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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시.시조) 스크랩 고은, 『만인보』
여영 김영애 추천 0 조회 94 13.11.26 23: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인보』, 시대의 벽화

―“이미 불이 꺼진 세계가 빛을 얻었다.”



『만인보(萬人譜)』, 마침내 완간이다! 1986년에 세권을 낸 이래 25년 만에 완간의 위업을 일궈냈다. 『만인보』 완간을 일대 문학사적 사건으로 보는 것은 차라리 너무 무심한 문학적 인습에 지나지 않는다. 『만인보』, 장엄한 기획이다. 총 30권에 4001편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로 5600여명의 인생을 노래한다. 『만인보』가 불러일으키는 경이로움은 우선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방대함이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언어의 명명력 속에서 5600명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생생한 현존으로 되살아나는 기적 때문이다. 이때 5600명 개별자들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다. 만 명은 만 명의 상호호응으로써 만물의 세계상을 불러온다. 그런 점에서 『만인보』를 하나의 통일된 사회전기로 파악한 역사학자의 관점은 공감할 만하다.1)


시는 불가피하게 모국어에서 생명의 피를 수혈 받고 일어선다. 모국어가 없다면 어떤 시도 滿潮(만조)에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좋은 시인들은 모국어의 恩典(은전)에 대한 자의식이 투철하다. 모국어의 황홀경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가 없다. 모국어는 불가피하게 그 모국어를 젖줄삼아 우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日常凡百事(일상범백사)와 맞닿아 있다. 고은의 『만인보』는 모국어라는 커다란 연대 속에서 저마다 벅찬 역사의 파란을 떠안고 있는 萬人(만인)의 삶을 하나씩 하나씩 호명하여 거기에 맞는 작은 서사를 불어넣어 마침내 일구어낸 민족 대서사시다. 이때 만인은 시인이 호명할 수 있는 인구의 임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개별자의 경험적 세목의 圓融(원융)을 드러낼 뿐 그 실체적 의미는 희박하다. 흩어져 있는 만인은 동시대 안에서 연루됨으로써 그 개별성을 지우고 한 시대로 묶인다. 하나는 만인이고, 아울러 만인은 하나다. 시인이 『만인보』의 시작에 앞서 내놓은 시적 에피그램을 보라!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다 세계이다”(「서시」). 그러므로 『만인보』는 만인 속에서 한 사람 보기고, 한 사람 속에서 만인 보기다. 다시 말하면 만인의 삶에서 유추된 생명의 實相(실상), 더 나아가 개별자의 생체험을 민족의 총체성으로 수렴하려는 웅장한 시적 기획이다. 이는 세계문학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방대하면서도 탁월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다 세계이다

