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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5일(화) 오전 11시, 만남교회(우동혁 목사)에서 청목회 2월 모임이 있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모임은
최용재 목사님의 폴 워셔(Paul Washer) 이야기 (10분 동영상)
발제1: 예언자 (김종호 목사)
발제2: 제사장 (한은혜 목사) 순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폴 워셔 목사님(1961년 생)은 미국 남침례교회 선교사로, 하트크라이선교회(HeartCry Missionary Society) 대표이기도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그의 거침 없는 예언자적 메시지는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어 많은 설교 동영상(한글자막)이 올라와 있고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첨부한 "현대 교회를 향한 열 가지 기소장(10 Indictments against the American Church)"을 보시고 오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세대를 섬기는 목회자로서의 위치,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여할 메시지는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동영상
출처: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4168707303856304614#docid=-2502465091307345754
현대교회를 향한 10가지 고발
요약
영어원문 http://wordofmouthministries.blogspot.com/2008/11/paul-washer-10-indictments-against.html
한글번역 http://blog.cgntv.net/blog/blog_title.asp?id=sein3090&bloger_cat=21289
* 직역이어서 불편하실 수 있지만 시간상 동영상을 다 보실 수 없는 분들은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나아갑시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은 펼쳐진 책과 같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임재하심과 당신의 눈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숨길수 있습니까? 가장 영리한 사람들의 행동들도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납니다.
당신의 전지하심은 한계가 없으며, 은혜가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약한 자들에게 부어지며 당신의 영광에 풍성한,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은혜가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당신되심과 당신의 하신 모든 일들을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아래에 당신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당신은 왕이시며 다른 왕은 없습니다. 당신은 구원자시며 당신은 그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오늘밤 당신은 나를 아시며 내가 커다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 당신께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 형제들 중에 가장 미천한 자를 부르셨고, 당신의 은혜로 때로는 더 작은 자가 더 큰 자를 가르친다는 사실외에 내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언제나 나의 경우이며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
아버지, 오늘밤 우리를 도와주소서. 말의 유창함이나 탁월한 지성 따위는 사라지게 하소서. 진리가 앞서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의 상태가 더 영광스럽게 되도록 내가 변화하게 하소서. 나 자신과 여기에서 듣는 자들을 위해 은혜위에 은혜와 자비위에 자비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도와주소서, 오 하나님, 그러면 우리가 도움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안에 있는 그 도우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저녁 내가 여기에 선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 서서 부흥, 개혁, 하나님의 백성과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기소장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망의 기소장입니다.
이 일련의 모임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의 커다란 결론, 커다란 부담감이 내 마음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우리가 만든 모든 문제들을 다 청소해 주시기만을 단순히 기대할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원칙이 우리 모두 가운데서 위반되고 있으면서 여분의 성경적 계시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익합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악마나 악한 사람들이 그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주어졌고 우리가 단순히 우리 눈에 옳은 것들을 행하면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때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아주 세부적인 설명들이 주어진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세를 위해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주어진 것일까요? 제 생각에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대해 특정하시고 우리가 그중 가장 작은 세부사항이라도 빼서 무시해도 된다고 추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연약한 사람이며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기소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관대 다른 이를 기소할수 있겠습니까. 또한 감히 이것을 하나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하겠습니다. 내가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경과 비교해 볼때, 변화해야만 하는 분명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틴 루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텐부르그의 문에 못박힌 95개조의 선언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에 지워진 부담이며 나는 이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금 말하겠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말들은 일부 여러분들을 화나게 할것입니다. 그러나 경고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건방지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전달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싫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건방진 적도 많이 있었고 진리를 잘못된 방법으로 전달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변명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잘못된 전달자를 통해서든 아니든 간에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여러분이 듣는 것을 기뻐하며 “아멘” 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어떤 영적 경지에 도달했다면, 내 형제가 했던 이말을 하겠습니다. “네가 가진 것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받은 것이라면 왜 자랑하는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젊은 성직자라면, 이 진리들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사랑없이 여러분의 교회에 휘두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의 제안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개혁이라도 하기 전에 여러분의 무릎에 피가 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여러해동안 섬겨오신 더 나이든 성직자라면 제발 거만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늙고 어리석은 왕이 그의 하인들 중 가장 약한 사람으로부터 배울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오늘이 당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바꿀 용기를 가지십시오. 적어도 당신이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영광중에 들어갈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드신 분들께 경고로써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자, 내말을 잘 들으십시오. 나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방법에 대한 디모데전서 5장의 훈계를 알고 있고 그 방법으로 여러분께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안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고 있고, 이 나라 뿐만 아니라 내가 다녀왔던 유럽과 남미 그리고 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나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잘려져 나왔던 반석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펄젼과 휘트필드를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래벤힐,마틴 로이드-존스, 토저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하고 놀라운 운동입니다. 단지 인기있는 대중매체와 저명한 기독잡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15년 전에는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각성을 내 사역이 아닌 것을 통해 보게 될거라고는 꿈꾸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곳에 다니면서 내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을 봅니다.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를 위해 부르짖으며 “변화해야 한다” 하고 천명의 젊은이들이 선포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든, 전도에 대한 미국으로부터 온 심리학과 각종 얄팍한 기술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 울면서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 그들의 교회를 전도하는 남미에서든, 내가 때때로 새벽 두세시까지 앉아, 오늘날 그 누가 상상할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두건을 쓴 젊은 흑인들과 신학을 논하곤 하는 미국 내부의 어느 도시에서든 간에 말입니다. 각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부드럽게 말하고자 합니다. 40세 이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매번 각성을 가져왔었던 옛 사람들과 옛날 방식들과 진리들에게로 눈을 돌리는 많은 젊은이들, 그 대부분은 아주 어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우리가 발견한거요. 웨일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이것 좀 보세요, 저것 좀 보세요, 그리고 이 가르침을 좀 보세요. 이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외면하거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지난 25년간 설교해온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들이 25년간 설교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부흥 가운데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네가 기도하든 안하든 올것이다.”
나는 이중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압니다. 내가 전 세계의 남녀와 젊은이들이 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때에, 내게 그것은 부흥의 첫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열매들을 주신 분께서 모든 추수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제 10 가지의 고발들, 내가 믿기로 우리가 변해야 할 것들을 보기 원합니다.
1. 무엇보다도 첫번째 고발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특히 나의 교파에서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디모데후서 3:15 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지난 몇십년간 성경의 영감에 관한 강력한 전투가 있어왔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전투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더 자유주의적인 교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위한 전투에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함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은 전투의 반밖에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오류가 없는가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려면, 성경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모든 사회과학과 문화연구를 들여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 의견에는,
사회과학이 우리들 대다수가 보지조차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와 전도와 선교학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하는 일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교회에 주요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몇년전에, 여러해 전에, 내가 신학교에 다닐때 한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발자국들을 그리기 시작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칠판을 가로질러 간 후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단지 이 말만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교의 복도들을 누비고 있다. 주의하라.
이 발자국 소리가 사도 바울이나 그와 함께 하였던 영감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분명히 들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 생활의 극히 작은 어떤 영역들은 다룰 수 있지만 일이 정말 힘들어지면 사회적 전문가들에게로 갈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거짓말입니다.
여기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모든 현대 사회과학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왜 전도와 선교와 소위 말하는 교회 성장이 고고학자나 사회학자 그리고 모든 문화의 영향을 받는 월스트리트의 학생들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됩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선교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 활동과 교회 활동,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성경을 펴고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 하나님?’ 이라는 한 가지 질문만 하는 신학자과 성경학자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교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를 보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찾는 자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찾는 자는 오직 한분이라는 것을 교회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며,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순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된다 할지라도 그분과 그의 영광에 순응하십시오.
