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어린 나의 6,25를 겪은 학창(學窓)시절과 삶.
장윤우(성신여대 명예교수,시인)
1937년 12월 1일- 나는 서울,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렇기에 순 “서울내기 깍쟁이”라고도 불리운다.
서대문 밖 행촌동(杏村洞)이었고 초등학교, 중고등, 대학을 거의 서대문과 신문로,종로통에서 보내면서 꿈을 키워왔기에 순박한 시골풍정을 잘 모른다고 하는게 알맞을게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 서울의 4대문 성밖은 오늘의 시골보다도 더 시골다웠다.
뒷산에 다람쥐와 맑은 냇물이 흐르고 어린 동무들과 새소리, 바람소리를 맞으며 아카시아꽃잎, 산딸기를 따먹으려고 열심히 산을 오르내렸다. 1940년대 일제(日帝)밑에서 우리말을 빼앗기고 강제 창씨개명(創氏改名)도 당하고 남산 위에 높이 지은 조선 신궁(神宮)에는 긴 칼을 찬 담임선생을 따라서 어린 초등학교 1년생들이 참배하려 올라가던 높은 계단 생각은 지금도 지워지질 않는다.
빛바랜 옛사진으로 간간히 보고 있다. 내가 살던 빨간 이층 벽돌집이 바로 독립문 옆에 있기에 꼬마대장들의 모임은 늘 독립문이었고, 영천, 관동(官洞)시장과 양잠소 골목이 무대였다. 몇 년 후에 집을 더 늘려 현저동 형무소가 있는 압박골에 아담한 한옥을 구해서 그곳에서 4남매들이 거의 외할머니 밑에서 컸다.
부친은 세관관리로서 남도 끝 마산세관에서 감시과장으로 근무하시고 어머님까지 함께 임지로 가셨으므로 사남매가 늙으신 외할머니 밑에서 컸다,
낭만과 푸른 꿈은 뒷산을 두른 안산(鞍山)과 앞산 마루 인왕산으로 메아리쳐 갔다. 푸른 밤하늘에 쏟아져 내릴 듯이 무수한 별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세어가면서 내별은 어디에 있을까 한없이 빨려들었다.
서울중학 1년생인 1950년 6월 25일--
초여름의 나른한 일요일의 나들이에 시민들이 한가로이 취해 있을 무렵,
나도 예외 없이 독립문 근처 집에서 책을 뒤적이는데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갑자기 한길에 소동이 빚어졌다. 북한군이 예고도 없이 삼팔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하여 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트럭에 실려 북으로 향하였으나 파죽지세로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아니, 이럴 수가 북진통일을 구호로 외치면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호언(豪言)하던 자유당정권의 기세는 어딜 가버리고 이미 대전으로 도피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눌한 말씨가 느릿하게 녹음된 방송으로 서울사수(死守)와 국민 안무에 급급한 것일까.
북한인민군들은 대부분 10대의 소년병 같았다. 자기 키크기만한 삼팔식 장총을 끌다시피 메고 탱크를 앞세워 서대문으로 한강변으로 내달았다. 서대문형무소가 열리면서 숱한 정치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핼쓱한 모습의 죄수들은 기고만장하였고 어느 결에 준비되었는지 독립문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와 인민공화국 깃발이 내달렸다, 붉은 깃발과 만세 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언제 이렇듯이 준비되었는가 빨갱이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어린 나이에도 저으기 놀랐다.
허기사 남침이 시작되면 남한에서 30만ㅇ8ㅕ명이 봉긔될거라고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호언장담하였다지 않는가.허나 부발로 끝났다.
우리 가족들은 한강을 건너 고향마을 시골집(경기, 남양면 장전리 316)으로 떠나려고 서둘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강철교가 미리 폭파 되버린거다. 다시 마포나루로 향했다. 작은 나룻배를 전세내여 강을 겨우 건넜다. 서울이 함락된지 이틀쯤 뒤였기에 인민군대는 이미 천안, 대전쯤 점령했으리라고들 추정했다.
이게 웬일인가 강 건너 언덕에는 국군(당시 국방군)들이 매복해 있었다.
