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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용과 기용의 차이
起用과 弃用의 차이
탁구신동에서 탁구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하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한 신유빈 선수에게 국민적 환호가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중국탁구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도 버려졌던 한 선수를 기억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신유빈이 14세 나이로 대한민국 국대가 되었지만 18세에 늦게 국대가 된 늦깎이 천재선수의 이야기인데요.
88올리픽에서 여자단식 금메달을 따고, 쟈오즈민과 복식을 이뤄 양영자 현정화조에게 패하고 은메달을 딴 천징 선수입니다.
당시 안재형과 핑퐁러브라인을 타던 중국여자탁구 에이스 쟈오즈민이 평소모습과 달리 부진해서 한중 양국 관계자들도 놀라게 했었죠.
陈静获奥运冠军后,为什么回国就被弃用,让她不得不远赴台湾
중국國代에서 대만省代로 밀려난 올림픽 금은동메달 선수
2023-09-19 09:52
发布于:重庆市
1988年,20岁的武汉姑娘陈静在汉城奥运会乒乓球比赛中获得了女单冠军,这也是奥运会历史上中国第一个女单冠军,因此陈静获得了无数的鲜花和掌声。然而让人意外的是,凯旋后的陈静却遭到弃用,最终不得不宣布退役,这是怎么回事呢?
1968年,陈静出生于武汉一户普通家庭。
陈静小的时候,乒乓球运动正风靡一时。不管是街道、机关还是政府,不管有没有场地,大家都能因陋就简创造打乒乓球的条件。陈静的父母就是一对乒乓球爱好者,所以在父母的影响下,陈静小时候也显露出了对乒乓球的热爱。为培养她的兴趣爱好,父母干脆把她送到体校学打乒乓球了。
还别说,陈静在打乒乓球方面很有天赋,而且她也特别能吃苦,这让她的启蒙教练认定她是个很有潜力的球手,所以在学习和训练上,教练总是根据她的自身条件,调整训练内容。这样一来,她很快就成为了同伴中最厉害的球手,而她也在不断的进步中找到了自信。
1979年,陈静在少年宫乒乓球比赛中获得了冠军,这也是她学球以来获得的第一个冠军。不过最让陈静高兴的是,这次比赛结束后,湖北省乒乓球队就选中了她,而她也从那时起,正式开始了她的运动生涯。
在省乒乓球队里,陈静得到了专业和系统的训练,她也特别能沉得住气,除了勤练基本功和体能外,陈静还有一个优点就是特别爱动脑筋,她在打球的时候,总是不断地考虑如何发球和接球。时间一长,陈静除了保持了传统以快制快的打法外,她还练出了反手弹击的绝活。除了极具进攻性,她打出去的球总是落点刁钻,节奏突然,在技术上更是凶猛又稳健。不论是进攻还是防守,她都无懈可击。所以她在队员中很快就成了佼佼者,并在多次比赛中打出了很高的水平。
不过,陈静进入国家队的时候,已经18岁了。说句实话,18岁才进入国家队,算是起点比较晚的队员了。而且国家队里的运动员都是各省、市顶级运动员,因此在这个人才辈出的队伍里。陈静不光要更加刻苦训练,同时她还要得到比赛的机会。因为比赛不光能获得荣誉,同时也能让一个运动员的水平得到提高。
陈静当然明白她能进国家队本属不易,但进国家队的目标还是希望能多参加一些国际赛事。她希望经过多年的训练,她能得到了个展示自己实力的机会。为了能得到这个机会,陈静把时间几乎都花在了训练和学习上,她的技术也突飞猛进。最为难得的是,她在训练和学习的过程中,还不断地调整打球的战术,以适应不同的对手。
1988年,乒乓球项目正式被列为奥运会比赛项目,这个消息让中国乒乓球队闻之欢喜,一时几乎所有的运动员都摩拳擦掌,都想在即将开幕的汉城奥运会上为国争光。
不过,按比赛规定,参加比赛的名额只有3个,因此当时队员们的竞争也十分激烈。当时队里的主力队员是焦志敏、何智丽、李惠芬与戴丽丽,她们不仅资格老,比赛经验丰富,而且都在世界乒坛很有影响力。而陈静虽然通过激烈的竞争走到了最后,但考虑到她没有什么比赛经验,因此她是5个人中最先被淘汰掉的。可是剩下的4个人不分仲伯,教练组也很犯难,于是在队内进行了一次投票。结果年轻气盛的陈静,在投票的时候没有投任何人,只是在上面写了一句:“你们为什么不用年轻队员?”正是这句话促成教练组改变主意,最终定下了她和焦志敏、李惠芬3人参加奥运会。
在奥运会乒乓球比赛中,陈静3人都表现不俗,并顺利地打进了半决赛。在半决赛的过程中,陈静战胜了捷克名将赫拉霍娃,而焦志敏在与李惠芬对决的时候,听从了教练组的安排,让球给了李惠芬,于是焦志敏在半决赛中被淘汰,而陈静和李惠芬则进入决赛。
