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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눈 백 개의 혀
김동원 시인·평론가
프롤로그– 엑시터시ecstasy
사유의 폭과 작품의 깊이 이 두 가지는, 류인서 시집 전반을 커버한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녀의 시는 ‘들킴 혹은, 비밀 사이’에서 기우뚱한다. 파편화된 현실에 언어의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하던 초기 모더니티를 관통해, 탈 중심, 다양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포스터 모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최근에 들어선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새로운 감각 이미지를 통해, 독자적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 사물에 새로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존 서정을 탈피한 시안이 돋보인다. 그녀의 시는 행과 연 사이, 제3의 의미 공간을 확보한다. 섬세한 울림과 떨림은 묘사를 먹고 은유를 낳았다. 그녀는 줄곧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시의 허기”를 고백한다. 현실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 변주하는 힘이 강하다. 이런 작용과 반작용의 시적 긴장은, 그녀의 특징이자 확장력이다. 때론 비현실적 상상력으로 비판을 받지만, 그녀의 환상성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임을 상기시킨다.
시적 어투는 매력적이다. 허공 어딘가에 홀린 어조이다. 대상의 욕망을 그대로 흘린다. 언어의 결은 심플하고 모호하다. 검은 무늬와 흰 무늬의 심리적 직조쯤에, 그녀의 시가 머문다. 하여, 류인서의 1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 창비)는 “유한의 육체와 무한의 시간에 살금살금 실금이 가게 하는 불화(不和)의 거울을 오래 응시”(송찬호)한 시로 읽힌다. 2시집『여우』(2009, 문학동네)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장석주)으로 집약된다. 3시집『신호대기』(2013, 문학과지성사)는 사물에 달라붙은 극도로 예민한 시어의 감촉을 느끼게 한다. 이쪽과 저쪽 모두 열려있는 류인서만의 독창적 기교이다. 4시집『놀이터』(2019, 문학과지성사)는 “몰락한 나라의 서책 혹은 은밀한 종교의 예언서를 참조해 현재의 길을 찾는 여정에 비유”(김수이)된다.
그녀 시작詩作 공정의 매커니즘은 복잡계이다. 환유를 통해 정돈되지 않은 불확정성의 현실을 훔쳐낸다. 이런 시의 제작 방식은 집요한 사물의 근접성에서 기인한다. ‘나와 사물의 틈’, ‘나와 사회의 틈’, ‘나와 세계의 틈’ 사이에서, 시를 잡는다. 그녀의 어투는 견자見者의 시선을 확보한다. 사물 속에 내재한 환상을 묘한 이야기 구조로 풀어낸다. 치밀한 관찰과 묘사는 그녀 시의 안테나이다. 물론 근작들은 즉흥적 발상이 돌올하다. 시는 무법無法의 예술이다. 사물에 달라붙은 시감詩感을 즉발성으로 인식할 때 빛난다. “탁 봤을 때 들어오는 것이 시”라고 류인서는 갈파한다. 그녀 시는 무방비 상태이다. 메타포를 무자비하게 먹어 치운다. 하여, 풍경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낳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그녀 시는 팽팽하다. 시어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 말의 점층과 반복의 리듬은 역동적이다. 구상은 추상으로 추상은 구체로 뒤집는다. 하여, 류인서의 말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뒤틀린다. 종잡을 수 없는 충동성과 무방향성은 ‘풍경 인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를 의미하며, 압축과 생략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난다. 하여, 혹자는 그녀의 시를 엑시터시라고 부른다. 치열한 자기검열과 침묵의 방식을 통해, 무의식의 시관詩觀을 누설한 셈이다.
