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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참법문(小參法門)
-2020.4.16.화엄전. 無比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 한단락 공부하겠습니다.
경전(經典)은 법신사리(法身舍利)라고 해서 부처님하고 동등하게 봅니다.
사실은 부처님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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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사리(法身舍利)다, 부처님이 부처님다운 것은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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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속된 계산법으로 계산하면 ‘진리의 가르침, 특히 대승경전(大乘經典)의 가르침은 그 어떤 위대한 부처님보다도 더 실질적으로 우리에게는 가치가 있다.’
이런 평가는 엉터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 줄 알지만 부처님보다도 경전을 우리가 중요시 여겨야 된다는 마음입니다.
경전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고, 부처님을 존중하고 받들고 부처님을 아주 참 부처님다웁게 생각하는 마음이죠. 따지고 보면 같은 것인데, 우리 불자들이 경전을 좀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제가 평소에 늘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속에 맺힌 말을 표현하다 보니까 ‘부처님보다 경전이 우선한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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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강점은 사실은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도 우수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참 엄청난 투자를 했지 않습니까?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저는 ‘투자다’ 이렇게 표현을 가끔 하는데요. 뭡니까?
세상의 신분으로서는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 출신이고, 그보다 더 귀한 신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런 고귀한 몸으로 출가해서 6년 고행을 참 정말 피나는 고행을 하셨습니다.
고행하는 중간에 당시 인도사회에서 뛰어난 선지식들을 다 친견하고, 배울 것을 배우고 깨달을 점을 깨닫고 그렇게 했습니다.
본래 출신이 천한 사람이 고행을 많이 했다면 크게 두드러지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 신분이 어떤 분입니까? 고귀한 태자의 출신으로서 그렇게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을 했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고행한 것 하고는 좀 달리 봐줘야죠. 그건 뭐 고행하는 사람은 지금도 많으니까요, 고행이 그렇게 값진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지막 7일간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서 바른 선정에 들어서, 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
그래서 화엄경이 맨 처음에 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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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뜻으로 늘 이야기 합니다. 현상의 어떤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늘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죠. 그럼 깨달음이 뭐냐? 당장에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되고, 질문을 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깨달음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 해야지요.
그래서 이 화엄경이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서 시성정각(始成正覺) 하시니,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니, 정각의 안목에서 세상을 볼 때, 그 세상은 이러이러 하고, 사람들을 볼 때, 살아있는 중생들을 볼 때, 그 중생들의 내용은 또 그 실상은 이러이러 하다.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는 말이 화엄경에서는 몇 번 나와요.
왜냐? 왜 몇 번 나오느냐?
처음에 나와도 그걸로 충분하지만 그 외 반복해서 그렇게 나오는 것은 그만치 시성정각(始成正覺)의 의미가 중요하고, 또 그것 때문에 불교가 존재한다는 뜻에서입니다.
그걸 어떤 사람들은 ‘지금 현실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그건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냐? 어째서 화엄경이 맨 처음 설해졌느냐?’ 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분분합니다만, 크게 우리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뜻으로 봤을 때, 화엄경이 깨달음의 문제에 바로 답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고, 그리고 나서 정각의 내용을 그대로 남김없이 펼쳐 보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화엄경이 최초의 설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를 좀 믿고 불교를 좀 공부하고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경전, 깨달음의 내용을 남김없이 설파한 그런 중요한 경전을 좀 관심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모시는 것보다도, 경전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모시고 이해하는 것에 더 공을 들여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경전 이해도 경전 이해지만 부처님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경전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경전은 옛날부터 법신사리(法身舍利)다, 부처님 사리를 우리가 얼마나 좋아하고 잘 모십니까?
진짜 좋은 사리는 이 경전이예요.
경전(經典)이야말로 법신사리(法身舍利)입니다.
이 법신사리를 우리가 보고 읽고 외우고 또 쓰고 하면서, 말하자면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듯이 하고, 삼키고 소화하고, 또 나의 피와 살이 되도록 그렇게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 이것이 불자들이 제대로 한다면, 정상적인 그리고 아주 부처님 뜻에 맞는 불자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늘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또 사이사이에 달리 하기로 하고요.
