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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16일 금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나던 날부터 보살펴 주셨는데 그들은 불륜을 저질렀다며, 그래도 계약을 생각해 용서하겠다는 말씀을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다. 그런데 너는 불륜을 저질렀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낱낱이 늘어놓지만, 그 맥락은 예루살렘의 죄악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서 16장 1절부터 15절까지 읽고 그다음에 60절로 가는데, 15절부터 59절까지는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면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긴 고발과 심판 선고를 앞두고,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에제 16,60)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15절부터 59절까지 볼 때, 예루살렘이 지은 죄는 많고도 큽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처벌도 분명히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멸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멸망은 다른 어떤 데서 오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고하시고 실제로 치시기 전에, 당신께서 예루살렘에게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기, 아무도 돌보지 않고 던져 버린 아기를 하느님께서 살려 주시고, 계약을 맺어 아내로 맞으시며 귀하게 꾸며 주셨습니다.
생명을 지킨 것부터 먹고 입고 왕비가 된 것까지 모두 하느님께서 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렸어도 하느님 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십니다. 지금이 비록 심판의 때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피투성이를 살려 주시고 알몸을 덮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께서는 심판과 함께 이미 용서를 약속하시고, 한번 맺으신 사랑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으십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통치자와 권력자의 모델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이니 경사 중의 겹경사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목숨 바친 분들에게 깊이 감사하며, 그들의 애국심에 가슴 뛰고 설레야 할 광복절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고 굴욕적입니다.
제대로 된 통치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는 하루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헝가리에 가면 얼마나 스테파노가 존경받는 인물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면서도 정교회 쪽으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헝가리 국민들 가운데 스테파노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헝가리 왕국이 성모님의 푸른 망토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더불어 헝가리 모든 백성들이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래서 성모승천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모님을 사랑했던지 그는 가급적 성모님 축일에 임종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03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선종했습니다.
임종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신생 헝가리 왕국을 성모님께 맡기고 성모님의 보호를 청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 앞의 한 신앙인으로서 성모신심에도 투철했지만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도 각별한 성모신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도 세상을 통치해야하는 왕이었던지라 불가피하게 군대를 동원할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영주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식 전에 스테파노는 성당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뜻에 따라 평화로이 이루어지도록 오래도록 기도를 올렸고 성모님의 특별한 중재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지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반군을 진압한 후에도 그는 패장들을 관대하게 끌어안는 여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왕관과 홀, 그리고 검까지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했던 참 신앙인 스테파노였습니다. 성모님께 자신의 왕관을 봉헌한 스테파노의 오른 손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 매년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대축일 때마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순회하며 헝가리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왜 핑계를 발견하는가? 사명이 아니라 꿈으로 살기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을 우선시하여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면 절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구는 핑계를 찾고, 누구는 핑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누구는 꿈을 살고 누구는 사명을 살기 때문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세이노의 가르침: 가난한 사람들은 선량한가?’를 짧게 편집해서 올린 글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상황에서 가장에게 그런 평가를 어떻게 내릴 수 있는가?’라고 인상 찌푸리며 불평할 수 있지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쓴 세이노의 생각도 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몇 년 전인 1990년 봄, 서울 천호동의 반지하 셋방에서 살던 엄 모 씨(40세)와 부인(38세), 그리고 아들(8세), 딸(6세) 모두가 연탄불을 피워 놓고 동반 자살한 일이 있었다. 엄 씨 가족은 4년 전부터 이 셋방에서 보증금 50만 원 월세 9만 원을 내고 살아왔는데 집주인이 집을 수리하여야 하므로 방을 비워 달라고 해 이사 갈 집을 물색했으나 오른 방값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 것이었다.
서울에서 고교를 나온 엄 씨가 처음 택한 직업은 군에서 배운 운전이었다. 그는 결혼 후 서너 군데 직장에서 차를 몰았으며 모 국회의원의 자가용 운전사로 월 60만 원을 받고 일하다 차를 망가뜨린 실수 때문에 그만두었고 몇 개월 전부터 친구가 경기도 부천에서 하는 부동산 소개업을 도와줬으나 벌이는 한 달에 삼십만 원 선에 불과했고 일정치 않았다.
엄 씨는 2남 1녀의 맏이였다. 그래서 서울 변두리에서 동생과 함께 사는 부모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을 늘 괴롭게 여겼지만 죽기 며칠 전에도 노모에게 생활비로 15만 원을 부쳤다. 부인은 집에서 자수 미싱을 하며 생계를 꾸렸으나 죽기 얼마 전 전세 목돈을 만들고자 재봉틀마저 팔았다. 그러나 이때 받은 76만 원은 옮겨 갈 방을 구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대신 어린 아들은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엄마가 미싱을 팔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TV 소리가 잘 들렸기 때문이다. 방 안도 참 깨끗해졌다.”
