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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씀이- 실제 우리의 삶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주는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왜, 우리의 삶속에 변화된 순종의 삶이 따라오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아 속에 있는 혼의 생각들이- 단순하게 순종하기 원하는 우리의 영을 혼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 광야에 엎드려진 IS처럼- 지금의 안식인 교회생활에서- 계속 성장해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레아마의 말씀이 주어짐으로- 단순하게 순종하는 삶이 회복되어야만- 지금의 안식을 누리며- 계속해서 성장해 가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이미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하늘의 지성소에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시는- 시은좌(施恩座)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오늘은, 우리를 돕는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은혜를 얻는 것인지 자세히 알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히브리서 말씀을 잠깐 쉬고,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으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앞에 ‘나’와 뒤의 ‘나’는 서로 다른 ‘나’입니다. 곧 앞에 있는 ‘나’는 과거의 변화 받지 못한 ‘나’를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있는 ‘나’는 은혜로 변화를 받은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나’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던 포행자인 사울을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나온 ‘나’는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때, 가장 열렬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변화를 받았습니다. 사울 같은 포악 자가 변화를 받아 바울이 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먼저 이 가능성을 열어놓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라고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핍박자요, 포행 자였습니다. 자기 확신으로 꽉 찬 지성인이며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열정과 확신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을 누가 변화시킨 것입니까? 사울이 변화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처음에는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가지신 분이 혹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속임수이고 거짓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나는 변화될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서- 그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요새는 사탄이 우리 속에 지어놓은 견고한 진인 것입니다.
이상하게 나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우리 심령을 묶어놓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깨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허용하면서- 적당히 죄를 짓고 타협하는 삶을 사셨다면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 부정적인 생각부터 대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불신앙의 요새는 무너질지어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따라서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의 누추한 삶은 다 지나갔다./ 보라 나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게 보이는 현실의 삶은 아직 온전하지 못해도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타난 현상으로 요동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온전케 된 모습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변화 된 삶을 살 수 있다> 한 번 더 선포하세요!! <나는 변화 된 삶을 살 수 있다>
사단의 요새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지어진 집입니다. 이 견고한 집을 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3-5)
우리에게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레아마로 주어진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입니다. 혼의 생각을 베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허탄한 이론과 생각들로 지어진 사단의 요새는 성령의 검으로 파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될 수 있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사단의 요새를 파하는 강력인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변화된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우는 소리를 합니다. “나는 울어도 보고, 참아도 보고, 애써도 보았지만, 잘 안 되던데요!!” 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나의 난 된 것은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변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은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늘 은혜를 말하지만- 그 결과는 변화된 삶을 가져오지 못하고- 도리어 불순종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구실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심으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듣고서 구원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은혜에 대한 정의에 만족하십니까? 어렸을 때는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은혜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보면- 은혜가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6,17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으로 채택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은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켜 은혜라고 말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4장 22절에서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주님이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 하면서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을 기도해 주었음을 봅니다. 그러니 바울은 주님과 은혜를 한 가지로 보았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의 최고의 걸작인 <산상설교집>에서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은혜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이다. 만일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그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웠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또 존 비비어 목사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책에서 ‘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난 이삼십년 동안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믿어 온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다, 왜곡된 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나는 많은 신도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모든 것을 포장하여 불순종을 변명하는 것을 들어왔다. 물론, 은혜가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배운 대로는 아니다.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권능”이다. 비록 은혜가 우리 허물을 덮어 준다지만, 단지 은폐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해 주고 능력을 공급해 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은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은혜는 나를 변화시키는 위해서 내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부활하신 주님이 살리는 영으로 내 안에 성령의 권능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은혜의 성령”(히10:29)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예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도 관계가 있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과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다음의 성경구절들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고전 15:10)
디도서 2장 11-13절을 보시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3장 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자, 이 모든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은혜에도 양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는 측면이 있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죄를 이기게 하는 생명의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단순히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도 포함되어진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말씀해 줍니다.
