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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의 등업인사로 글월 올립니다.
부족하고 어슬푼점 많더라도 애교로 봐주시고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900.
청계산에서 피눈물을...
산 계곡 길로 접어들자 개울물소리가 들렸다. 이 조잘 되는 소리가 얼마만인가 싶었다. 지난겨울 유난히도 혹독하게 추웠던 날이 많아 일찍부터 개울이 얼었다가 이제 서서히 날씨 따라 녹아 흐르니 잔뜩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포근한 봄기운과 함께 기지개를 펴고 달팽이가 딱딱한 껍질 속에서 가늘고 여린 촉각을 조심스럽고 여린 자세로 살그머니 뻗어 올리듯이 무언가에 짓눌러 언제부턴가 닫혀 있어 둔해질 대로 둔해져 있던 청각이 되살아나 곪은 상처자리에 새살이 돋아나 듯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개울물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몇 십 년 만에 한강수가 얼었고 유난히도 폭설과 함께 2월까지도 지독히 추운 날이 너무 많았었다. 그러다보니 마음까지 추위에 움츠리고 있었던지 개울 물소리조차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나이 탓 일 것이고 덩달아 추운 겨울이 길게 느껴왔던 것 또한 어쩔 수 없이 둔해지고 무디어진 삶이 흐느적거리는 감각이라 생각되었다.
특히 지난겨울이 길게 여겨지는 데는 나대로의 이유가 또 있었다. 추웠던 날씨 탓도 있지만 마음 편하지 못했던 일 들이 연일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파트 관리소장자리도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항하지 못하였다. 지나고 보면 하찮은 일로 주민의 극성스런 민원에 근무 분위기가 묘하게 꼬여 가면 그 아파트에 근무하기가 싫어지고 싫어지면 패를 보며 배팅을 하듯이 다음 판세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기회를 보며 옮길 자릴 찾아보거나 수소문하여 피신할 곳을 찾았다. 또 그 때마다 다행하게도 한 여름 날 소나기 피해 처마 밑이나 움막을 찾아들 듯이 간신히 피신처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번 겨울 역시도 너무 혹독한 시련에 부딛혀 돌파구를 찾느라 허둥댔다. 고민 끝에 결국 자리를 옮겼다. 고민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최선의 돌파구였고 나에게는 또 한 번 은혜를 입고 마음의 빚을 남기는 일이었다. 사실 잔인하고 지독했던 시련이었으면서도 그저 그런 거지하고 남들에게는 쉬운 표현을 하였다. 남들은 내가 그 토록 홍역을 치른 그 고뇌의 뒤안길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즐길지도 모른다. 홍수에 물난리가 났을 때 강둑에 서서 물 구경하듯 말이다. 고뇌를 타인이 그 깊이나 탁함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일행이 양재역 4번 출구에서 청계산행 버스를 타고 가서 「원터마을」느티나무가 있는 로터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안양에서 양재역까지 가서 양재역에서 다시 청계산입구까지 버스로 가야했다. 그런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하면 대략 1시간 30분 정도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약속된 집결지로 가지 않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 예정된 산행은 청계산 정상인 매봉임을 확인하고 정상에서 일행을 만날 요량으로 집결지 반대편인 안양 청계사 입구 쪽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돌출행동을 하는 것도 주말에 맛보는 일탈의 행방감이 주는 만용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는 아픈 진통이 있었고 그 진통이 멎자 새아침을 맞이하는 신선함과 함께 온몸에 상큼한 생기가 돌아 왠지 모르게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뛰쳐나가고 싶었고 더불어 오래간만에 나의 건강 상태를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과 함께 한 번도 청계산을 넘어가보지 못한 곳이라 이번 기회에 안양에서 청계산을 양재동쪽으로 넘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도졌기 때문이었다.
항상 올랐던 지점으로 내려오다 보니 작은 산이라도 종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행이 있고 산행 후 뒷 풀이가 있어 항상 등정한 길로 풍뎅이처럼 되돌아 내려오다 보니 재미가 덜했고 늘 상 아쉬웠다. 그렇게 응어리지고 짓눌러 있었던 갈증 같은 것이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포근함 때문인지 안방 구들장에 감싸놓은 감로주가 숙성하듯 뽀글거리더니 넘쳐나고 말았다.