얼룩 혹은, 욕망
어떤 시는 첫 줄이 먼저 오고 어떤 시는 과정을 지우려는 듯 마지막 문장이 먼저 온다. 어떤 언어들은 지독한 물질성으로 내 몸에 덩이째 달라붙어 꾸역꾸역 냄새를 피우며 얼룩을 남기지만 끝내 시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어떤 언어는 지독히도 의미의 바깥에 있으려하는 데, 이런 의미의 망실과 잉여 사이에 시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언어는 사물과 부딪치면서 휘어지고 떨어지고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시는 나도 모르는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의도치 않았는데 아주 멀리 나아가기도 하고 주변을 맴돌며 살을 파고들거나 다른 몸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류인서의 시작 노트 중에서
류인서는 참다운 시격詩格에 이르기 위해서 아름다운 욕망을 꿈꾼다. 주체할 수 없이 파멸해 간 ‘나’의 흔적을 시로 지운다. 얼룩과 욕망은 언어의 페이소스이다. 불가능과 가능의 벽을 잇는 작업이다. 한편 그녀는, ‘욕망이란 전차를 결단코 멈출 수 없는 것’을 안다. 도전과 응전만이 시의 첫 행임을 안다. 류인서는 ‘욕망함으로써 시’의 광맥을 캔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아름다운 욕망’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극도의 절제와 끝없는 고뇌만이 시인의 길이다. 시작詩作 과정은 드러난 욕망의 무늬다. 류인서의「시월」을 읽으면 어떻게 시어를 이렇게도 오랫동안 견고하게 잘 매만졌을까 절로 감탄한다. 시인으로써의 다부진 초심의 각오와 분출을 시 행간 속에 숨김없이 드러낸다. 1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 창비)에 수록된 이 작품은, 모래 속 진주알에 비견된다.
늑골 가운데에다 나 활 하나 숨겨두고 있네
심장에서 파낸 석촉의 화살
팽팽한 시위에 메워 이제 당기려 하네
하늘은 오래 명치끝에 매달려
이슬보다 더 고요 하네
나의 과녁은
별이나 꽃처럼 눈부신 것이 아니네
빛살만 골라 밟던 바람이나
그늘 비껴가는 어둠 또한 겨누지 않겠네
통증은 먼저 명치를 차고 나가
여문 하늘부터 날카로이 깨뜨릴 것이네
서둘러야겠네, 이미
열매처럼 무거워져 졸고 있는 저 길들을
앞질러야 하네
시간의 완강한 눈꺼풀 찢어 젖히고
나 끝내 선명한 피의 점안식 치르려 하네
목숨 떨리는 이 반역의 여진
감각의 활줄 위에서 깊이 눈부시리
― 류인서, 「시월」 전문
「시월」은 우선, 시어를 온전히 장악하였다. 마치 시어들이 시인의 명령에 언제라도 출동할 태세를 완비한 것처럼, 팽팽한 긴장미가 흐른다. 시는 근본적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초기 류인서의 시는 존재자인 나와 존재인 시와의 동일성을 추구한다. 이런 차이와 반복은 작품의 일정한 시적 원리와 미적 질서를 띠게 된다.「시월」은 내면적 조바심이 오히려 음악성을 만들어낸 특이한 작품이다. “하늘이 명치끝에 매달려” 있는 시적 이미지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추상적 욕망을 구체적 감각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늑골 가운데에다 활 하나 숨겨둔 / 심장에서 파낸 석촉의 화살”이 묻혀 있는「시월」은, 시심의 은유다. 시인에게 시어는 그 시의 전부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이다. 류인서의 과녁은 “별이나 꽃처럼 눈부신 것이” 아니다. “빛살만 골라 밟던 바람이나 / 그늘 비껴가는 어둠 또한 겨누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대체, 그녀가 겨누는 화살의 욕망은 무엇일까. “통증은 먼저 명치를 차고 나가 / 여문 하늘부터 날카로이 깨뜨릴 것이네 / 서둘러야겠네, 이미 / 열매처럼 무거워져 졸고 있는 저 길들을 / 앞질러야 하네 / 시간의 완강한 눈꺼풀 찢어 젖히고 / 나 끝내 선명한 피의 점안식 치르려 하네” 3연의 내포된 시인의 의식은 결연하다. 시어와 시어 사이의 격格이 일점일획의 허점 없이 완결성에 귀착된다. 현대시사에 류인서의 ‘시’를 확고히 뿌리내리기 위해 “피의 점안식”을 치르겠다고 천명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확고한 의지인가. 욕망을 꿈꾸는 시인은 아름답다. 하여, 예술가의 욕망은 무죄다. 단지 욕망이 불쾌한 이유는 시어의 과잉 범람에 기인한다. 개개인의 이기심에서 뻗어 나온 현대의 젊은 시편들은, 불필요한 시적 언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혹독한 자기검열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욕망만이 살아남는다. 류인서의「시월」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폭풍 같은 시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사색하고 관조한 견인주의자의 시다. 내면의 오솔길을 한 땀 한 땀 자신의 색실로 수놓은 참으로 견고한 시다. “목숨 떨리는 이 반역의 여진 / 감각의 활줄 위에서 깊이 눈부”실 것을 예감한 류인서는, 찬란한 욕망의 부활을 꿈꾼다.
