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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풀 이동순
개밥풀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 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날 큰 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낱鄂? 창작사, 1980
귀촌 이동순
귀촌(歸村)
빈집을 하나 얻어서 산골 살림을 차렸다 어느 해 과한 군불에 꺼뭇꺼뭇 색깔이 변한 붉은 패랭이꽃무늬 비닐장판을 걷어내다가 흰 밥알을 뿌린 듯 바글바글 널부러진 벌레알에 소름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도저히 못 살고 떠난 사람이 버리고 간 겨우 쥘손만 남은 몽당비로 흙 바른 서까래에 얼기설기한 거미줄 대강 쓸고 툇마루의 쥐똥 제비똥 긁어내고 버려진 농약병이랑 파묻고 장뚝간엔 방춧돌도 가즈런히 짜 맞추었다
천장의 파리똥과 묵은 세월의 때얼룩을 헌 신문지로 쓱싹 발라 놓고 등에 목물하고 방에 들어와 툇문 열고 앉으니 다 익은 앵두가 제풀에 호도독 떨어지고 가까운 골짜기
에선 오월 한낮의 뻐꾸기도 울었다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금강봄맞이 꽃 이동순
금강봄맞이 꽃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 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내를 건느고 공장을 지나
연탄가스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외딴 함석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종일 햇살 한 모금 들지 않는
뒤꼍 토담 밑에 다다른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장독대 가즈런히 반짝이는
시골집 뜨락을 그윽히 내려다보다가
갓 태어난 복슬강아지의
보송보송한 솜털에
가서 딩굴며 몸 부빈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동강 난 국토의 허리께 부근
철조망 치고 방공호 파대느라
뻘겋게 파헤쳐진
황토의 속살이 하도 애가 말라
그 속으로 사뿐 내려 앉는다
* 앵초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잎은 뿌리에서부터 뭉쳐서 나며 꼭지가 긺.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유월경에 흰 꽃이 예닐곱개씩 핌.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낫 이동순
낫
한번 성질 내면
온 산 다 뜯어 먹어도 시원찮지만
지금 그 성질 많이 눌러 놓고 있지
슴베* 곧은 조선낫 들게 갈아
이 산에서 번쩍
저 산에서 번쩍
온 산기슭 뻐들어 가는 칡넌출 후려가면
날 얇은 까끄랑 왜낫들
감히 따라들 어림도 못하지
쥘 손 헐거우면
아무 돌멩이로나 낫공치를 탁탁 치고
갱기를 손바닥으로 바쫙 죄어서
관우 장비 창칼 되어 동정서벌 헤처 나가지
까막눈에겐 기역자 글 가르쳐주고
살모사 능구렝이떼 멀리 쫓으며
어려울 땐 모든 낫들 한 곳에 모여
그 누구도 함부로 못할 광풍해일 되었지
밀어 깎는 풀낫 갈대 베는 벌낫
담배 귀 따는 담배낫
백정들 눈물로 고리 짜던 버들낫
반달 같은 논배미의 반달낫
물음표의 옥낫 왼손잽이 왼낫
안 쓸 때 녹 낄라 조심조심
숫돌에 매우 갈아 기름 먹여 걸어 두게
배고플 때 무우깎기 제격이듯
더부룩한 삼팔선 풀 깎는 날 꼭 있으리니
* 낫날의 한 끝이 자루 속에 들어간 부분.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닭집을 지나며 이동순
닭집을 지나며
팔려 온 수많은 닭들이
닭집 녹슬은 닭장 안에 모여 앉아
날카롭던 부리 끝도 꽉 잠기운 채
어느 공기의 틈을 보고 있는가
팔려 온 수많은 닭이여
남의 집 담벼락을 이어서 만든
따닥따닥 따깨비 지붕 아래서
사십줄에 접어든 닭집 여편네
알 밴듯 뚱뚱한 배를 흔들며
도마 위에 마구 던져 칼 내젓나니
