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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3개월 3주 시나브로 세상 속으로
살아온 연수와 상관없이 사람들마다 돌아보면 자신에게 중요한 때라 여기는 시기(時期)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진로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각각 상황과 의미는 다르지만, 잊히지 않는 소중하고 귀중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할 것 같다. 내게도 2년 3개월 3주라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시기가 있다. 돌아보면 그 당시는 육체적으론 무척 고단하고 피로가 쌓인 힘든 시기였지만 하루하루가 늘 새로웠다. 그래서 남들에겐 짧은 기간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무척 긴 시간으로 2년 3개월 3주를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거론한다. 오랜 시간 갖던 편견과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고 남들과 조금씩 동화되어 가던 그 시기는 가치관의 변화뿐 아니라 언행과 행실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세상 속에서 한층 성숙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해서 그때의 나를 표현하기도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프락사스가 아니라 유일신이자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날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사무엘상 2장 2절의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한나의 마음에 빗대어 부연 설명을 이어간다. ‘더불어’ ‘함께’ ‘같이’라는 동질감이 생기며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계기, 즉 인생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된 시기였다고….
오늘로써 캐나다에 온 지 만 17년 1개월이 되었다. 2005년 8월 14일 저녁 6시 반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하니 2005년 8월 14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기내에서 두 끼를 해결하고 영화도 두어 편 보고 쪽잠을 취하고도 출발과 도착이 같은 날인 것은 16시간 양국 간의 시차 때문이다. 유리창 너머의 파란 하늘은 왠지 하루를 덤으로 얻은 것 같은 기분과 맞물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설렘을 부추기고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빅토리아에 가기 위해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출발하던 시각은 오후 세 시. 승무원이 나눠준 사탕 하나가 입 안에서 거의 사라져갈 무렵 비행시간으로 고작 26분 걸리는 빅토리아 공항에 도착했을 땐 오후 3시 26분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정착할 곳에 나도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어눌한 언어와 낯선 환경에 적응해갈수록 전에 없던 특이한 습관이 생겼다. 희한하게 아라비아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독특한 나만의 화법인데, 버릇이라고 하기엔 행동 양식이 아니라서 애매하다. 그것은 갓난아기의 엄마들이 “생후 몇 개월 되었어요.”라던가 몇 살보다는 몇 년 몇 개월이라고 아이의 나이를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테면 빅토리아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2005년 8월 14일이고 밴쿠버로 이사 온 날짜는 2015년 7월 14일. 그래서 밴쿠버에서 만난 사람들이 “언제 캐나다에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빅토리아에서 만 9년 11개월 살고, 밴쿠버에는…, 그렇기 때문에 몇 년 몇 개월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단 한 번도 이러한 순서를 대충 이야기한 적이 없다. 때에 따라 한국에서 몇 년 몇 개월이라고 덧붙일 때도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또 정을 붙이고 있던 곳을 잊지 않기 위한 나만의 셈인지 사실 나조차 까닭을 잘 모르겠다. 게다가 한국에서 살 때는 낯선 단어로 느껴지고 그다지 입에 담을 일이 없던 단어조차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말하기도 한다. 그뿐이랴. 내 안에도 예전에 공감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애달픈 심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기도 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난 지역으로 이사한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캐나다에 오기 전까지 ‘고향’이라는 말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로 치부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겐 정겹고 그리움의 대명사 같은 말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무척 낯설고 매우 어색한 단어가 고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 때마다 귀성객들의 전쟁터와 같은 고속도로 상황을 정겨운 귀성길 풍경으로 보도하는 것을 보아도 덤덤했다. 되레 한산해진 서울 거리와 붐비지 않는 식당이 오히려 좋다고만 생각했던 이기심 많은 사람이 나였다. 그런데 만 17년 1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 되어 돌아보니 언제부터인지 내 입에서도 고향이란 단어를 꺼내고 때론 향수를 빌미로 눈물도 흘리고 있다. 무덤덤했던 내게 캐나다는 듣기만 해도 설레는 아름다운 말, ‘고향’을 찾아 주었고 고국, 조국, 모국이라는 울컥하고 장엄해지는 묵직한 말까지 선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거의 직접 해야만 하는 수고까지 안겨 주었다. 