보살은 열 가지 해탈이 있다
오늘은 일련번호로 따지면 55번이 됩니다.
‘보살은 열 가지 해탈이 있다’
해탈(解脫)은 불교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낱말이죠. 그야말로 중요한 낱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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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해탈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번뇌의 해탈과, 삿된 소견의 해탈과, 모든 집착의 해탈과,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의 해탈과 이승(二乘)을 초월하는 해탈과, 생사 없는 법의 지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해탈이니라.”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해탈은 정확하게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되고, 평소에 해탈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 경전에서 소개한 이런 근본적인 해탈은 아니라 하더라도, 살면서 ‘놓아버려야 되고, 잊어버려야 하고, 벗어나야 하는’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데서부터 우리가 해탈할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벗어날 줄 알아야 되고, 놓아버려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저는 그런 해탈을 우리들 수준에 맞는 ‘1차적인 해탈이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는
번뇌해탈(煩惱解脫)
“번뇌의 해탈과”
사견해탈(邪見解脫)
“삿된 소견의 해탈과”
제취해탈(諸取解脫)
“집착의 해탈과”
온처계해탈(蘊處界解脫)
“오온(五蘊)”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
“십이처(十二處)” 십이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그것을 십이처라 하고, 또 육식(六識)까지 합하면 “18계(十八界)” 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을 이야기할 때 오온 십이처 십팔계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삼과법문(三科法門)이라고 해서 아주 기본이죠.
사람은 무엇이냐?
바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할 수가 있다.
사람의 삶은 여기서부터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늘 등장을 하지요. 기본입니다.
이것의 해탈과
초이승해탈(超二乘解脫)
“이승(二乘)을 초월하는 해탈과”
이승(二乘)하면 성문(聲聞) 연각(緣覺)을 말하는데 성문법, 연각법 물론 다 좋은 법입니다.
또 중생들에게 일면, 필요한 가르침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성문승 연각승이 참 불교 안에는 많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초월하는 해탈과
무생법인해탈(無生法忍解脫)
“생사 없는 법의 해탈 무생법인의 해탈이니라.”
결국 그것마저도 해탈해야 한다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어일체세간일체찰일체중생일체법(於一切世間一切刹一切衆生一切法) 이착해탈(離着解脫)
“모든 세간(世間), 모든 세계, 모든 중생, 모든 법에서 집착을 여의는 해탈과”
해탈하면 무조건 집착을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죠.
예를 들어서 ‘명예에서 해탈한다’ 하면 명예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가, 명예에 대해서 어떤 집착을 놓아버리면 그것이 명예로부터의 해탈입니다.
또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사는 데는 경제력이 꼭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경제력은 꼭 필요한데, 그러나 지나치게 불필요한 경제를 또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어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어가면서까지 재산에 욕심을 내는 경우들도 너무 많지 않습니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면 업(業)때문입니다. 자꾸 우리가 가까이 하고, 습관을 들이고, 돈을 모아보니까 또 그런 대로 좋거든요. 뭐든지 물질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한 번 가서 아주 좋은 호텔에서 자고 좋은 경치를 보고 그렇게 며칠을 지내보면 ‘야 참 돈이 좋기는 좋다’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면 내가 그것의 심부름꾼이 되어버리고, 노예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의 심부름꾼이 되고 노예가 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필요한 만치만, 우리가 최소한의 필요한 만치만 가지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도 해탈하고, 너무 지나친 집착을 벗어나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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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지없이 머무는 해탈과, 모든 보살의 행(行)을 일으켜서 여래의 분별없는 지위에 들어가는 해탈과 잠깐 동안에 모든 세 세상을 다 능히 아는 해탈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조금 차원이 높은 해탈인데요.
모든 세간해탈, 모든 세계해탈, 모든 중생해탈, 모든 법에서 집착을 여의는 해탈과
무변주해탈(無邊住解脫)
“그지 없이 머무는 해탈과”
아주 무한히 머문다 하는 것입니다.
