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은 의식주의 이동이다.
1일 산행은 하루의 나들이와 같은 것이나
적어도 1박 2일부터는 분명 의와 식과 주라는 생활의 기본조건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한 조지 휜치의 말은
조금 차원이 다르나 의식주라는 생활의 다른 면을 뜻할 수도 있으리라.
등산은 막영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산이 높고 깊을 때 더욱 그렇다.
등산의 내용과 형식이 고도화하면서 이른바 '로지스틱' 전술이 중요하게 되었는데,
이 속에 막영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그래서 등산의 역사는 곧 막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산행에 막영이 등장한 것은 바로 알피니즘과 기원을 같이 한다.
즉 1786년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이 초등되자 몽블랑 등정을 제창했던
드 소쉬르 자신이 1년 뒤 직접 도전에 나섰을 때,
그는 등산 역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막영 준비를 했다.
그때 드 소쉬르는 포터 다섯과 가이드 아홉을 데리고 무게 70킬로그램에 가까운 매트리스와 침구에서 화목까지 가지고 갔다.
오늘날 알프스 등산에서 천막을 쳤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드 소쉬르의 경우를 지금에 와서 시시비비할 수는 없다.
등산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 이야기다.
게다가 자연 과학자였던 드 소쉬르는 몽블랑 정상에서 여러 가지 실험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알프스 등반 역사에서 막영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65년 마터호른 등반 때다.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시가 못되어 적당한 막영지가 나타났다.
고도는 11,000피트였다.
다음날 아침 시간을 생각해서 크로와 페터 아들이 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올라갔다.
(중략)
우리는 햇빛을 쪼이거나 스케치 또는 채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진 뒤에도 한참 동안 우리 웃음소리와 안내인들의 노래가 머리 위 암벽으로 울려 퍼졌다.
그날 밤 야영은 즐거웠고 두려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윔퍼는 1861년 마터호른에 도전하며 '가볍고 안전하게 그리고 아무리 힘든 데도 메고 올라갈 수 있는' 천막을 만들었다.
이것이 천막의 원조로 그 뒤 20세기 후반까지도 히말라야 원정에 사용된 이른바 '윔퍼 텐트'다.
한국도 1971년 히말라야 로체샬(8400m)원정에 이 천막을 가지고 갔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윔퍼형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돔형 텐트가 나왔으며,
그 이듬해 우리 북극탐험에서는 돔형을 4중 내피로 주문했다.
일본의 우에무라 나오미가 북극에서 백곰 습격으로 천막이 찢겼다는 기록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는 개썰매를 타고 그린란드의 내륙 깊숙이
'아이스 캡 지대(Ice Cap 氷帽地帶)'로 들어갔기 때문에 백곰을 만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네 겹으로 된 천막 신세를 톡톡히 졌다.
그것은 한해 전 에베레스트에서 사용했던 두 겹 천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부러운 것은 에스키모들의 막영 방법이었다.
그들은 저녁이 되면 썰매 두 대를 나란히 붙여놓고 그 위에 가옥형 천막을 쳤는데,
그 안이 삽시간에 넓은 거실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한 쪽에 다용도 공간까지 생겨 썰매에 걸쳐 앉은 채 내부를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 수가 있었다.
큼직한 스베아 가솔린 스토브에 펌프질을 하고 시퍼런 불길을 일으키는 솜씨 또한 놀라웠다.
거칠 수밖에 없는 대자연 속에서 에스키모들의 생활은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독일에서 나오는 등산 전문지 <베르그슈타이거> 최신호에 '천막은 나의 성(城)'이라는 슬로건 밑에
20종 가까운 등산용 텐트를 종합적으로 점검 평가하는 특별 기사가 실렸다.
이때 각각의 천막은 첫째, 밤의 안식처. 둘째, 악천후 때의 방수와 안정성.
셋째, 건립 철수의 간편. 넷째, 경량과 내구성. 다섯째, 내부의 다용도 공간 유무 등에 관해 집중 진단을 받았다.
한낱 등산용 천막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 이 정도로 엄격한 시험대에 올라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 같으나,
적어도 산 속에서 며칠이고 살아본 등산가라면 그러한 요구들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막영은 힘들고 험한 산행에서 하룻밤 휴식하고 지친 심신을 내일을 위해 회복시키는 시간이며 장소다.
산 속에는 곳에 따라 마운틴 로지 같은 산장이나 대피소 건물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은 천막을 치는 막영과 성격이 다르고 여기서 그 특이한 분위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등산에서 막영을 전제로 천막을 지고 가는 일은 육체적 노역을 요하며 결코 유쾌한 일은 못된다.
그러나 그런 준비를 갖춘 산행은 언제나 불안하지 않으며,
종일 행동하다 지칠 대로 지쳤을 무렵 적당한 막영지가 나타났을 때의 기쁨과 만족감은 겪어본 사람 아니면 모른다.
막영의 본질과 극치는 문명과 격리된 대자연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곰 같은 맹수의 위험에 노출된 대자연이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그곳에 안전 수칙이 마련돼 있고 늘 레이저들의 감시가 따르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의 막영은 산중 특유의 고립감과 긴장감이 없다.
등산가가 막영하며 자기 생을 살피고 충족을 느끼는 것은
눈보라나 눈사태 같은 대자연의 맹위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때다.
미국의 극지 탐험가인 윌슨이 대설원 가운데 천막을 쳤을 때 그는 '무한함(Immensity)'을 느꼈다고 했다.
필경 윌슨은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망망대해 같은 얼어붙은 황무지에서 설영했으리라.
1953년 낭가 파르바트를 고소 캠프에서 혼자 올랐다가 그날 밤을 꼬박 선 채 지샜던
헤르만 불이 전날 뒤로 했던 최종 캠프지를 찾아 내려가던 모습을 우리는 그의 책 <8000미터의 위와 아래>에서 읽는다.
저녁 다섯 시 삼십 분에 나는 설원을 벗어나 질버잣텔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시 라키오트 빙하와 막영지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등로 전체가 가로놓여 있었다.
사면을 파고 눈 속에 세운 천막이 보였다.
이것을 보고 더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 밑에 움직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막영지가 텅 비어있지나 않을까?
눈에 들어오는 그 넓은 세계가 성스러운 평화 속에 잠겨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안 들린다.
나는 라키오트 피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 검은 점이 다시 보였다.
저기 누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헤르만 불의 낭가 파르바트 등정은 세계 산악계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의 하산 또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원정대는 대장의 독선과 오판으로 중간 캠프를 모두 철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의 친구인 한스와 발티는 초조한 마음으로 외로이 텐트를 지키고 있었다.
바로 그 막영지로 불이 악전고투 41시간만에 살아서 돌아왔다.
이때 낭가 파르바트의 고소 캠프는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그들 세 등산가의 우정이 응고한 곳이었다.
불을 맞은 한스는 등정 소식을 묻지 않았다.
그저 불이 살아 돌아와서 기뻤다.
옆에서 말없는 발티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