그로테스크grotesque
류인서는 4년 주기로 자신의 시 작업을 정리해 왔다. 시집이 모두 봄에 출간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우연일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농담 같은 지적이지만 시집의 발간 주기나 시기 속에 시인 류인서의 심미적 욕망이 내장된 듯도 하다. 현실 세계의 정서적 재현에 기초한 서정성과는 다른 류인서 시의 경향을 감안하면, 시인에게 시작(詩作)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잘 갖추어진 심미(審美)의 세계로서 사유되고 있는 듯하다. 일상의 현실, 여기에서 기인한 생활 감정이나 내면을 담아내기보다는 이러한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 ‘포즈로서의 시’, 이를테면 ‘월경(越境)의 형식’이라고 할 만한 방식으로서 그녀의 시는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사이[間]와 바람[風/願]의 시학」(김문주 문학평론가) 중에서
류인서의「눈」(3시집『신호대기』2013, 문학과지성사)은 그로테스크하다. “먹어치운다”는 놀라운 공감각은 직관의 시학이다. 폭설로 인한 자연의 무자비함을 비유한다.「눈」은 시각의 미각화이다. 허공을, 땅을, 숲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흰 것들’은 순수를 가장한 무자비한 폭력이다. 완벽한 공포의 은유다. 그때까지 그녀가 경험한 ‘눈雪’의 상징과 연결된 내면의 풍경 얼개이다. 흰색은 원초적 본능의 색이다. 부활의 색이자 빛의 광기이다. 그녀의「눈」은 반복을 통한 점층의 방식으로 시상의 전개를 펼친다. 눈과 사물과의 갈등은 첨예하다. ‘먹어치운다’ 는, 죽음의 또 다른 메타포이다. 류인서는 아무데나 시어를 툭 던져놓는 방식으로 행을 치고 나간다. 그녀는 이런 시법을 “어휘의 확장 공사”라고 부른다. 마치, 언어가 새로운 언어를 먹어치우는 방식이다.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가등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 치운다
저의 시작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 류인서, 「눈」 전문
그래선지「눈」을 읽으면 탐미적이다. “가등 아래 남자를 먹어치”우는 흰 눈을 상상하면 그로테스크하다. 강렬하면서도 대담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한 야수파적인, 혹은 고야(스페인 1746~1828)적인 대담한 시적 발상이다. 하여 “눈이 온다 / 와서 / 먹어치”운다는, 도발적이자 본능적이며 폭력적이다. 수직의 폭설과 풍경의 수평은 기막힌 리듬을 만든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우는「눈」은, 이윽고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반복과 점층을 통해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유와 리듬은 사물과 심리 간의 떨림과 울림으로 갈마든다. 동사 ‘먹어치운다’의 환유는, 드디어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우는 지구환경 파괴의 주범이 된다. 이런 류인서 만의 놀라운 메타포는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우고,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 치”우고, 끝내 시의 “소화불량”으로 환원된다. 현실을 물고 놓지 않는 강력한 주술적 시가「눈」이다. 설명적 이미지를 버리고, 생략과 압축만으로 놀라운 비약에 닿는다. 하여, 그녀에게「눈」은 현실의 폭력성을 고발한 반어적 시법인 셈이다. 물론, “또 하나, 이 시의 시작 방법은 동명의 작품을 쓴 김수영의 「눈」(그리고 「풀」)에서 시도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김수영의 작품을 배후에 두고 창작된 시이다. 류인서는 다른 작품을 빈번하게 자신의 시편 속에 기입(記入)한다. 물론 그러한 작업은 패러디(parody)나 패스티쉬(pastiche)와는 상이한, 구태여 비교하자면 존경과 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오마주(hommage)에 가까운데, 이는 류인서의 시학이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현실과는 다소 거리를 둔 심미적 세계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김문주 문학평론가,「사이[間]와 바람[風/願] 중에서)