우리는 제국을 건설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인정 받으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별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잠시 이사야 8장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19절 – 역자주).
이것은 사회과학과 교회성장 도사들과 그외의 것들에 대한 완벽한, 아주 완벽한 정의, 또는 적어도 삽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삼사년마다 한번씩 그들의 모든 이론들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계도할 것인가부터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장시킬수 있을까 까지입니다.
삼사년마다 무엇이 여러분의 교회를 세상이 볼때 최고로 만들수 있는지에 관한 다른 유행이 찾아옵니다.
최근에 최고 또는 가장 잘 알려진 교회 성장 전문가가 자신의 모든 이론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과 눈물로 무릎을 꿇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명료한 말을 주지 않습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8:19 – 역자주)
교인으로서,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나가서 성령께서 살리신 사람들을 위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상담을 해야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2. 두번째 고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때때로 사람들이 이렇게 요청합니다.
“폴 형제님, 와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일주일간 시리즈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 경우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글쎄요, 형제님,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셨나요?”
그는 말합니다, “잘 생각해 봤냐니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그건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젠데요, 당신의 교회에 가서 가르치라고 하는 그 주제가요...”
그들은 말합니다.
“ 논쟁의 여지가 있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인데요. 우리는 크리스챤들이잖아요. 이것은 교회이구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말합니다.
“친애하는 목사님,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최고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당신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할때, 당신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교회 구성원들 중 일부가 일어나서 이런말을 할텐데요. ‘그건 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마음에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 있고 그들은 자신이 만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시편 50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을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1, 22절 – 역자주)
자,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속성이나 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는 높은 상아탑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모든 기독서점들이 자기 도움에 관한 책들과 ‘그것을 하는 다섯 가지 방법’과 ‘독실해지는 여섯가지 방법’과 ‘넘어지지 않는 열가지’에 대한 책들로 가득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들이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걸어가기 위해 모든 종류의 사소한 작은 육신적 장치들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조차 죄악이 만연합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집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목사로서 일년내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것이 언제입니까? 미국에서 일주일 내내 행해지고 있는 가르침 중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관계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흐름에 따라, 다른 사람들 모두를 그냥 따라가다가 어느날 이런 소리를 듣고 갑자기 “나는 누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라고 말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의 사람들인 것이 하나도 이상할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여러분이 영광의 문들을 지나갈때 시작되지 않습니다. 영생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진주 문을 여닫고 금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정말로 신나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원 속에서 미치지 않을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영광이 무한하신 분이 계시고 여러분은 그분을 좇아 가는데 영원의 영원을 보내게 될것이며 그래도 결코 그분의 산기슭 주변에조차 여러분의 팔이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싶고 하기 원하는 많은 여러 일들과 모든 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을 꺼내십시오, 이 책(성경 – 역자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공부하십시오.
일요일 아침,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차라리 일요일 아침이 없는 것이 더 낫겠다고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미국에서 일주일 전체 가운데 우상숭배가 가장 심하게 행해지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 적어도 대다수의 군중들은 – 그들 자신의 육신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만든 하나님, 사탄적 장치들과 세상적 지성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은 여호와보다는 산타클로스를 더 닮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3. 세번째 고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볼때, 이것은 체계적 신학은 아닙니다만, 성경중에서 어떤 책이 체계적인 신학책이라고 말할수 있다면 로마서가 가장 근접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 책의 처음 세 장을 한가지만을 하려고 썼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정죄아래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그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결말도 아니고 최종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은 아주 타락한 존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데려가려면 그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모든 육신의 소망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가 21살때, 설교하도록 막 부르심을 받았을 때였는데, 나는 성직자들에게 반값으로 양복을 파는 어느 오래된 가게에 갔습니다. 그들은 50, 60년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로 들어가서, 캔터키 파두카에서, 양복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습니다. 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습니다. 거기에는 한 늙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가 걸어 들어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구만, 그렇지?”
나는 말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는 아주 늙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건물 바로 바깥에 있는 저 건물이 보이나?”
나는 말했습니다. “네.”
그가 말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설교했었지.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영혼들이 구원받곤 했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요즘의 전도와 같은게 없었어. 우리는 이삼주 동안 설교를 하고서 죄인들에게 영접하도록 초대하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실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하기만 했지.”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를 어떻게 아셨나요?”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 글쎄, 그냥 예를 하나 들어주지. 수십년 전에 내가 이 가게에 양복을 사러 왔었다네. 누가 나한테 30불을 주면서 말하더군, ‘목사님, 내일 가서 양복 한벌을 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문으로 들어왔을때 가게를 맡고 있던 젊은 점원이 돌아서 나를 보았고 나를 봤을때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쳤다네, ‘누가 나 같이 악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임했다는 것을 알았지.”
지금 우리는 그냥 사람들에게 가서 얘기하고, 세가지의 입문적인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할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 우리가 우리 입으로 토해 놓은 종교적 삶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두번 다시는 복음에 마음을 열지 않을, 두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레오나르드 레벤힐이 즐겨하던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많은 장소에서 오직 한번만 설교하는지 이해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상적으로 다룰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 역자주)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영원보다는 지금 가장 좋은 삶을 주는데 더 신경쓰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합니다.
나는 이것을 말할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사역과 싸우게 될까봐 그들의 사역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사람이 인간의 죄를 다루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령께서 하십니다.
오셔서 죄의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특정하게,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면, 성령은 여러분 주변에 절대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레미야 시대의 목자들처럼 우리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가볍게 다룬다면 우리는 속이는 자들입니다.
“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렙6:14 – 역자주)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낼까봐, 그 사람이 슬퍼질까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부인하는 의사와 같이 우리는속이는 자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폴 형제,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우리는 요한과 찰스 웨슬리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문화와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마음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져 있어요. 우리는 자존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도 약합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본적 있으십니까?