손이 시려왔다. 성급한 마음과는 달리 산 계곡의 아침 기운은 바람이 없는데도 아직은 쌀쌀하였다. 두 손을 비벼보다 배낭에 장갑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은 외피의 면장갑을 꺼내 꼈다. 이 면장갑은 4-5년 전 등산로 입구에서 한 벌을 5천원에 산 것인데 겨울산행 때 만 사용하다보니 이미 낡아 본전은 했다고 생각한지가 오래됐지만 그런대로 아직 헤지지 않아 가을부터 봄까지는 배낭 옆구리 주머니에 늘 상 넣어 다닌다. 지난 1월 그렇게도 추웠던 날 스키용 장갑 같은 것을 껴야하는데 이 외피 면장갑 두 장을 끼고도 손이시러 고생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뒤에서 두런거리며 따라오던 젊은이들이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갔다. 묵묵히 혼자 앞만 보며 한참을 걷다보니 금 새 장갑 낀 손이 훈훈해지며 온몸에 답답함이 느껴오며 더웠다. 한창 급경사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다 겨울옷에 바람막이 고텍스자켓까지 겹쳐 입고 있었으니 몸이 더워지면서 땀이 조금 맺히나 싶더니 금세 갑갑하고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고개 들어 앞길 전경을 살피니 조금 위로 경사진 능선이 보였다. 희뿌연 하늘이 열리고 능선을 따라 가지가 성성한 활엽수가 어지럽게 서로 가지를 엇대어 걸치고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후끈거리는 자신을 달래며 능선까지 단숨에 올랐다. 능선에 닿아 보니 휴식할 공간이 있고 꽤나 넓은 길이었다. 「국사봉」을 향하는 오르막 능선 길과 우측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장갑과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스틱을 꺼내 길이를 조절하고 「국사봉」을 향할 채비를 하고는 배낭 주머니에서 손가락 끝이 없는 반장갑을 꺼내 끼었다. 스틱은 늘 한쪽만 가지고 다니는데 스틱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이 장갑을 꼈다. 꽉 죄여주는 감촉에 저절로 힘이 주어졌다.
능선에는 상처 입은 키 큰 활엽수 밑둥치를 수피보호를 위해 흰 천을 감아두었다. 한 두 그루가 아니라 능선 따라 줄지어 가며 띄엄띄엄 건너뛰며 수많은 나무들을 붕대를 감아두었다. 나무 밑둥치에서 사람 키 높이까지 하얀 천으로 두르고 곁에는 비닐로 감쌌다. 상처를 보호하고 벌레들의 침해를 방지하는 살충제을 흰 천에 함께 묻혀 나무를 감싸고는 비닐로 싼 외피가 보기에 흉할 정도로 눈에 거슬렸다. 아마도 태풍의 휴유증으로 이곳 깊은 산속 나무들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나무들이 송두리 채 넘어졌고 뿌리를 들낸 고목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나마 등산길 주변에는 그런 나무들을 톱으로 잘라 정리했으나 아직도 널 부러져 있는 상처 입은 수목들의 아픔이 아스라이 느껴지고 전해왔다.
사실 지난 가을 태풍「곤파스」로 나 역시 아파트 피해 복구공사 때문에 벅차고 힘든 나날을 보냈다. 옥상의 싱글지붕과 지하주차장 트렌치 지붕들이 날아갔고, 세대의 샷시 창문이 수없이 깨지고 심지어 옥상의 안테나가 떨어지며 거실 방까지 날아 들어갔다. 화재수신반이 낙뢰로 작동불능이 되었고 태풍이후 계속된 비로 옥상 층 세대에 누수현상까지 이어졌다. 옥상 층 세대가 비에 누수가 되니 천정의 석고보드가 내려 앉아 아래로 쳐지는 곳은 송곳으로 물구멍을 내고 그릇으로 물을 받아야 했다. 천정에서 벽체를 타고 흐르는 물은 아랫집으로 이어갔다. 보험회사와 협의하니 옥상 층 누수는 천재지변이라도 간접피해로 보험처리가 안된다고 하는 얘기가 나돌자 피해세대가 관리 불실이니 보상하라며 관리사무소로 민원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몇몇 초고층세대의 베란다 샷시 주문도 문제였다. 두껍고 무겁고 덩치가 큰 이중통유리다보니 승강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한 두 세대를 보고 비싼 장비를 임대하는 것이 배보다 배꼽이었다.
넘어진 나무도 빨리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그 나마 뿌리 쪽에 공기에 들어가지 않은 나무는 흙 덕에 살 수 있을 것인데 며칠 경과하면 바람이 들어 모두 말라 죽을 판국이었다. 작은 굴삭기를 불러 나무 일으켜 세우기 작업에 들어갔다. 인력용역회사에서 2명을 불렀더니 그 중 한사람은 일을 좀 해본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몸이 피둥피둥 살이 찐 젊은이로 제 몸 간수하기조차 버거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불렀으니 하루일당을 줘야할 판이라 부지런히 줄이라도 잡아 주는 보조역할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간식은 두 사람 분을 먹고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꼼짝거리는 꼴을 못 봐 성급히 잡아당기다보니 금 새 내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터진 자리가 따가웠다. 일도 하던 사람이 하지 장갑도 끼지 않고 설치다가 며칠을 물 집 터진 손바닥 탓에 고생하였다. 다행이 태풍이 있은 다음 이틀 동안은 날씨가 좋아 나무세우기 작업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굴삭기로 당겨 바로 세운 후에 끈으로 묶어 당겨주는 것을 이틀간 작업을 하였으니 피해가 심했던 잣나무 숲은 옛 모습을 되찾으나 하얀 땅 거미줄을 친 것처럼 어지럽게 얽어 놓았다.