사방에 흥건한 고운 핏방울과
털 뽑힌 너의 주검은 오히려 아름답다
진작 하늘 그리워 애태운 꿈이
닭집 녹슨 닭장으로 이어질 줄
이미 마련된 길이라 어이 알았으리
오늘도 핏내 자욱한 닭집을 지나며
인간의 횡포한 손길을 슬퍼하노니
구천의 닭들은 길이 눈 감으라
낱鄂? 창작사, 1980
대춘부 이동순
대춘부(待春賦)&
방 안에 매화는 피고 지고
이 아침 봄 눈이 흩날리노라
때까치는 으능나무에 둥지를 틀고
쌓인 건초들은 흩어져 빈 들에 깔린다
언 땅의 밑 어느 곳에서
작은 알뿌리들은
반짝이는 그의 실눈을 뜨고 있을까
마침내 이 나라에 봄은 오도다
죽은 풀들의 씨앗과
말을 잃은 사람의 말
이 나라의 강산에 살아나리로다
강물이 풀리어 흐르는 감격
만 리에 나부끼는 푸른 깃발
이 나라의 빈 들을 메우리로다
이 아침 흩날리는 저 춘설도
한식경 붐비면 그칠 것이니
오늘도 시린 발목을 어루만지며
찾아와도 별 볼일 없는 봄을 기다리자
낱鄂? 창작사, 1980
두엄더미 이동순
두엄더미
아침이면 찰찰 넘치는 요강을
마누라보다 먼저 두엄더미에 갖다 붓는다
세상의 버림받은 더러움끼리 옹송거리며
가슴 알몸 부둥켜 끌어 안을 때
겨드랑이 틈으로 배어나는 저 장엄한 기운
두렁길에서 이 겨울 해를 보내는
쇠똥 죽은 쥐 몽당비의 꽁꽁 언 것들
서로를 부추기며 속속드리 썩어 가노라면
저의 더러움을 비옥으로 깨달은 자
의 더러움은 이미 더러움이 아니다
모든 더럽고 천한 썩은 내 나는 것
혹은 그 비천 때문에 앉을 자리조차
빼앗겨 구석으로 몰려 난 길바닥의 것들은
이제 덜 마른 눈물자욱으로 달려 오너라
내 몸을 그대 땀기운과 짓이겨
목이 파리한 풀싹 한 잎이라도
제대로 피게 하려는 저 숭고한 두엄더미
의 살아있는 정신
물의 노래, 실천문학, 1983
따비 이동순
따비
입춘녘 바람결에도 괜스리 몸 서걱이는
뒤꼍 시래기 오가리 밑에
따비는 누워서
아쉽웁고 허전한 마음으로 누워서
아직 못 이룬 평생 꿈 하나에 애가 마른다
신나게 남전북답 오르내리던 젊은 날
저 너른 들판을 달려 가 들쥐 두더쥐의 소굴을 파 일구고
갈기 힘든 밭고랑 귀퉁이로는
주걱꼴 말발굽꼴로 만든 따빗날
번갈아 찔러 넣으면
모난 돌무지땅 엉거시 덤불도
성큼 딛고 가는 그의 발길 멈출 수 없었다
참나무로 뭉쳐진 다부진 몸매
한때는 손때 절어 빛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서슬 푸른 쇳날도 모지라진 채
묵은 흙때도 그대로
따비는 누워서
아쉬웁고 허전한 마음으로 누워서
이젠 이름만 남은 따비밭을 기운차게 일구어가는
개량식 삽날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따비, 그는 단 한번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들녘을 누비며
흙 위에 튀어오른 온갖 쇠붙이
불발로 녹슬어가는 저 불길한 지뢰밭을 말끔히 걷어내고
속 씨원한 남북관통도로 하나쯤 틔워놓고
입가엔 웃음 벙글벙글 피우며 눈감고 싶다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또아리 이동순
또아리
체신은 이래봬도
나 농삿일 웬만큼 한 몫 하오
짚북더기 뚤뚤 말아 볼품이야 없다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없으면
암소뿔도 물러 빠지는 우월 염천 등에 업고
논고랑 더듬더듬 하시는 우리 농부님네들
타는 목젖은 누가 가서 축여주며
쪼로록 쪼로록 보채쌓는
저 몹쓸 걸신 때려누일 새참 광주리는
무엇으로 받쳐 가리까
하기사 요즘은 세상이 좋아
털터리 경운기가 털털털털
참도 나르고 품앗이꾼도 실어 나르고 합디다만
없는 놈한테야 그것도 푼수에 넘소
여보소, 농부님네들
험한 시절에 험한 변 겪어내자면
저문 논두렁에 온몸 배배 틀고 앉은 배암처럼
독한 따뱅이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어야 하오
지금 사는 것이 사는 것 아니고
어렵기가 또아리 구멍으로 샅 가리는 격이지만
여차하면 그늘 속으로 날아가 꽂힐
한 자루 비수로 팽팽 옴츠려야지
아나, 농부야 말 듣소
이참 저참 홧김에 마신 술로 비틀거려도
가슴 속 또아리만큼은 절대절대 풀지 마소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마왕의 잠 1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1