그들이 설교했던 것들은 그들의 문화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설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짐승의 사나움을 가지고 대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의지가 박약하고 자존감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와 이 세상은 이 혐오스러운 자존감의 병폐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때 우리는 또한 도둑들입니다. 우리는 도둑들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어느 우주 거인이 바구니를 타고 와서 별들을 다 따서 담아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져갔나요?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여러분은 그것들을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서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게 되면 별들이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급진적 타락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거부할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영광은 우리의 타락성의 바탕위에 놓여졌을때 가장 광대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여인은 많이 사랑하였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알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 알았습니다. (눅7:47 – 역자주)
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로인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훈계를 따를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강탈하였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고후10:17 – 역자주)
4. 네번째 고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나라에 복음이 굳게 서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무지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병폐는 자유주의적 정치인들도, 사회주의의 근본도, 헐리우드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소위 복음주의 목사와 우리 시대의 설교자와 우리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거기에 병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하는 약간의 미신적 기도와 함께 우리의 축복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영리’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다섯가지’로 축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가 하는 기도를 충분히 진지하게 따라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천주교적으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중생’을 ‘결심주의’와 맞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단 몇분동안 말한 후에 얼마나 많은 30, 40대의 신실한 분들이 나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지 아주 놀랍습니다. “폴 형제, 내 인생에서 이런 것은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속죄와 화해의 역사적 교리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말할때,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그냥 분명히 얘기합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시작해서 사람의 본성과 그로 인한 타락에 이릅니다. 거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두 복음의 위대한 기둥들은 모든 믿든 사람들의 입에서 위대한 딜레마 (진퇴양난) 라 불리고 알려진 것에 이르게 합니다. 그 딜레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의시면서 동시에 악한 사람들을 정당화 할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 특별히 잠언의 한 본분을 인용하자면, “악인을 의롭다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습니다” (17:15 – 역자주). 그런데도 우리 모든 기독교 노래들은 얼마나 하나님이 악한 자를 정당화하시는지를 자랑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찰스 스펄전과 로마서를 세번은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말했듯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성채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큰 문제는 하나님은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모든 사람들은 진실로 악한데,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려면 악한 자를 정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을 사랑하신 위대하신 사랑을 두셨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던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었던 그 계획대로 그는 그 나무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의 법정에 서서 우리의 죄악을 지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 제국의 상처 아래 고난 받고 나무에 달려 있을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이 고난받는 것을 볼만한 도덕적 인내심이 없어서 외면하셨다는 이런 낭만적이고 능력없는 견해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죄가 되었기 때문에 외면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라고 외쳤을때, “그 잔에 뭐가 있었을까? 아, 로마의 십자가구나. 채찍이구나. 못이었구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추측해 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그 나무 위에서 겪으신 육체적 고난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잔은 그 아들에게 부어져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공의때문에 버려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짖밟혀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짖밟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내가 독일에, 아니 유럽의 독일 신학교에 있었는데, ‘그리도의 십자가’ 라는 책, 존 스토트가 쓴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늘에서 사람들에 의해 그의 아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보시고 그것을 우리의 죄에 대한 댓가로 여기셨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 육체적 고통과 나무에 못박은 것은 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은 피의 희생이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 사실로부터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거기에서 멈춘다면 여러분은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날 복음이 설교되고 개인 전도에서 나누어질 때 내가 지금 얘기한 것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 아래 짖밟히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속량하실 수 있었고, 자신의 신적인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악한 자들의 공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신다는 것이 결코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 축소주의. 우리는 왜 복음이 능력이 없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상할 이유가 없지요…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복음을 뒷전에 남겨두고, 여러분의 그럴듯한 복음 메세지라는 것에 더 이상 능력이 없을 때, 사람을 개종시키려면 요즘 가장 저명하게 사용되는 속임수나 상업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부분, 아니 전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이 말을 하겠습니다. 몇년 전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나의 영적 삶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학문의 세계에서 할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페루의 정글 한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젼이 말했듯이, “나보다 더 위대한 마음을 가진 더 위대한 사람들이 재림에 대한 이 교리에 접근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위대하고 강력한 교리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죠. 이게 나를 아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치 상담하는데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기독교로 들어오는 첫발걸음일 뿐이고, 그 다음에 더 훌륭한 것들로 넘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들을 아는 지식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친구여, 재림의 날에 재림에 대해 여러분은 완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천국의 영원의 영원속에 있으면서 갈보리의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젊은이들, 젊은 설교자들은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을 따라 그 나무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그가 그 나무 위에서 하신 일, 그분이 그 나무 위에서 하셨던 그일을 눈꼽만큼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의 오븐에 희한한 불을 지피는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말을 하는 것을 나는 아주 좋아합니다. 이것을 나는 백만번은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드려 자기 자신의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돌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머물러 있었고 그 노인은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결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막간일 뿐입니다. 수천년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의 손에서 돌칼을 취하여 그의 충만한 진노 아래 그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전하는 그 알량한 복음이 왜 능력이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십시오. 평생동안 무릎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떠나십시오. 십자가를 공부하십시오.
네번째 고발: 중생의 교리에 대한 무지, 중생의 교리에 대한 무지.
친구 여러분, 이것을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나는 여기에 칼빈주의자도 있고 아르미니우스파도 있고 그 중간의 온갖 종류의 동물들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스스로 5점짜리 스펄젼주의자라고 부르듯 이쪽으로 치우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뭔지 말씀드리죠. 중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웨슬리와 레벤힐과 토저와 나머지 모두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그들은 구원은 설교자에 의해 조작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성령의 중생하게 하시는 일에는 이 세상과 우주을 창조하는 것에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사람을 재창조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구세주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설교하는데는 선생들도 있고 설교자들도 있고 해설자들고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데 그들 모두가 다 교회의 건강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캠벨 몰건처럼, 그분이 그 위엄있는 강대상으로 설교하러 올라갈 때 이렇게 스스로 인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깎는 자들 앞의 양같이.” 그는 광대하신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런 의미에서 선포하는 우리 모두는 선지자로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구요? 우리는 항상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아주 메마를 뼈들이 있는 골짜기에 서 있는 에스겔입니다. 그 뼈들은 아주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로 가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예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이 이 살육당한 이들 위에 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이것을 굳게 붙잡는다면, 이 나라에서 전도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행해지고 있는 조작에 더 이상 자신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선포할 것입니다.
중생의 교리. 웨슬리를 보십시오. 잠시동안 그들이 직면했었던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친애하는 휘트필드, 그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철저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았구요, 언약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은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중생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어떤 신조와 맞바꾸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웨슬리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바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영적 삶의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지난 몇년, 몇십년 간의 전도자들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버려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단체에서 언젠가 여러분이 한번 결단을 한적이 있고 그것이 진지했었다는 것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삶에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의 일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직면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그것은 대체로 꼭 일종의 유아세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구의 권위에 의한 고교회의 견진성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죄인의 기도’ 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전쟁을 선포했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그렇습니다, 유아세례가 내 의견에는 종교개혁의 금송아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침례주의자와 복음주의자와 오늘날 그들을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죄인의 기도’가 이 지구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수 있습니까?”
성경으로 같이 가서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누구든 그렇게 전도했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일어서서 나한테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나라로 가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깝다. 자 이제 나를 자신의 마음으로 초대할 사람이 누구냐? 손 든 사람 있구나.’ 하고 말했다고 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삶속에 적어도 한번은 기도를 했고 누군가 그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진지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럼요, 나는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고 나에게 거듭났음의 확신을 주는 강력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 가운데 나는 한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처럼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는 한 전도자가 그런 짓을 하도록 한 사람을 꼬시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너무 불편하게 느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을 위해 기도할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면 내 손을 꽉 쥐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결심주의, 우상적인 결심주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결심의 진지함을 판단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때 그는 그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그 기도를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진지했었는지 한번 봅시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시험하십시오. 자신을 살펴서 여러분이 믿음가운데 있는지 보십시오.”
내 친구들이여, 나는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개종의 증거는 여러분이 개종하던 순간의 진지함에 대한 조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삶에 계속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한 짓을 좀 보십시오. 나무는 열매로 알수 있지 않습니까? 60, 70%의 미국인들이 자기들은 개종했고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몇천명의 아기들을 죽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비윤리성 때문에 전세계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설교자들에게 돌립니다.
5. 다섯번째 고발: 비성경적인 복음으로의 초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미 조금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더 깊숙히 들여다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내 말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더더욱… 나는 이것을 어디서나 보아 왔습니다.
칼빈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파들, 그들중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표면적 초대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서 그 초대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는 듯 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미국인에게 말하는 것이 상상이 됩니까?
“선생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구요? 와, 굉장한데요, 나도 나를 사랑하거든요! 와, 이거 놀랍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세요? 나도 내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이 있는데요.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를 내 삶에 받아들이면 내가 최선의 삶을 지금 갖게 될거네요. 이거 완전 놀라운데요.”
그것은 성경적인 전도가 아닙니다.
그것 대신에 다른 것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시도다. 그는 수천명에게 인자를 품으시며,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는 죄인에게 결코 형벌을 면치 않으실 것이다.
모세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사람이 자신과 비교할 기준이 없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에게 세속적인 마음을 속일 하나님에 대한 사소한 것들만 이야기한다면 그가 진짜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고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완전한 조언의 설교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그에게 이것이 그의 생명을 치르게 할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입문적인 질문을 합니다.
“이봐요, 당신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것은 몇년 전에 나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와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의사가 들어와서 “이봐요, 바바라, 당신은 당신에게 암이 있다라는 것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표면적으로 대합니다. 무게도 없고 엄숙함도 없습니다.