며칠 뒤 동 대표 회의를 하는데 대표 한사람이 제법 근사한 한마디를 하였다. “왜 소장이 임의대로 장비 부르고 나무를 줄로 묶어세우느냐? 세우려면 지주목으로 단단히 묶어 세워야지 줄로 묶어 놓으니 보기에 안 좋다” 하는 것이었다. “젠장! 누군 보기 좋으라고 줄로 묶은 줄 아는 가베. 하루 이틀 지나면 전부 죽을 판국이라 급히 세우고 뿌리 쪽에 흙 채워 수많은 나무 살려 놓았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판국이구먼” 싶었다. 지주목으로 세울 줄 몰라 안 세웠는가? 비용도 만만하지 않고 한 그루에 지주목 세우는데 시간도 걸리고 인부 손도 많이 가야하니 비싼 장비와 같이 일하려면 몇 그루나 세우겠는가? 우선 줄로 나무를 세운 다음 추후 지주목 사다가 받치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던가.
3월 중순이 되었지만 아직 지난겨울의 눈이 여태 녹지 않은 계곡에서 먼지 묻고 낙엽으로 오염된 눈얼음이 바위 틈새로 여기저기 보였다. 그 사이로 많지는 않지만 개울물이 졸졸 흐르니 봄이 오는 기운이 완연하였다. 배낭을 챙길 때 배낭 곁 주머니에 줄로 매단 아이젠을 오늘아침에는 풀어 놓고 왔다. 한 달 전 지난 2월까지도 도봉산 등반 때는 하산 길에 빙판길이 있어 요긴하게 사용했는데 이젠 3월이어서 오늘 아침에 배낭에서 풀어 놓았다.
「국사봉」을 향해 계속 걸었다. 산길은 이미 잘 조성된 육질(肉質)의 등산길로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가다보니 길 가운데 잔자갈들을 주워쌓고 있는 작은 돌무더기가 두 곳이나 있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한 두 개씩 모아 돌탑을 형성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저 지나는 이름 없는 나그네이나 하나씩 쌓아가는 무심한 돌덩이는 지나간 길손들이 남기는 손때 묻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듯하였다. 세월 따라 사연은 쌓여가겠지...
해발540m 「국사봉」을 오르니 먼저 온 이들이 몇 군데 자리를 잡고 여담을 즐기고 있었다. 살펴보니 주변경관도 어느 정상들 못지않게 사방으로 뻗은 모습에서 산세의 흐름과 수려함이 엿보이고 내려다보이는 평촌시가지가 안개 속에 포근히 다가오는 평화로운 모습에서 정상에서 맛보는 상큼한 기분이 젖어왔다. 오늘따라 이런 풍광에 느껴오는 평화로움과 상큼한 기분이 짙게 묻어나는 이유가 왜일까. 오늘따라,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가늠하기 어려운 착착함이 가슴에 어렸다.
엊그제 금요일 퇴근 시간 즈음에 들은 긴급뉴스 속보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말문을 닫고 그저 아연실색을 하였다. 「토코 대지진」이라고 붉은색으로 굵게 제목을 달고 다급하게 전해주는 뉴스를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그저 " 또 꽤나 큰 지진이구나 !“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화상으로 전해지는 「쓰나미」 현상의 가공할 위력을 시청하면서 엄청난 재난이 닥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나미」가 마을을 향해 덥치던 모습이 마치 영화「십계」에서 모세의 기적같이 바다가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을 연상케 하였다. 밤새 뒤척이며 늦은 뉴스를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를 지경으로 눈을 뗄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일을 걱정하며 지새운 밤이었다.
나는 착착한 기분을 떨꾸기라도 할 요량으로 열심히 산을 걸었다. 내가 건강한 자신에 스스로 감사하고 평화로운 생활에 가족들이 행복함에 고마운 마음을 가슴속으로 새기며 발길을 무심히 세고 있었다. 「이수봉」이 가까워지는 능선에 작은 헬기장이 주변에 키 큰 소나무 숲에 은폐되어 있었다. 펑퍼짐하게 다듬은 이곳은 제법 넓었는데 소갈머리가 다 빠진 내 머리통처럼 허연 공간으로 들 나 있었다. 여기에 햇볕이 살프시 내려쬐는 양지 바른 한 켠에 한 부부가 다정스럽게 앉아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는 모습에서 한자락 행복감이 괴어 있었다.
