나를 먹어야만 하며; 너는 나를 너의 육신의 음식처럼 변화시킬 수 없지만 너는 내 안에서 변화될 수 있다.” 당신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며, 내 영혼을 거미처럼 삼킬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물을 때: “공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유한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까?” 그러자 당신은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내 마음의 귀로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의심의 구름을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피조물들로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진리와 함께 살지 않을 것을 의심할 것입니다.46)
심플리키아누스는 로마의 수사학자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us)47)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리누스는 신플라톤주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자였는데 심플리키아누스의 도움으로 그는 개종하였다. 그는 플로티누스(Plotinus)와 기독교 사상의 형이상학을 관계짓는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상들을 심플리키아누스는 그에게 소개했던 것이다.48) 또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친 다른 친구는 플라비우스 말리우스 데오도루스(Flavius Mallius Theodorus)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책들을 어거스틴에게 빌려주었던 자였다.49) 그 외에도 신플라톤주의자들도 어거스틴은 알고 있었다.50) 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여러 질문들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을 주었고 영적 자유를 갖는데 공헌했다. 하지만 그 한계성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특히 『고백록』51)에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작품들을 통해 성경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플로티누스를 연구하면서 성경에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플로티누스는 로고스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한복음의 첫 장과 흡사했다. 하지만 로고스를 언급하지만 성육신하신 말씀을 말하지는 않았고, 십자가의 신비도 해결하지 못하였다.52) 플라톤 철학으로 인해 영혼의 눈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의 경험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53) 하지만 진리에 대한 완전한 갈증 해소는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직도 어거스틴 자신에게 있는 것은 금욕적인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성적인 문제보다도 도덕적 문제가 더욱 힘들었다. 그는 매우 감성적으로 예민한 자였다. 심플리키아누스는 빅토리누스(Victorinus)도 개종을 주저하면서도 담대하게 사도신경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어거스틴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당신의 사람, 심플리키아누스가 빅토리누스에 대해 나에게 말하자 나는 그를 본받고 싶은 마음으로 불탔다.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 . . 나의 의지는 나를 사슬로 묶었습니다. . . . 새로운 의지, 즉 당신께 경배 드리기를 원하는 의지와 당신으로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의지가 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너무나 오랫동안 묶여있었기에 과거의 의지를 이길만한 힘이 부족합니다. 나의 두 의지, 즉 하나는 육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의지들은 내 안에서 싸우고 있으며 그들의 불일치로 인해 나의 영혼은 혼란스럽습니다.54)
자신의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어거스틴에게 폰티티아누스(Pontitianus)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이전에는 수도사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집트의 은자 성 앤터니에 대해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가슴에 꽂힌 화살과 같았다.55) 이제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반자들을 만난 셈이었다. 개종하기 전날, 자신의 기독교 친구인 폰티티아누스는 그에게 바울 서신들을 연구토록 했다. 다음 날, 세를 들고 있는 집에서 어거스틴은 아래와 같은 극적인 개종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내 영혼에 깊이 감추인 것을 살펴보므로 비참한 나 자신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내 마음의 눈앞에 그것들을 놓았을 때 내 안에 큰 폭풍이 몰아쳤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자연적 감정으로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기 때문에 알리피우스(Alypius)56)로부터 멀리 떠난 이유는; 혼자 있으면서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혼자 떠나서 그조차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했으며 흐느껴 우는 목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을 치면서 어떤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의 눈물을 자유스럽게 흘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오 주여, 얼마나?” “영원한 당신의 화를 받을 것인가? 오, 과거의 죄악을 기억나지 않게 하소서;”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하염없이 부르짖기를 “내가 ‘내일, 내일이냐?’ 하면서 얼마나 미룰 것인가? 왜 지금이라 하지 못할까? 지금 이 순간 나의 추악한 죄들을 마무리하지 못하는가?” 이런 말들을 거듭하면서 찢어지는 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물으면서 내 마음에 처참한 비통을 한 동안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가까운 집에서 한 어린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갑자기 들었다. 