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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현감 박동선과 이몽학의 난
"싸우지 않으려는 이 전 통제를 원통제가 불렀기 때문에 임진년에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남을 부른게 더 큰 전공이라... 좋아 그런데 조정 명령 없이는 관할구역을 못 넘어간다는 사실, 알아?
그리고 전라 좌우 수군에게 경상도를 지원하게 해달라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 사람은 경상감사 김수야"
"조정에서는 임진년에 이 전 통제사가 경상도 바다로 늦게 출발했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많다던데요? 그 분들이 설마 법을 몰랐겠습니까?"
"다 알면서도 괜히 하는 소리지. 이 전 통제가 구원을 늦게 갔다고 욕 먹는다면 1차 출동 때 참가하지도 못한 이억기 수사는 아예 능지처참해야겠네?"
이순신이 싸운 공보다 원균이 이순신을 부른 공이 더 크다는 소리는 정말 괜히 하는 소리다 당시 어전회의에서 그런 소리를 한 대신들이 있는데 임금은 그런 논의를 흡족히 여겨 전쟁이 끝난 이후에 선무공신 등급을 논의하는 관정에서 이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임금이나 조정 중신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1596년 여름, 수군 지휘권을 두고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벌어진 논의가 한참이던 때 마침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 였다.
반란을 결정적으로 진압한 것은 홍주목사 홍가신이 성을 굳게 지키고 충청수사 최호가 수군을 이끌고 홍주성에 들어가 군세를 떨친 덕택이라는 사실은 조정 중신들 모두 동의했다.
홍주성의 방비태세가 튼튼함을 본 반란군들이 겁을 먹고 흩어졌기 때문에 이후 진압은 아주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수사 최호가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며 출전을 주저하자 남포현감 박동선이 최호를 설득해 홍주성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최호는 공이 없고 1등 공이 박동선에게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최호가 당연히 1등 공이라고 했고 현감 박동선은 나중에 청난공신 선정에서 아예 빠져 끼지도 못했다
이렇듯 청난공신 선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논쟁할 때와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됐다 다 그런것이다 그런데 이몽학의 난이 진압된 1596년 당시 임금이 1등이라 했던 최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청난공신 1등이 아닌 2등으로 깎여 책봉됐고 홍주목사 홍가신 혼자 1등에 책봉됐다.
임금이 나름대로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호를 2등 공신으로 강등시켰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 김경진의 "임진왜란" 중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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