在决赛前,教练组找到陈静,要求她让球给李惠芬,以确保李惠芬夺得冠军。其实陈静当时的状态非常好,和李惠芬的技术也不相上下。所以她只要打败李惠芬,就能夺得女子单打冠军。但教练组却认为李惠芬已经25岁了,考虑到运动员的运动生涯都比较短暂,因此李惠芬能不能参加下届奥运会还是个未知数,而陈静才20岁,以她的实力完全能打到下届奥运会。且到那个时候,她应该更成熟,技术也会更精湛。
但教练的理由并不能使陈静信服。在她看来,既然两人都进入了决赛,就没必要再出现让球的举动。所以她没有听从教练的安排,反而在赛场上全力以赴,最终打败了李惠芬,夺得了女单金牌,成为奥运历史上中国乒乓球第一个女单冠军。
原本为国家夺得荣誉的陈静,应该被当作功臣看待。可是由于陈静没有听从教练的安排,因此她在回国后受到了教练组的打压和排挤。不光她的主教练被换掉,而且在多场国际比赛的选手名单里,大家都没能看到她的名字。最让人不能理解的是,像她这样的奥运冠军,居然都没有获得1990年北京亚运会的参赛资格。
此时,中国乒乓球队的后起之秀也不断涌现,像邓亚萍、乔红等都脱颖而出,而陈静这名天才型选手却坐上了冷板凳。陈静对于自己的处境非常憋屈,而此时国家队领导又准备把她退回省队。在这种情况下,忍无可忍的她只能以“对乒乓球不感兴趣”为由宣布退役。这一年,她才23岁,正是运动的巅峰时期,也是人们寄予了厚望的希望之星,因此她的退役在当时让许多人感到非常惋惜。
恢复自由身后,日本立刻向她抛出了橄榄枝,邀请她到日本去做教练。而台湾宏基电脑乒乓球俱乐部也开出了优厚的条件,邀请她到台湾打球。经过台湾方面的努力,最终陈静以“杰出大陆体育人士”的身份,以文教交流的形式加入了宏基乒乓球队。
在台湾训练的时候,陈静发现自己除了一个奥运冠军的头衔,其他一无所知,所以她在训练之余,为了将来能继续从事体育事业,她还在台北体育学院攻读硕士学位。
陈静毕竟是世界第一的乒乓球高手,所以她在台湾不久就打败了所有队员,成为了台湾乒乓第一人。台湾乒乓球协会为了让陈静早日能代表台湾打球,因此在她居住满一年后,就为她办理了居留权和护照,使她能长期合法地留在台湾。
随后,陈静以中国台北队选手的身份重返乒坛,并多次在国际赛事上获得冠军。而她的强势回归,也成为了中国女子乒乓球队的强劲对手。当时归化日本的何智丽,已经成为了中国女乒的公敌,如今陈静也被称为是“叛逃”的运动员,所以她与何智丽一样,都遭到了国家队的批评。
对于国家队的批评,陈静倒是一笑了之。她表示她必须靠乒乓球谋生,再说了,台湾是中国的一部分,不存在叛逃。日本邀请她,但她并没有加入。此后,她只顾埋头刻苦训练,在不断的努力下,她的水平也恢复如初。
1996年,陈静代表中国台北队参加了亚特兰大奥运会。在乒乓球比赛中,她先后打败了中国香港选手陈丹蕾、何智丽与乔红,在女单决赛中,她和邓亚萍为争夺金牌的得十分激烈。两人的比分始终牢牢紧跟,然而谁也没想到在最后决定胜败的那场比赛中,陈静却突然不断失误,最终以5:21输掉了比赛,让邓亚萍夺得了金牌,而她只夺得了银牌。
很多人在看过那场球赛后,都认为陈静是故意让球,毕竟以她当时的状态,打赢邓亚萍并不是不可能的事情。但对于大家的疑问,陈静只是淡淡地表示,当时她确实分心了,才造成了失误。
2000年,陈静再次代表中国台北队征战悉尼奥运会,在那场乒乓球单打比赛中,她夺得了一枚铜牌。而她也因此成为了奥运会唯一一位集齐了金、银、铜牌的乒乓球运动员。
在悉尼奥运会结束后,已经32岁的陈静宣布退役,正式结束了她的运动生涯。此后,陈静在台湾又生活了一段时间,那段时间她拍广告、写书、做主持人……生活过得十分精彩。但陈静认为乒乓球运动在台湾并没有受到足够的重视,而她希望以后还能有机会把乒乓球作为事业发展,所以她于2001年回到大陆定居,并考取了华南师范大学的博士生。
如今,陈静一直生活在广州,她目前不仅是华南师范大学的心理学教授,而且她还在广州组建了一支乒乓球队,而她作为领队不仅要担负培养有天赋的乒乓球选手,同时她还经常带队参加各种乒乓球比赛。
不过,陈静虽然事业有成,但婚姻却迟迟没有解决,直到她在39岁那年遇到了国家体育总局排球运动管理中心的负责人徐利,两人一见如故。在经过一段时间的接触后,才双双走进了婚姻殿堂,并且直到现在两人还十分恩爱。
陈静之所以在经历了令人同情的遭遇后,还能迅速站起来,并一直活得很精彩,正是因为她身上有一种永不妥协的体育精神。正是在这种精神的激励下,她才不断努力向前。一个这样奋勇向前的人,生活又怎会辜负她呢!返回搜狐,查看更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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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징, 올림픽 우승 후 왜 귀국하고 버려져 대만으로 가야만 했을까?