맨드라미의 하늘도 시들어
꽃 피던 마을은 이제 처참하다
깨어진 자유처럼 풀씨 흩날리고
토종개들의 눈빛은
죽어서도 먼 바다를 머금고 있다
해안을 돌아온 아이들의 귀
재잘거리는 몇 개의 말미잘
잔잔한 어둠이 바다의 허공을 일렁이고
피로한 물풀의 잠아
너는 신의 발목을 안고 몸을 떤다
네 손바닥의 못자국을 뜯어내면
향나무숲으로 파고드는 햇살소리가 들리고
만상의 잠을 보채는 무형의 바람이 보였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2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2
잠은 폭우를 동반하고 와서
채석장의 돌이 되어 부서져 내린다
명절날 아침에 풍선 부는 하나님
대피리 소리로 돌의 잠을 예보한다
하늘의 창문을 열고
그대 눈썹 밑에 푸름이 다소 끼어 있다
그리하여 암석의 비 내리고
꽃밭에 한련이 피면
잠은 의미롭게 드러눕는다
가죽장화를 벗어놓고
국방색 담요를 둘러쓰고
오직 돌과 더불어 잠잔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3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3
쏟아지는 빗발의 잠을
검정우산 하나로는 걷잡을 수 없다
그래도 박쥐우산 하나 펴 들고
가등(街燈) 아래의 하룻잠을 받는다
깊은 등골 속으로 처박히는 잠을 향해
나는 오줌을 좀 누고
목덜미를 부르르 떤다
잠을 받으며 우산도 검게 떤다
바지단추 여며 닫고 돌아서는 빗발
속의 신(神)은 덧니 사이로 빠져
달아나려고 했다
그래서 검은 치통을 앓고 있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4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4
벽상의 과도를 겨누고
몇 개의 잠을 날려 보낸다
잠을 날리는 호궁(胡弓) 앞으로
가만히 날아가는 해동청 하나
잠은 그의 뒷덜미에 비치어
잘 익은 참외의 신선한 빛깔을 지난다
들끓는 하품을 쓸어내고
잠은 벽상의 녹슨 과도 위에서 부러진다
과꽃이 방 안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부러진 동면의 가지 위로 눈도 오지 않는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5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5
중리(中里)에서 온 부고가
가을비에 젖고 있다
괴로운 잠은 한밤중까지
그대의 공중에 뒤척인다
타는 장작 소리와
쓰러진 잠을 짓밟고 내리꽂는
마왕의 말굽소리
우리 모두는 잠을 잃고
길가의 목화밭에 숨은 맨발이다
추운 강물을 맨발이 걸어가고
이 나라의 왜가리 한 마리가
발톱 하나를 떨고 있다
오, 비는 부고 속의 젖은 불면이다
새벽에 잠은 중리의 하늘로 쏟아진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6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6
비와 잠은 동질의 것이다
비는 해바라기의 한 다발
젖은 꽃씨를 잠 재우고
밤중에 숨죽이고 흐르는
강물은 불멸의 잠이다
숲의 산맥 어디서나 잠깐 눈을 붙이고
찬비 맞으러 나간다
모발을 적시고 내리는 비
너는 연적으로 떨어지는
하늘소리를 듣고 있다
나는 눈감고 서서
물 묻은 잠을 턴다
낱鄂? 창작사, 1980
마왕의 잠 14 이동순
마왕(魔王)의 잠 14
가령 그들이 산수(山水)를 노래할 때
채찍 아래 무수히 찢기운 산맥이나
먹장구름에 짓눌린 바다가
요즘은 모두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도 꽃밭에 처박히던 별똥별 하나
우주의 밖으로 되돌아간다
가령 그들이 표류중에 보내오는
큰 파도의 아우성을 기록할 때
그대는 은하늘의 별들을 불러 모아
부러진 꽃나무를 고금에 슬퍼하라
몰아치는 시방세계의 칼바람이
구름 밖에 타오르는 번개를 본다
낱鄂? 창작사, 1980
무명초 이동순
무명초(無名草)&
차디찬 시멘트 축대 위 가파른 곳의
금 간 틈서리를 비집고 살던 풀포기 하나
바람결에 나 이렇게 잘 있으니 염려말라고
온 몸으로 흔들어 보이던 고갯짓이
지금은 어디 갔나 모진 비바람끝에 축대 무너지고