우리가 지금 누려야 할 안식은- 바로 이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의 지식은 있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면 큰일입니다. 우리에게 은사에 대한 체험은 있지만- 이 은혜가 없다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이 은혜가 고갈되면- 우리는 아론의 두 아들처럼 소멸하는 불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야 합니다.”(히4:16)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 은혜를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축복이나, 건강이나, 혹은 능력이나 영적체험을 구하는 자는 많은데-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는 자는 적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3).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은혜는 한 마디로 <예수님>이고 <성령님>입니다. 왜, 은혜가 예수님이고 성령님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측면으로 볼 때, 은혜는 예수님이고- 거룩함의 측면으로 볼 때, 은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어도-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받고 누렸던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예배를 아무리 많이 참석하고-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4장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은혜는 성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을 생수의 강물로 비유하셨습니다(요7:37-39).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많은 물이 모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항상 겸손한 자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는 두 가지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1)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오직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천사의 지시를 따라 베드로를 불러왔을 때- 그들은 베드로가 들어오자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모함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고넬료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설교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해서 설교가 마칠 때까지 계속 은혜가 여러분 위에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변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동양의 성자라고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꼬는 “나의 나 된 것은 밤중에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시간에 일어나서 한 시간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고백은 바울의 고백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이 고백이 바울의 고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은혜는 기도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33장 26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여기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간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은혜는 기도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릭 조이너스가 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을 보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나는 네가 아는 진리를 따라 살도록 네게 더 많은 은혜를 나누어 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해 매일 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날마다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새벽기도회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한 시간이 되는 거리를 매일 질주하여 새벽기도에 나와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공급받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00일만 작정기도를 하겠다는 분들이 이제는 주님 오실 때가지 이 은혜의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즐거이 헌신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힘들어 보이던 것도- 결단하고 나면, 도리어 즐거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누가복음11장 9-13절을 보면-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리가 가득합니다.
(1).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이 은혜는 성령입니다. 맨 끝부분을 보세요.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다”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는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는 자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는 정욕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꼭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 인내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번 구해보고 안 된다고 말하지 마시고 계속 간구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가 부어지게 될 겁니다.
야고보서 5장 7,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하십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역사하십니다. 이른 비는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에 기다리는 비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추수 때에는- 이른 비로 역사한 초대교회 때보다도 더 강한 성령의 역사가 마지막 추수 때에 늦은 비로 강력하게 부어진다고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합니다.
요엘서를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다”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인 지금은 성령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부어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입니다. 입을 넓게 여시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마십시오.
앞서 저는 은혜의 반쪽을 가지고- 은혜의 전부로 착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분명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으면 무조건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깨달음과 감동을 주시지만-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맡겨두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자유의지를 파괴하시면서 까지 자동적으로 순종하게 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학개서 1장 13- 14절을 보시면-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라는 기록을 보시면-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들에게 성전을 재건축해야 하는 필요가 절박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학개선지를 통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약속과 함께 / 먼저 성전 건축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시면서-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켜주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고, 감성을 흥분시켜주는 일까지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의 몸을 드려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까지 영향을 행사하는 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강해도 인간의 의지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는 실제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돕는 역할이지 대신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원래 보혜사란 ‘페라클레토스’라고 우리 곁에서 돕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했지 않습니까? 성령님의 역사는 돕는 은혜입니다. 결코 대신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했는데-
보십시오. 바울사도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간증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도 자칫하면 은혜를 헛되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을 보면- 이 의미가 더 정확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셨을지라도- 우리가 몸을 드려 순종하지 않으면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은혜가 헛될 수도 있고, 헛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이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전에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엔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은 후엔 그 욕구 자체가 사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이 더 강해졌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2)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힘입어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은혜를 받았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타협하지 마시고 은혜를 힘입어 죄와 싸워서 이기라는 겁니다.
(3). 인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을 보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10절을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입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가 쓴 <행동하는 믿음>이란 책을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마치 모든 일이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이 진리를 전파하는데 사용한 수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기에 위대한 성공의 비밀이 있다. 당신의 최선을 다하여 일하라. 그러나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신뢰도 갖지 말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동시에 성실하게 인내를 가지고 일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일하라. 당신이 평생에 걸쳐 계속 이렇게 반복하면- 그 결과는 틀림없이 엄청난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안식을 누리며- 계속 성장하는 믿음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냐? 이것이 궁금하실 겁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둘 다 필요합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또,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헌신이 공조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더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우리의 노력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되 최선을 다하여 힘써야 합니다.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고,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는데 까지 싸워야 하고, 인내로 열매를 맺기까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받은바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인협동으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고 할지라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아무리 수고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세기의 성자 성 프란시스는 <누가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인가?>라는 글에서-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통하여 무슨 선행을 이루어주실 때, 그것을 자기가 했던 일로 여기지 않고- 더욱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기를 더욱 작은 자로 여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지 아셨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