“선생님, 당신에게 끔찍한 병폐가 있고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단지
“선생님,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라고 한다면,
마귀에게 가서 자신이 죄인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예, 그렇죠. 죄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주 잘 하고 있으며… 아니면 보기에 따라 못하고 있다고 할수도 있겠죠. 그러나, 예.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건 압니다.”
문제는 당신이 죄인임을 아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이 복음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너무나 일하고 계셔서 변화가 일어나서, 여러분이 한때 사랑했던 죄가 지금은 미워지고, 한때는 품기를 원했던 죄로부터 지금은 마치 용을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피해 도망가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오는 질문이 “천국에 가기 원하십니까?” 입니다.
이것이 내가 내 아이들을 98%의 복음주의 교회의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보여준 다음에,
좋은 의도를 가진 어떤 사람들이 서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너무 훌륭하지 않니?”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너희 어린이들 중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니?” 라고 말합니다.
“오, 저요.”
“누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니?”
“오, 저요.”
그리고 그들은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기독교 문화, 적어도 교회 문화 속에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잘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15, 16세, 의지력이 생기는 때가 되면 매였던 줄을 끊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죄악가운데 살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너는 크리스챤이야. 너는 단지 크리스챤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뿐이야.
타락하지 마라.” 라고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해서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었다. 너는 심지어 세례식에서도 그를 선언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까 너는 그분에게서 떠나간 것 같구나. 자신을 살펴봐라. 자신을 시험해 보아라. 네가 정말로 개종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구나.” 라고 말하는 대신 말입니다.
그런다음 대학 졸업 후 24, 25세, 또는 30세가 되었을때, 그들은 교회로 돌아와서 그들의 삶을 재헌신하고 미국에서 기독교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그 모조의 기독교적 윤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은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당신은 너무 화를 내는군요.”
내게 그럴 권리가 없습니까? 누군가는 부흥을 위해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초도 바로 세워놓지 못했습니다.
아, 부흥이 와서 우리의 기초를 바로 세워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멀쩡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고 성경이 우리 앞에 있는데도 이런 문제들을 고치지 않아야 합니까?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친구 여러분들,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천국에 갔을때 하나님이 거기 있기를 원하지 않을 뿐입니다. 문제는 천국에 가고 싶은가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을 멈추셨습니까?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소중해졌습니까? 당신은 그분을 갈망하십니까?
그것이 정치적 이론이 뜻하는 모든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분이 더이상 상처받지도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수 있는 특별한 곳으로 가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소중하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할때, 그 다음에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천국에 가기 원하십니까?”
“음, 네.”
“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오시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
자,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그 방법을 사용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방법 때문이 아닙니다. 그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입니다.
“선생님, 당신은 예수님을 갈망하십니까? 당신의 죄를 알겠습니까?”
“오, 그럼요.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회개가 어떤 것인지, 당신의 삶에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성령의 증거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여기 몇구절의 성경을 봅시다. 상한 심령을 보십니까? 당신이 싸워왔던 모든 것들이 붕괴된 것과 지금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과 새로운 열망들과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십니까?”
“예, 그것이 보입니다.”
“선생님, 그것이 회개의 첫 열매들일수 있습니다. 자, 자신을 그리스도께 던지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런 다음 제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복음을 말할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구원받는지 말할 권세가 있고 당신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가르칠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할 권세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을 그 하찮은 일로 데려올때, (예를들어 다음과 같이 – 역자주)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에 초청하셨습니까?”
“예.”
“당신은 그때 진심이었습니까?”
“예.”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심이었고,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초청하면 들어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5분 동안의 상담 후에 교회 밖으로 나갑니다. 그 전도자들은 ‘데니스’ (미국의 체인 레스토랑 이름 – 역자주) 로 먹으러 가고, 그 사람은 길을 잃습니다. 그 사람은 길을 잃습니다.
비성경적인 초청.
만약 그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만약 그들이 그들의 구원에 대해 다시 의심하게 된다면. 다시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면,
“예전의 한 시점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의 삶속에 당신이 기도했고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초청한 시점이 있었나요?”
“예.”
“진심이셨나요?”
“그런거 같은데요.”
“마귀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계속적인 세속성 속에 두려움이 없고 성장이 없는 교회의 견지에서조차 성장이 없이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 제자도의 부족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세속적 그리스도인의 교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세속적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더 많은 생명을 파괴시켰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씨름합니까? 예.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평생을 열매없이 계속적인 상태의 세속성 안에 살면서도 진짜 그리스도인일수 있습니까?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아니면 신약의 언약에 대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히브리서에서 훈련에 관해 말씀하신 모든 것들이 거짓말입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종을 위한 사람들과 일하고 있을때…
나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범적인 복음의 제시를 접할 때 그들은 또 다시 이런 방법론에 빠집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고, 그 다음에 다음 고발 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내가 캐나다에서 설교하고 있었을 때인데…
사실상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거기는 알라스카에서 3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는 작은 교회였고 나는 설교중이었습니다. 내가 강대상에 서자마자 60대나 70대 초반쯤의 산같이 커다란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저 산처럼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건물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두들겨 팰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설교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때, 나는 다 때려치우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슬픈 인간이었습니다. 그냥 복음, 복음,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왔을때 나는 곧장 그에게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슬프고 낙심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엑스레이 사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3주 후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평생 소 목장에서 살았습니다. 거기는 산같은 것들을 지나서 경비행기나 말을 타야지만 갈수 있는 곳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한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고, 누가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어떤 것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나는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설교내용을 이해하셨나요, 복음을요?”
그가 말했습니다. “예.”
자, 그 순간 거의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럼,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시겠습니까?”
그게 그들이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해하셨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이해했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까? 그냥 그게…”
그가 말했습니다.
“애라도 그건 이해했을 겁니다. 누구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기도하는게 전부입니까, 아니면…?”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3주 후에 죽을 겁니다. 나는 내일 떠나야 합니다. 내가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으니, 우리가 여기 머물면서 당신이 개종하거나 죽어서 지옥에 갈 때까지 성경과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나는 구약과 신약의, 속량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루고 있는 모든 구절들을 여러번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을 읽으면서, 잠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그 사람에게 회개에 관해, 믿음에 관해, 확신에 관해 질문하면서, 그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날 저녁 그저 지친채로 아무런 돌파구도 찾을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요한복음 3:16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백만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위대한 구원의 약속중의 하나입니다. 그 본문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결코 잊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산같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무릎 위에 나의 성경을 들고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 아, …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폴 형제님, 내 모든 죄는 다 사라졌습니다. 나는 영원한…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내 말은…”
내가 말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가 말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한번도 안 읽어 보셨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당신들이 시도하는 그런 작은 속임수 대신에 말입니다.
뭐, 식사하러 가신다구요?
뭐, 여러분 생각에 설교란 구경거리고 그 다음엔 호텔로 돌아가신다구요?
아닙니다. 설교 후는 일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영혼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집회 중에 사람들은 상담하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상담을 하려고 앞으로 나옵니다. 5분동안, 그들은 상담을 받고, 빨리 카드를 목사에게 줍니다.
그러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해 주십시오.”
감히 어떻게!
만약 그를 소개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오늘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과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우리의 사랑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의 안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지고 그가 정말로 회개와 믿음과 위대한 구원의 확신과 성령안에서의 기쁨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는 것이 확실해 지도록 이제 우리는 그와 함께 일할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한 짓을 보십시오.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좀 보십시오.
이것은 어떤 종교집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멈추십시오. 멈추십시오!