무변(無邊) 어느 한 곳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곳에 매이는 것이 아니고, 무변세계에 머무는 것 그것이 해탈이라는 것이죠.
발기일체보살행(發起一切菩薩行) 입여래무분별지해탈(入如來無分別地解脫)
“보살행을 일으켜서 여래의 분별없는 지위에 들어가는 해탈과”
아주 차원 높은 해탈입니다.
어일념중(於一念中) 실능요지일체삼세해탈(悉能了知一切三世解脫)
“잠깐 동안에 모든 세 세상을 다 능히 아는 해탈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부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예불문에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것을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라고 해서, 요 다섯 마디에 불교가 다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익히고 닦아서 결국 무엇을 성취하자는 것이냐? 해탈을 성취하자고 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내가 해탈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혼자 성취한 것만으로 불교는 ‘할 일을 다했다’ 하는 것이 아니죠.
다른 사람에게도 그 해탈을 성취할 수 있도록, 부단히 아는 바대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것, 그것이 해탈지견(解脫知見)입니다.
해탈한 사람의 지혜예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말하자면 좋지 아니한 공기, 좋지 아니한 냄새, 좋지 아니한 환경 그런 것을 정화하는 데는 향기보다 더 좋은 게 없죠. 좋은 향기, 그렇습니다.
이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문제에 향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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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위없는 부처님의 일을 베풀어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성숙하나니라.”
보살은 열 가지 공원[園林]이 있다
제가 이세간품(離世間品)을 공부하다가 또 아주 참 좋아하는 구절이 나왔는데요.
여기는 56번째 ‘무착행(無着行)을 답하다’에서 ‘보살은 열 가지 공원이 있다’ 그랬습니다.
원림(園林)이라고 원문은 되어 있어요. 제가 공원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열 가지 놀이터, 공원이 있다.
생사(生死)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공원[園林]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나고 죽음이 보살의 공원이니 싫어서 버림이 없는 연고이니라.”
대단한 말씀입니다.
생사가 보살의 공원이다. 생사가 보살의 놀이터다.
해인사에 팔만장경을 모셔놓은 입구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문 양쪽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現今生死)가 즉시(卽是)다. 아마도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답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늘 그렇게 해석을 하고 소개도 하고 했습니다. 참 대단하죠.
원각도량(圓覺道場)이 하처(何處), 원만하게 깨달은, 부처님의 그 깨달음, 그 깨달음의 장소가 어디냐?
그 깨달음의 내용을 바로 팔만대장경에 다 소개해 놨죠.
그곳이 어디냐? 진정한 그곳이 어디냐?
원각도량(圓覺道場)하처(何處)오.
현금생사(現今生死)가 즉시(卽是)다. 지금의 우리가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싸우고 울고 불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이 삶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다. 원각도량(圓覺道場)이다.
이런 뜻입니다. 참 대단한 글이죠.
그러한 내용을 바로 팔만대장경에 실어놨다.
이런 뜻으로 이해를 하고 전 늘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원각도량(圓覺道場)이 하처(何處)냐.
현금생사(現今生死)가 곧 이곳이다.
현금생사, 우리 모든 사람들이 치다꺼리 하면서 나고죽고 나고죽고, 울고불고 웃고 하는 이 사실, 이 현실이 바로 원각도량이다. 원만하게 깨달은 그 장소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뭡니까?
이른바 나고 죽음이 보살의 공원이다. 보살의 놀이터다.
현금생사(現今生死)가 보살의 놀이터다.
아 참 오늘은 이 구절 하나만 우리가 마음에 잘 새기고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부처님 공부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회하는 곳이 바로 우리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윤회하는 곳,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끊임없이 태어나는 이곳이 바로 보살의 놀이터예요. 보살의 공원입니다.
안목이 있는 사람, 눈뜬 사람, 지혜 있는 사람의 놀이터입니다.
결코 떠날라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 여기서 어떻게 해봐야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을 뜨고 우리가 그것을 잘 수용을 하고, 또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어디 가서, 서방정토(西方淨土)요? 아닙니다.