―「서시」


『만인보』는 이땅에서 나고 스러진 만인의 삶을 시로 담아낸다. 노름꾼·오입쟁이·장돌뱅이·엿장수·싸움꾼·샛서방·떠돌이·머슴·동네도둑·천덕꾸러기·미친년……, 우열이·상묵이·도식이·사행이·상필이·귀녀·병만이·은석이·봉순이·이종남·상식이……등과 같은 기명으로 호명되거나 무명씨·뱃속 아기·고아·재수생·택시기사 등과 같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익명의 어둠으로 부름을 당하는 무수한 장삼이사들, 거기에 고모·작은고모·큰집고모·왕고모·고모부·당숙모·외삼춘·큰외숙모·외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어머니……등과 같은 혈연들, 다시 거기에 무수한 고향 마을의 아저씨·아주머니·삼촌·영감·할머니·할아버지·여편네·마누라·아낙네들……, 한국 불교의 고승들, 문인들, 독재체제와 맞서 싸웠던 민주인사들, 이 모두를 아우르고 이승만·신익희·조소앙·박헌영·박정희·김대중·김영삼·노무현과 같은 현대사에서 걸출한 정치가들이나 이중섭·권진규·윤이상·천상병·오윤·와 같은 예술가들, 이난영·현인·남인수·김정구·한명숙와 같은 대중예술가들까지 아우르는 그 유례가 없는 엄청난 시적 기획이다. 한편 한편마다 나고 죽기까지의 갖가지 곡절과 애환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시로써 의연하다. 고은에게 『만인보』쓰기는 민족을 고립된 개별자의 욕망과 생명성, 대뇌의 형이상과 염색체에 새겨진 동물적 적나라함,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테두리로써의 경험적 분별세계에서 귀납하려는 역사행위이자 사람 일반에 대한 왕성한 시적 탐구일 터다. 감히 말하건대 『만인보』는 나와 너, 혹은 나와 세계 사이의 주종·표리 관계, 그 안에서 구비치는 사람의 파렴치함과 반인윤성, 이념의 파괴성을 드러내는 개별자의 삶을 기리는 비문(碑文)이며, 그 비문들이 모여 만든 우리 파란과 격랑의 현대사 벽화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과 죽음을 시로 불러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부름을 “호명된 것을 더 가까이 가져옴”2)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이쪽에는 부재한 저쪽의 사람들이다. 그 부름은 아무리 하찮은 무명씨를 불러낼 때조차 장엄한 의식이다. 혈연을 중심축으로 하는 유년기의 기초환경에서 일제 강점기, 분단, 전쟁, 산업화시대,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사형으로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부름은 접혀 있는 것의 펼침이고, 없는 것의 불러냄이다. 그러니까 부름은, 다시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저쪽, 먼 데 있는 것들을 “부재함에 가려진 그런 현존함”3) 속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시인의 부름을 받은 만인은 부재의 심오함을 뚫고 현존의 씩씩함으로 솟아난다. 사람의 象形(상형)이 삶의 상형이요, 만인의 상형 안에 세월의 무늬가 새겨지고, 역사의 얼룩이 스며듦으로써 공공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개별자의 傳記(전기)는 곧 사회적 전기로 전환한다. 그리하여 『만인보』는 만인의 운명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요, 만인을 아우르는 인물 열전이요, 아울러 문화인류학적 민중 탐구 보고서다. 그 끝에 열린 것은 가히 “이 세상의 만다라”(만인보』 제13권 6쪽)인 것이다.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 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다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 담아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한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어머니」일부


『만인보』의 시작은 시인이 겪은 어린시절의 기초 환경이다. 거기에는 고향과 인근 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고모, 증조할아버지 들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노래하는 것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가마타고 시집 와서 쓴 시집살이를 겪고 농업노동의 고됨 속에서 자식을 낳아 길러야 했던 어머니다.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한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던 어머니는 시인의 어머니면서 동시에 만인의 어머니다. 시인의 기억 안에서 여전히 생동하는 가난의 실감과 함께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어머니는 내 실존의 근거가 곧 고난임을 말해준다. 『만인보』에서 고난을 피동적으로 수납하는 여자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물고생 불고생 실컷 얻어 하다가 / 병든 몸으로 가난뱅이 친정에 왔다”(「다홍치마」)는 영자는 잘못된 혼인으로 인생이 어그러져 참혹해지는 어머니의 또 다른 시적 현신인 것이다.