명성교회 신자였던 엄 씨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주님께서 현숙한 처녀를 어머님 눈에 띄게 하셔서 좋은 아내를 주셨고 귀여운 남매까지 선물로 주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인가. 그러나 한 가지, 다만 한 가지 나에게 물질의 축복, 남들처럼 돈 잘 버는 재주만은 주지 않으셨다. …집을 비워 달라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고민에 빠져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집 문제 하나 해결 못 하는 무능한 가장. 이런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며 불평 한마디 해 본 적 없이 늘 쾌활한 아내, 당신은 정녕 천사이리라.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 혼난다는 말을 종알거리는 아이들, 너희도 정녕 천사이리라. … 전세금 마련을 위해 추진했던 일들이 모두 제대로 안 돼 이젠 방법이 없다. 나 혼자 세상을 떠나려고 했지만. …이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에 떨어진 처자식의 앞날이 얼마나 고생스러울 것인가. …아버지 때부터 시작되어 오고 있는 가난이 나에게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지게 될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 끝날 조짐도 없다.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르는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정치하는 자들, 특히 경제 담당자들이 탁상공론으로 실시하는 경제정책마다 빗나가고 실패하는 우를 범하여 가난한 서민들의 목을 더 이상 조르지 않도록 그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시어서 없는 자들의 절망과 좌절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엄 씨는 죽기 전 장례비용이라고 적은 봉투에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9장과 1만 원권 지폐 10장 등 1백만 원을 담아 방안 책상 위에 놓아두었으며 부동산 소개일을 하면서 고객을 태우고 다니고자 월부로 산 프레스토 승용차를 팔아 장례 비용에 보태 달라고까지 했다(당시의 거의 모든 신문 기사들을 모아 재편집한 것이다).
당시 어느 경제학 교수는 모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잘못된 분배 구조가 고쳐지지 않으면 서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참과 혼란은 비인간적 이기심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제도 개혁들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국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다시는 가난하기 때문에 죽는 일이 없도록 다 함께 생각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정한 제도 개혁이면 반대하지 않으며, 집주인이라고 마음대로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느냐고? 그렇다.
첫째, 나는 ‘듣기 좋은 멋진 말’을 하는 그 교수가 세를 놓고 있는 집이 있다면 당연히 시세에 따라 세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 집주인들이 마음대로 집세를 올리지 못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임대 주택을 구입하려고 하지 않기에 셋집의 수는 대폭 줄게 되고 임대 가격은 대폭 올라 버리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더욱 살기 힘들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증명된 바 있다.
셋째, 거의 모든 기자, 소설가, 방송작가, 교수, 종교인 등이 자살한 엄씨를 ‘착하고 효자인 데다가 가족도 사랑하였고 성실하였으나, 가난하였기에 갑자기 오른 집세 때문에 절망하여 어쩔 수 없이 자살한 사람’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 상황을 좀 더 파악하여야 한다. 그는 군 제대 후 무려 15년 이상 운전을 하였음에도 저축이 없었다. 국회의원 자가용 기사를 하면서는 월 60만 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1990년 당시는 근로자 최저임금이 16만 5천6백 원이었고 월급 100만 원 이상을 받은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5~6%에 불과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적은 봉급은 결코 아니었다.
넷째, 그는 친구가 하는 부동산중개업소에 나가면서 고객 접대용이라는 명분으로 프레스토 승용차를 월부로 샀지만 집은 천호동이었고 일터는 부천이었다. 그 먼 거리를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였다는 것은 그의 처지로 볼 때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게다가 차를 월부로 산 것을 보면 신차였다는 말이며 프레스토보다 더 싼 차들도 있었는데 월부로 그 차를 구입하였다. 보증금 50만 원 월세 9만 원짜리 사글세 집에서 사는 처지에 도대체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을까?
다섯 째, 1990년은 이미 산업계에서 3D 업종 전체에 대한 근로 기피 현상이 나타나 일당 3~4만 원에도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다른 일을 하고자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복덕방 사무실에 나간 이유가 도대체 뭘까? 돈도 잘 벌고 편해 보였기 때문 아닐까?