독법讀法
방빌은 카몽이스가 촛불이 꺼지자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어 시 쓰기를 계속한다고 적고 있다.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다니! 그런 부드럽고 섬세한 빛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곧 모든 시시한 빛 ‘저 너머’에 있는 빛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촛불은 있었다. 그것은 밤샘을 시작했었고, 그러는 동안 시인이 시작詩作을 시작했다. 촛불은 영감 받은 시인과 함께, 영감을 주는 삶, 공동의 삶을 영위했다. 촛불 아래에서, 영감의 불 속에서, 시인은 한 행 한 행,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의 불타는 삶을 펼쳤다. 책상 위의 대상들에겐 모두 자기만의 희미한 후광이 있었다.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새하얀 꼬리를 온통 문갑에 대고 있었다. - 가스똥 바슐라르, 2017년『촛불』, 마음의 숲 / 박연준 산문『쓰는 기분』 p44~45에서 발췌
독법讀法은 세계를 읽는 한 방법이다. 대상의 변화를 뚫어 본다는 뜻이다. 언어는 알몸의 행위예술이다. 순식간에, 불현듯, 그리고 느닷없이 시를 향해 진격해 온다. 하여, 시인은 항상「신호대기」(3시집『신호대기』2013, 문학과지성사)자이다. 시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 끊임없이 영감靈感의 파란 신호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특정한 사물에 접신된 자만이 신령神靈을 해방시킨다. 그것은 나로부터 나를 버릴 때만 가능태를 이룬다. 운명을 거부하는 자만이「신호대기」앞에서 정시正視할 수 있다. 아름다움과 두려움의 경계선에 서길 류인서는 요구한다.
어제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 오늘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
다중국적자처럼 우리는
달아나도 좋겠지 역주기로 오는 계절과
사수처럼 매달린 제3의 창문에게서
얼굴을 공유하는 화장술에게서
출구를 감추는 불빛들,
나는 무릎에서 흘러내린
기다림의 문턱값을 밟고 서있다
바람이 열어 보이는 틈바구니에서
마른 유칼리 나뭇잎의 고독한 살냄새가 난다
동쪽에서 꺾은 가지를 서쪽 창에서 피울 수 있을까
화분을 안은 여자의 아이가 손안경을 만들어 다른 곳을 볼 때
그림자들이 살아났다
밀도가 다른 두 공기덩이가 길 가운데서 만난다 전선이 통과한다
우리 몸에 시간이라는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 류인서, 「신호대기」 전문
시는 칼날 위에 서는 작업이다. 예기치 않은 충돌과 갈등에 질문하는 방식이다. 지금 이순간 현재를 뚫는 것이 시다. 어쩌면「신호대기」는 생사生死의 횡단보도 앞에서 “동쪽에서 꺾은 가지를 서쪽 창에서 피울 수 있”는 가를 묻는, 우문愚問인지도 모른다. 하여 그녀의 시는“유한의 육체와 무한의 시간에 살금살금 실금이 가게 하는 불화(不和)의 거울을 오래 응시”(송찬호)하기도 하며,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장석주)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류인서는 사물에 달라붙어 있는 극도로 예민한 기호를 상상력과 이미지로 교직해 자유자재로 만진다. 풍경의 이쪽과 저쪽을 통과하는, 제3의 공간을 확보해 심미의 세계를 연다.「신호대기」는 현실의 욕망과세계의 비밀한 틈을, 시의경계 지대로 설정한 셈이다.