드디어 「이수봉」에 닿았다. 「이수봉」은 545m로 「국사봉」과 주능선을 연결되어 청계산 정상으로 너울지며 흐르고 있었다. 잠시 주변경관을 보며 숨을 고르고 이마에 맺힌 작은 땀을 지웠다. 희뿌옇게 적막감이 도는 사방이 또 하나 정상에 선 감회를 느끼게 하였다. 비록 짙은 안개 탓으로 멀리 조망할 수 없었으나 가까운 몇몇 산등성이가 안개 속으로 뻗어갔고 희미하게 꼬리를 감춘 능선은 수려한 산세를 짐작하기에 충분하였다. 짙푸른 소나무 숲이 띄엄띄엄하면서 울창한 참나무 숲이 이파리 없는 가지들을 어지럽게 잿빛 하늘을 향해 뻗치고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정상에 서면 다 가진 것 같은 풍족함이 서리고 괜히 우쭐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남동방향의 깊은 계곡 길로 찾아가면 성남방향으로 내려가 「옛골」에 이르는 등산로인데 내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옛골」에서 올라온 산사람들이 한두 명 또는 무리 진 팀들이 정상 언저리를 지나쳐갔다. 기어 다니는 것 무리 같기도 하였다. 그들은 내 곁으로 산비둘기처럼 다가왔다가는 능선 길 따라 또 흩어져 갔다. 바람소리, 새소리는 아직 없었으나 외롭지 않을 정도로 산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생동감이 흘렸다. 나는 늘 이러한 생동감에 매료되어 그저 오래 머무르고 싶은 충동에 저려왔다. 나무에 잎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바람이 불 때나 오늘처럼 이렇게 그저 잔잔할 때도 나는 느끼고 같이 숨 쉬며 그 생동하는 고동소리를 들어왔다.
몸가짐을 추스리고 조금 나아가니 세 갈레 길이었다. 바로가면 과천 매봉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 꺾어지면 청계산 정상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우측 길로 나아갔다.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어서 황토 빛 진흙이 맨발로 다니고 싶을 정도로 잘 다져져 있었고 곱게도 반들거리기까지 하였다. 간간히 바위 덩치가 길을 막곤 하였지만 다가가니 옆으로 휘어지며 다시 새 길이 나타나곤 하여 나를 즐겁게 하였다. 어쩌다 길 위로 나신을 들낸 뿌리를 볼 때마다 그 억척스런 삶이 경이로워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내 핏줄이 탁하고 막히는 것에 치를 떨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한때 끄윽 끄윽 하고 소리 없이 울먹인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그럴 때마다 순간적으로 내 가슴에 숨기고 다니는 값비싼 악세사리가 생각나 허리를 펴고 상체를 뒤로 제치며 가슴을 펴보곤 하였다. 가슴 한가운데까지 시원함이 전해오면 아직은 통수(通水)에 지장이 없구나 하고 몸을 사리곤 하였다.
길 가운데로 헬기장이 또 하나 있었다. 이곳 역시 몇몇 일행이 정상 정복의 여유와 함께 준비해온 간식을 나누며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옆길을 돌아 「매봉」을 향해 나아가니 여기는 아예 콘크리트로 터 잡아 만든 큰 공간의 헬기장이 또 있었다. 봄날 웅덩이에 올챙이 들이 오골오골 모여 헤엄치듯이 이번에는 한 떼로 무리 진 일행들이 옹기종기 패를 갈라 둘러 나눠 앉아 있는 것이 무슨 모임이 있었는지 포근한 햇빛아래서 한 때를 즐기고 있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고 안개가 있다하나 봄이 오는 길목의 바람한 점 없는 날이고 보니 그들이 산 정상에서 피워대는 잔웃음소리는 소나무 숲 위로 비누방울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계산 정상으로 나아가는 곳에 또 하나 작은 봉우리 「석기봉」을 지나니 우뚝 선 「망경대」가 앞길을 막고 있었다. 산길은 높은 지대여서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날카로운 바위를 양손으로 더듬게 하고 스틱으로 중심을 보조해야 할 지경이었다. 햇빛이 오래 동안 들지 않은 곳으로 눈이 마저 녹지도 않은 이 길은 질펀하게 물기가 젖은 검은 진흙밭길이었다. 조금 전 내 옆을 지나가던 한 무리의 일행 중에 한사람은 엉덩이에 흙을 잔뜩 묻히고 지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이는 아마도 이곳 어딘가에서 미끄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쾐 스리 나도 발길이 바들바들 떨리고 조심스러웠다.
잠깐 바위등걸에 앉아 바지가랑이를 양말 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랑이에 흙도 묻고 혹시나 발길에 걸리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조심에서였다. 더구나 일행도 없이 혼자 걸으니 낭패 보면 얼마나 볼품이 없겠는가 싶기도 하여 내 딴에는 체면 돌아볼 처지가 아닌 것이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응달진 나무 등걸과 숲 사이로 허옇게 쌓여있고 군데군데 녹아내린 곳은 검붉은 낙엽들이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죽어있었다. 질퍽이는 길은 물 끼가 삐쳐 나와 진흙탕을 이루었으니 한마디로 만신창이었다. 그 길옆으로 사람들이 낙엽을 밟고 지나간 새 길이 있어 다행이었다.
