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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9)
글/정진옥
제12일 ( 2016-09-10, 토요일 )
서해 갑문
호텔 구내식당에서 조반을 먹고, 九月山을 가기 위하여 차에 오른다. 어떠한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태가 좋은 도로를 달려 아침 8시 30분경에 남포시에 위치한 ‘서해갑문’에 도착한다. 대동강의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서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것을 막는 시설로 이해된다. 1986년에 완공되었다는데, 아마도 수자원의 확보가 주목적일 것이다.
이 시설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인근 고지에 지어놓은 홍보실로 안내된다. 복숭아꽃 색깔의 한복을 곱게 입은 30대 중후반쯤될 미인 해설강사가 우리를 맞아준다.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모습이라고 느껴졌는데,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 ‘서편제’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했던 오정해씨를 그대로 딱 닮았다. 정말로 많이 닮아 보인다.
먼저 이 시설의 의의나 개요 또는 건설과정 등을 담은 영화를 관람한다. 홍보실의 중앙에 서해갑문의 꽤 큰 축소모형이 제작되어있다. 해설강사가 길다란 지시봉을 사용하여 모형을 보며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준다. 둑을 쌓은 하구가 바다처럼 넓어 보이는데, 둑의 길이가 8km라고 한다. 남포와 황해남도를 잇는 길이기도 하고, 정해진 시간에 갑문을 열어 선박을 통행시키기도 하는 시설이다. 3개의 갑문과 36개의 수문이 있으며, 5만 톤급의 선박을 통행시킬 수 있단다. 국가의 역량을 총 동원했던 대역사였다고 한다. 좋은 느낌을 주는 우리 조선의 전통적인 미인이라 여겨져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구월산 지원폭포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로 옆의 논밭이나 개울가에 앉아있는 황새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린 시절에 마을 주변에서 숱하게 보았던 새인지라 너무나 반갑고 행복했다. 처음에는 설마 황새가 아니겠지 라는 심정으로 반신반의 하였는데, 자꾸만 나타나고 이를 보다보니, 정말로 어린시절에 보던 바로 그 황새가 맞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남한에서는 어린 시절 이후에는 저 새를 본 기억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되니, 어린 시절의 죽마고우라도 조우케 되는 양, 아니 그 보다도 더욱 반가운 그런 심정이 된다.
동승해 있는 북한측 인사에게 북한에는 꾀꼬리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있단다. 북쪽 조국의 산하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고, 고마운 마음이 괴어든다. 남녁에는 벌써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황새 꾀꼬리 소쩍새 원앙새 뜸부기 등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밀려든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내 젊음이 흘러갔듯 그들도 다 세월따라 흘러간 것이다. 북녁땅에 있는 이런 동물들 또 식물들이 계속 잘 보존되어지기를 축원한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구월산 입구의 매표소에 도착한다. 평범한 민간인 복장의 여인이 왼쪽 도로변에 놓여있는 책상에 앉아 있고 동네주민인 듯한 남정네 3인이 한가로운 구경꾼인양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다. 길섶 오른쪽에는 ‘구월산명승지안내판’이라는 이름으로 구월산지구의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가로 4m, 세로 3m는 될듯한 큰 구축물이다. ‘특산물매대’라는 작은 매점건물이 있으나 그냥 닫혀있다. 아마 성수기에나 운영하는가 보다.
주의사항과‘참관료’를 명시한 안내판도 있다. 참관료가 어른은 2000원, 어린이는 1000원이고, 소형차는 주차 및 통과료금이 2000원, 자전거는 400원이라고 쓰여있다. 우리 일행이 물건을 구입할때 보통 어디에서나 이들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환율이 1달러에 100원인 것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하자면, 어른의 입장료가 20달러가 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는 어불성설일 터이다. 북한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나름대로 짐작된 바로는 1달러가 약 8000원에 상당하는 국내교환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이곳 입장료가 0.25달러가 되는 셈이니, 주민들이 감당할만한 적정한 금액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도 역시 구월산을 안내해줄 여성안내원이 수배되어 우리 차에 동승한다. 20세가 될까 말까한 아주 어린 아가씨인데 키가 훌쩍 크고 용모가 단정하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데 대학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략 10여분을 달려서 구월산 폭포골의‘지원폭포’의 입구에 도착한다. ‘志遠’이란 김일성주석의 부친인 김형직선생의 좌우명이었다고 하며 이 분이 이 폭포를 비롯한 구월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했던 행적을 기려 부여된 이름이란다.