6. 여섯번째 고발: 교회의 속성에 대한 무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종교 기관만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목표와 부흥의 궁극적 산물은 성경적 교회들을 심는 일일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지역 교회들이 경멸받고 있다는 것에 가장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순회 설교자라서 세계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 모두가 절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30명의 무리의 목사라고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집회중에 당신을 뒷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그분은 순회 설교자들의 왕자가 아니라, 그분은 목사들의 왕자이십니다.
몇년 전 빌 클린턴이 선거 기간에 이런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중요한건 경제다, 바보들아.”
나의 목사님, 제프 노블렛, 우리 교회 장로들 중 한분이시고, 주교육자이며 주설교 목사이신 그분이 어느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요, 셔츠를 잔뜩 만들었으면 좋겠는데요.”
“거기에 뭐라고 쓰시려구요, 제프 형제님?”
“중요한건 교회다, 바보들아.”
예수님은 교회, 아름답고 때묻지 않은 순결한 교회를 위해 그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사역에서 무언가를 위해 생명을 드리고 싶다면, 교회에 드리십시오.
하나의 교회에, 한 몸의 신자들, 지역의 신도들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입니다.
이제 교회에 대해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신도들 중 남은 자라는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남은 자’ 신학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모든 여정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남은 자인 진짜 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남은 자인 신도들, 또는 작은 무리의 신도들이 교회라 불리는 커다란 집단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목사들이 신성모독에 가까운 일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신학자들이나, 순회 교육자들, 설교자들이나, 이런 저런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 밖만큼이나 죄가 많다. 교회 안에는 교회 밖만큼이나 이혼률이 높고, 교회 안에는 교회 밖만큼이나 비윤리성이나 음란물이 많다.”
그런 다음 설교자들은 말합니다.
“예, 교회가 창녀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창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들과 설교자들이 교회가 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름답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때로는 부서질듯 합니다. 때로는 연약합니다. 괴롭힘을 당합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심령이 상해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자신의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적인 설교의 부족함 때문에,
소위 말하는 교회라는 것은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세속적이고 사악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 가운데 있는 모든 염소들 때문에, 양들은 염소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비난을 받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독되어집니다.
이것을 읽어보셨는지… 그냥…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만, 빨리 한번 봅시다.
빨리요. 보여 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을 봅시다. 감사합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뺏고 싶지 않지만, 이 본문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그것을 이해하십시오.
나는 종말론에 관해 논쟁에 빠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신약의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히 8:9 – 역자주)
나는 설교자들이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극소수의 진짜 신도들인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약의 교회에 적용시키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이 “뭔가 새로운 일을 하겠다.” 라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히 8:9,10 – 역자주)
당신이 정말로 개종했다면, 그분이 당신에게 율법이 적힌 돌판을 주기만 한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초자연적으로, 중생의 교리를 통해, 그 율법들을 당신의 마음에 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후반부 – 역자주)
그리고 뭐라고 써있는지 보십시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1,12 – 역자주)
다시 말하지만, 중생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2000년동안 이 새 일을 하고 계십니다.
미국에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잘 가꾸어진 잔디 위에 지어진 정말 멋진 벽돌 건물들이 많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뭐라고 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를 가르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들과 설교자들이 없어질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아는 뛰어난 지식, 특히 그들의 죄가 용서받은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넘어갑시다. 32장을 보십시오, 32장 38절입니다. (렘 – 역자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그분은 “나는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어쩌면, 운이 좋으면, 아, 만약 나와 같이 일할 전도자들을 충분히 구할수 있다면, 어쩌면 이게 제대로 될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해 한 백성, 내가 내 아들에게 줄 한 백성을 이끌어 낼 것이다.”
그리고 또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것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 나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적어도 지금 화내고 있는 것 보다는 더 화내지 마십시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70년대와 80년대와 모든 예수 행진들과 모든 사람들이 울고불고 하면서 “교회는 너무 분열되었다. 교회는 하나가 아니다.” 하는데,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들, 이것을 말해 드리죠. 만약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디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위해 듣지 않으신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의 약속은 습격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촛점을 조금 다시 맞춰드리죠.
나는 여러분들에게 교회는 하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항상 하나였습니다.
당신은 비행기 안에 앉아 있을 때, 아니면 슈퍼마켓에서,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이를 만났을 때, 당신이 침례교도이거나 메노파 교도이거나 이것이든 저것이든 간에 진정한 복음주의자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사람과 몇분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아, 그 사람 신자구나. 살아있는 신자다.” 라는 것을 발견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 당신은 그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당신의 생명도 내어 줄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번은 우리가 페루의 디파르맨또 아르조나스에 있었는데, 그때는 신데로 루미노소의 시대였고 그곳에 한창 내전이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는 검은 방수포를 덮은 곡물 트럭 뒤에 타고 22시간을 달리다가 자정쯤 되어서 그 방수포를 벗겼는데, 그 트럭은 멈추었고 우리는 정글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우리는 그날밤을 정글의 주변에서 보내고, 인해니오 탐블릭이라는 곳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다음날 반쯤 갔을때 우리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래서 나와 나의 친한 친구 파코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만약 여기가 테러리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라면, 군인들조차 거기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한 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나귀를 데리고 밭에서 돌아오고 있는 한 소년이 당나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년의 뒤로 가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마을, 오두막집과 어도비 진흙집들이 있는 조그마한 마을 주변에 다달았습니다.
“파코.” 내가 말했습니다. “알겠지만, 만약 테러리스트들이 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다면 우리는 죽었네.”
“맞아, 하지만 어디라도 가긴 가야지.”
그래서 우리는 내려가서 어둠속에서 술에 취해 있는 한 남자에게로 다가가서 남미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형제들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산간지방에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미어로, “저기 사는 할머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한 늙은 나사렛 여자가 있었고 나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는,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등불을 비추고, 나를 잡아채서는 안으로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녀는 파코도 잡아챘고, 우리를 아래층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집은 일종의 진흙 벼랑을 파서 만든 것이었는데, 우리를 건초와 닭과 물건들이 있는 지하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가 우리를 거기 앉혔고 등불을 켰는데 그때 한 어린 소년이 들어왔고 그녀는 그 아이를 불러다가 “가서 다른 형제들을 데리고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닭고기와 유카와 다른 모든 것들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분열되었고 엉망이 되었으며 죄로 가득하다라는 그 모든 바보같은 소리를 그만 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이라면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은 양들 가운데 있는 한 무리의 염소들과 가라지들입니다.
그리고 극소량의 성경적, 긍휼적 교회 훈련만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양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을 먹고 살고, 양을 파괴하고, 여러분 중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 설때에 비싼 죄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일어서서 악한 사람들을 대면할 충분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들어보십시오.
교회에 관한 미국에서의 평균적 시나리오는, 대체로 교회는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가정이라든지, 장단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설교가 아주 적기 때문에, 교회는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세속적인 잃어버린 사람들이며, 교회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들이 대체로 교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많은 수의 사람들을 잃고 싶어하지 않고 전도와 진정한 개종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악한 자들에게 영합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적은 무리의 진짜 양들은 그 모든 극장의 가운데, 그 모든 세상적인 것 가운데, 그 모든 대충매체 가운데 앉아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고, 단지 누군가 우리에게 성경을 좀 가르쳐 주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그것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냥 사실입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오, 당신은 그냥 화가 났네요.”
친구 여러분들, 내가 이것을 말하는 데 어떤 희생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이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수의 악한 사람들을 모아 유지하는 반면에 그 가운데 있는 소수의 양떼는 굶어 죽고 세속적 다수와 함께 그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약 내 아내가 어느 늦은 밤에 월마트에 있었는데 당신이 남자로서 지나가다가 두 남자가 그녀를 희롱하고 있는 것을, 셋, 넷, 다섯, 열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희롱하며 상처 입히고 있는 것을 보고도 자기 보존의 이름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냥 지나갔다면,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친구. 나는 그 열명을 찾아 다닐뿐 아니라, 당신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녀는 그분에게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당신의 교회, 당신의 명성, 당신의 교파,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 뭐라고 하는지 보십시오. 나는 이 말을 사랑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그러면 그 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이고 거룩함입니다.