무슨 동방(東方) 저 유리광세계(瑠璃光世界)? 그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든 이 자리에서 눈을 떠서 이 삶이 내 살림살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 삶에서 평화를 얻어야 됩니다.
교화중생(敎化衆生)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중생을 교화함이 보살의 공원이니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는 연고이니라.”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보살의 놀이터다 말입니다.
놀이터에서 노는데 지칠 일이 뭐 있고, 노는 일을 게을리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는 연고이니라 그랬습니다.
중생교화 하는 일이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중생교화 하는 일이 우리 불자의 놀이터입니다.
불자들이 가서 노는 공원입니다.
어쨌든 중생교화입니다.
한 마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안다면 그 한마디, 자기가 소신하고, 믿고 있는 바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관세음보살 한마디도 좋습니다. 지장보살 한마디도 좋습니다.
인과이야기도 물론 더 좋습니다.
화엄경 더 좋습니다.
법화경 좋습니다.
그렇게 좋은 가르침을 가지고 중생들에게 가르쳐야 됩니다. 교화(敎化)라는 게 뭡니까? 가르칠 교(敎)자 아닙니까? 중생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아 참 이러한 삶도 있구나’ 하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주일체겁(住一切劫)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일체 겁에 머무름이 보살의 공원이니 모든 큰 행을 포섭하는 연고이니라.”
일체겁에 머무른다.
이 시간요. 어느 장소도 떠나선 안되지만 시간도 떠나서는 안됩니다.
보살은 어떤 시간에서든지 어떤 장소에서든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모든 보살행을 다 그 속에서 우리가 포섭해야 됩니다.
모든 행이 그 속에 있습니다.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겁에 머무는 것이 보살의 공원이라고 했습니다.
청정세계(淸淨世界)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청정한 세계가 보살의 공원이니 스스로 머무는 곳인 연고이니라.”
청정한 세계, 텅 빈 세계, 보살은 어느 곳에 가서 살든지 지옥에 가서 살든지 어디 가서 살든지 간에, 그 사는 곳은 텅 비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텅 빈 것으로 마치 그림자가 이 세상을 거닐 듯이, 그렇게 거닐면서 사는 것이 보살의 삶입니다.
텅 빈 세계가 보살의 공원이니 스스로 머무는 곳인 연고이니라.
보살은 늘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삽니다.
우리는 늘 거기에 목을 매달고 거기에 참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살지요.
그저 구름에 달 가듯이 슬렁슬렁 그렇게 인생을 가볍게 살 줄 아는 자세, 보살은 그렇게 삽니다.
우리는 ‘아이고 보살이 이 세상에 중생 제도하려고 빠져가지고’ 사는 것 같이 그렇게 여겨지지요. 물론 열심히 중생제도 합니다. 그렇지만 보살은 또 정말 구름에 달 가듯이 그렇게 가볍게 살고 있다고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일체마궁전(一切魔宮殿)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일체 마(魔)의 궁전이 보살의 공원이니 저 무리들을 항복받는 연고이니라.”
마구니가 있는 곳이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마구니가 있는 곳, 마구니가 버글버글 끓고 있는 그곳이 보살의 놀이터, 보살의 공원입니다.
가서 놀 곳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구절을 보고는 그만 그냥 탄복을 하고, 그래서 이세간품, 이세간품, 자꾸 화엄경 하면 ‘이세간품 이세간품’ 하는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구절 하나라도 빨리 좀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마침 이번에 소참법문을 하게 돼서, 뭐 코로나 덕택입니다. 코로나 덕택에 소참법문을 하게 되어서, 이세간품을 먼저 당겨다가 이렇게 함께 공부해 보고 있습니다.
이 구절 하나만
‘일체마궁전(一切魔宮殿)이 시보살(是菩薩)의 원림(園林)이다. 마구니의 궁전이 보살의 공원이다’
이 한마디면 저는 이세간품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아 정말 대단하지요?
거기서 저 무리들을, 그들을 다 항복받기 때문이다.
항복받기 때문이다.
아, 참 글쎄요.
이 이야기를 듣고, 또 이것이 녹취돼서 글로 만들어져서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참, 저 이상으로 그렇게 감동을 할 줄 믿습니다.