200m쯤의 탐방로를 지나니, 송림과 큰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있는 폭포는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서로 다른 3 방향에서 각기 큰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폭의 형상인데 나름대로 운치가 좋다. 떨어진 물들이 잠시 모였다 흐르는 담소도 물이 제법 많고도 맑다. 송림과 암봉과 담소 그리고 넉넉한 너럭바위가 정갈한 정취를 빚어낸다.
다시 폭포의 입구로 되돌아 온다. 이정판이 있다. 환인 환웅 단군, 세 분 겨레의 조상을 모신다는‘삼성사’는 여기서 팔담골 방향으로 대략 10km 남짓을 들어가야 하나보다.
구월산 삼성사
구월산이라는 이름은 ‘단풍이 드는 음력 9월에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 그리 부르는 것이란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구월산을 소재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전하여 온다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 작년 9월에 구월산을 지났었는데, 금년 9월에 다시 구월산을 지나는구나. 매년 9월에 구월산을 지나는 까닭은, 구월산의 풍광이 9월에 가장 뛰어남이니.” 재미있는 것은 이 짧은 시에 九月이라는 말이 8번이나 나오면서, 단 8개의 글자만이 쓰였다는 사실이다. 김삿갓의 해학과 기지가 담겨있는 참으로 기발한 글이다.
구월산은 국조이신 단군께서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떠나 이곳에서 사시다가 신이 되어 승천하셨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사가 구월산에 있는 것이리라. 구월산은 백두대간의 중심에서 벗어난 서해안의 황해도 은률군과 안악군에 걸쳐있다.
구월산의 최고봉은 사황봉으로 984m이다. 조선시대에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숨어든 장길산의 청석골 산채가 있었고, 의적 임꺽정의 근거지였으며, 조정의 폐정에 반기를 높이 들고 항거한 홍경래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또 조선말기에는 의병들의,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들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6.25 전쟁때는 구월산 유격대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던 것처럼, 이 구월산은 세상이 흉흉할 때마다 오갈데 없이 쫓기는 뜻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피난처로서의 따뜻한 품이 되어 주곤 했던 곳이다.
11시20분경에 삼성사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다. 여섯 층계 돌계단 위에 솟을 대문격인 3간짜리 건물이 있고, 계단 아래에 국보유적 제168호 임을 알리는 표지팻말과 안내판이 있다. 우리 겨레의 시조이신 단군과 아버지 환웅, 할아버지 환인을 기리기 위해 고려말에 건립되어, 봄과 가을에 이 세 성인( 환인 환웅 단군 )을 받드는 제사를 지내온 곳인데, 일제의 우리 문화재 말살정책으로 터만 남았던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라 설명되어있다.
‘三聖祠’라는 현판이 달린 대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선다.‘절 寺’가 아니라‘사당 祠’를 쓴 것으로 이 곳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건물양식으로는 불교사찰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동서 양쪽으로 각기 1채 씩 건물이 있다. 다시 중앙에 있는 다섯계단의 돌층계를 올라서면 또 양쪽으로 1채 씩의 건물이 있다. 좌측은 ‘迎賓堂’이라는 현판이, 우측은 ‘養賢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다시 15~20계단쯤 높게 올라간 터전의 중앙에 ‘三聖殿’이라는 현판을 건 사당이 있다. 세 분 조상님의 상반신 畵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정 가운데에 단군님의 화상이, 좌측에 환인님의 화상이, 우측에 환웅님의 화상이 각기 은은한 진주빛 揮帳 뒤에 모셔져 있다. 우리 일행 모두, 반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득한 역사속의 國祖를 뵙는다는 경건함으로 엎드려 參拜를 드린다. 작은 정성을 올린다.
이곳에는 도감 감관 지기라는 직함을 가진 세 분 관리인이 있다는데, 그 중 최고책임자인 도감 김관철선생이 우리를 맞아 단군릉의 발굴과정 등 여러가지 설명과 안내를 해 준다. 특히 여지껏 내가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사실, 즉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인 1916년에 이곳 삼성사에서 자결하셨다는 애국지사 겸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선생에 대한 설명이 매우 큰 감동을 준다. 민주정부시기에는 개천절에 남북한의 인사들이 이곳에 함께 모여, 같은 배달겨레의 후손으로서 함께 제사를 올렸었다는 얘기를 듣노라니 웬지 문득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글을 쓰게 되면서 또 한 분의 愛國志士 나철선생에 대한 나 스스로의 理解를 위하여 살펴본 내용을 아래에 간략히 정리하여 첨부한다.