「망경대」는 유달리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주변을 압도하며 길손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한번 오르고 싶은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나는 바위들을 짚어가며 한참을 더듬거린 후에 간신히 「망경대」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었다. 우측으로 작은 「혈읍재」가 있고 청계산정상인 「매봉」이 가까이 보이고 조금 멀리 또 다른 정상이 보이는데 그곳은 철탑과 송신탑 같은 것이 보였다. 송신철탑은 나무 가지 끝에 앉은 달팽이가 촉각을 곧 세우고 있는 듯 하얀 속살이 내놓고 하늘을 향해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주변산세는 참나무 숲이 서로 매 마른 가지가 커다란 부채 살 같이 펼치고 서로 엇대며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짙은 잎을 드리운 소나무가 그들의 시린 허리를 감싸주듯 안아주고 있었다. 청계산 일대는 암봉이 거의 없는육산이라 별로 가슴에 느낌이 와 닿지 않는 그저 고만고만해 보이는 풍광이나무 숲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홀 깃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반이 다 되어갔다. “어디쯤예요?” 하고 핸드폰을 쥐고 외치니 정상을 1분 정도 남기고 있단다. 용케도 내가 남기고 있는 거리와 딱 비슷하였다.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였다. 허둥대며 「흘읍재」를 지나는데 노점상 막걸리기가 군침을 돋우었다. 이곳에는 이미 일진의 무리들이 한 순배 잔들을 돌리고 있었으니 참새 코가 그 걸 놓칠 리 만무하였다. 여태 한 모금 하지 않고 여기까지 날라 온 것이 내가 생각해도 용하고 대견하였다. 사실 「이수봉」정상에서 좌판대를 굳이 외면하고 참았었고 목마르다 싶을 때 마다 애써 챙겨온 물병을 흔들다 보니 물명은 이미 빈 통이고 고갈된 지 오래였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오늘은 술도 삼가고 음식도 조심하고 소식한다’는 다짐을 하고 온 내가 아니던가.
몹시도 망서러졌다. 그냥 지나갈 것인가? 한잔하고 갈 것인가?. 정말 망서러졌다. 잠시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을 회상해보았다. 장장 2시간 반이나 계속 걸었다. 달리 쉬는 시간 없이 근래 보기 드문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이정도면 한잔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도저히 참지 못하는 군침이 나를 먼저 삼키고 있었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자신에 핑계될 걸맞은 구실을 드디어 찾았다 싶었는데 내 발길은 이미 좌판대 앞에 우뚝 멈추고 있었다. 칼칼하고 메마른 목줄을 타고 내려가는 찬 기운이 알싸하다 못해 짜릿하게 느껴왔다. 땀을 씻으며 내려가는 찬 기운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발가락의 말초신경이 가늘게 떨려오며 전신에 뻗치는 생기가 느껴왔다.
“ 캬! 그래 이 맛이야 ! 흐흐흐 ”
빈창자 속을 향내 짙은 숙성된 막걸리가 스며드니 전신을 찌르는 알싸한 기분이 팽팽하고 바람 빠진 풍선에 바람 채우듯 전신이 부풀어 올랐다. 다시 한 번 주말에만 맛보는 일탈의 해방감이 전신에 스며들고 잔을 들고 풍광을 살피는 내 눈가가 가늘게 떨리며 이슬처럼 즐거움이 비치는 것을 아무도 보는 이는 없었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혈읍재」를 감아 돈다. 「혈읍재」란 ‘피눈물을 흘리며 운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 고개인데 연산군 시대 유학자인 정여창이 이곳에서 무오사화를 당하여 은둔생활을 하고 있을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사연이 궁금하여 오늘은 산행 후에 관련 글들을 찾아보았더니 뭔가 공감이 가는 것이 있어 여기 옮겨본다.
어린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오른 남이장군이 충정을 읊은 시가 있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을 칼에 갈아 없애 버리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을 말로 하여금 마시게 하여 없애버린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자 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말 하겠는가
당시 훈구파의 핵심인물인 유자광이 남이장군의 시중에 ‘未平國’을 ‘未得國’이라 고치고 역모를 꾀한다고 꾸며 왕이 되기를 노린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에 남이장군은 시 한 수 때문에 27세의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훈구파의 대립세력인 사림파의 김종직은 특히 이런 유자광과 사이가 극히 좋지 않아 서로 미워하고 질시하는 사이였고 오늘날 여야 같은 사이로 서로 앙숙으로 지냈다고 한다. 훗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었다는데,
노산의 시체를 숲 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내용은 “황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초나라 義帝를 조상한다.는 내용이라는데 이것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꼬는 내용으로서 ”단종이 세조에 의해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사건을 묘사한 것과 너무나 유사한 면이 있어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그 후세를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문이 김종직이 죽은 지 6년 뒤인 연산군4년 1498년에 제자 김일순이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직)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성종실록 史草에 적어 넣었던 것이다.