언제나 일상은 “어제의 벽에 등을 대고 서있다”가 “오늘의 벽”에 갇힌다. 반복되는 삶의 권태는 시의 주적이다. 그 지점에서 그녀는 고뇌한다. “역주기로 오는 계절”을 통과해 “바람이 열어 보이는 틈바구니” 속에서 “고독한 살냄새”를 맡는다. ‘제3의 공간’은 그녀 시의 효용과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승화시키는 장소다.「신호대기」는 우리 시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배경 이미지로 선택한다. “밀도가 다른 두 공기덩이가 길 가운데서 만”나 통과할 때, “우리 몸에 시간이라는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사유의 밑바탕에는, 좌우 투쟁과 같은 시대적 담론이 깔려있다. 하여, 행간 속에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신호대기」는 드라이하다. 그런 점이 오히려 전혀 ‘낯선 방향’으로 시어들을 몰고 다닌다. 행과 연의 충돌, 예기치 않은 시어의 돌발 출현, 이미지의 무의미성, 모호한 시적 상황은 충동적이다. 그녀는 이런 카오스의 상태를 ‘풍경 인식’이라고 부른다. 풍경을 날 것으로 보지 않고, 시인의 경험, 현실의 틈에 밀어 넣어, 상상력과 버무려 시가 튀어나오게 하는 방식이다. 즉, 설명적 이미지를 버리고, 생략과 압축으로 추상화한다.「신호대기」는 알고 보면, 사회의 음습한 틈을 찔러, 더 밝은 세상을 훔쳐본 “출구를 감추는 불빛들,”의 비밀한 창窓이다.
여우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가장 구체적인 ‘몸’의 징후와 얼룩을 통해 어떤 한계지점을 통과해온 자신의 아득한 존재론을 펼쳐간다. 또한 감각의 선명한 재구(再構)를 통해 대상의 외관과 속성을 유추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열망과 통증을 환기하는 방식을 현저하게 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요한 응시와 묘사 그리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삶의 복합적 비의(秘義)가 바로 류인서 시학의 동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감각의 묵시록」해설 중에서
류인서의「여우」는 색계와 무색계 사이쯤이다. 남자는 여우를 진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설 속에 빼꼼히 눈을 내민 그 백여우는, 치명적 유혹이다. 근대 이전까지 여우 꼬리는 시니컬한 음화陰畫였다. 순수한 상상의 예술 재료였다. 현대의 ‘그 꼬리’는, 사뭇 방법론적 질문을 던진다. 하여 여우는, 바람이었다가, 하붓 하붓 떨어지는 살구꽃이었다가, 혹은, 날카로운 쇠소리였다가, 그 날렵한 몸을 허공 속에서 뒤집어 여자가 된다.류인서의「여우」는, 붉은 물이 빠진 슬픈 꼬리 이야기다.더 이상 등을 할퀼 손톱이 없는 여우 이야기다. 그 옛날 “예쁜” 여우 “꼬리 하나”가 “장식으로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그러다 홀연 ‘시’로 둔갑한 어떤 여우의 서늘한 잔상이다.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자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 고개 중턱에 닿아
더 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별 얼음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 류인서, 「여우」 전문
알레고리의 시「여우」(2시집『여우』(2009, 문학동네)는 우화이다. 아홉 개의 꼬리 달린 구미호九尾狐의 변신 이야기다.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는 요물에게 홀린 총각은, 뼈 가죽만 남는다. 밤마다 요력妖力을 부려 절정에 오른 여우는,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닌다. 슬몃, 남자 꼭대기에 올라앉아 간을 빼먹는 요물이 백여우다. 천년마다 한 번씩 여자로 둔갑한 이 요물은, 백 년 동안 남자를 마음대로 후린다. 여우 구슬을 삼켜 천 길 속 사랑을 훔쳐낸다. 요물의 첫 입술을 피하면, 오뉴월 급살을 맞는다. 지옥의 불길 속에 끌고 들어가는, 삼천 년 묵은 흑여우도 있다. 절세미인으로 둔갑해, 한 나라의 간을 모조리 빼먹고 망하게 한다. 특히 생간을 먹은 여우는 “꽃”으로 환생하기도 한다. 밤마다 홍등가 붉은 야화夜花로 핀다. 더이상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야, 불여우는 둔갑을 멈춘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로 몰래 감춘다.