“나철(羅喆, 1863 ~ 1916. 음 8.15)은 全南 보성 출신으로 漢學을 공부하고 文科에 급제하여 副正字를 지냈다. 乙巳條約이 체결된 뒤에는 李哲, 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五賊암살단을 결성, 그들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에 자수하여 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 후 풀려난다. 救國運動의 일환으로 민족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漢城府에서 檀君敎를 창시했다. 吳基鎬 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에 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놓고 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다. 1년뒤 大倧敎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北間島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韓日合邦 이후로는 日帝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로 이동했는데, 이 때 大倧敎人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4년에는 본사를 그 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宗敎統制案’을 공포하여 탄압을 露骨化하였고, 敎團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이듬해 1916년 음력 8월 14일, 金枓奉을 비롯한 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九月山 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는데, 祠堂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白頭山, 남으로는 先祖의 墓所를 향해 參拜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斷食 修道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써붙인 뒤 修道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殉命三條( 대종교를 위하고, 단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와 日帝의 침략을 규탄하며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長書를 남기고, 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殉國 殉敎한 이 날을 嘉慶節이라 하여 기념한다.”
삼성사를 나온지 10분여 만에 월정사 입구부근에 도착한다. 우거진 수목들로 녹음이 짙다. 김형근단장을 따라 ‘月精寺影碑’라고 새긴 石碑가 있는 곳을 둘러본다. ‘유적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있다. 위 아래가 좀 납작한 달걀을 세워놓은 듯 단조로운 둥근 모양의 부도비들이 있다. 그 중 하나에 역시 소박한 서체로 ‘白荷堂’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저만치 떨어진 길쪽에 북한 주민들로 보이는 열서너명의 남녀노소가 사진을 찍으며 한가한 동정으로 서성인다. 가족단위로 소풍을 나온 것인가 보다.
월정사 입구를 향하여 숲이 울창한 길을 걷는다. 차가 들어갈 수는 없을 정도의 좁은 길이지만 아담하고 정결하다. 입구가 가까와지니, 길의 왼쪽을 돌로 2단의 축대를 쌓아 땅의 높이를 고르게 하고 그 안쪽에 사찰건물들이 지어져 있다. 길 오른쪽은 마른 개천이다.
구월산 월정사
입구에 ‘국보 제75호 월정사’라고 쓰인 작은 석비가 있고, 안내판이 있다. 846년에 세운 사찰이라니 무려 1,170년이나 된 고찰이다. 그래서 그런지 북쪽의 極樂寶殿을 중심으로 남으로 萬歲樓를 두었고, 左右로 水月堂과 冥府殿이 있는데, 건물들이 그다지 크지 않고 또 서로 사이좋은 친구처럼 어깨를 맞대듯 가까이 붙어있어, 절터가 포근하고 아담한 느낌을 준다. 건물들이 너무 크고 너무 많은 남한의 일부 대형사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 있다. 일주문이나 출입정문도 따로 없다. 만세루 건물의 앞 처마에 월정사라는 3글자의 작은 현판아 거려있고 만세루 현판은 건물 안족 처마에 걸려있다.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상냥한 언행의 주지스님의 집례로 예불을 올린다. 티끌 하나를 보시한다. 불교사찰이지만 단군시조도 모신단다. 낮1시가 다 되어간다. 평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 점심을 먹기로 하여 마땅한 자리를 구하는데, 주지께서 사찰 왼편의 개울가 너럭바위를 추천하신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운치가 그만인 개울가로 옮겨, 배구장 만큼이나 넓고도 반듯한 바위에 각기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해설강사 아가씨가 자진하여 도시락을 나른다. 띠엄띠엄 물가에 앉으신 우리 일행 분들에게 도시락을 하나씩 날라다 드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훌쩍 커버린 귀여운 손녀딸이 인자한 할아버지께 두손으로 공손하게 음식을 올리는 그런 가족적인 친근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황해남도 구월산 월정사 경내의 아름다운 시냇가에서, 남도 없고 북도 없는, 격의없는 한가족이 되어 나누는, 더 없이 맛있고 더 없이 훈훈한 그런 점심을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50m쯤 더 왼쪽 안으로 제법 큰 석비와 부도탑이 각기 1개씩이 보인다. 석비의 밑부분을 거북바위가 받치고 있으니, 제대로 격식을 갖춘 비와 탑인 듯 하다. 식사를 끝낸 일행 모두가 만세루 마루에 걸터앉아, 그 앞 마당에 서있는 주지스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북측 수행원이 채근치 않으니, 우리는 절로 한가한 마음이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무심코, “통일신라시대”라는 말을 하게 됐는데, ‘통일신라가 무슨 말이냐’고 스님이 물으신다. 결국 스님의 견해는, 신라가 우리나라를 통일한 일이 없으니, 말이 안되는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다. 외세를 끌어다가 동족을 멸망시킨 겨레의 배신행위였을 뿐 통일을 한 일은 결코 없었단다. 통일을 한 것은 고려였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였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로서는 뭐라는 의견을 개진할 수는 없고, 단지 남북한 간에 역사를 보는 관점이 이렇게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오후 3시경에 월정사를 나온다.
