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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 기찬여행-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역사…空島정책으로 한때 단절 |
섬의 역사 가거도 패총 등 곳곳에서 고대부터 거주한 사실 확인 고려말∼조선초 해상세력·왜구 견제 위해 공도 추진 |
입력시간 : 2013. 03.29.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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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섬 여행의 글을 쓰다가 반가운 책 몇 권을 입수했다.
그중 하나가 김준의 '섬여행 답사기'와 최성환의 '바다로 간 천사,
섬이 되다' 이다.
필자도 가끔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고향이 섬이라고.
물론 한때는 부정 한 적도 있었다.
저번 안좌에 김환기 화백의 취재를 갔다가 시껍했다.
좋던 날씨가 한 밤중에 거친 비바람으로 변했다.
이번 취재여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 문화해설사 박옥례 선생의 얼굴표정이 굳어 있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시더니 배편이 빨리 끊어질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거다.
어찌 보면 섬의 일상이다. 이런 일이 섬사람에게는 다반사이다.
그냥 그분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안좌, 팔금 등을 촬영하고 허겁지겁 암태의 오도항으로 향했다.
아뿔싸, 우리의 차량은 압해도 송공항에 있는데 배는 바람을 피해 목포 북항으로 피항 한다고 했다.
그것도 이 배가 오늘 마지막 배라고. 이런 낭패가….
섬은 항상 우리에게 낭만과 아름다운 추억만 주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섬 여행은 그만큼 예기치 변수와 돌발이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여유 있는 날짜를 가지고 여행을 해야 한다.
가끔 TV사극에 등장하는 내용 중에 국왕은 죄인을 향해 “저 간악무도한 죄인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라” 한다.
위리안치는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것이다.
중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로 주로 전라도나, 남해안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다.
경남의 남해읍에 가면 유배문학관이 있다.
남해 유배문학관은 서포 김만중, 자암 김구, 후송 유의양,
약천 남구만 등 6인의 유배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의 남도 땅은 훨씬 많은 시대의 선각자들이 유배된 곳이다. 방치된 느낌이었으나,
최근 연구가 시작됐다.
전남문화재단이 유배문학에 대한 자료조사를 한다고 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도 습득하고, 주제와 시대별 정치적 상황 배경을 설명하는
전시관을 만들기 바란다. 유배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학습프로그램을 유배역사와 문학에 관한 교육의 장과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관으로써 지역민들의 자부심 향상에도 기여하고 풍부한 관광자원과의 연계,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정책개발과 더불어 문화관광의 거점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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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궁금해진다.
우리는 흔히 섬에 들어와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던 분들을 입도조(入島祖)라고 한다.
입도조는 역사가 300~400년 정도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섬에는 성(姓)씨가 같은 집성촌(集姓村)이 많다.
흔히들 자가일촌(自家一村)이라고 표현하는 동네가 많이 있다.
섬들의 원 입도조의 역사는 짧은 것은 아니다.
서남해의 신안은 백제불교가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에 위치하였다.
백제는 침류왕 1년(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대사에 의해 중국을 거쳐
신안 섬을 통해 영광 법성포 포구로 들어오게 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장보고대사는
동남아에서 멀리는 인도양 까지 교역을 할 때, 이미 신안의 섬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해서 사용을 하였다.
1700년대 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갈 때 모두 이 고을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영암 구림마을 포구).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또 흑산도에서 하루 가면 홍의도(홍도)에 이른다.
또 하루 가면 가거도에 이른다. 북동풍을 만나 3일이면 태주 영파부 정해연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 순풍을 만나면 하루 만에도 만날 수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연 바닷가에서 배를 출항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러 뭍에 왔다.”
당시 유명한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이 신안의 뱃길을 이용한 상선의 선단을 타고가 당나라 과거에 합격했다.
그 당시는 신안의 다도해를 경유해야 중국으로 가는 길목 이였다.
지금도 흑산도를 가려면 모든 배들은 비금, 도초, 안좌, 팔금의 뱃길로 가야한다.
이렇듯 신안의 섬들은 이미 고대부터 인간의 발자취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가거도의 패총으로 전남 기념물103호로 지정된 고분이다.
패총은 선사시대의 유물이다.
패총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때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남단 가거도에서 어찌 생각하면 동남아의 남방계나,
아니면 위쪽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다 잠시 머문다는 것이 그 섬의 입도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68년 서울대학교 인류학 조사팀에 의해 발굴 되었고,
최근 2005년에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조사 되었는데
패총의 중심연대가 신석기 전기와 말기이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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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토기류, 석기류, 골각기 등이 출토 되었다.
그 외에도 신안의 이곳저곳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나오고 있어,
여기저기 섬 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진다.
이렇듯 오랜 생활을 섬에서 해오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에서 섬을 비우라고 한다. 물론 왜구나
해적들에 침탈에 섬에 살고 있었던 몽매한 섬주민만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많은 섬에는 우리의 문화 역사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려 말에 섬을 비워버린 공도(空島)의 조치는 서남해 해상세력이 삼별초 세력에
동조할 것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하여 서남해 해상세력과 왜구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에서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당시 공도화의 대상은 진도, 압해도, 흑산도, 장산도, 거제도, 남해도 등과 같이
주로 해상세력이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큰 섬들 이였으며,
결국 고려 말 공도 조치는 이들 해상세력에 대한 국가의 탄압과 견제 의미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말의 이러한 공도정치는 조선 왕도에 들어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 되면서
단순히 일시적인 ‘조치’의 차원을 넘어서서 법으로까지 규정되는 하나의 국가
‘공도정책’으로 자리 잡아간다. 궁(宮)의 허락 없이 몰래 섬에 들어간 자는
杖 1백대의 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심지어 섬에 도피 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조선이 공도정책을 실시했던 목적은 고려 말에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던 해상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취했던 공도 정치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의 해양은 이미 피폐화되어 있었고 해양을 근거로 하여 삶을 영위하던 뱃사람들도 크게 쇠락해 있었다.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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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공도를 국가의 정책으로 삼아 강력하게 추진했던 이유는
모든 백성들은 국왕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위치에서 편제되어야 한다는
조선적 통치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왕조가 안정을 찾아, 왜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강화하고 왜관무역을 통해 유화정책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섬과 해안일대는 100여년 가까이 비어있었던 까닭에 소유관계도 명확치 못한 경우가 많아
말을 기르는 목마장으로 활용하거나 공신들에게 사패지로 주어졌다.
대체로 큰 섬들은 성종대를 전후하여 다시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지만
작고 외딴 섬들은 16-17세기에야 사람이 거주할 수 있었다.
왜구의 침탈은 식량, 노예, 그리고 귀중품 따위를 노략질 때문에,
그에 따라 공도 정책에 서남해안의 어지간한 섬들은 거의가
공도정책으로 텅 비게 되자 왜구는 좀 더 깊게 육지를 침탈했다.
대표적으로 고려시대 청자의 산지였던 강진의 대구만 일대와 부안 변산의 유천리 도요지 일대도
모두 비우게 되어, 청자의 생산이 중단되고 유통이 어렵게 되자
내륙지방인 광주 충효동과 같은 곳에서 분청사기가 탄생하게 된 동기가 되기고 하였다.
최근 섬지역의 패총을 발굴하면 신석기-청동기-원삼국-삼국-고려로 이어지던 패총이 단절되었다가
16-17세기부터 다시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공도정책의 때문으로 중간의 문화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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