철모 위에 태극기를 질끈 동여매고 도강피난민들을 검문하였다. 혹시 서울에 집결한 인민군대가 위장 도강(渡江)하는가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잘못 알고 말한 도강시민들이 붙잡혀가는 것도 볼 수가 있었다.
6.25전쟁 ---.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십대 소년은 실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처음 보는 신기한 상황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찾아내고 놀랬다.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도중이었다. 시흥쯤 된 듯한데 UN군 쌕쌕이(세이버 젯트기를 그렇게들 부른다)가 후퇴하는 국방군 트럭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날아간 트럭과 파편, 국군장병들의 시신이 처참했다. 남.북한군의 구별이 여의치 못하여 호주군, 미군, 영국군, (참전 16개국)등에 당한 사례가 많다는 말을 들었다. 시골길을 따라서 간 곳은 서해바다가 한가로이 떠 있는 조부모님들의 고향인 남양면 장전리였다.
초가지붕과 마당에 깔린 멍석 --- 마당 끝엔 감나무, 대추나무가 동그란 뒷산엔 밤나무가 가득 찬 조용한 마을이었다. 부서운 전화(戰禍)도 모르는 외딴 시골이었다,
결국 이곳에서 석달동안 ----, 9·28 서울수복이 될 때까지 눌러 살었고 우리를 피난시키기 위해서 상경하셨던 부친(장진창)께서는 공무원이셨기에 너무도 힘든 도피생활이었다.
막판에는 마을의 빨갱이들이 앞장서서 동리 유지와 우익들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대창으로 학살하거나 묶어서 이동시키고 있었다.
수인철도선을 따라 몰래 철길 야간 이동시키는 열차 폭파도 보았다. 어린 나이의 우리들도 밤이면 모여 인민군가나「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압록강 구비구비...」노래를 배워야했고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된 셈인지 그 노래는 지금도 머리에 간혹 스친다, 이북 안내방송에 그대로 이어져오는 탓인가, 9월의 어느날 밤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인천함포사격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그 이후- 서해 수평선위로 떠 있는 무수한 함정들이 목격되었다. 붉게 물든 포연(砲煙)하늘, 어린이들이지만 솔톡재에 올라서 흥분된 가슴을 짓눌러가며 인천상륙작전의 추이를 바라다보던 며칠 뒤에야 비로소 포성이 멈추고 적막한 데, 드디어 이제 붉은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는구나. 안도가 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대작전의 성공이었다,
무더위 속 밭가운데 높이 세워진 수수깡더미 속에 몸을 숨긴 부친, 삼촌, 고모부 3人도 비로소 햇볕을 보게 되었으니 모두 고인이 되셨으나 바싹 마른 몸과 백지장처럼 창백하신 모습이 어린 우리에게도 몹시 안쓰러웠다.
자유대한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실감하였다.
중학1년생인 나어린 소년 장윤우, 나는 쌀을 지고서 서울 집에까지 걷고 또 걸어서 왔다. 온종일 걷느라고 모두들 두 어깨가 쓰리고 발 뒤꿈치에 물집이 생겨서 터졌고…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행진이었기에 며칠간 끙끙 앓았다.
서울에 온 내 집동네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생가가 있는 행촌동은 폭격과 시가전(市街戰)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거리마다 파괴된 탱크와 망가진 차량(車輛)들, 시신이 흩어져 있는 귀신같은 거리였다. 유명인사들의 납북 행렬이 가슴 아팠다.
전쟁의 참화는 시가지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그러나 수복이후의 안도와 참상도 잠시 였으니 석달쯤 뒤 강추위속에 다시 남행열차에 올라타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 의용부대의 전쟁개입으로 51년 1월 4일 서울이 재함락 되었다. 꽹과리소리와 인해전술에 여지없이 위압당한 걸까. 화물만 싣는 무개열차에 올라앉아 무려 일주일간의 긴 고행 끝에 항도(港都) 부산항(釜山)에 도달하였다.
