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미의 극치, 한국의 문살무늬
창窓이란, 통풍과 채광이 목적이다. 방과 방을 연결을 뜻하는 호戶를 합쳐 ‘창호’라고 한다. 문살이란 창호의 살 짜임새에 나타나는 장식무늬를 말하는데 건물의 성격과 의미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문살은 예부터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다.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이는 한국 문살은 전통공예의 한 장르로 구분한다 해도 손색이 없다. 문살에도 각각의 표정이 있고, 사연이 담겨 있다. 내면에 담긴 의미를 표현하는데도 거침이 없다. 우리 민족만이 가지는 선험적 가치관이 오롯이 묻어있으며,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느끼는 시각적 아름다움은 자유와 개성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질서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사상과 철학을 담아 건물의 성격을 무엇보다 잘 표현해 놓은 곳이 문살인 만큼 사연을 알고 보면 한없이 깊은 멋에 전율이 인다. 이제부터 문살에 말을 걸어보자. 문살은 우리에게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 낙선재
건물의 용도에 맞게 문살의 모습이 결정된다.
문이란 고정된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안과 밖을 이어주는 소통의 연결고리이자 너머의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이기도 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건물 같지만, 문살의 모습으로 건물의 성격이 결정된다. 건물의 모든 요소에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마지막으로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듯 문살로써 마무리 짓는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문살을 만드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건물의 쓰임에 따라 문살도 달리 했다. 궁궐이나, 사찰, 양반가의 고택에서 그 성격을 잘 구분하고 있다.
나라의 안녕과 권위를 담은 궁궐문살
궁궐이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임금이 살던 곳이다. 웅장한 팔작지붕과 건물 규모에서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데 문살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나라의 안녕과 종묘사직을 위한 의지를 문살에 표현해 놓았다. 경복궁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근정전勤政殿이다. 이곳의 문살에는 격자비꽃살문을 단순화하여 조각했다. 언뜻 보면 약간의 조각으로 사방팔방 무늬를 겹쳐 견고함만을 추구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여섯 개의 꽃잎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꽃이 되었다. 현대감각으로 바라보아도 손색없는 그래픽 작품을 보는 듯하다. 그 가운데는 곡선이 모여 우연을 가장한 꽃 수술까지 표현해 놓았다. 꽃들이 연결되어 꽃밭을 이루고, 부귀와 영광, 그리고 임금으로써 가져야 하는 나라의 안녕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표현했다.
경복궁 근정전
왕비의 침전이자 내명부를 책임지던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이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은 특별히 촘촘하게 짜인 살문이다. 이것은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 발로였다. 촘촘한 것은 빛이 투과해 방안으로 은은하게 비추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은밀한 시선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묻어있다. 명작은 어느 구석진 곳의 작은 부분을 잘라도 멋진 작품이 되는 것처럼 이곳의 문살 역시 그렇다. 몇몇의 공간 면에 원색을 채우면 몬드리안의 작품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 버금가는 작품이 탄생될 것이다. 시각적 느낌뿐 아니다. 왕비라 하지만 여인의 생에 그리움이란 왜 없을까. 문살을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며 현실에서 오는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창덕궁 낙선재 문살을 보자. 화려함으로 치자면 절집에 미치지 못하지만 조선 24대 왕 헌종의 뜻에 따라 소박함을 강조하여 단청을 하지 않았다. 단아하면서 검소하고, 견고하면서 살짝 멋을 입힌 문살들의 축제다. 작은 창에는 완자문, 세로로 긴 문에는 변형된 아자문, 작은방 바라지창에는 촘촘한 우물살문, 띠살문 등, 방의 규모와 용도에 맞게 적절히 한 점이 이채롭다. 이곳에 서면 다양한 문살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낙선재에 묻어있는 덕혜옹주의 뼈저린 슬픔을 간혹 잊어버린다.
낙선재. 이곳은 문살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검소함과 상념을 담은 반가의 문살
양반가에서는 궁궐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주로 띠살문이 많이 보인다. 띠살문은 유교儒敎의 가르침인 사치를 배제하고, 검소하고 올곧은 마음을 뜻한다. 띠살문의 특별한 매력은 문살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빛은 아무리 수다쟁이라도 침묵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로와 세로로 일정간격 촘촘하게 짠 우물살문도 가끔 보인다. 이것은 야단스럽지 않은 반가의 단아함을 강조해 놓은 것이다. 함께 붙어있는 문살에 따라 우물살문을 다는 경우가 많다. 사랑채 양 끝 칸에 검소한 띠살문을 달았다면 가운데 칸은 우물살문을 달아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다.