이때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 있던 훈구파의 이극돈은 김일순과의 사이에 반목이 있던 차에 이를 문제 삼아 연산군에 고하였다는데 평소 향락을 좋아하던 연산군은 선비들을 매우 싫어하던 차에 훈구파의 선동하는 꾐에 빠져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되었단다. 이로 인하여 김일순은 광화문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고, 이는 김종직이 훈구파와 대립되며 득세할 때부터 선동한 그 뿌리가 있다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단다. 김종직이도 시 한 수 때문에 두 번 죽었으니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훈구파 일당은 이극돈까지 제거하고 그리고 사림파 전체로 사건을 확대하여 죄를 묻는 바람에 정여창을 비롯한 김종직 제자들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 일련의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하고, 당시 이 청계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정여창이 이를 한탄하여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여「혈읍재(血揖재)」라고 하는 고개이름이 오늘에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연을 품은 곳이어서 그런지 과연 망경대와 매봉사이에 있는 작은 고갯마루는 산세도 험하고 경사가 심하여 당시로는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던 것이다.
수없는 세월이 흘렸어도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적끼리 서로 헐뜯고 모락하는 작태를 볼라치면 이「흡읍재」사연이 어찌 옛 이야기만이겠는가 싶었다. 권세 때문에 서로 헐뜯고 싸우는 비린내는 여전히 변함이 없음에 세상사 역겨움에 환멸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청계산의 정상「매봉」에 올랐다. 「매봉」은 해발582.5m로 최고봉은 아니다. 매 바위라 알고 있는 이곳은 서울 발치에서 가족들과 즐겨 찾는 명산이다.
「아무것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 되노라」
---유치환님의 시 “행복 중에서”---
시 한 구절을 따다 바위에 새긴 정상 「매봉」의 표지석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애써 땀 흘리며 찾은 행복이 결국 마음속에서 비롯되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구절이 어떤 시에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유치환 시인의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는 구절은 산을찾는 내가 즐거움에 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 기억하고 있는데 이 표지석의 싯귀 또한 바로 내 마음 같아 마음속에 담아왔다.
약속한 우리 일행들 중 선두그룹이 나타났다. 반가운 김에 손을 맞잡아 인사를 나누고는 모두가 도착하는 때를 기다려 「매봉」이라고 새긴 표지 석을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새기고 주변 풍광을 돌아보며 잠시 정상을 밟은 기분에 다들 한 끗 부풀었다. 정상 주변으로는 많은 등산객들이 올라와 저마다 준비해온 도시락과 간식과 먹으며 성급하게 때 이른 봄날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정상 아래로 흩어져 숲 사이에 둘러앉으니 새 때가 군무를 이루어 내려앉은 듯하고 등반축제의 행사장을 방불케 하였다. 매 바위 정상에 매 때가 무리지어 앉은 장관이었다.
이곳 정상에서 살펴보면 광교산과 백운산이 희미한 안개 속에 비등하게 구비쳤고 멀리 서울의 남쪽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과천문현동이 일대가 가까이 다가와 품에 안기는 듯하였다.
스무 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은 마땅한 쉼터를 찾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밀려오는 무리들을 피해 곧바로 하산 길로 들어섰다. 하산 길은 너무나 많은 목책계단이 계속되어 조심스레 앞만 내려다보며 걸었고 계단은 무릎에 무리가 되기도 하여 불편을 느꼈다. 목책으로 이어지던 계단길이 끝나는 곳에 「원터골 쉼터」가 있었다. 잠시 쉼터에 자리 잡은 우리일행은 정상에서 즐기지 못한 간식을 나눠먹고 담소를 씹으며 등정의 휴식을 한가롭게 즐겼다.
산 계곡을 내려오다 보니 두 능선이 만나는 낮은 협곡사이로 과천시가지가 다시 내려다 보였다. 저 멀리 얇은 안개 속으로 들 나 보이는 도심의 고즈넉한 아파트촌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허연 콘크리트 빌딩 무리가 멀리서 보면 숲속에 하얀 메밀 꽃밭을 연상하게 하듯 하얀 들꽃이 소담스럽게 펼쳐있는 들판 같았다. 계곡으로 내려오는 하산 길은 넓게 잘 다듬어 서울 근교의 명소답게 발길에 길들어 걷기에 좋았다. 계곡에는 많지 않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등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뒤는 산세를 따라 숲을 이루었고 계곡아래 멀지 않아 보이는 「원터마을」에서 부터 이어지며 산을 올라오는 나들이 온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우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하늘은 아침부터 뿌연 회색으로 온통 가려있었는데 오후나절이 되니 안개가 조금 걷히고 햇살이 기운을 차린 형상이었다. 따스한 기운이 도는 주말이라 봄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줄줄이 이어 오르고 있어 하산 길도 여전히 붐비는 것이 즐거웠다. 큰 개를 데리고 등산길을 걷는 시민이 있어 놀란 사람들이 몸을 사리고 길을 비켜주었다. “요즈음은 개도 등산하는 갑네!”하는 한마디가 개 뒤를 따랐는데 귀동냥으로 들리는 얘기인지라 씩 웃고 그냥 지나쳤다.