능력과 지혜가 필요했던 사람은 우선은 그 자신이었다.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자기에게 물려진 원인은 그의 소비생활과 일하는 태도 때문이지 피할 수 없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나는 그를 ‘착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소비생활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절망을 초대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정말 있는 자들은 말을 막 하는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도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자기 잘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노동 착취를 당해봐야지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고.
그러나 세이노는 가난으로 세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하층민으로 몇 년간 살면서 자금을 모아 1,000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가정환경이나 정치인들 탓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합리화, 곧 핑계는 너무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죄를 짓고 게을러서 안 되는 것들을 합리화하며 그런 삶에 자신과 자녀들까지 고착시킵니다. 이렇게 여러 핑계를 대며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사명을 쫓은 것이 아니라 꿈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꿈이고 자녀를 낳는 것도, 재산을 얼마 모으겠다는 것도 꿈입니다. 꿈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스스로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릅니다. 사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꿈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셨다면 전능하신 분께서 그 일이 이뤄지도록 모든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믿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황소를 훔친 도둑이 경찰서에 끌려와 말했습니다.
“저는 고삐를 하나 훔쳤을 뿐입니다. 고삐를 들고 오니까 소가 따라 오더군요.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경찰서장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도 자네 손을 잡아왔을 뿐이네. 손만 오지 자네는 왜 따라왔나. 우리는 자네를 형무소에 넣지 않겠네. 자네 손만 집어넣을 걸세.”
*최승호의 [황금털 사자] 중에서
성인들은 핑계를 대지 않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핑계가 있더라도 결국 죄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핑계는 사명을 찾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뜻만 이루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그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사명을 찾아 삶의 의미로 삼는다면 결코 핑계 대고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꿈을 좇지 말고 사명을 삽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가슴을 움직이는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입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삶을 주도하게 됩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은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문명은 생각의 탄생으로 열렸습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생각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예술은 생각의 열매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제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장엄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우리 영화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BTS의 음악은 K Culture의 우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생각은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상(模像)’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과 지적 인식능력과 선택과 행위의 자유 덕분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대로 믿지 않으면, 믿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빵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우리가 빵을 적게 가져왔다는 말씀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빵을 많게 하는 효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사이의 교만과 헤로데의 욕망이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미신이 되고, 광신이 되고,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폭력과 전쟁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공동선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같습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혼인하여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스테파노(Stephen)
신분 : 왕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활동연도 : 969/970?-1038년
같은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헝가리 게자(Geza)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Adelaide)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크(Vaik)는 10살 때에 세례를 받고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된 바이에른(Bayern) 공작의 누이동생인 기셀라(Ghisela)와 결혼했고, 99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자르족(Magyars)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련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고, 1001년에는 헝가리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스테파누스 왕은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의 지도하에 교계제도를 구성하고 교회 재건을 도모하며, 온 나라를 평화롭고 지혜롭게 다스림으로써 헝가리 국가를 창건하고 그리스도교화 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이었다. 그는 자신이 후계자로 여겨 왔던 신심 깊은 아들 성 에메리쿠스(Emericus, 11월 4일)가 사냥 도중 사고로 죽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친척들간의 암투와 음모로 큰 시련을 겪고, 말년에는 건강마저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다. 그는 1038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사망하였다.
성 스테파누스가 사망한 후에도 헝가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었으며, 묘지를 참배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1083년에 라디슬라스 1세 왕은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의 허가를 받아 헝가리의 주교들과 수도원장, 고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의 유해를 장엄한 예식으로써 공경하도록 결정하였다.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성 게라르두스 사그레도(Gerardus Sagredo, 9월 24일)의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686년에 부다페스트는 터키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는 성 스테파누스의 축일을 9월 2일로 선포하고 전세계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000년 8월 2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 스테파누스 성당에서 성 스테파누스를 그리스 정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성 스테파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1054년 이후 서방교회의 성인이 동방교회에서도 성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성 로코 (Roch)
활동년도 : 1295-1378년
신분 : 평신도,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로꼬, 로꾸스, 로케, 로쿠스, 로크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 출신인 성 로쿠스(Rochus, 또는 로코)의 부친은 그 지방의 장관이었다. 그러나 20세 되던 해에 부친을 잃자 그는 로마(Roma)를 순례했는데, 그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전염병의 희생자를 돕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피아첸차(Piacenza)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풍성하게 드러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순례자로 변장한 스파이 혐의를 쓰고서 5년 동안이나 투옥되었다. 성 로쿠스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나중에야 그가 전직 장관의 아들이며 현 장관의 조카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또 그렇게 공경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로코(Rocco), 에스파냐에서는 로케(Roque)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