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그림자
김재희
산속을 굽이굽이 돌아 너머에 있는 작은 학교, 그 학교 옆엔 사택이 있었고 그 사택 앞에는 두레박으로 퍼 올려야 하는 우물이 있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고등학생 시절에 결핵을 앓았던 나는 휴학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바깥출입이란 겨우 그 우물가에 들랑날랑하는 정도였다.
누군가 우리 집에 오는 날엔 작은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낮에는 방에 처박혀 책이나 보고 있었고 밤에만 바깥바람을 쐬곤 했다. 한동안 그렇게 유령처럼 살았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선홍색 각혈이 그리 두렵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런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가 더 벌건 상처가 되어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그저 사람 만나기가 싫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러웠던 날이 많았다. 그런 날엔 근처의 산 밑에 자리한 저수지를 찾아가곤 했다. 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신나게 놀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한바탕 울고 나면 하얀 백지장처럼 마음이 개운해졌다.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앉아 있노라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너울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때로부터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소녀시절을 보냈다.
붉은 자국 밑에 어리는 하얀 그림자, 굳어져 석회가 되어버린 하얀 그림자가 홀로 서기를 도와주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어느 날, 무심코 우물가로 나가던 내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누군가 환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 잠시 숨죽이고 있었다. 그도 무심히 달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주고받았던 감정이 밝은 달처럼 하얗게 빛을 발했다. 혼기 찬 여인의 가슴에 알 수없는 물결이 출렁였다.
달이 너무 밝아 모든 물체의 그림자가 선명했다. 그 그림자 속에 출렁이는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말없는 감정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물체들의 그림자가 선명한 검은 그림자였다면 내 마음속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하얀 그림자였다. 아무도 모르는 해맑은 하얀 그림자. 그저 잠깐 스쳐지나가는 감정이겠지 싶었다.
그 잠깐의 감정이,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때 그만큼의 감정이 지금껏 그대로 가슴에 남아 있다. 어떤 추억 하나 없는, 그렇기에 아무 의미가 없는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이 있어 지나온 내 생이 그리 삭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음 한구석 그런 촉촉한 감정이 있었기에 내 주위의 사람들과도 따듯한 정을 나눌 수 있었으리라.
해 저무는 하늘가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생을 정리할 즈음에 이르러 보니 이루어진 것들보다 이루진 못한 것들이 아쉬워서 가슴 뻐근해지는 날이 있다. 요즘 들어 가슴 밑바닥 한켠에 새겨진 하얀 그림자가 더욱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