고향에는 밤이 있다

한없이 이 환한 대보름 뒤의 달밤이 있다

잠 깨어 뒷간에 간다

벌써 요강 넘쳐서

바깥으로 나가 뒷간에 간다

자지러지게 환한 밤

건너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

참수리가 공중에서 먼데까지 보듯이

병아리 보듯이

멀리 멀리 바위배기 상여집까지 보이는 밤

보름 쇠고 치던 징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

가슴 설레어 천리길 나서고 싶다

과부 자식 아니랄까

소문난 건달 창섭이 오줌 싸고 진저리치며

그 길로 휘영청 나서고 싶다

곰아 곰아 너 숨었거든

발바닥만 핥지 말고 너도 나와 성큼 나서보아라

환한 달밤 아쉬어 어찌 잠자누 잠만 처자누

―「대보름 뒤」


『만인보』는 인간의 새로운 발견이다. 아니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만인보』에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대보름 뒤」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을 감싸고 있는 달빛 환하게 비치는 고향 산천의 서사적 풍경도 있다. 방에 들여놓은 요강이 넘쳐 한밤중 바깥으로 나와 오줌을 누다가 바라본 대보름 뒤의 달밤 풍경! 모든 삶은 불가피하게 장소에서의 삶이다! 누구에게나 고향 산천이란 맹목적인 의지로 실존화 하는 장소다. 그런 맥락에서 고향 정주의 아득한 기억은 현존을 이 세계라는 지평 속에 着根(착근)시키는 실뿌리다. 그리하여 “자지러지게 환한 밤 / 건너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의 풍경은 어엿하게 기억의 주체 안에서 자기동일성으로 육화되어 실존의 일부로 귀속하는 것이다. 이때 그것은 존재 바깥의 그 무엇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 삶을 감싸는 외부가 아니라 실존으로 내부화 되어버린다. 따라서 풍경은 그 속에 새겨진 망각과 기억으로 얼룩진 자아의 발견 속에서 외부화된다. 장소와 인격의 결속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결속으로 삶의 일부로 내부화 되는 풍경들은 그 실재성으로 현존의 의미를 구획짓고 규정한다. 실향과 망향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은 주체가 고향-삶의 일체화에서 탈각되어 인격의 훼손을 겪으며 궁극적으로는 본질의 삶에서 내쳐지는 까닭이다.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작대기 뉘어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머슴 대길이」


『만인보』는 이땅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개별자로 호명하고 지금-여기로 부름으로써 세계 속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의 몸짓으로 살아나게 한다. 「머슴 대길이」는 하이데거의 어법을 빌리자면, “명명함 속에서 명명된 사물들은 사물들의 사물화함으로 불려”지며, 아울러 “사물화하면서 사물들은 세계를 펼쳐”내고,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머물고 그때그때마다의 겨를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삶조차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 지게작대기 뉘어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라고 불러냄으로써 세계의 빛 속에 의젓한 현존으로 저를 드러나게 한다. “대길이 아저씨 /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불러냄은 임산부의 태속에 있는 아기가 바깥으로 밀려 나오는 것 같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말은 존재에게 빛을 주고, 개별자로 하여금 구체적 실존의 겨를을 살아내게 한다. 끝내 호명되지 않은 것들은 어둠 속에 있을 것이며, 세계의 빛 속으로 저를 드러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님의 어둠 그 자체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것들은 그 부름 속에서 존재로 명명되며 “사실주의적 유토피아”(끌로드 무샤르, 「고은의 기쁨」) 속에서 한 사내의 사적인 삶, 즉 인생의 전기로 살아나는 것이다.


달치 포구도 포구라고

밴댕이젓 나부랭이 아니면

눈꼽조개껍질이나 흩어진 것도 포구라고

거기 선술집 다정옥 있다

다정옥 춘자란 년

꼭 단호박같이 생긴 년

작달말한 것이

챙길 것은

여간내기 아니게 챙기고 나서

한번 누워주었다 하면

요분질로 밤새워

사내 피 다 말리는 춘자

바람 되게 불어쌓는 밤

웬만한 사내 둘은 거뜬히 죽어나는 밤

땀 식은 껄껄한 몸 가득히

신새벽 담배연기 힘껏 빨아들이는

그 담배 맛에 죽었다 깨어나는 밤

―「달치 포구 다정옥」


「달치 포구 다정옥」은 주막집에서 몸 파는 작부인 춘자라는 여자의 사연을 담는다. “춘자”는 “머슴 대길이”와는 또 다른 구체의 세부 속에서 한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그 신산스러움의 낱낱이 드러난다. 밤새우는 요분질과 그 요분질에 사내 두엇 죽어나는 밤이라는 이 걸죽한 육담 속에서 “다정옥 춘자란 년 / 꼭 단호박같이 생긴 년”, “요분질로 밤새워 / 사내 피 다 말리는 춘자”라는 구절에서 구체적 현존을 드러낸다. “신새벽 담배연기 힘껏 빨아들이는 / 그 담배 맛에 죽었다 깨어나는 밤”에서 돌연 사실주의적 生彩(생채)를 얻는다. 이때 춘자는 「다홍치마」의 영자와 다르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 보며 / 앉아서 큰애기 되어 / 세상을 깊이 서러워 할 / 지나가는 사람 보며 앉아 있었다”(「나운리 가게」)에 나오는, 종일 점방을 지키고 앉은 주인집 딸의 미래적 현신이기도 할 것이다.