일테면, 만 14년 9개월 1주가 되는 오늘까지 아들들의 운전기사 겸 매 끼니를 챙겨주고 재워주는 하숙집 여주인처럼 그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엔 위에서 언급한 2년 3개월 3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기간은 전혀 다른 일상의 시간이 흘러간 시기라 독특한 나만의 셈법을 적용한 탓이다. 그렇지만, 뇌출혈로 쓰러져서 수술받은 울 엄마가 회복될 때까지 병간호하느라 한국에서 지낸 시간은 합산했다. 비록 양국을 오가며 살긴 했지만, 캐나다로 이주했으니 한국이 아닌 빅토리아가 터전이란 억지 논리로 꿰맞춘 거다. 회복하신 엄마를 모시고 캐나다에 와서 함께 지내다가 엄마의 비자 기간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가 몇 개월 보내고 다시 캐나다에 와서 지내고 또다시 한국으로…. 그렇게 엄마와 둘이서 태평양 위를 날아다니며 지내던 어느 날 불현듯 불안감이 소스라치게 느껴질 만큼 엄습해 왔다. 우리 집 가장이 나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동안 부족함 없이 친정엄마에게 의지하고 살던 내가 비로소 정신이 퍼뜩 드는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위기감 같은 것이 생각을 장악하며 이대로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조급함에 신문을 뒤적거렸지만 내가 가진 조건이 너무나 열악했다. 재료가 상할 수 있는 음식에 관련된 일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기술이 필요한 것 역시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이래저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며 엉뚱한 자학까지 따라왔다. 남편이 있었다면 덜 두렵고 망설이지 않을 텐데… 하는 쓸데없고 부질없는 생각도 밀려와서 스스로 당혹스럽고 민망한 나머지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뭔가를 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애당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꼬박 6년을 두 아들의 운전기사와 끼니만 챙겨주는 식당 아주머니 같은 일상을 보내던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놀고먹던 내가 뭔가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 상황을 아는 지인들마다 그나마 컨비니언스 스토어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느냐…? 는 이야기에 앞뒤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아니 주저하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드디어 나의 실사판(實寫版 Live action) 세상살이가 오십 년 만에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서 2년 3개월 3주라는 엄청난 시간 여행 속으로 시나브로….
가게를 구하고 보니 컨비니언스 스토어로는 빅토리아에서 제일 크고 넓은 무엇보다 유서 깊은 곳이었다. 간판이며 실내 인테리어에 정성을 쏟으니 예쁘고 멋지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고 지역 신문에도 인터뷰 기사가 실릴 만큼 관심을 받았다. 70년 동안 상호는 그대로 유지한 채 주인만 바뀌던 마트를, 컨비니언스 스토어라기보다는 그로서리(Grocery)로 운영하던 곳을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가 지역 랜드마크 같은 상호도 바꾸고 거주인이 거의 백인 토박이들인 지역에 떡 하니 컨비니언스 스토어를 열었으니 호기심에 방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게 이름을 ‘153 With J & Flowers Convenience store’로 교체한 탓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153 숫자의 의미와 알파벳 J에 대해 궁금해하며 우연히 가게 주소가 1537인 것과 내 이름 Julia의 이니셜로 오해했다. 카운터에 성경을 올려놓고 153 숫자의 호기심을 풀어주기 위해 요한복음 21장 11절을 설명하고 아예 요한복음 21장 1절부터 14절까지 스스로 읽게 했다. J는 내 이름이 아니고 JESUS라고 즉 ‘예수님과 함께’라는 뜻이라고 이야기하면 모두 “아~!”하는 감탄과 함께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아멘” 또는 나와 함께 “할렐루야”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나는 카운터에서 들어오는 손님마다 성경을 읽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손님들의 모습은 매우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으로 감사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오는 기적을 맛보기 시작했다. 또 주변 교회 목사님들과 우리 교회 목사님들도 가끔 오셔서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귀한 간증의 시간도 가졌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며 신기한 것은 영어가 서툴고 어눌한 내가 기쁨으로 감사를 나눌 때는 신기하게 술술 말이 나왔다. 교회에서 영어로 간증까지 했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기적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느끼는 자와 못 느끼는 자의 차이로 무엇이든 감사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기적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찌 됐든 장사 수완도 없는 데다 더욱이 체력도 딸려서 이른 아침에 문도 열지 않으니 비싼 가게 렌트비를 내면 매달 적자였다. 대신 가게엔 나를 찾아 주는 유학생들부터 우리 교회 친구들과 한인 성경 공부에서 만난 한인 교인들이 방문해서 매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는 홀 뒤편뿐 아니라 카운터 안도 제법 넓어서 차를 마시는 테이블도 있다 보니 2014년 6월 1일 가게를 넘기는 날까지 2년 3개월 3주 동안 동네 사랑방 같은 구실을 했다. 