세상이 변해가다 보니 말 못하는 개도 대접받고 길도 양보 받는 좋은 세상임에는 틀림없었다. 한참을 내려오니 이번에는 작은 애완견이 목책계단을 기어오르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그러자 주인 같은 사내가 목줄을 낚시 줄 나꿔채듯 당기니 작은 개는 목줄에 끌려 대롱거리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계단위로 올려졌다. 그러고 보니 개도 정말 등산시키는 시대임에는 틀림없었다. 집구석에서 잘 먹이고 잘 재우니 피둥피둥 살 만 쪄 모처럼 나들이에 운동시킨답시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혹시나 하고 개 뒷다리를 살펴보니 정말로 통통하고 뱃살이 축 처졌다. 개를 데리고 가는 주인은 날렵해 보이는데 개는 비만이었다. 정말 개 팔자 상팔자인 시대인지라 목줄에 끌려가긴 해도 잘 먹고 잘 지낸 탓에 개에서 부티가 잘잘 흐르고 있었다.
얼마쯤 걷다보니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막 벤치에 쉬려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년 아니면 중학생인 아들 녀석이 벤치에 앉으며 숨을 헐떡이는데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 앞에 서서 패트병을 꺼내 건네주는 엄마,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아빠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을 근심스런 눈빛으로 살피고 있었다.
우리일행과 어우러진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하산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길가 나무들은 이파리가 없어도 곧 순을 튀 울 준비에 한창인 때였다. 고요하고 적막함이 서린 산속이지만 따스한 대지의 춘풍이 부는 자연의 섭리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바쁘게 약동하며 요동치는 고동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지난겨울에도 지지 않고 지금까지 앙증맞게 말라 오그라들어 붙어있는 청단풍 잎이 이젠 보기에 추하다 못해 군덕지로 보였다
돌연 가까운 어딘가에서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가 ‘두두두두’ 하고 들렸다. 주변을 살피며 소리 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좀 더 길게 나무 쪼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딲따구리도 집을 마련하는지 나무속 벌레를 사냥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으나 이렇게 길을 가다 들리는 소리에 숲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춥고 긴 겨울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가 없고 지금은 매 마른 활엽수의 마른가지들만이 우거진 곳이라 다른 산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새가 오지 않으면 나무에는 잎도 돋아나지 않는다’ 는데 아직은 산새들이 나설 때가 아닌 듯하였다 .
가족들과 나들이 나온 어린 녀석이 개울가에 폴싹 뛰어가더니 흐르는 계곡물을 내려다보다 물에 반쯤잠긴 작은 돌 맹이를 들고는 바닥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가재라도 찾는듯하더니 이내 돌을 던지다시피 내팽개치고는 손을 모아 입가로 가져가 호호거렸다. 응달진 나무 등걸에는 아직 잔설이 있고 바위틈새도 아직 얼음이 남아있으니 계곡물이 너무 차가웠던 것이었다.
산길이 끝나고 「원터마을」에 이르렀다. 즐비한 상점들이 길가에 갖가지 등산용품들을 내다놓고 있었고 골목마다 맛있는 음식점들이 저마다 상호와 함께 잘 차린 음식들을 간판에 새겨 넣어 산행 후 허기진 등산객들의 군침을 돋우고 있었다. 「원터마을」, 이곳 역시 청계산이 서울시민의 휴식처인 명산답게 많은 사람들이 뒤 섞이는 곳이 느티나무가 있는 로터리주변이었다. 오르는 사람들, 식당을 기웃거리는 무리들, 승차장에 버스를 기다리는 일단의 군상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고 크고 작은 차들이 길게 이어지며 꼬리를 물고 신호 따라 흐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노선버스가 회차하는 「옛골」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원터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이 「원터마을」등산길에는 사람들이 항상 많이 붐볐다. 조선시대 길손들이 쉬어갔다는 쉼터(院-휴게소)이 있었던 곳이라 알려지는 곳이라 그런지 하산 길에 잠시 쉬었던 곳 「원터골 쉼터」가 이곳의 옛 이름에 연유한 휴식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쉬지 않고 시원하게 달리는 길목이었고 산은 밀려오는 개발의 마수가 턱밑까지 죄여와 산자락을 갉아먹고 있었다.