무지막지한 흙더미 그 위로 쌓이고 덮여
이젠 아무도 깔린 풀포기를 떠올리지도 않는데
더욱 까맣게 흔적조차 잊어가고 있는데
애잔한 한 포기 목숨 죽었는가 살았는가
즐겨 이곳을 찾던 채마밭 콩새들도 오지 않고
낯설구나 어제 모습 하루아침에 바뀌어지다니
허물어진 성터에 오른듯 마음만 소란할 뿐
내가 오늘도 기웃거리며 돌틈 뒤지는 것은
거친 흙더미를 솟구쳐 하늘로 파리한 얼굴 내밀
무명초, 네 믿음의 힘을 보려 함이다
물의 노래, 실천문학, 1983
물의 노래 이동순
물의 노래
부제 : 새도 옮겨 앉는 곳마다 깃털이 빠지는데
□ 1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
돌아가 고향 하늘에 맺힌 물 되어 흐르며
예 섰던 우물가 대추나무에도 휘감기리
살던 집 문고리도 온몸으로 흔들어 보리
살아생전 영영 돌아가지 못함이라
오늘도 물가에서 잠긴 언덕 바라보고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 꿈에 가위 눌리니
세상사람 우릴 보고 수몰민이라 한다
옮겨간 낯선 곳에 눈물 뿌려 기심매고
거친 땅에 솟은 자갈돌 먼 곳으로 던져가며
다시 살아보려 바둥거리는 깨진 무릎으로
구석에 서성이던 우리들 노래도 물 속에 묻혔으니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불러보아도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만 나루터에 쌓여갈 뿐
나는 수몰민, 뿌리채 뽑혀 던져진 사람
마을아 억센 풀아 무너진 흙담들아
언젠가 돌아가리라 너희들 물 틈으로
나 또한 한많은 물방울 되어 세상길 흘러 흘러
돌아가 고향 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 2
하고많은 마을 중에 하필이면 이 마을이
큰 물 담고 물막이 좋다고 소문들이 났었는지
총독시절 왜놈들이 이상한 자로 땅 재 가고
해방 되고도 하이카라들 지도 위에 줄 그어쌓더니
아무려면 사람 사는 곳 제 맘대로 어찌하려고
목침 고쳐 베고 좋은 시절 오기만 믿던 착한 사람들
풍수들은 황우쇠 들고 일 없으리라 장담하고
남향집 댓돌녘에는 향그런 햇살도 잘 들었지
그런 중에도 흉흉한 소문 잇달아 꼬리를 물고
논밭뙈기 세간살이 가차없이 물 들 것이라고
사람들은 두근거리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갔어
이 중에 서울관리들 몇 번이고 찾아 와서
돈바람 먼지바람 일으켜 놓고 떠나들 가더니
토지깨나 있는 것들 미리 집재산 처분하여
먼 곳으로 싸 묶어가도 한밑천 잡고 잘 살더라고
마을집들 하나둘씩 인정마저 감추어가고
눈초리에 무서운 핏발 기웃거리며 다니더니
흐르는 광음 수백년 마을도 물에 잠기우리라
어딜 가나 고향도 풍속도 마음마저 잃어버린
이웃들 멍하니 퍼질고 앉아 아무것도 몰랐다고
성주님께 눈물 반 조왕님께 울음 반으로 애원해도
무심한 신령님은 아무런 영험 보이지 않으니
에라, 이 놈의 세상 제 갈길로 가려므나
낮부터 한잔술 걸치고 실컷 푸념이나 돌리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곤한 잠에 빠졌는데
잠 속에도 큰 물이 들어 깜짝깜짝 놀래었더라
물의 노래, 실천문학, 1983
백마의 혈통 이동순
백마(白馬)의 혈통(血統)
부제 : 공손룡(公孫龍)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읽고서
무수한 말들의 마성(馬性)을 지키려는
꿋꿋한 너를 굳이 비마(非馬)라 하는 사람들의 강압에도
아랑곳없이 갈기를 나부끼는 말이여
이제 하늘로 오르는 고갯길에서 재갈 물린 쉭쉭거림만 더해가는
고단한 노동의 수레바퀴여
지난 겨울 마굿간 앞으로 희끗희끗 날리던 눈송이들도
감쪽같이 녹여 버린 시대의 모략이여
오늘 아침 붐비는 공원의 돌담곁을 쨍한 햇살 이마에 받고
방울 짤랑이며 걸어가는 너의 모습이 애처로워
나는 아들놈이 몰래 벽장 속에 감춰 둔 콩강정을
가져다 주었다 썩은 홍당무보다도 군둥내 나는 곡식보다도
어젯잠 우리 식구들이 음복하던 제삿밥보다도 너는
달게 먹더라 달게 먹더라
기쁨으로 히히힝거리기조차 하면서
하얀 구름덩이가 점차 용마로 변해갈 때
너는 여전히 아스팔트에 뒷굽 때리는 소리를 딱따악
낸다 자꾸만 높아가는 자기 콧대를 꺾으려고
귀털 속으로 우벼드는 독한 빈대를 몰아내려고