허구
시인들이 사라진 후 / 오랫동안, 오랫동안, 오랫동안 /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 흐르고 있네 /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기분풀이로 그 노래를 부르지 / 작가의 이름도 모르면서 / 누구를 위해 그들의 마음이 두근거렸는지 알지도 못한 채 / 때로 사람들은 구절이나 표현을 바꿔 부르지 / 가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 그들은 라 라 라 라 라 라 흥얼거리네 / 라 라 라 라 라 라
시인들이 사라진 후 / 오랫동안, 오랫동안, 오랫동안 /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 흐르고 있네 / 어느 날, 어쩌면 내가 정말 죽은 후라도 / 사람들은 노래를 하리니 / 슬픔을 달래주는 / 혹 어떤 행복한 운명에 대한 그 곡조가 / 구걸하는 노인을 살아가게 하거나 / 혹은 아이를 잠들게 할까? / 봄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그 노래는 / 물가에 울려 퍼질까
시인들이 사라진 후 / 오랫동안, 오랫동안, 오랫동안 /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 흐르고 있네 / 그들의 섬세한 혼과 노래들은 /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슬프게도 하네 / 소년과 소녀들을 / 부르조아와 예술가들을 / 혹은 방랑자들을… ―「시인의 혼」, 1951년 트레네 작사 작곡 샹송 가사
류인서의 「장미」(4시집『놀이터』, 2019, 문학과지성사)의 노래는 시인들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거리에 흐르고 있을까. 오랫동안, 오랫동안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까. 시의 빨간 혀로 “허구”의모서리를 핥을 수 있을까. 그녀의 어떤 혀는 낯선 이미지를 노래의 형식에 가둔다. “이것은 조금씩 내가 말을 삼킨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수천 년 돌고 돌아 핀 장미의“입에는 혀가 없다”. 하여, 그녀는 은유를 통해 장미의 “가시”를 뽑는다.「장미」는모순된 자아와 현실의 충돌이자, 새롭게 욕망한 시의 허구를 함의한다. “방패처럼 목구멍을 막고 있는 / 꿈틀대는 붉은 살덩이”이야 말로 류인서를 틀어막고 있는 현실의 억압 기제이며, 기의로 기표를 걷어차는 방식이다. 하여, 그녀의 “질문의 방은 어항보다 깊”다.
그의 입에는 혀가 없다.
내가 조금씩 그것을 먹어버렸다.
이것은 조금씩 내가 말을 삼킨 것과는 별개의 일.
가시 이빨 저쪽, 방패처럼 목구멍을 막고 있는
꿈틀대는 붉은 살덩이는 그럼 무엇이냐.
질문의 방은 어항보다 깊어서
그는 지금도 빈 어항에다 허기를 봉인하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혀가 없어진 줄 모르는 그는
여전히 혀로 사랑하고 혀로 어르고 혀로 흘금댄다.
하품 가득한 그 입속에다
오늘 밤 누가 홍등을 켜두었구나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아도 어항의 불을 꺼버려야 할 때가 있다.
개폐기를 내리면서 나는
세상의 온 밤들이 녹아 사라지는 허구의 순간을 생각한다.