새 장터보다

묵은 장에 더 먹을 것 푸짐하다

그러나

빈털터리 아버지 따라간

상진이

그 많은 먹을 것 그냥 지나간다

침도 못 삼키고

눈만 켜고

이 세상은 절대로

먹고 싶은 것 공짜로 먹을 수 없다

돈 없이 먹을 수 없다

어린 상진이

열두 살에

진리 깨쳤다

배고팠다

―「묵은 장」


『만인보』의 시편들은 인간의 본질을 겨냥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生態(생태)를 직시한다. 「묵은 장」은 빈털터리 아버지를 따라 장에 나온 소년 상진이의 모습을 통해 가난의 생태를 드러낸다. 생태라는 것은 벌써 본질에서 존재사건이다. 그러니까 『만인보』시편들은 존재사건의 日誌(일지)들이기도 하다. 시인은 배고픔에 대한 생생한 시적 보고를 하면서, 열두 살 소년을 꿰뚫고 지나간 “이 세상은 절대로 / 먹고 싶은 것 공짜로 먹을 수 없다”는 진리를 되새긴다. 그 진리를 깨친 소년은 깨우침으로 배고픔이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고픔은 더 생생해진다.


시인에게 『만인보』쓰기는 죽음으로 인해 무와 부재로 돌아간 이들을 불러내 언어적 현존을 입히는 일이다. 아울러 그 무수한 타자들이 살았던 역사 내러티브(historical narrative)의 시간을 문학 내러티브(literary narrative)의 시간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체험으로서의 시간이 이야기된(narrated) 역사로서의 시간으로”4) 전환되는 것인데, 독자들은 이것을 『만인보』를 읽으며 그 독서경험 속에서 두 개의 중첩된 시간과 상호소통하며 수용미학적인 시간으로 바꾼다.5) 그리하여 우리는 『만인보』를 읽으며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광복과 분단, 전쟁과 혁명, 산업화 시대를 거쳐 1980년 광주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시간들을 추체험한다. 이를테면 「9·28수복 직후의 어느 풍경」과 같은 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도 역사 내러티브를 통해 서사적 기억 안에 봉인되어 있던 전쟁의 끔찍함을 近景(근경)의 체험으로 겪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아내가 빨갱이한테 학살당한 뒤

숨어 있다 돌아온

강기환이 치안대장이 되었다


마당 생솔가지불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치안대장 강기환이

빨갱이 김백철이 장모와

빨갱이 갬백철을

헛간 유치장에서 끌어냈다


치안대장 열서넛이

생솔가지불 둘레에 서 있다


강대장이 사위를 몽둥이로 쳤다

저년과 붙어봐

장모의 옷도 다 벗겨졌다

저년과 붙어봐 이새끼야

뭉둥이로 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위 김백철의 성기가 일어났다

장모를 뭉둥이로 쳤다 장모와 사위가 붙어버렸다


장모의 꼬인 두 다리가 풀렸다

장모를 쳤다

장모와 사위가 숨가쁘게 진행했다

이윽고

장모와 사위가 절정을 이루었다

멍든 등짝

핏물 튀긴 엉덩이 들썩이며

절정을 이루었다


강대장 담뱃불을 비벼 껐다

이런 짐승은 살려둘 수 없어


그의 총탄이

눈 감은 장모와

눈 감은 사위 김백철에게 박혔다


강대장은

다음 빨갱이 어머니와

빨갱이 아들을 불러냈다

또 뭉둥이찜질이 벌어졌다

비명은 차츰 줄어들었다

비명이 그쳤다 너무 쉽게 죽어버렸다

강대장 화가 났다

이새끼들

왜 이렇게 빨리 뒈져 썅!

―「9·28수복 직후의 어느 풍경」


세상에나! 이것이 전쟁의 리얼리즘이다. 「9·28수복 직후의 어느 풍경」이 보여주는 것은 전쟁의 풍경이다. 전쟁은 人倫(인륜)을 파괴하고 사람의 마음을 獸心(수심)으로 바꾼다. 서로 죽이고 죽이며 미쳐 날뛰며 그 무수한 주검들을 밟으며 악의 무한순환으로 달려간다. 아들을 죽이고 죽은 아들의 간을 꺼내 어머니의 입에 물도록 강제한다. 목총 개머리판으로 치고 또 치며 기어코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들의 간을 물고 / 동네를 돌아다녔다.”(「송호식 모자」)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사람들은 어제가지 우리가 알던 그 삶이 아니다. 그들은 악마고, 괴물이며, 殺人鬼(살인귀)다. 이들은 지옥에서 온 괴물들이 아니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명씨”들이다. 개나리가 한창인 봄날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을 내려다보고, 약수동 네거리 식당에서 곰탕 한 그릇만 사먹었으면 좋겠다고, 막걸리 한 사발만 마셨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을 품은, 숭고할 것도 없고 사악할 것도 없는 “무명씨”들(「봄날 무명씨」)! 그들은 외부의 침입자들이 아니라 “우리 자아 안에 있는 억압된 타자의 드러남”(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일 뿐이다. 사람을 人面獸心(인면수심)의 극악무도한 괴물로 간단하게 바꾸어놓는 이런 광기와 착란의 시대를 뚫고 새로운 생명들은 나타난다. 