부디 그렇게 감동을 하셔서 ‘보살의 정신이 바로 이 한마디에서 참 다 녹아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셨으면 싶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실 거예요.
사유소문법(思惟所聞法)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들은 법을 생각함이 보살의 공원이니 이치와 같이 관찰하는 연고이니라.”
들은 법을 생각함이, 우리가 법을 듣고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글을 읽고는 또 깊이 생각해야 돼요.
사유소문법(思惟所聞法) 들은 법을 깊이 사유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보살의 공원이다.
보살은 중생을 대하고 있을 때는 중생들에게 그저 바른 이치를 가르쳐야 되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뭐라고요?
바른 이치, 법, 진리를 사유하고 있어야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이것을 어떻게 잘 풀이를 해서, 잘 풀어서 중생들에게 납득을 시키고 감동하게 할까 하는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이치와 같이 관찰하는 연고다.
잘 사유해야 그 설명된 이치대로 관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유해야 됩니다.
문사수(聞思修) 아닙니까?
듣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계속 계속 되뇌이는 것 그게 수(修)입니다. 닦을 수(修).
문(聞) 사(思) 수(修) 듣고 사유하고 그다음에 닦고.
닦고는 반복해서 반복해서 내 살림살이로 만드는 것, 그게 수(修)입니다.
문(聞) 사(思) 수(修) 그걸 삼혜(三慧)라고 하지요.
듣고 생각하고 닦고, 삼혜입니다.
수(修)는 내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좋은 말입니다.
육바라밀사섭사삼십칠보리분법(六波羅蜜四攝事三十七菩提分法)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여섯 가지 바라밀다와 네 가지 거두어 주는 일과 서른일곱 가지 보리의 부분법이 보살의 공원이니 인자한 아버지의 경계를 이어받는 연고이니라.”
부처님의 살림살이죠.
육바라밀, 사섭법, 37조도품, 이것이 모두가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거기서 뭐한다고요?
자부(慈父) 인자하신 아버지의 경계를 계승한다.
우리가 이 육바라밀, 사섭법 삼십칠조도품을 잘 공부해서 내 살림살이로 만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계승하는 일이 되고, 불보살의 살림살이를 그대로 이어받고 발전시키는 일이 됩니다.
십력사무소외십팔불공(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 내지일체불법(乃至一切佛法)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불공법 함께하지 않는 법과 내지 모든 부처님의 법이 보살의 공원이니 다른 법을 생각하지 않는 연고이니라.”
보살은 다른 법 생각 안합니다.
부처님의 열 가지 힘, 사무소외(四無所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저 앞에서 소개한 육바라밀(六波羅蜜) 사섭법(四攝法)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이 모든 것이 전부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러면 다른 법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그 공원에서, 그러한 놀이터에서 놀기 바쁜데 어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법을 생각하지 않는 연고이니라 그랬습니다.
시현일체보살위력자재신통(示現一切菩薩威力自在神通)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모든 보살의 위신력과 자유자재한 신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보살의 공원이니 큰 신통한 힘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어 중생 조복시킴을 쉬지 않는 연고이니라.”
역시 모든 보살의 위신력과 자유자재한 신통을 나타내 보인다. 그걸 뭐 하려고요?
그게 보살의 공원입니다. 놀이터입니다.
왜냐 큰 신통한 힘으로 바른 법을 굴리어서 중생을 조복시킴을 쉬지 않는 연고이니라.
놀이터에서 항상 놀아야지 뭐 어디 딴 데 갈 곳이 어딨습니까?
보살은 항상 이러한 놀이터에서 놀아야 됩니다.
그것이, 이러한 것을 가지고 중생들을 조복시키는 것을 쉬지 않고 꾸준히 끊임없이 한다는 뜻입니다.
일념어일체처(一念於一切處) 위일체중생(爲一切衆生) 시성정각(示成正覺) 시보살원림(是菩薩園林)
“잠깐 동안에 모든 곳에서 일체 중생을 위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일을 보이는 것이 보살의 공원이니 법신이 온 허공의 모든 세계에 두루 한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라.”