내가 만났던 모든 진짜 신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말했고, 현재보다 더 거룩해지고 싶다는,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싶다는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렘 32:39 -역자주)
오, 얼마나 훌륭한 본문인지요. 그러나 아주 빨리 다음을 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렘 32:40 전반부 – 역자주)
자, 우리는 이 부분만 읽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악하고 잃어버려진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이 구절을 듣습니다.
“예, 하나님께서는 나와 영영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켤코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부분을 읽는데는 실패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써있는지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렘 32:40 전체구절 – 역자주)
하나님께서 당신과 영영한 언약을 세우신 증거는,
그분께서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두어서 당신이 그분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분을 떠나고 그분이 당신을 징계하지 않으셔서 당신이 계속해서 그분을 떠나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당신의 마음에 경외함을 두지 않으신 것이고,
당신은 중생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과 아무런 언약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 그것은 사실입니다.
7. 일곱번째 고발,
우리는 이것을 그냥 빨리 지나갈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오해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정의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과 긍휼이 있는 교회적 훈련의 부족.
오늘날 미국의 대부분의 기독교 목사들은 마태복음 18장을 그들의 성경에서 바로 찢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안되지요, 선생님. 전체를 다 취해야지요.
많은 목사들은, 사무실과 서재에서 나올때 신학은 뒷전에 남겨 둡니다.
그들은 대화할 때는 신학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무실에서는 신학적입니다.
그러나 밖으로 나서면, 그들은 세속적 수단에 의해 교회를 운영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장로는 아닙니다, 거기에 그렇게 오래있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자랑하지 않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교회적 훈련을 실행합니다. 이곳은 1000명 정도 되는 아주 큰 교회입니다.
그리고 파문(추방)으로 시작하지 않는 사랑과 긍휼이 있는 교회적 훈련을 통해 지난 몇년동안 30여개의 결혼을 구해냈다고 그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것과 함께 시작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우리는 말합니다.
“오, 나는 너무 사랑이 많아요. 우리는 훈련을 할수 없어요. 우리는 다만… 우리는 다만 너무 사랑이 많아요.”
여러분이 예수님보다 더 사랑이 많으신가요? 그분께서 이것을 명하신 분이십니다.
“예, 이것은 아주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날 교회와 문화 사이에 그다지 많은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문화에 맞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나가서 헐리우드에게 시위하는 것으로 문화를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문화에 맞섭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여러분이 항의 표지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순종함으로 걸으면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할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5 – 역자주).
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마 18:16 – 역자주)
이 사람들이 여러분 편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들어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당신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과잉반응하고 있고 율법적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들어보십시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7 – 역자주)
친구 여러분, 나는 우리가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하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때가 가까워 왔고 지금이 그 일이 일어날 때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비판적이고, 율법적이고, 증오에 가득찬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많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내어놓을 정도로 충분한 사랑이 있는 사람, 한 무리의 장로들, 지도자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이 모든 기독교 서점들을 보십시오.
웨슬리와 휘트필드 등등과, 청교도파와 종교개혁의 시대의 오래된 책들을 보십시오.
그 대부분의 책들은 복음이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을 설교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인가, 어떻게 진정한 개종을 분별하는가, 어떻게 영혼의 의사가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로마(카톨릭)에 참여했습니다.
로마(카톨릭): 아기가 세례를 받습니다. 아기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아기는 로마 카톨릭에 속했습니다. 결코 개종을 다시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을 교회에 유지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세상적 수단들을 창조합니다.
기독교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25분은 아주 웃긴 얘기들이고 5분 후에 그물을 끌어 당기는 그런 30분의 설교 후에, 2, 3분동안 상담을 하고, 그들과 함께 약간의 기도를 합니다.
그들과 약간의 상담을 한 후,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날들을 그들을 훈련하는데 보내고 왜 그들이 자라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나는 일대일 개인 제자도의 가치를 믿는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교회는 그것, 모든 책들과 모든 다른 것들과 함께 우리가 지금 일대일 개인 제자도라고 알고 있는 그것 없이도 천년 또는 더 오랫동안 잘 해 왔습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대일 제자도는 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거대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만큼 뒷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있고,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가 우리가 사람들을 제자화하고 있지 않아서라는 생각에서 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개종이 되지 않고 있어서이고, 당신이 그들을 제자화하든 안 하든 간에 그분의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도 진정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아무도 그들의 영혼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속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소들을 제자화하는데 많은 돈을 쓰면서 그들이 양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염소를 양이 되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염소는 권능의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양이 됩니다.
다음으로 교회적 훈련…
나는 그들이 교회적 훈련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교회적 훈련,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는 장로들과 다른 구성원들의 빈틈없는 돌봄 아래에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내 가족들을 이 교회로 옮겼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만약 그들이 언젠가 개종한다면, 그들은 지금은 다 아주 조그마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개종하거나 또는 믿음의 고백을 한 다음에 빗나간다면, 내 아이들은 교회로 데려와질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원합니다,
만약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말이죠.
여기에 있는 여러분의 일부는, 만약 목사가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당신의 아이에 대해서 기도해 왔는데, 걔들이 개종이 안된것 같아 두렵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굉장히 화를 낼 것입니다.
“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여러분은 너무 화가 나서, 그 목사를 쫓아낼 무리를 모을 것입니다.
8. 여덟번째 고발: 구별됨에 관한 침묵
거룩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의 공백이 있습니다.
나의 친구 여러분, 거룩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거룩해집시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집회를 합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특정해지면, 그때가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는 때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 역자주)
이것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나는 행위를 가르친다고 너무나 자주 비난받아왔습니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들어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중생과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갑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 정말로 개종시키시면, 가르침과 축복과 권고와 훈련을 통해 그분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이 끝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성화가 없이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왜냐구요? 만약 거룩함 가운데 성장이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일하시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를 보십시오.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롬 9:13 – 역자주) 그러나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 그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셨습니다. 야곱은 축복받았습니다. 에서도 축복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에서를 향한 자신의 심판과 진노와 야곱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어떻게 하셨는지 말씀드리죠. 그는 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훈련에 대한 일도 없고, 신령함에 대한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야곱을 그의 삶 속에 거의 매일 죽을만큼 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함으로 데려오시기 위한 사랑의 훈련, 하나님의 바로잡으심입니다.
자 이것에 대해 아주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말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리고 나서 2절로 갑시다.
“너희 몸”. 왜 그는 몸이라고 말합니까? 이 모든 초 영성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나는 예수님께 내 마음을 드렸고, 당신은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글쎄요, 사실을 말하자면,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할수 없다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그럴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3 후반부 – 역자주)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은 여러분의 몸도 가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은, 친구 여러분, 무슨 피를 퍼올리는 근육이 아니고 어느 시인의 상상 속에 있는 환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존재의 가장 본질이며 핵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존재의 본질과 핵심을 가졌는데 당신의 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뭐, 율법적으로요? 아닙니다. 추론을 이끌어 내면서요? 아닙니다.
단지 성경의 계명들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관해서입니까?
나는 청교도들이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청교도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는 그들이 그들 삶의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로 가져 오려는 정직한 시도를 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때문에, 그들이 ‘성경에 따르면 내가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에 관해 800장짜리 책들을 썼기 때문에. 성경에 따르면 무엇을 내 마음 속에 들여오지 말아야 할 것인가? 내 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귀로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며, 무엇이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혀는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는가? 내 삶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예, 나는 여러분을 무서워 죽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제 이부분에서 나는 신중하려고 합니다.