여자 시체 옆

아기 시체 있더라

시체가 아니었다 꿈틀거렸다

오호 어린 목숨 하나 꿈틀거렸다

―「아기」


어린 생명은 가여운 것, 움트는 기적, 세상을 밝히며 오는 새벽빛이다. 그것이 어여쁜 것은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진부한 악들, 광기와 착란들을 무찌르고 정화시켜 마침내는 세상을 순정한 그 무엇으로 갱신해내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악에 오염되지 않은 어린 것들은 인류의 미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수많은 주검들 속에서 살아 있음의 눈부심, 생명의 어여쁨을 노래한다. 포성과 포격의 광란 속에서 자라남, 그리고 살아있음은 보람이고 어여쁨이며 자랑거리다. 주검들은 살아있음의 어여쁨에 견주어 볼 때 추악함이고 추문이다. 주검들이 아니라 자라남과 살아 있음만이 화엄 세상을 일구는 기초적 토양이다. 


이렇게 살아 있다

이렇게 자라나고 있다

그 포성 속에서

그 폭격

그 굶주린 후방에서

이렇게 어여쁘게 자라났다

―「국민학교 운동장」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는 것이 폭력이다. 사람이 폭력의 강제 속에 놓일 때 세상은 기괴한 타자들이 날뛰는 無間地獄(무간지옥)으로 바뀌고, 사람이란 한낱 “냄새나는 가죽 주머니”들에 지나지 않는다. 숱한 생명들이 가축처럼 도축되는 이 살벌한 지옥 속에서도 어린 생명들이 일궈내는 생의 황홀경은 불가피한 일이다. 먼저 온 사람이 죽고 늦게 온 사람이 새 생명으로 융성해지는 것이 사람의 생태학이고, 그 생태학으로 일구는 사람살이의 장엄-역사다. 고은의 시적 통찰력은 포성과 폭격 속에서,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어여쁘게 자라는 어린 생명들을 노래할 때 늠름해진다. 이때 어린 생명은 무릇 생명 현상의 숭고함을 摘示(적시)하며, 생명의 찬란함으로 주검의 칙칙함을 추문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추악과 폭력들, 그리고 진부한 악들을 지양하고 있어야만 될 세상을 향하여 열린다. 