여물대신 강정 씹는 소리를 커다랗게 들려준다
오, 눈부신 갈기를 나부끼는 말이여
그러한 너를 사람들은 굳이 비마(非馬)라 하지만
한 맺힌 울음 삼키고 서둘러 떠난 너의 내력을 나는 안다
네가 평소 강정을 즐겨 먹던 한 마리 백마였음을
젊은 민주주의의 혈통이었음을
물의 노래, 실천문학, 1983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이동순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 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
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
파헤쳐 놓은 수도공사도 끝내지 못했는데
태어나리라던 아기예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여지껏 나무에 대룽대룽 매달려
애잔한 잎들은 팔랑이는데
못다 쓴 원고뭉치는 그대로 밀려 있는데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새들도 있는데
불현듯 불현듯 새해는 왔는가
기다리던 첫눈도 나리지 않고
적적한 마당귀를 덮고 있는 김장독 이엉 사이로
시궁쥐만 분주히 쏘다니는데
새해는 왔는가
헛꿈을 잔뜩 안고 돌아와 저 혼자 설레이는
놈팡이처럼 새해는 왔는가 와서 무얼 하려는가
모듬판에서 돌아오는 밤
이미 자정을 넘겨 볼에 스미는 찬 기운
텅 빈 호주머니와 마음 속으로
아무거나 새것이라면 마구 채워야 하는 걸까
해마다 와서 속절없이 가 버리는 것이
새해일까 나라는 깨어지고 깨진 틈서리는
서로 붙을 생각조차 품지 않는데
보리싹 파릇파릇 움 틔우는 저 들판이
후루룩 겨울참새를 허공에 뿌리는 그 속마음은
무엇일까
물의 노래, 실천문학, 1983
서시 이동순
서시(序詩)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꺾고
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
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 내려가고
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
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
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
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
가쁜 숨 가만히 쉬어 가고 있을까
이 아침에 지어 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
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성난 목소리로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 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
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
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얻었으니
하늘 아래 이 한 몸 더 바랄게 무어 있으랴
낱鄂? 창작사, 1980
수심가 이동순
수심가(愁心歌)
호랑나비의 날개를 만지니
우수수 바람 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바람은 거친 발로 과꽃을 밟으며
깊고 어두운 나라로 길 떠나갔다
오, 가을 꽃밭의 작은 풀아
큰키나무의 발 아래 엎드리고
이슬의 한 방울도 바랄 수 없다
더운 거미줄이 너를 둘러싸고
찬 바람에게서 몸 가려 주리라
일어서라, 서서 꽃 피어라
꽃밭에 마른 꽃씨만 남겨두고
여름은 이윽고 가버렸다
낱鄂? 창작사, 1980
아주까리 이동순
아주까리
아주까리의 가지가 익어서
아주까리밭의 풀잎도 익었다
그곳 세상에도 찬 바람이 오느냐
젖은 피마자의 껍질을 벗기며
황토 속에 갇혀 버린 가을을 생각한다
입추가 되기 전에 너는 떠나고
네 목소리는 먼 나라에서 오누나
끓는 물에 인동(忍冬)잎을 넣으며
전처럼 와서 그리운 향내를 맡으라
와서 끝없는 내 아픔의 울타리 되라
