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시는 여행자들에겐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아동도서전, 박람회, 볼로냐FC 축구팀 등으로 가끔 기삿거리의 언저리를 맴도는 인구 30만의 중세도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볼로냐를 생각하면 ‘로쏘Rosso’(빨강)를 떠올린다. 도시 전역의 건물이 붉은 색이다. 한편으론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전통적으로 강한 지역이다.
이런 볼로냐가 유럽연합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5개 도시 중 한 곳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임금 수준은 이탈리아 평균의 2배에 달하고,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 로마냐 주 GDP의 30%를 담당하고 있다. 실업률도 3%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바로 협동조합이다.
유럽연합에서도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발한데, 특히 그 중에서도 도드라지는 곳이 볼로냐다. 볼로냐에만 4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고, 대부분의 시민은 어떤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다. 또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50개 중 15개가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 없이는 생활하기 힘들다는 볼로냐,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자.
이탈리아 경제에서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지위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에 해당하는 소비자협동조합들은 식품안전성, 식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전달, 환경, 생산과정의 윤리적인 측면 등을 모토로 이탈리아 전국 7백만 조합원들에게 연간 한화 22조 원에 달하는 소비재를 공급하고 있다. 한국의 생협들과 조금 다른 점은 싸고 안전한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굳이 유기농 위주의 물품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철학은 협동조합 내 민주주의를 정착하고 잉여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대형 소비자협동조합 아드리아티카Coop Adriatica의 초대형 매장에서 물품을 고르고 있는 한 조합원. 한국의 생협과는 달리 굉장히 규모화되어 있다. 조합원이 아니어도 구입할 수 있지만 출자금 25유로를 내고 조합원이 되면, 할인과 더불어 병원이나 극장 등에서 사용 가능한 포인트를 얻는다.
●●소비자협동조합의 자체 마크를 단 의약품. 없는 게 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볼로냐 사람들의 소비자협동조합에 대한 신뢰도는 75%에 달하는데, 이는 국교인 카톨릭에 대한 신뢰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매장 내 한 까페에서 조합원에게는 10% 할인해준다는 알림판. 쇼핑뿐만 아니라 문화, 휴식 공간도 잘 갖추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집을 얻는 데도 협동조합을 이용한다. 주택 수요자를 위한 주택건설 협동조합 무리(Murri). 조합원이 되려면 출자금 50유로, 우리 돈으로 약 8만5천 원가량을 내고 등록한다. 조합원들은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잡지를 통해서 조합에서 어떤 집을 짓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본인이 원하는 형태의 집을 찾으면 예약을 할 수 있는데 만약 원하는 집을 못 찾으면 출자금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임대사업도 하는데 임대 기간 이후 세입자가 집을 구입하길 원하면 그 동안 납부한 임대료를 주택 가격에 포함시켜준다. 무리는 협동조합답게 건축 원가를 제외한 마진율이 5~6%라고 공개하고 있다. 마진이 적기 때문에 주택을 비교적 싸게 공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기자들이 줄을 서있다. 이런 협동조합들이 이 지역에만 여러 개 있다.
볼로냐 사람들은 내집마련도 형동조합을 통해서 한다. 사진은 조합원의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주택건설협동조합 무리의 새 아파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운동은 ‘사회적 협동조합’ 개념을 통해 알려져 있다. 굉장히 넓은 범위의 사회 복지를 협동조합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제도적인 인프라가 잘 돼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소외계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A형과 서비스 제공도 하지만 일자리 제공에 중점을 두는 B형으로 구분한다.
● 한때 노숙인이었다가 지금은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고 있는 바티스티니Giordano Battistini 씨. 그는 노숙인을 위한 자활 협동조합 쿱 라 스트라다Coop La Strada의 조합원이다. 이 협동조합은 노숙인들에게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동시에 자활을 하고 있는 노숙인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하고 있다.
●● 동료들과 함께 노숙인과 상담하고 있는 바티스티니 씨.
●●● 마피아로부터 해방된 땅을 농민들에게 빌려줘서 유기농 농사를 짓도록 돕는 리베라 테라Libera Terra(해방된 땅) 프로젝트의 관리자 파브리Simone Fabbri씨. 그 땅의 농부들은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유기농 제품에 리베라 테라라는 브랜드를 붙일 수 있다.
●●●● 리베라 테라의 유기농 와인. 맛이 좋고 가격도 싸다.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볼로냐의 한 문화다. 문화 각 분야의 종사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스스로 출자하고 책임감 있게 운영해 나간다.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어린이 연극 협동조합 바라카(La Baracca). 19명의 조합원이 있는 바라카는 1995년부터 볼로냐에 있는 ‘어린이 극장’의 관리권한을 시로부터 위임 받았다. 어린이를 위한 연극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 바라카의 예술감독 프라베티(Valeria Frabetti) 씨. 어린이 심장외과 전문의였던 그녀는 어린이를 위한 의술에서 예술로 일찍 방향을 바꾸었다.
●● 0~3세를 위한 연극 <물의 색깔>의 한 장면. 내년에 한국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 볼로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복합 문화공간 암바시아토리(Ambasciatori). 소비자협동조합 아드리아티카와 도서협동조합 등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 암바시아토리의 내부. 서점, 까페, 식당, 쿱 매장이 한 공간에 있다.
협동조합끼리도 협동한다
협동조합들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협동조합 간의 협동으로 시너지 효과가 난다. 조합원이 모두 6명인 협동조합 키친쿱(Kitchencoop). 종합적인 홍보기획을 주 분야로 하는 이 초소형 협동조합은 다른 협동조합들로부터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작업한다.
또한 협동조합들의 연합체인 레가(Lega)는 협동조합들의 대표로서 단위 협동조합을 대표하고, 세무, 법률, 인사 분야에서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있다.정 집 같은 분위기의 키친쿱 사무실 입구. 인테리어 감각이 남다르다.
무엇이 이 지역에 협동조합을 들끓게 했을까. 볼로냐는 중세부터 군주제나 공화국이 아닌 자치형태를 띠는 도시였고 타인의 간섭이나 수직적인 관계를 꺼렸기에 구성원의 평등을 전제하는 협동조합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또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조직력을 기반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데, 볼로냐 협동조합의 강력한 조직력은 19세기 후반의 카톨릭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협동조합 모델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효율성만을 중요시했던 시스템은 불황과 실업을 낳았다. 볼로냐의 협동조합들은 실업자와 소외 계층을 고용하고, 어려운 협동조합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 지지해주고 있다. 중세시대 볼로냐에는 이백 개가 넘는 탑이 있었다. 재력가들의 과시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몇 개만 남아있다. 이제 협동조합 운동의 심장부 볼로냐에는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탑들은 쓰러지지 않도록 강한 연대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 가정 집 같은 분위기의 키친쿱 사무실 입구.
●●키친쿱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바티스티네(Giovanni Batistine) 씨. 키친쿱은 수평적으로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협동조합 형태여서 창의적인 작업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한다.
●●● 협동조합 연합체인 레가는 세무, 법률, 인사 분야를 지원한다.
●●●● 레가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미아니(Mattia Miani)씨.
글을 쓴 김태열 님은 한살림 일꾼입니다. 매년 진행되는 한살림의 해외연수 공모를 통해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의 협동조합을 둘러보는 기회를 갖고 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