끝내면서 : 『만인보』, 무명씨들을 노래하다


진작 산새들이 다 할머니였고 어머니였느니


다만 나는 짐승가죽 옷 입은 조상 1인이 아니라

수수천만 여러 삼실 핏줄 이어받은

슬픔 어둠 이슥한 밤인 만인입니다

내일의 만인입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일지

천년 묵은 기와 수막새 한쪽으로

속속들이 뼛속까지 보이는 거울 하나 만들어내는 그 사람일지

아 신록 며칠 또는

입에 거품 문 순 건달일지

―「무명씨」부분


“무명씨”의 삶들이 모자이크로 촘촘이 박혀 민족이라는 큰 그림을 이룬다. 1인은 그냥 1인이 아니라 만인 속의 1인이다. 이때 “무명씨”란 너와 나의 경계가 지워진, 시인의 말에 따르면, “자아의 궁극인 무아”인 것이다. 개체가 녹아서 전체로 융합한다. 그런 까닭에 『만인보』는 하나가 만인으로 轉移(전이)되고, 接移((접이)되는 사태다. 그리하여 一卽多(일즉다), 즉 티끌 가운데 존재 일반을 내다본 세계다. “수수천만 여러 삼실 핏줄 이어받은 / 슬픔 어둠 이슥한 밤인 만인입니다”라는 구절은 무아로 돌아간 “무명씨”를 노래한다. 무아의 상태에 이르면 선악이나 미추의 분별마저 뜻없다. 고은은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고 또 그이고 누구이고 그 누구는 또하나의 나이고…… 의 종결 없는 삶 그것이다. 諸行(제행) 그것이다”6)라고 쓴다. “너 없는 나도 없고 나 없는 너도 없으니”(한용운) 생명과 생명은 하나로 이어져서, 마침내는 무장무애의 경지에 이른다. 『만인보』가 궁극적으로 “무명씨”의 노래인 것은 실명으로 노래되는 많은 사람들조차 실은 “아무나”의 범주 속에서 그들의 한과 절망, 오욕과 누추함, 이룸과 실패를 보편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만인보』에서 진부한 악인 열전을 시로써 적을 때조차 시인의 어조가 너그러워지는 것은 “타자들의 가없는 하나하나의 진실”에 가 닿으려고 시인의 마음이 열린 상태인 까닭이다. 타자를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은 타자를 관용적 이해 속에서 받아들이려는 인간애의 발로이고, 바로 그것이 연민의 본질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인간애의 핵심이다. 연민의 본질이며 도덕성의 시작이다.”7) 『만인보』가 닿으려는 핵심적 진실은 인간애다. 인간애로써 會通(회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만인보』의 바탕에 깔린 참마음이다. 연민이 살아나고 도덕이 숨쉬는 “무명씨”들의 세상이야말로 華嚴(화엄) 세상의 기초다.

  

실로 한반도에 도래한 근대는 『주역』에서 말하는 바 明夷(명이)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내 밝은 기운은 하늘로 뻗쳐 널리 퍼지지 못하고 땅속으로 흩어졌다. 캄캄한 어둠, 그 악무한적 혼돈이었으니 사물이나 앞뒤 식별이 어렵고 해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은 어려웠다. 날개들은 꺾이고, 목숨들은 잘못 나아가거나 잘못 물러서는 바람에 초개와 같이 사라졌다. 자중하고 근신한 자들만 겨우 살아남았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 땅의 보살핌이 모자랐으니, 지혜의 시절은 아득했다. 그 시절을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은 다 明夷之者(명이지자)들이었다. 암흑에 의해 지혜가 가린 세상을 살아야만 하는 운을 타고났다는 얘기다. 그 수난의 역사를 헤쳐 오며 무명씨들은 온통 “잿빛 세상 잿빛 마음”(「봄날의 무명씨」)으로 살았다. 서서히 잿빛이 걷히고 있다. 고은은 고정된 일점투시법이 아니라 조선 산수화가들이 그랬듯이 시점이 산재한 채 움직이는 만점투시법으로 그 만인들의 삶을 하나하나 그려 마침내 거대한 시대의 벽화를 매조지한다.


1) 박성현, 「문학과 역사의 접점 : 사회전기로서의 『만인보』」, 고은 『만인보』 완간 기념 심포지엄, 2010년 4월 9일, 서울 프레스센터. 박성현은 『만인보』의 社會傳記(사회전기)적 성격을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인보』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인들의 이야기인 크로키적 개인전기들이 모여 조화롭고 통일 하나의 총체(ensemble)을 이룬다는 점, 결국 한 사회의 전기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2) 하이데거, 여기서는 김동규, 『하이데거 사이-예술론』(그린비, 2009)에서 재인용


3) 하이데거, 앞의책에서 재인용


4) 박성현, 앞의글


5) 이점에 대하여 박성현의 보다 상세한 지적은 의미롭다. “시에 타나난 등장인물들의 시대적 배경은 그들이 체험한 시간이고, 출판년도, 특히 작품이 쓰인 시기는 텍스트 혹은 내러티브가 창조된 시간이다. 전자는 저자 자신을 포함해 ‘그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인 등장인물들이 체험한 시간, 다시 말해 객관적 연대기 혹은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형식 속에서 주체들이 ‘살았던’ 시간이다. 고은 이 체험된 시간을 포착해 문학내러티브적 재현을 통해 객관적 시간 안에 놓음으로써 그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박성현, 앞의글)


6) 고은, 『만인보』제16권, 시인의 말, 창비, 2004


7) Iban McEwan, the Guardian(UK), 15 Sptember, 2001. 여기서는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이지영 옮김, 개마고원, 2004)에서 재인용.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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