2023-09-1909:52:충칭시 발표
1988년 20세의 우한 아가씨 천징은 서울 올림픽 탁구 여자 단식 우승이자 올림픽 사상 첫 중국 단식 우승으로 수많은 칭찬과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개선 후 천징이 국가대표로 기용되지 않아서 결국 은퇴를 선언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1968년 천징(陳靜)은 우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징(静靜)이 어렸을 때 탁구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거리, 기관, 정부, 장소가 있든 없든 누구나 쉽게 탁구를 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었죠. 부모가 탁구 애호가인 진정도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탁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녀의 취미를 키우기 위해 부모님은 아예 그녀를 체육학교에 보내 탁구를 치게 했습니다.
천징(陳在)은 탁구에도 재능이 있고 노렧까지 겸비하여 잠재력 있는 선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공부와 훈련에서 코치는 항상 자신의 조건에 따라 훈련 내용을 조절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내 동료 가운데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고, 꾸준한 성장 속에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진정은 1979년 소년궁 탁구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그가 탁구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징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이 대회가 끝난 후 후베이성 탁구팀이 그녀를 선택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 탁구팀에서 천징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고, 그녀는 특별히 안정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본기와 체력을 부지런히 연마하는 것 외에도 천징의 또 다른 장점은 머리를 잘 쓰는 것입니다. 그녀는 공을 칠 때 항상 서브와 리시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천징은 빠른 속도로 치는 전통적인 방법을 유지하는 것 외에도 백핸드 샷의 묘기를 익혔습니다. 매우 공격적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친 공은 항상 날카롭게 떨어지며, 템포가 갑자기, 기술적으로는 더욱 맹렬하고 안정적입니다.공격이든 수비든 그녀는 빈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선수 중에서 빠르게 최고가 되었고 여러 경기에서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천징이 국가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18세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18세에야 국가대표팀에 들어간 것은 출발이 늦은 편입니다. 그리고 국가대표 선수들은 각 성, 시의 정상급 선수들이기 때문에 이 인재들이 배출되는 팀입니다. 천징은 더욱 열심히 훈련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합의 기회도 얻어야 합니다. 명예뿐만 아니라 선수 개인적으로도 시합을 통해 기량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징은 당연히 그녀가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목표는 여전히 더 많은 국제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다년간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얻기 위해 천징은 훈련과 공부에 거의 시간을 할애했고, 그녀의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무엇보다 훈련과 학습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플레이 전술을 가다듬으며 상대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1988년, 탁구 종목이 정식으로 서울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는 소식에 중국 탁구팀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한때 거의 모든 운동선수들이 곧 개막하는 서울 올림픽에서 나라의 영광을 쟁취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대회 규정상 출전 정원이 3명밖에 되지 않아 당시 선수들의 경쟁도 치열했습니다.당시 팀의 주축은 자오즈민, 허즈리, 리훼이펀, 데릴리. 이들은 노련한 자격과 풍부한 경기 경험, 그리고 세계 탁구계의 영향력. 진정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막판에 이르렀지만 경기 경험이 별로 없는 점을 감안하면 5명 중 가장 먼저 탈락한 것. 하지만 나머지 4명은 중백을 가릴 수 없었고 코칭스태프도 난색을 표해 팀 내에서 한 차례 투표를 했습니다.결국 젊고 씩씩한 천징은 투표할 때 아무에게도 투표하지 않고 왜 젊은 선수를 쓰지 않습니까? 코칭스태프가 마음을 바꿔 자오즈민, 리훼이펀 3명과 함께 올림픽 출전을 결정했습니다.