뒤돌아보면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정말 귀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고 재미있는 추억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특히 하루를 보내면서 겪는 많은 일과 수많은 사람을 통해 배우고 깨달아 가며 얻은 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크리스천의 삶을 실천해가는 과정에 놓였던 시간이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의 장점과 단점을 부각하며 강하게 단련시키시고 훈련하는 시간이었다. 술과 담배 냄새를 정말 싫어하는 내가 알코올과 담배 연기가 몸에 밴 손님에게 웃으며 대해야 하고, 경마라는 도박에 빠진 애 아빠와 이혼한 내가 사행심을 부르는 로또 복권 같은 것을 팔아야 하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외관상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을 한 남자에게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으로 상처받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대하다 보면, 친절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호천사처럼 나를 보호하는 단골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이나 차가운 음료수를 예쁜 냅킨으로 곱게 싸주면 무척 좋아하고 대접받는 기분이라며 모두 환한 미소로 답례했다. 가게 안과 밖에 예쁜 꽃들이 즐비하고 깨끗하고 청결하니 어느 날은 손님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당황했던 순간도 있었다. 홀에 놓인 피아노와 손님이 들고 온 바이올린과 기타로 연주하며 작은 음악회가 자주 열려 즐거움을 나누던 시간도 있었고, 매주 수, 목요일 저녁엔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이웃사촌 캐네디언 아주머니도 계셨다. 한국말이라 못 알아듣는데도 남자 주인공이 멋있어서 본다며 볼이 붉어지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배우는 박시후였다) 한국 전쟁 참전으로 아버지를 잃은 캐네디언 손님을 비롯하여 밸런타인데이 때마다 내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손님, 갓 구운 빵을 가져오는 예쁜 금발 아가씨 데비. 먼 곳으로 이사한다며 값비싼 쥬얼리를 선물하고 간 세라. 비누 만드는 것을 배웠다며 내 이름을 새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싱그럽고 향긋한 향의 비누를 선물하던 매건. 나와 아들이 캐네디언 시민권을 받았다는 소식에 축하한다며 예쁜 머그잔과 정성이 가득 담긴 손글씨 카드를 건네주던 낸시. 피아노 연습을 위해 수시로 들락거리던 동네 꼬맹이들부터 빅토리아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의 연주까지 울 가게는 그야말로 동네 작은 음악회 장에 만남의 기쁨이 늘 상주하는 사랑방이었다. 홈리스 떠돌이로 생활하는 분들도 들어와서 마음껏 피아노를 치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연주가 훌륭하고 뛰어나서 감탄과 탄성을 내지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 준 고마운 추억 속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일은 들어오는 손님마다 카운터에서 내가 내밀던 성경 구절을 읽던 순간이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성경을 읽는 커플부터 청소년까지 우리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은 예외 없이 성경을 읽었는데 처음엔 낯설고 어색해하던 사람들이 밝은 모습으로 감사하며 인사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이렇듯 문을 열고 들어오던 얼굴과 나갈 때 그들의 표정은 정말 밝고 환한 모습으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끔 우리 교회 친구들이 기타와 클라리넷을 들고 와서 가게 밖의 거리에서 찬양과 기도로 깜짝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신호등 정지선에 서 있는 차량에 다가가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용기로 시작된 사도행전의 29장은 지금도 계속 써나가는 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언제 어디서건 주님의 사랑을 전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캐나다에 와서 오늘까지 만 17년 1개월 사는 동안 그때의 2년 3개월 3주가 고되고 피곤하긴 했지만,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2년 3개월 3주 만에 가게를 정리했을 땐 손실액은 꽤 컸지만(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탓도 한몫하고),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매 순간 감사로 물든 삶이 아닌 불평과 불만을 일삼는 보기 좋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시나브로 세상 속으로 젖어 들어가는 아름다운 시간으로 지금의 행복한 우리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된 고마운 시기. 그러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나와 아들은 행운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아들과 종종 나누며 즐거운 간증으로 간직하고 있다. 좋은 것과 싫어하는 것의 편견을 허물어가던 2년 3개월 3주는 아름다운 추억이 새겨진 멋진 시간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감사로 행복한 오후를 보낸다.
- 2022년 9월 14일 캐나다에 온 지 오늘이 만 17년 1개월 된 날에 문득…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비슷한 말은 “살금살금’ ‘은밀하게’ 등이 있다.
* 나의 아호 ‘예함’은 ‘예수님과 함께’의 준말로 이 시기에 운명처럼 들어왔다.
* 이 기간에 5명의 단골이 우리 교회에서 세례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