나는 추론을 끌어내거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친구 여러분, 내 아내는 이것에 대해 이런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만약 당신의 옷차림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솟아나오는 당신의 얼굴을 위한 틀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옷차림이 당신의 육신을 위한 틀이라면, 그것은 감각적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워하십니다. 충분히 말했나요?
지금 내가 거룩에 관해 모든 것을 다 말할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이 단지 외적인 표현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를, 외적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일부 젊은 여러분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고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기를 아마도 나보다 더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너무나 근심하게 만들어서 그분이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시게 하는데는 오직 30분의 텔레비젼 밖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99% 순수한 물에 1%의 하수도물은 나는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은 내가 아주 고심하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레벤힐이
“레오나르도 형제님, 젊은 친구, 폴 형제가 아주 고심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나의 친한 친구 하나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책자 하나를 보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소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결코 결코 그것과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은 해도 되지만, 당신은 하면 안된다.” 라고 써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에 반드시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여,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쇼핑센터에 가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보다 더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최고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 중의 하나인 어느 노인이 그의 마지막 연주회에서 연주하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연주를 마쳤을 때, 한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처럼 연주하기 위해서라면 내 일생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나처럼 연주하기 위해서 나는 내 일생을 바쳤다네.”
“나는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는 버려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을 알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 내가 뭔가 말씀드리죠.
모든 사람들이 그 모든 조그만 수련회들과 모든 집회들을 돌아다니면서 모여서 서로 껴안아주고 노래를 부르고 다른 모든 일들을 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시편을 연구하면서 무릎 꿇고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오로지 하나님과만 함께, 그분께만 속해 있을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당신과 한몸인 당신의 아내조차도 당신의 눈을 들여다 보며 당신이 가는 곳에 함께 갈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구별됨에 대한 침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함께 할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사귈수 없습니다. (고후 6:14 – 역자주)
어둠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는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그럴수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럴수 없습니다. (고후 6:15 – 역자주)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고후 6:17 - 역자주) 무엇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까? 불법과 어둠과 사탄적 장치들과 불신자들의 세계와 삶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십시오.
9. 아홉번째 고발.
이것은 가정을 꾸린지 얼마되지 않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습니다.
내 아내는 처음 8년 동안 약간의 뇌종양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가질수 없었는데, 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기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태어났는데, 그 다음에는, 누가 알겠습니까?
심리학과 사회학이 가정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체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목사님들, 지도자들은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교회는, 더 잘 말하자면, 우리의 주일 아침 예배는 너무 겉치레적입니다.
아름다운 예배가 있었고 설교가 잘 되었고 사람들이 감동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는 아닙니다.
증거가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가정, 결혼, 가족입니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면, 내가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때문에, 독실한 아이들을 길러낸 독실한 사람을 찾고, 가서 그 사람에게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무엇을 알아내는지 아십니까?
내가 교회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줌마들이나 하는 허탄한 이야기들과 사회학과 이것 저것과 다른 모든 것들과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 뿐이고, 한 구절의 성경 구절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자신의 가정을 성경말씀대로 꾸려 나가려는 남자와 여자를 찾게 되는데, 그 차이는 압도적입니다.
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때 이렇게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내 옆자리에 사람들이 앉을 것이고, 그들은 “무슨 일 하세요?” 라고 묻습니다.
나는, “아, 나는 남편이예요.” 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 그 밖에 또 무엇을 하세요?” 라고 묻지요.
“아, 나는 아버지예요.”
“그 외에는 무엇을 하세요?
“음, 시간이 남으면 설교 조금 합니다.”
사람이 전 세계를 얻어도 자신의 가정을 잃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을 그냥 이런 식으로 표현하겠습니다.
무엇에 의거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으며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탕으로요?
지금 당장 성경말씀으로 가서 말씀들을 끄집어 내어 어떻게 당신의 가정이 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심리학과, 사회학과, 일시적 기분과, 이 시대의 거짓말들의 포로라는 것을 나는 보증할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권위도 없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말이죠.
창세기 18:19을 봅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그리고 들으십시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아니 2절은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해서 내 가정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말하겠는데, 당신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장이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세우려고 하는 작은 왕국을 위해서 당신의 가정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순종하기를 갈망하십니다. 당신이 순종하기를.
여러분에게 두가지만 예를 드리죠.
이것은 한때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던 때와 같습니다.
“폴 형제, 당신은 전도에 반대하십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나는 성경적인 전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방식에는 반대합니다.”
“당신은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에 반대하십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내가 여러분께 무언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내가 충분치 않을 것이고, 다른 일부에게는 내가 너무 지나칠 것입니다.
나는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기 위해서 이 두가지만 사용하기 원합니다.
주일학교입니다.
당신이 무슨 교파에 속했든 간에, 만일 일종의 조직적인 교파에 속해 있다면, 당신의 교파가 주일학교 교재와, 어떻게 주일학교를 가르칠 것인지 선생들을 가르치는 집회와, 주일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해 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는데 수십억을 쓴다고 보증할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당신의 교파가 얼마나 많은 돈과 얼마나 많은 집회와 노동력을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도록 가르치는데 쓰고 있습니까?
이제 아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두번째 계획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첫번째 계획만 있으십니다.
여러분이 첫번째 계획을 피해가면 두번째 계획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아이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교리문답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사역을 대체한다는 암시를 주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을 산산조각내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단지 그 조그만 경우 하나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주일학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일학교를 위해서. 그러나 이 나라 전체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자녀를 가르칠지를 가르치기 위한 집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이 여러분의 아이를 훈련시킬 권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일학교는 오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권위가 있다해도, 그들은 훈련의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작은 예일 뿐입니다. 중고등부를 봅시다.
“글쎄요, 청소년들은 함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자, 봅시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누가 청소년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누가 그렇게 말했나요?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말씀드리죠. 1960년대의 심리학자들과 세대차이입니다.
청소년들은, 천진난만한 바보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어른스럽게 되고, 파괴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을 버릴수 있도록, 어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청소년들을 함께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모든 부모들도 거기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부모 잃은 청소년들은 어떻게 합니까?”
글쎄요, 그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
부모 잃은 청소년들은 교회의 기독교 청소년들에게로 와서 자기 자신의 집에서 보는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을 봅니다, 부모도 없고, 애들이 애들을 가르치고. 아니면 머리에 무스를 바른 약간 더 나이든 아이가 당신의 애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 잃은 아이가 당신의 교회로 와서 거기서 아이들을 본다면, 그들의 부모와 총체적으로 사랑의 놀라운 관계를 가지는 청소년들을 본다면 어떨까요?
그들은 “와, 이런 것은 전에는 본적이 없다. 그의 아빠 좀 봐라. 그는… 그는 그의 아빠를 사랑하는구나. 이것 좀 봐라… 그러니까 이게 기독교 정신이라는 건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친구 여러분, 나는 의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와서
“폴 형제, 나는 다 다녀봤습니다. 아무도 나의 문제를 진단해 주지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을 24시간 동안 따라다녀 보겠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정각이 될때마다, 만약 한시가 되면 그가 벽돌로 자기 이마를 한번 치고, 두시가 되면 벽돌로 자기 이마를 두번 치고, 열두시가 되면 벽돌로 자기를 열두번 치는 것을 내가 알아냈다고 합시다.
24시간 동안 기록을 하면서 조심스럽고 주의깊게 이것을 관찰한 후에, 나는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저기요, 내가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여, 우리가 그 정도로 측은합니다. 왜 우리 아이들이 그런 일을 하느냐구요? 왜 모든 것이…?
그것은 한 늙은 성도분과 같은데, 그에게 누가 한번은 물어봤습니다.