올림픽 탁구 경기에서 천징은 모두 좋은 활약을 펼치며 순조롭게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준결승에서 천징은 체코의 명장 흐라호바를 꺾었고 자오즈민은 리훼이펀과의 맞대결에서 코칭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리훼이펀에게 공을 내줬고 자오즈민은 준결승에서 탈락했고 천징과 이혜분은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결승에 앞서 코칭스태프는 진정을 찾아가 우승을 위해 이혜분에게 공을 넘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실 천징은 당시 컨디션이 아주 좋았고 이혜분과 기술도 막상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혜분만 꺾으면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칭스태프는 이혜분(25세)의 짧은 선수 생활을 감안할 때 다음 올림픽 출전은 미지수이고, 진정은 스무 살 정도로 충분히 다음 올림픽까지 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더 성숙해지고 기술도 더 정교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코치의 이유는 진정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둘 다 결승에 오른 이상 더 이상 공을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그래서 코치의 말을 듣지 않고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한 끝에 리후이펀을 꺾고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따내 올림픽 사상 첫 중국 탁구 여자 단식 챔피언이 됐습니다.
원래 국가의 명예를 얻은 진정은 공신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이 감독의 말을 듣지 않자 귀국 후 코칭스태프로부터 압박과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감독만 바뀐 게 아니라 여러 국제대회 선수 명단에서도 이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올림픽 챔피언임에도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덩야핑, 차오훙 등 중국 탁구팀의 후발주자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천징이라는 천재형 선수는 벤치를 지켰습니다. 천징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매우 억울해하는데, 이때 국가 대표 지도자는 그녀를 다시 성 팀으로 돌려보낼 준비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다 못한 그는 탁구에 관심이 없다며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물세 살의 절정기이자 기대를 모았던 기대주였던 그의 은퇴는 당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자유로워지자 일본은 곧바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 일본 코치로 초청했습니다. 대만 홍키컴퓨터탁구클럽도 좋은 조건을 내걸고 그녀를 대만으로 초청했습니다. 대만의 노력 끝에 천징은 '걸출한 대륙 스포츠맨'으로 문교 교류 형식으로 홍기 탁구팀에 합류했습니다.
대만에서 훈련하면서, 천징은 자신이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타이틀 외에 다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녀는 훈련하는 것 외에도 체육 사업에 계속 종사할 수 있도록, 그녀는 타이베이 체육 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했습니다.
천징은 세계 최고의 탁구 고수이기 때문에 그녀는 대만에서 곧 모든 선수들을 물리치고 대만 최고의 탁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대만탁구협회는 천징이 하루빨리 대만을 대표해 뛸 수 있도록 1년 동안 거주한 뒤 체류권과 여권을 발급해 합법적으로 대만에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천징은 이후 중국 타이베이 선수로 돌아와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녀의 충격적인 복귀는 중국 여자 탁구팀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당시 일본으로 귀화한 허즈리는 중국 여자탁구의 공공의 적이 됐고, 지금도 천징은 '배신자'로 불리며 대표팀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대표팀의 비판에 천징은 오히려 웃었습니다. 그녀는 탁구공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며, 게다가 대만은 엄연히 중국의 일부이며, 중국을 배반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로 일본에서 그녀를 초대했지만 그녀는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훈련에만 매달렸고 부단한 노력 끝에 수준도 회복됐습니다.
1996년, 천징은 중국 타이베이 팀을 대표하여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탁구 경기에서 그녀는 중국 홍콩의 천단레이, 허즈리, 차오훙을 차례로 물리쳤고,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덩야핑과 금메달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승패가 결정되는 마지막 경기에서 진정은 실수를 연발해 5-21로 져 덩야핑에게 금메달을 허용했고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경기를 보고 진정이 고의로 공을 양보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녀의 상태로는 덩야핑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의 의문에 대해 천징은 당시 그녀가 확실히 산만해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2000년, 천징은 다시 중국 타이베이 팀을 대표하여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고, 그 탁구 단식 경기에서 그녀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래서 올림픽 탁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금·은·동메달을 모았습니다.
시드니 올림픽이 끝난 뒤 32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 천징은 정식으로 운동을 접었습니다.
코칭스태프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외국으로 귀화하는 선수는 동서고금을 통해 흔히 있는 일인데 그녀의 행보는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중국 탁구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해프닝이고 희생자였던 것입니다. 전지희 선수가 중국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하여 신유빈과 조를 이뤄 중국을 이겨버리는 대한민국 국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천징 선수가 아직도 중국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아마도 ... 애증의 소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양궁이나 쇼트트랙에서 외국으로 귀화하는 선수는 어떨까요. 최민정과 심석희에게 내려진 부당한 지시, 안현수가 러시아대표가 된 것, 유럽으로 떠난 여배 국대 이재영 이다영, 남자양궁 김하늘이 호주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것 등은 다른 운동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 운동선수들의 최후의 선택입니다. 심신이 많이 망가진 소치의 영웅 심석희가 한국을 떠나지 않은게 측은할 정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