월정사 법당
구월산 산성
이제 구월산의 산줄기들의 일부나마 주마간산할 겸 또 산성의 전망대에 올라 구월산의 일면이나마 조망할 겸 차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가는 산악도로를 달린다. 산줄기가 첩첩하고 초목이 울울창창하여 어디 하나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푸르고 칙칙한 숲이다. 길 옆 숲으로는 칡덩굴이 또한 무성하다. 최고봉이 사황봉이라는데, 어느 봉인지 알지 못한다.
오후 4시경에 산성의 전망대에 도착한다. 콘크리트를 재료로 하는 전망대의 전체적인 형태가 버섯모양이다. 초대형 버섯이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구월산의 줄기들과 계곡을 조망한다. 바다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물길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이 음력으로는 아직 8월11일쯤이라서 그런지 구월이면 단풍이 들어 가장 볼만하다는 구월산에 단 한닢도 단풍든 잎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푸르디 푸른 녹음이 가득하다. 이렇게 울창한 숲을 바라 보노라니, 그 옛날에 이 산을 은신처로 삼아 기득권 세력의 횡포에 저항했었다는 장길산 임꺽정 홍경래 김종벽 이정숙 등의 이름이 떠 올라 가슴이 아파진다. 산세가 이처럼 첩첩암암하면서 또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평야나 촌락이 인접해 있으니 능히 그럴만도 했을 것이겠다.
문득, 남가주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 하나가 생각난다. 19세기에 남가주 일원에 걸쳐 백인들의 목장에서 많은 말을 훔침으로써 악명을 떨쳤다는 Tiburcio Vasquez ( 1835~1875 )라는 Mexican Bandido의 행적이다. 일당과 함께 LA에서 가까운 Mt. Hillyer(6,200’)나 Pacifico Mountain(7,124’)를 은신처로 삼아, Big Tujunga Canyon을 통로로 신출귀몰 들고 나면서 백인들에게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그러나 Mexican이나 Indian에겐 통쾌한 의적으로 선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산들의 산세는 추적자들로 부터의 은닉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이 구월산의 산세에 훨씬 못 미치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남가주의 산들은 이렇게 울창한 수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취약점이 된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 구월산이 불리한 면이라면 겨울에는 대개의 수목들이 잎이 다 떨어진 나목으로 변하기에, 그 은닉성이라는 점에서의 환경이 여름과는 크게 다를테고, 또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내야 한다는 취약점이 있긴 하겠다.
어쨌거나 이런 한가한 상상이나 하면서, 21세기의 어느 길목을 걷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늘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서 쫓겨야만 하던 그들의 입장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겠다. 범사에 감사할 일이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월리 부도( 보존유적 제1728호 )와 원정사사적비명( 보존유적 제1724호 ), 원정사 5층탑( 보존유적 제1726호 )을 살펴볼 수 있었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마도 인근의 어느 주민이 했을 법한 일인데, 차도의 한쪽 편에 곡식을 말리려고 널어놓은 것을 보았고, 또 뒤뚱거리며 걷는 여러 마리 거위를 몰며 차도를 걸어 가던 남자가 우리 차를 피하려고 서둘러 거위떼를 수습하는 광경을 보았다. 이 모두가 다 어린 시절에 일상으로 보고 겪던 정경들이어서, 사람사는 소박하고 포근한 느낌이 우러나면서, 다시 한번 그 옛날의 내 고향산천에 와 있는 것 같은 친근한 감회를 느껴 볼 수 있었다.
양각도호텔에 돌아와서 호텔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다시 구내매점에서 웅담과 자수그림, 책을 구입한다. $235어치이다. 이제 내일 하루의 일정을 마치면 모레는 이 북녁땅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다보니, 더욱 아쉬움과 기다림이 교차하는 그런 들뜬 심정의 밤을 보낸다.
구월산을 거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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