피난민들로 뒤끓는 부산시내를 처음 보는 경이로운 눈으로 보기도 잠시일 뿐이다- 가족들은 여수로 떠나는 작은 철갑선에 올랐다. 피난보따리도 거의 털려 버리고 누가 보든 더러운 거지행색들인데도 풍광이 아르다운 다도해를 지나는 뱃전에서 하루 내내 섬과 섬들, 갈매기 소리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산자수명한 항도 여수에 도달하였으니 임진외란당시 이순신장군이 진(陣)을 친 우수영, 이곳에서의 꿈을 버리지 않고 3년 세월이 잊혀질리 없다. 어린 나이에 나홀로 문학의 꿈이 영글어가기 시작하였다. 마침 서울중 동기생인 곽성룡과 김현태도 피난을 와서 같은 반(班)학생으로 다녔다.
부친이 여수세관으로 전근된 덕택이랄까 신항 바닷가 관사에 몸을 던졌다. 서울중학교 1년생인 내가 여수중학교1년생으로 바뀌고 장윤우의 사춘기는 드디어 외롭고 고생속에 무연한 바다를 바라보며 3년이 계속되었다.
이후 피난막사에 자릴 잡고 재학생들을 찿는 부산 서울 모교를 찾아가게되고 휴권반대데모로 구호를 외치며 광복동 거리를 행진하며 보내다가 결국 수복된 서울 본교로 복귀하게 되었다.
훗날 나는 서울중학,고교에서 서울대학교 미술과로, 두 남동생은 큰애는 고려대(高大) 영문과를, 둘째는 서울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大학교 상과대학를 다녔다.
1954년쯤의 겨울은 역시 혹독하였다. 어느 세대가 우리처럼 험난하고 굴곡진 역사를 겪었을까 싶다만 일제치하에서 태어나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되고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이른바 <6·25사변>을 거쳐 1960년대 대학생활 속에서 4·19혁명세대가 되어 버렸다.
육군 일등병 장윤우는 강원도 양구 전방에까지 밀려들어가서 제대증을 받고 5·16 군사혁명도 서울거리에서 생생히 보았다.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弑害) 서거, 석달후, 12·12 대통령시해와 군부사태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시대를 넘겨야했다.
서울! 내고향 서울은 오늘, 파괴의 잿더미 위에서 전혀 다른 새모습 - 국제도시로 변모되었다.
이제 선진도시 서울의 중심부에서 - 멀리 외곽지대로 떠밀려 살고 있다. 한강 하반 목동의 뻘 밭에 세워진 소위 목동 신시가지시에서 20여년째 몸을 의탁하며 노후를 보낸다.
조선집 대청마루에서 청아한 매미소리, 참새 떼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청계천 맑은 물에서 가재를 치던 「서울내기 소년」이 아파트의 숲속에서 매연과 차량의 소음으로 하루를 열고 잿빛 취기 속에 닫는 몸이다. 토박이 서울내기사람들은 종로 가회동 쯤에서나 눈씻고 찾아볼까. 2/3가 넘는 타지(他地) 사람들이 밀려 와서 주인이 되어 고향을 잊고, 아니 빼앗긴 채 연명(?)하고 있을 게다.
나룻배 타던 한강은 그래도 유유히 흐른다. 장마철이 오면 넘치는 강물을 구경하려고 달려가던 철부지들, 인천에서 실려온 새우젓독들이 즐비하게 쌓인 황포돗대의 마포강변은 씻은 듯이 살아지고 냉냉전차가 길 가운데를 누비며 달리고 명절이 되면 화려하게 단장한 꽃전차를 구경하러 길가에 앉아 어린 가슴을 설레이며 기다리던 낭만도 사라졌다.
뜨거운 여름철, 청계천 맑은 물가에서 노닐던 그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지저분한 도시, 온갖 범죄가 우글거리는 도시, 살기 힘들다는 도회지- 그래도 나를 키워준 도시, 서울을 나는 떠날 수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한다. DMZ-. 비극의 산물 어데로 갈 것인가. 누구도 모른다.
그리운 학창시절 나를 키워낸 모교~ 그리고 함께 칠순(七旬)을 넘어가는 고등학교 8회 동기생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며......... 우여곡절(迂餘曲折),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난한 길이였어도 추억은 아득하지만
아름다웠어라,
그렇구나 딸각발이 서울 선비라도 좋다, 앞으로 사는 날까지만 무탈하게 여생을 넘기고만 싶구나-
감회서린 6.25전쟁 50주년을 마지하며~
새삼 감회가 어린다. * 사진은 육군 초년병의 장일병,
-<양천문단 10호, 서울고 동창회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