동네를 가로지른 경부 고속도로 굴다리 아래에는 잡상인들이 좌판을 어지럽게 펼치고 있었다. 이곳은 사시사철 이곳 원주민들이 갖가지 잡곡과 야채들을 팔고 있는 특별한 구역 같아 보였다. 바람과 비 그리고 햇볕을 가려주니 야채장사하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겠는가 싶었다. 늘어놓은 바구니마다 담긴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써 붙인 이름들이 재미있고 수도 많아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깐 더덕. 맛있는 단 호박 건강식 도토리 묵, 웰빙 흑 콩, 집에서 만든 두부, 머위, 달래와 냉이, 상치, 생강, 풋고추, 콩나물, 고사리, 무 말 냉이, 곶감, 말린 대추, 봄나물, 미나리 등 다채로웠고, 특히 노오란 배추 속을 하나씩 뜯어 부풀러 쌓아놓고 있는 것이 꽃바구니를 연상케 하였고, 때 이른 쑥이 벌써부터 나와 손으로 다듬고 있으면서 이름도 모를 갖가지 식품들을 즐비하게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원터마을」먹 거리로는 콩으로 빚은 두부가 잘 알려지고 있는데 막상 길가에는 곤드레 나물 비빔밥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의 산행은 청계산을 넘는 종주라기보다 작은 산을 올라 이어지는 몇 봉우리와 능선을 타고 작은 정상을 넘어 반대편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평소와 달리 많이 걸은 것으로 걸음걸이가 뻐근히 무디어 왔다. 이렇게 많이 걷는 경우가 나로서는 주변에 있는 작은 산에서 몇 번의 경험이 있었다. ‘관악산’은 안양에서 과천으로, 안양에서 사당서울대로, 사당역 쪽에서 안양 운동장으로, ‘삼성산’은 안양유원지에서 사당 쪽 서울대로, ‘수리산’은 군포에서 병목 안으로, 병목 안에서 대아 역 쪽으로, ‘광교산’은 안양에서 수원으로 넘어갔고, ‘청계산’은 과천에서 인덕원으로, 과천에서 의왕으로, 대공원에서 안양으로 다닌 것이 고작이었는데 여기에 이번에 인덕원에서 「원터마을」로 넘어온 것이 하나 추가되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사실 오늘 따라 일부러 종주할 마음을 먹은 것은 어제저녁 초등동창회 모임에 가서 좀 과식하고 약주도 한잔한 탓에 10시 넘어 귀가하여 저녁운동을 하지 않고 그냥 자다 보니 쏟아지는 아내의 구시렁거리는 면박을 아침부터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내심 건강관리에 소홀하였고 어릴 적 동창들과 동심에 젖어 자신의 아픈 몸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동창회자리에서도 한 녀석이 며칠 전 집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가 각종 검사 받고서 지금은 귀가하여 집에서 요양하느라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화두로 시작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심에 젖어 자제력을 잃었던 것이었다. 자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어제 못한 운동의 몇 배를 오늘 해야겠다는 얄궂은 오기가 발동하여 종주를 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었다. 집사람한테는 양재동으로 가서 집결지인「원터마을」느티나무 앞에 간다고 하고서는 내심 자신을 채찍질 하는 기분으로 산을 넘을 생각을 갖고 집을 나왔던 것이었다. 이렇게 건강할 때에 그 길들을 다시 한 번 더 가고 싶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일손을 놓고 한가해지면 전국을 살펴 몇몇 친구들과 1박2일정도로 가볍게 넘을 수 있는 산길을 찾아 걷고 싶은 곳이 헤아려졌다.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소개로 내친김에 서울시의 추모공원이 건설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와야 할 곳을 미리와 본다” 며 너스레를 피우는 연배 드신 선배와 함께 조감도를 살펴보니 규모가 큰 의료시설이 건립되고, 사무실과 승화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추모공원 대부분이 지하에 설치되어 지상은 공원을 조성하는 친환경으로 설계를 한 것으로 앞으로 1년 정도 지나야 모든 건설이 끝나는 일정이었다. 죽음도 생활의 일부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젠 이런 추모공원도 이젠 더 이상 님비현상이 아닌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안아주는 공간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늦은 오후의 여린 햇살을 받으며 양재동꽃시장까지 걸었다. 꽃시장에 이르니 봄을 준비하는 시민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봄맞이 화목과 봄꽃들이 인기가 높은 때이고 지금부터가 적기이기 때문이다. 지피식물이나 야생화가 제철을 만나 꽃피울 날이 정말 가까워왔음을 실감하며 이제 사 긴 겨울의 여울은 정말 삭아지고 멀어져 갔는가 싶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봄은 어느새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끝.
2011. 3. 13 청계산 J. K Park
RmxRkwjd dlfrdjwntutjrkatkgkqslek = 끝가정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900
첫댓글 청계산에서 피눈물....."보다는 "위로받고 싶은날 청계산을 찿아서"....로 제목을 붙이는것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