그는 그의 10대 아들이 젊은 아가씨와 함께 어떤 조용한 장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못 믿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내 아들을 못 믿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그의 아빠도 못 믿습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단둘이 있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이보다 훨씬 더 잃을수 있는 것이 많은 데도요. 나는 넘치는 호르몬이 있는 10대보다 나의 의지력을 더 잘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이 내가 그렇게 할거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까?
우리는 성경적 원칙들을 하나하나 위반합니다.
그리고는 왜 모든 것이 엉망인지 의아해 합니다.
10.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정말 빨리 넘어갑시다.
내가 정말 빨리라고 얘기할때 무슨 비유 같은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디모데전서로 갑시다.
나는 두어달 전에 우리의 –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되는지 더이상 모르겠는데, 공화정, 민주주의, 국가, 나는 더이상 모르겠습니다, 사회주의적 상태 –
그것에 대한 그 모든 끔찍한 일에 대해 듣고 있었고, 거기에 앉아서 듣고 있을때 나는 너무나 마음에 부담이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할수 있습니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 진심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걸고, 불속에라도 뛰어들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돌진하는 코뿔소가 있다면 내가 그 앞으로 뛰어들겠습니다.
다만 내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워싱턴에 가서 그냥 백악관 앞에 서서 그들이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때까지 설교를 하기 원하십니까?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와 교회와 이 모든 것에서만 설교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 나라가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제발 나를 던져주십시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나를 그들에게 던지시옵소서.”
4장 1절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디모데전서 4장1절입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 그는 기본적으로 젊은 디모데에게, 문화 속에 모든 지옥이 풀려나서 모든 것이 그냥 미친듯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짐승과 같이 될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몇달전에 콘래드 움베웨이와 함께 있었고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프리카의 스펄젼이라고 부르는데, 그말이 맞습니다.
만약 그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들으십시오.
그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설교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우리는 더이상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짐승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물론 타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곧 분리될 것이다, 디모데야.”
이제 그가 또 무슨 말을 합니까?
6절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리고 바로 여기 이 본문이 나에게 그냥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예. 세상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모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으십시오.
모든 지옥이 풀려나는 가운데에서, 배교의 가운데에서, 핍박의 가운데에서 여러분의 반응은 이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이것입니다.
계속해서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나가서 무엇인가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연단된, 날선, 검과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아,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이 “네가 따르는” 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지적 성경공부가 결코, 결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계신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배우는 그 교훈을 따를 때까지는 교훈을 제대로 배울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친구 여러분,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교회 일들, 많은 교회 성장에 대한 일들,
모든 문화에 대한 민감함, 성경에 대한 민감함은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것,
이것은 단지 한 떼의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 교회 놀이를 하기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고수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갑옷에 맞추려고 하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갖다 버리십시오.
육신의 팔을 더 신뢰하면 할수록,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적게 보게 될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하나님의 사람, 당신은 부흥을 원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신갑주가 필요합니다.
만약 능력의 검들이,
만약 강력한 붙타는 파이프와 검들과 무기들이 싸움을 위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진다면, 우리는 그러한 무기들을 잘 쓰고 잘 다루며, 잘 연단된 인격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싸울수 있는 잘 조정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함을 위해 우리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젊은이여, 자신이 기도하도록 훈련하십시오.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러번 계속해서 반복해서 체계적으로 읽는 것을 훈련하십시오.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여러분이 교제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언제 잠자리에 들고 언제 일어날지에 대해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이것은 전쟁입니다.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절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말할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예외가 아니라면, 여러분이 태어난 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30세 미만, 아니 40세 미만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한번도 일할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훈련이 부족할 것입니다.
당신은 한번도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었고,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이 뼈가 빠지도록 일하게 만든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성취했고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사역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며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할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늙은 사람이 되었을때, 당신은 깨어져 있겠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강하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령함을 위해서 당신을 훈련하십시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지금 가장 좋은 삶을 사는게 무슨 소용입니까?
영원이 있는데요. 여러분이 영광의 하나님 앞의 화강석 홀에 서는 날, 왕들과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나누어지고 구분되고 따로 모아져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던져지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영원한 영광으로 초대됩니다.
올림픽 참가자들이 얼마나 위엄이 있습니까만, 잠시동안일 뿐입니다.
그들은 네살이나 다섯살때부터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22살이 될때까지 훈련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걸어놀을 메달을 따려고 9초동안의 경기를 하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당신은 영원한 것들을 위해서 똑같은 것을 줄수 없습니까?
일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육신에 큰 제약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능력에 제약이 너무나 커서 그들은 한가지에만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역이었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이것은 모든 수용의 가치가 있는 믿을만한 진술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10절 – 역자주)
이것은 소망없이 단지 산산조각나기 위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것에 쓸데없이 우리의 생명을 주는 무슨 순교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우리를 명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거기에 두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힘을.
오, 이 삶은 수증기입니다. 나는 47살인데, 엇그제는 21살이었습니다.
그것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이것은 수증기입니까?
여러분이 힘이 있을 동안에 설교하십시오.
나는 그분의 섭리 안에서 젊을때 내 삶을 안데스 산지와 페루의 정글에서 내가 지금은 더이상 할 힘이 없는 일을 하면서 보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아직 젊을때, 아직 당신에게 힘이 있을때, 당신의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모든 바보같은 비디오 게임들을 여러분의 발로 밟아 부숴 버리십시오. 텔레비젼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십시오.
당신은 그런 것들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왕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의 아무것도 당신을 만족시킬수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1절 – 역자주)
자, 여기에는 아주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만일 나무 식탁에 내 아이가 한 컵의 물을 쏟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웅덩이로 보일 정도로 물이 식탁에 좀 쌓였다고 합시다.
당신은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식탁에 물이 엎질러졌네.” 그것은 모두에게 명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와서 수건을 가지고 그 물 웅덩이 위에 덮었다가 그것을 집어 올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물이 없네, 어디 있지?”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 물은 수건에 흡수되었습니다.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신령함과 연단의 일들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간청합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날들을 속세적 교인들의 콧물이나 닦으면서 보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공부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쭉 들이키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너무나 흡수되어서 사람들이 “그가 어디에 있지? 그는 동네에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아주 품위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어디에 있지?” 라고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이런 일들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사역자입니다.
우리에게는 별개의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것을 향해 멀리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들에 흡수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입을 열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는 제프 노블렛이 주 설교 목사입니다.
그는 언제나 공부에 전념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갔을때 나는 그에게 말했고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무엇을 물어볼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이거 하나만 해 주십시오. 노블렛 형제로부터 우리가 할수 있는 한 최대한 짐을 덜어줍시다. 그래서 그가 그 서재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둡시다.
나는 여기에 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신이 승인받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공부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강단에 나와서 바로잡고 꾸짖고 위대한 약속들과 경고들을 주면서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주십시오.”
목사님, 제발 당신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16절 – 역자주)
나는… 일단 이것을 끝냅시다.
이 구절은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과 설교자들이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나는 나 자신을 자세히 살펴서 나 자신과 나에게 듣는 자들을 구원할 필요가 있어.’ 라고 여긴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당신이 정말로 그분을 알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당신 자신의 삶을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이 언제입니까?
보십시오, 나의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내가 나 자신이 개종했는지를 연구할때,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논할때, 내가 20년간의 나의 그리스도와의 순례를 돌아볼때, 나는 커다란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커다란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이라도 내가 믿음에서 떠나가서 멀리 가고, 이단과 세상적인 방향으로 계속해서 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분을 결코 알지 못했었고 그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이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일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여러분에게 놀랍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 세상에, 나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건 모두가 다 …” 라고 말합니다.
천로역정을 읽어보십시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축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