― 류인서, 「장미」 전문
“왜 장미인가?”라고 묻는 것은, “왜 시인가?”라는 질문보다 한층 은유적이다. 그녀의 ‘혀’는 시의 또 다른 메타포다. 그녀는 “빈 어항에다 허기를 봉인하려”고 장미를 불러낸 셈이다. 그 붉은 “혀가 없어진 줄 모르는” 시는, “여전히 혀로 사랑하고 혀로 어르고 혀로 흘금댄다.” 이런 말의 모순된 매혹은 나른한 류인서의 시적 포즈다. 한때 김춘수에게 경도된 그녀의「장미」는 존재와 언어의 질문을 통해 의미를 지우는 시법을 구사한다. 타성과 인습에 젖은 언어 습관을, 의심과 낯섬의 방식으로 뒤집는다. 행과 행을 은유로 충돌시켜 ‘무의미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이런 시적 불안장애는, 젊은 날 그녀의 신경증의 한 방증인지도 모른다. “하품 가득한 그 입속에다” 장미의 “홍등”을 켠 시인이 있었던가. 모호성의 극치다. 장미의 꽃빛을 “필라멘트”로 비유한 것은 비약적이다. 꽃의 오므린 순간을 “불을 꺼버려야 할 때”로 인식한 점은 클리세를 벗은 멋진 표현이다. 아마도 류인서는「장미」의 “개폐기를 내리면서” 시적 “허구”야말로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간”임을 자각한 것이리라.
에필로그 ― 이후
류인서가 빚어내는 상상적인 이미지와 알레고리들은 구술하는 ‘나’의 이력이 생활 세계의 이력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곳에 살지만 온전히 이곳에 속해 있지 않은 ‘나’는 제도권의 언어와 낯선 이방인의 언어를 섞어서 구사한다. ‘나’는 유창하지만 서툴고, 억압되어 있지만 자유로우며, 현실의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지만 어떤 소속이나 수식어로도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생계와 일상에 골몰하는 생활인인 동시에, 멸망한 나라의 난민/유민이자 이름 없는 종교의 신도로 살아간다. ―김수이 문학평론가 『놀이터』 해설 중에서
류인서의 4시집 『놀이터』(2019, 문학과지성사)는 들뢰즈의 말처럼 끊임없는 ‘주름의 현상학’으로 명명된다. “그것은 접힘과 펼침 그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일자이자, 잠재적 역능이며 변곡점이다. 시인의 과업이 일그러진 조가비에서 살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일, 딴은 물의 소용돌이를 파악하는 일이라면 바로크의 시는 이음(Fügung)과 승화를 기반으로 한다. 류인서는 특유의 언어와 미감을 빗/엇의 기억과 현상에서 찾고 있다. 그로 인해 세계의 실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새로움(novelty)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녀의 시선과 안점(眼點․內點)은거울의 얼룩(「시계」)에 있다. 틈, 아니 트임에 있다. 하여닦을수록 커지는 얼룩(「희생」)은 하나의 통점이자빛의 뒷모습(「11월」)이다. 류인서의 시는몇 개의 현재(「봄날의 가면 장수」)로 둘러 싸여 있어 결코 단선적이지가 않다.”(김상환)
이렇듯 앞에서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한 류인서의 시편들은, 타자의 표적이 적확하다. 사물의 경계와 내밀한 비밀의 지점을 감각적으로 찔러넣고 있다. 시작에 있어 모티브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가령「침묵 수도원」(3시집『신호대기』2013, 문학과지성사)은 영화「위대한 침묵」의 오마쥬이다. 해발 1,300m 알프스 카르투지오 수도원 수도사들의 일상을 찍은 이 영화는,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인지를 역설로 보여준다. 인간의 수다한 말과 모순을 어떻게 너머야 하는지를 예리하게 짚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소리가 보이는 것처럼, 시「침묵 수도원」은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한 …… 그런 소리들”의 세계로 안내한다.「비행의 기원」은 추상적이지만 기발한 착상이 놀랍다. 박쥐 날개의 접힌 이미지에서 “계단”의 층계를 떠올린 시적 착상은 심미적이다. 이런 엉뚱한 상상력의 파편은 불연속의 연속적 무늬로 읽힌다. 또한 “계단에서 날개로, 그리고 박쥐와 해안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이 시의 일련의 풍경은 그것이 밤의 꿈임을 재삼 생각케 한다. 계단의 끝에서, 비행할 수 있는 창공이 아닌 수평선을, 그리고 밀려드는 해안을 펼치는 이 상상력의 개성은, 본질적으로 심미성의 소산이다. 그러한 점에서 “비막-날개 끝에서 자라는 별의 발톱”은 이 시의 의미를 절묘하게 함축한 생생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물질성, 이를테면 “계단을 날개의∼”, 이 언술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ㄱ ㄷ ㄴ ㄹ ㄱ∼’ 등의 음성적 자질도 이 시의 완미한 심미성에 기여하는 생생한 물질적 요소이다. 언어의 육체성에 대한 관심은 류인서의 시학, 그 상상력과 심미성의 핵심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김문주 문학평론가,「사이[間]와 바람[風/願]의 시학」중에서).