청송 송소고택 작은사랑채
안주인이 거주하는 안채는 조금 색다르다. 경북 청송의 99칸 송소고택처럼 띠살문을 열면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亞’자살문의 미닫이가 하나 더 있다. 이중의 방문으로 이것은 미적美的 발로와 함께 계절과 날씨에 따라 여닫기를 다르게 함이다. 금남禁男 구역인 별당 아씨의 방문을 보자. 주로 헐거운 ‘아亞’자 살문이 많이 나타난다. 제한된 영역인 만큼 창을 통해 바깥 날씨의 표정을 읽을 수 있고, 시간에 따라 채광을 달리하며, 조금씩 빛이 변해가는 모습에서 소소한 아름다움을 찾았다. 외부로부터 격리된 별당 아씨의 마음을 한번 더듬어 보자. 늘 보던 사소한 풍경 같지만,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모습을 마주한 채 다소곳이 앉아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는다. 얼굴의 고운 옆선은 빛을 받아 볼그레 물들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빛의 무늬 진 모습을 보며 가슴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설렌다. 어쩌면 이것이 별당 아씨의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안의 반닫이와 반짇고리 등이 하나의 띠처럼 어울리고, 방문 하나로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되는 빛의 신기와 함께 담담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청송 성천댁
아름다움의 극치, 절집 문살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절집 문살을 살펴보자.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라 더 가릴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장엄세계莊嚴世界를 표현한 단청처럼 문살 또한 완전한 세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 하나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절집의 문은 나와 부처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고통으로 가득 찬 언덕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상인 피안彼岸으로 가는 경계이다. 그런 만큼 겸손도 없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려고 든다. 튼실한 우물살문도 많이 보이지만 우물살문도 견고함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멋을 부려 부처님 탄신을 축원한다. 절집문살에는 모란과 국화가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꽃이란 불교에 있어 깨달음이며, 불법의 상징이다. 경남의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처럼 다양한 꽃을 한곳에 모아놓은 살문도 있다. 불법佛法의 향기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담아 그야말로 문 그 자체가 꽃밭이며, 화려한 세상을 그림으로서 마치 달콤한 초콜릿 선물세트로 중생을 유혹 한다.
* 부안 내소사
인생은 찰나라는 교훈을 주는 곳도 있다. 경북 영주의 성혈사의 나한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비꽃살문과 연꽃, 동자, 두꺼비, 잉어, 학 등을 조각해 인간세상의 모든 소망을 담아 재미있게 풀어놓은 살문도 있다.
인천의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대웅보전 어칸의 사분합문四分閤門처럼 방금 채색한 듯 호화롭고, 화려한 색감의 모란과 연꽃이 청자와 진사자기에서 막 피어오른다. 이것은 어느 장인의 훌륭한 솜씨를 거침없이 보여주는데 부처님께 꽃을 바치듯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했다.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이곳 문살과 마주하면 마음속에는 풍요로 가득 차오르고, 은은하게 퍼지는 착각의 향기는 덤이다.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우리 전통문살의 아름다움
우리의 옛 미술품은 구조적 기교만을 자랑하지 않는다. 문살 역시 마찬가지다. 모습에 따라 세련된 디자인 작품을 보는가 하면, 솟을살문에는 미술학도들의 사방팔방의 무늬를 연상케도 한다.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문처럼 역동성도 담겨있고, 화려함에 넋을 놓지만, 실상은 소박한 소망도 있다. 여백의 미, 띠살문처럼 무덤덤한 삶이 주는 일상의 행복도 담겨있다. 연결이 주는 아름다움 극치, 길상만복을 염원하는 ‘만卍’자를 모티브로 한 완자살문이 주는 세련미는 가히 압권이다. 어느 그래픽디자이너가 있어 이토록 아름다움을 선사할까? 정제된 것 같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살을 따라 눈을 옮기다 보면 화합과 연결이 주는 질서가 가슴에 각인된다. 이 외에도 한국의 문살은 장수長壽를 뜻하는 ‘귀갑龜甲’살문을 위시하여 용자살문, 매화꽃살문, 꽃완자살문, 등 30여 가지나 된다. 조형미의 극치, 우리 전통문살이 주는 다양한 아름다움은 절대 고독도 순간에 녹여버리는 마법 같다.
문화재청 월간지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