낱鄂? 창작사, 1980
어항 1 이동순
어항 1
갖추어야 할
모든 소도구들이 갖추어졌으나
지금은 고기가 살지 않는 어항이 하나 있다
바닥에 깔린 조약돌
작은 수궁(水宮)은 시멘트로 빚어 있고
무성한 물풀들은 플라스틱으로 돋아 있다
담수(淡水)도 충만하고
어항의 도구들도 제자리에 놓여 있어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던 사람들은
어느날 어항 속에 어른거리는 고요를 보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처음 보는 유령 같은 것이었다
말간 속살이 드러나 보이면
어항의 고기들은 다 어디 가고
등골에 와서 끼치는 소름처럼
난데없이 유리를 감는 퍼런 이끼
뜬 소문은 공중에 비등하는데
살러 온 고기들은 자꾸 죽어 나가고
이젠 아무도 어항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낱鄂? 창작사, 1980
연탄갈기 이동순
연탄갈기
무엇이 다른가 불타고 지는 모습은
쪼그리고 앉아서 연탄 갈아 넣으며
우리들 살과 피의 왕래 없음이여
이 밤을 헤매이는 개짖음만 못하리
바람결에 살의 분노 소란한 땅에
한 줄기 이름 없는 풀잎이 산다
아무나 와서 보라, 저절로 자란 초록
그대 목침에 깔려 신음하는 신문지
가까운 들판에는 푸른 개똥이 마르고
지하의 풀뿌리에 서릿발 친다
내 살을 차고 노는 자여
아픈 머리 찬 물에 담그는 자여
낱鄂? 창작사, 1980
올챙이 이동순
올챙이
우리는 버림받은 자식인가요, 어머니
오늘도 뙤약볕 내리쬐는
논바닥에 한 웅큼 물 고인 곳을
그나마 물이라고 오르내리며
그게 마지막 헤엄인 줄은 몰랐지요
한많은 당신의 알보재기를 어머니
왜 갈라진 논바닥에 뿌리셨어요
있는 듯 마는 듯 조금 물 고인 곳이
처음엔 우리들의 고향인 줄 알았읍니다
하기사 우리들 고향이란 별것 있나요
하늘 아래 모든 늪이 내 집이지요
끊임없이 세상은 균열되고
우리의 작은 늪이 말라붙네요
날마다 황토물 속을 오르내리며
부글대는 거품만 삼켰답니다
아, 숨이 가빠져요, 어머니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헐떡이는 아가미를 축이고 싶어요
어찌해서 우리에겐 발이 없나요
아무리 소리쳐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저 무뚝뚝한 논두렁과
바위들의 냉담이 나는 미워요
우리는 끝내 논바닥에서 죽어갔지만
누구 하나 우리를 거두지 않았어요
망종 무렵 농부가 물꼬를 틔우고 나서
맑은 여울은 가만히 다가왔읍니다
여울이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때
우리들 버림받아 굳어진 몸은
푸른 물 위에 가비야이 떠서
아주 먼 곳으로 흘러갔읍니다
낱鄂? 창작사, 1980
잔설 1 이동순
잔설(殘雪) 1
우리가 생각하는 낮은 곳보다
더 낮고 험한 곳으로도 눈은 내린다
햇살에 저 매서운 빙정(氷晶)이 해체되기까지
눈은 내려서 내린 그대로 있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두는 눈을 밟는다
헌 구두를 신은 사람은 헌 마음으로
새 구두를 신은 사람은 새 마음으로
겉으론 태연한 척 눈을 밟는다
눈보다 흰눈을 우리가 밟고 갈 때
발길에 채이는 것은 눈의 순결이 아니라
순결이 아니라 우리들의 살점이다
눈을 밟으며 흰 살점을 도려내는
스스로의 아픔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그리하여 눈은 잠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진 후에도 돋아나는 비늘들
정말 무서운 것은 강한 햇살에 녹지 않고
구석에서 차갑게 번뜩이는 저 은비늘이다
단 몇 마리의 삶을 위하여
수천의 알을 깔기는 물고기처럼
끝끝내 살아남은 몇 점의 비늘을 남기려고
이 밤도 흰눈은 무작정 쏟아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낮은 곳보다
더 낮고 험한 곳으로도 눈은 내린다
햇살에 저 매서운 빙정이 해체되기까지
눈은 내려서 내린 그대로 있고 싶어한다
낱鄂? 창작사, 1980
종다래끼 이동순
종다래끼
할 수만 있다면
싸릿대로 이쁘게 엮은 종다래끼 하나