소녀였는지 소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불렀다: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부르는 노래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 일어나서 이것이 성경 말씀을 열어보고 보여주시는 첫 장을 읽으라 하나님의 명령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복음이 갑작스럽게 읽으면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으로 느껴서 “가서 모든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앤터니(Anthony)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탁으로 그는 당신께로 개종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나는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곳에 두었던 사도의 말씀을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펴서 조용히 처음 직면하는 구절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을 수도 없었고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 문장을 끝을 순식간에 읽는 순간, 믿음의 빛이 나의 마음에 밀려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을 덮고 손가락으로 그 곳을 끼어놓고 이 사실을 알리피우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 . . 우리는 함께 모친께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친 매우 기뻐하시면서, 즐겁게 뛰시면서 승리에 찬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그렇게 애타게 슬퍼하며 기도하셨던 것보다 더한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찬양 드렸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므로 나는 이 세상에서 바라는 그 어떤 것도, 아내까지도 당신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57)
386년 여름, 위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수사학 교사직을 포기하고 학문적 글들을 다시 쓰기 하였다. 그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387년, 어거스틴은 몇 달 동안 모친 모니카, 아들 아데오다투스, 형제 나비기우스(Navigius), 친구 알리피우스, 그리고 가까운 사촌들과 형제들과 함께 친구 베레툰두스(Verecundus)로부터 빌린 카시키아쿰(Cassiacum)58)의 한 별장에서 별거 생활을 하였다. 이 곳에서 시편을 읽었다. 이 때에 『회의주의자들에 대하여』(Against Skeptics)를 썼고 또 자신의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는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On the Happy Life)이라는 책, 끝으로 『질서에 대하여』(On Order)도 펴냈다. 어거스틴은 감독 암브로스에게서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387년 부활절 전날에 받았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모친 모니카는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서 배를 기다리는 가운데 열병이 걸린 후 9일만에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운명을 달리했다.59)
그러자 388년 어거스틴은 로마를 다시 방문했다. 옛 마니교도들을 위해 『마니교도들의 도덕에 대하여』(On the Morals of the Manichees)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도덕에 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를 썼다. 그해 여름, 북아프리카의 칼타고에 도착한 그는 며칠 지나자 않아 고향 타가스트로 갔다. 고향에서 주위에 모여든 몇 친구들과 함께 타가스트에 조그마한 수도원을 세워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로마와 밀라노에서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한 목적을 삼았다. 지난 과거들을 모두 잊은 채 형식적인 교회적 삶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60) 특히 개종 시에 있었던 성 앤터니의 삶이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글을 써는 일에 힘썼다. 또 그릇된 길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노력했다. 과거에 자신을 도와주었고 마니교로 개종했던 로마니아누스(Romanianus)를 위해 『참 종교에 대하여』(On true religion)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죽었다.61)
389년 히포를 방문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나이든 감독과 백성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거스틴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히포의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에 의해 장로(a presbyter)로 수임 받았다. 391년 사제가 되었지만 계속적으로 수도원 삶을 지속했고 그러면서 아프리카 교회의 여러 일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에 어거스틴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성장했다.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연구실에서 성경 연구와 교회 교리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62) 392-4년 마니교도들과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글들을 썼다. 393년 10월 칼타고의 대감독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주재한 히포의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설교했다.63) 395년 발레리우스의 보좌 감독(assistant bishop)이 되었다. 396년 발레리우스의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로 어거스틴이 선출되었다. 397년 『고백록』을 쓰기 시작했고 아리안들(Arians)에 대한 『삼위일체에 대해』(De trinitate)를 쓰기 시작했다. 388년 칼타고의 네 번째 종교회의 참석했다. 402년 도나티스트 페틸리아누스(Petilianus)의 서신에 대해 논박하였다. 411년 카톨릭 감독들과 도나티스트들간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413년 『하나님의 도시』(De civitate Dei)를 쓰기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하였다. 414년과 417년 사이 어거스틴은 시편과 요한 서신들에 대한 설교들을 쓰면서 설교자와 주석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그의 초기 사제직과 감독직에 있을 때 성경 본문에 헌신하면서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는 것에 대해 제랄드 보너(Gerald Bonner)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의 초기 사제직과 감독직에 있어 성경 본문에 가깝게 가려고 했고 헌신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은 주석적이고 논쟁적인 후기 작품에서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경 본문들을 모자이크하는 면에 완벽하게 드러난다.”64) 430년 8월 28일 반달족(Vandals)이 히포를 포위한 3개월 되는 때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