잠깐 동안에 모든 곳에서, 그리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보살은 궁극적으로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바른 깨달음을, 그 깨달음의 이치.
화엄경은 제가 자주 이야기를 하는데 화엄경의 대지(大旨), 화엄경의 주된 뜻은 다른 표현들도 있습니다만 먼저 시성정각(始成正覺) 비로소 깨달음에 대한 것을 나타내 보이고, 그다음에 후현보살행원(後顯菩薩行願)이라 뒤에는 보살행원을 나타낸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화엄경의 대지(大旨)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명시성정각(先明始成正覺)하고 먼저는 시성정각을 밝히고
후현보살행원(後顯菩薩行願)이라. 뒤에는 보살의 행원을 드러낸다. 나타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것이 늘 이렇게 ‘잊지 말라’고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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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곧 여래의 위없는 근심을 여읜 크게 안락한 행을 얻느니라.”
부처님의 그런 경지에 결국은 이르는데 여기는 뭐라고요?
근심을 여읜 안락(安樂)한 행(行), 안락한 행을 얻는다.
안락한 행을 얻는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뭐 여러 가지 표현도 있겠지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 놀이터고 공원이니까요.
놀이터고 공원에서는 그저 편안히 안락하게 즐겁게 지내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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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하는 곳이 바로 우리 보살의 놀이터입니다. 안목이 있는 사람, 눈뜬 사람, 지혜 있는 사람의 놀이터입니다.일체一切魔宮殿이 是菩薩園林,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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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르침’...구름에 달 가듯이... 그리고 올려 주시는, 맑고 투명하게 마음을 맑혀 주는 꽃,
모든 것이 공원^^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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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은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法身舍利이다.
始成正覺으로 불교가 존재한다.
離世間品 善現行
*보살은 열 가지 해탈이 있다
번뇌의 해탈, 삿된 소견의 해탈, 모든 집착의 해탈, 五蘊 十二處 十八界의 해탈, 二乘을 초월하는 해탈, 생사없는 법의 지혜 해탈, 모든 세간 세계 중생 법에서 집착을 여의는 해탈, 그지없이 머무는 해탈, 모든 보살의 행을 일으켜서 여래의 분별없는 지위에 들어가는 해탈, 잠깐 동안에 모든 세 세상을 능히 아는 해탈.
五分法身香 -- 戒 定 慧 三學을 익히고 닦아서 解脫을 成就하고 다른 사람도 解脫을 成就하도록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解脫知見이 되도록 한다.
離世間品 無着行
*보살은 열 가지 공원(園林)이 있다.
1나고 죽음을 싫어서 버림이 없음
2중생을 교화함이니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음
3일체 겁에 머무름이니 모든 큰 행을 포섭함
4청정한 세계이니 스스로 놀이터를 삼음
5일체 魔의 궁전이니 저 무리들을 항복받음
6들은 법을 생각함이니 이치와 같이 관찰함
7六波羅蜜과 四攝法과 三十七菩提分法이니 인자한 아버지의 경계를 이어받음
8十力과 四無所畏와 十八不共과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다른 법을 생각지 않음
9모든 보살의 위엄과 자유자재한 신통을 나타냄이니, 큰 신통한 힘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어 중생 조복함을 쉬지 않음
10잠깐 동안에 모든 곳에서 일체 중생에게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보이는 것이니 법신이 온 허공의 모든 세계에 두루함
여래의 위없는 근심을 여읜 크게 안락한 행을 얻느니라.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오 -- 부처님의 원만하게 깨달은 그 장소가 어디냐?
현금생사(現今生死)가 즉시(卽是)니라 -- 바로 지금 이 삶의 현장이 그곳이다.
지금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였어도 내가 참 불자임을 증명해보이는 소중한 순간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다지겠습니다.
어른 스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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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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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이 삶을 사랑하고, 이 삶에서 평화를 얻어야 됩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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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원각도량(圓覺道場) 하처何處)오 현금생사(現今生死)가 즉시(卽是)니라
지금의 우리가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싸우고 울고 불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이 삶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다. 원각도량(圓覺道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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