하여, 류인서의 몸은 시의 통관通貫이다. 타자화된 주체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사물화된 은유다. 중첩된 욕망을 분출하는 힘이다. 세계의 유무有無의 연접인 동시에 단절이다. 감각의 불완전성이자 가능태의 접물接物이다. 끝으로「사물의 말」을 감상하면서 막을 내린다.
나는 빛을 모으는 오목거울이지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 사이에 핀 양귀비꽃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떨며 흐르는 공기
회오리를 감춘 강물이지
조용히 밤의 표면을 미끄러져가는 유령들의 범선
나비걸음으로 다가오는 폭풍우지
땅의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를 새
태양을 애무하는 파도의 젖가슴*이지
춤추는 방랑자지, 나는
멀리 있는 별보다 더 멀리 있는 별*
네가 잡은 주사위의 일곱째 눈이지
세계의 벽을 두드리는 망치, 나는 그 끝나지 않는 물음이지 기다림이지
아침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가는 괘종시계
발기하는 소경의 지팡이지, 날 선 창끝이지
네가 나를 들을 때,
너의 눈이 나를 쓰다듬을 때,
나는 너에게 덤빈다 먹어치운다
먹으며 먹히며 서로 끝없이 스민다
내가 너를 수태하고 네가 나를 낳은다
너와 나, 마주하는 두 개의 사물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
*니체의『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햇다』에서 인용
― 류인서, 「사물의 말」 전문
「사물의 말」은 류인서의 후기 시적 표적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쩌면 그녀 시의 ‘이전과 이후’의 경계선인지도 모른다.사물의 물성을 깊이 공명한 이 시는, 대상을 몸각화하였다. ‘사물이 말을 한다’는 놀라운 메타포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뿌리박고 있다. ‘현실만이 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동일한 생生의 영원한 반복은 초인 사상의 핵심이다. 운명에 대한 극단적 긍정과 극단적 투쟁은, 니체의 영원한 알레고리다. 그렇겠다. 사물과 사물은 수화手話의 방식으로 노는지도 모른다. 하여, 사물은 시공간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밖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안쪽 깊이 숨기도 한다. 「사물의 말」을 가만히들으면 “나는 빛을 모으는 오목거울”이야라고 귓뜸한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 사이에 핀 양귀비꽃”을 보라고 가리킨다. 아니,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떨며 흐르는 공기”를 느끼라고 채근한다. 류인서는 “조용히 밤의 표면을 미끄러져가는 유령들의 범선”을 타고 “나비걸음으로 다가오는 폭풍우”를 지나, 한 마리 “새”가 되어 “태양을 애무하는 파도의 젖가슴”을 만진다. 하여 그녀는 영원히 “춤추는 방랑자”가 된다. “멀리 있는 별보다 더 멀리 있는 별”이 된다. 짜라투스트가 그랬듯, “세계의 벽을 두드리는” 시의 “망치”를 들고” 끊임없이 ‘나’를 향해, “그 끝나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네가 나를 들을 때, / 너의 눈이 나를 쓰다듬을 때, / 나는 너에게 덤빈다 먹어치운다 / 먹으며 먹히며 서로 끝없이 스민다” 결국 류인서는「사물의 말」을 통해 ‘실재와 표상’, ‘들림, 혹은 들음’의 엄혹한 ‘시적 거리’를, 운명의 도구로 비유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