멜빵 달아 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 우리나라의 고운 씨앗을 한가득 담아
남천지 북천지 숨가삐 오르내리며
풀나무 없는 틈이란 틈마다 씨를 뿌리고
철조망 많은 무장지대 비무장지대
폭격 연습 한 뒤의 벌겋게 까뭉개진 산허리춤에다
온통 종다래끼 거꾸로 쏟아 씨를 부어서
저 무서운 마음들을 풀더미 속에 잠재우고도 싶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짚으로 기름히 엮은 종다래끼 하나
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
충청도 물고기 담아가서 황해도 시장에 갖다 주고
함경도라 백두산 푸른 냄새를 그득그득 담아와서
철없는 내 어린것에 맛보이고 싶어라
이남의 물고기 맛과 이북의 풋나물 맛이
한가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라
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우리나라는 하나여라 하나여라
하나여라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주검 옆에서 이동순
주검 옆에서
그의 옆에 서 있는 푸른 나무의
수많은 잎들은 작은 떨기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나
그는 이미 이러한 바람에 대하여
아무리 흔들고 싶어도 손을 흔들 수 없는
비좁고 난처한 네모꼴의 어둠에 누워 있다
그와 악수하고 다정히 눈웃음 주고받던
많은 그의 이웃들은 잊지 않고 찾아와
스스로 주체할 길 없는 슬픔에 흐느끼며
마냥 고개를 떨구는 것이나
텅 빈 어둠 속에 반듯하게 누운 그는
둘러선 온갖 사람들의 허전함 가운데
단 하나의 허전함도 알아보기나 할 것인가
흔들리던 나뭇잎들 하나 둘 떨어지고
모였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간 저녁에
그는 알게 될 것이다 다만 혼자였음을
세상에서 아끼던 그 무엇도, 주검이여
이제 그대에겐 전혀 소용에 닿지 않는다
맨 땅에 바람 불고 비 뿌리는 우울한 날에
모든 삶으로부터 떨어져 더욱 혼자였음을 느낄 때에
그대의 살과 뼈를 휘감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흙의 알몸과 마주 껴안게 될 것이다
아무리 흔들고 싶어도 손을 흔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홀로 말 없는 주검이여
낱鄂? 창작사, 1980
청이네 집 이동순
청이네 집
그해 여름 우리 식구가 와서 들게 된 이 집은 낡은 처마 밑에 짓다 만 제비집이 하나 있고 그 옆엔 작년에 살다 간 제비가 다시 오지 않는 제비 흙집이 하나 부서져 있고
거친 송판을 잇대어 낸 두어 팔 남짓한 마루엔 해묵은 쥐똥 제비똥이 한데 어울려 딩굴고 토끼장에는 토끼가 없고 이 토끼장에도 한때는 토끼가 살았다는 듯 토끼똥만 쌓여 있고
살 부러진 문짝을 가만히 열어보면 머리 큰 왕개미 다리 발 많은 고동각씨 음지로만 숨어 다니는 뭇벌레들이 꽃무늬 비닐장판 밑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고
지난해까지 이 집에서 혼자 살다 인천이라든가 어디로 식모 살러 갔다는 한때는 돈 많은 포목상의 소실댁이었던 수심 많은 청이네 엄마가 그의 답답한 속을 잠시 태우고 꺼버린 무수한 담배꽁초들이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
칠석날 밤 이동순
칠석날 밤
건넛집 외양 앞에서 모기 쫓느라 태우는 알싸한 쑥풀 연기가 고샅길을 건너오면 이윽고 밤은 저 장군목산 위에서 성큼성큼 걸어내려왔다
처마 밑에 석유등 켜놓고 멍석자리에 누워 별자리 더듬는 밤 옛 고담 속의 몽당도깨비에 서늘해진 아이들이 자꾸만 오금 밑으로 파고들면 풍뎅이 쇠똥구리들은 툭툭 등피에 몸 부딪고 나가 떨어지곤 하였다
어느 틈에 아이들 곤히 잠들고 삶은 감자를 양푼에 수북이 담아온 정순 어머니가 만주 흑룡강성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는 이젠 호호백발이 다 되었을 친정오빠 얘기를 코 훌쩍이며 들려주는 칠석날 밤
지금 그리운 사람은, 창작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