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26년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최충헌 형제가 봉사 10조를 보면 당시 문벌귀족사회에서 무신정권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사회문제를 잘 꼬집고 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나오는 봉사 10조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3. 선왕의 제도에 의하면 토지는 공전을 제외하고 신민에게 차등있게 나누어주었는데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탐오하여 공전과 사전을 빼앗아 겸병하여서 한 집이 가진 기름진 옥토가 몇 고을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의 세 수입이 줄어들고 군사들이 결핍을 겪게 되었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해당기관에 명령하여 공문서를 검증하고 강탈당한 것은 전부 공사의 본 주인들에게 돌려주도록 하십시오.
4. 조와 부는 모두 백성에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빈궁하면 어디에서 충족하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혹은 관리들이 불량하여 오직 사리만을 추구하면서 걸핏하면 민간을 침해하며 또 세도 대가의 종들이 경쟁적으로 백성들에게 전조를 강제로 거두고 있으니 백성들이 모두 근심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선량하고 유능한 인사를 선택하여 지방관직에 임명함으로써 세도대가들이 백성의 살림을 파산시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5. 국가가 양계에 도총사를 ,5도에 안찰사를 파견한 것은 오로지 관리의 간악한 행위를 억제하고 민폐를 방지해 주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각도의 안찰사들이 응당 안찰할 일은 안찰하지 않고 그저 백성들에게서 가렴주구를 해서 왕궁에 바친다는 명목으로 역을 이용해서 운반해다가 개인적 소비에 충당하는 일이 간혹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각도 안찰사의 공진을 금지하고 오로지 검열을 그 직분으로 삼게 하십시오.
7. 근래 듣건대 지방 관리들 중 탐욕한 자가 많아서 도무지 염치를 찾아 볼 수가 없는데도 각도의 안찰사들이 이를 내버려두고 있읍니다. 설사 어질고 청백한 자가 있어도 알려지ㅐ지 않으므로 악행은 조장되고 청백은 무익한 것으로 되어 징계도 권장도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양계 도통과 5도 안찰사들에게 명령하여 관리들이 유능한가 못한가를 살피게 하여 자세히 장계하게 한 후 유능한 자는 발탁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징계하소서.
8.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절약하는 검박한 기풍이 전혀 없으며 집이나 꾸리고 옷맵시나 보고 완상품을 갖추고 진귀한 보물로 몸장식을 하여 그것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렇게 풍속이 퇴폐해서는 멀지 않아 좋은 풍속이란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백관들에게 훈시를 내려 사치를 금하고 검소를 숭상하게 하십시오.
10. 중서문하성과 어사대의 신하들은 간언이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과감하게 간언해야 하며 비록 참혹한 악형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달갑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행동하여 융화 결탁할 생각들만 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적합한 인재를 선택하고 그런 후에는 조정에서 직언케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끝까지 쟁론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최씨정권은 오히려 더 부패와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이는 대몽항쟁기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나오는 사료를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ㅇ 최충헌은 자기 집에 앉아서 내시이부원외랑 노관과 더불어 문무 관원들을 임명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왕에게 보고하면 왕은 고개만 끄덕이고 두 부의 판사들도 정당에 앉아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처럼 최충헌이 정권을 독차지하고는 친근한 사람의 부탁이나 혹은 뇌물을 받아서 마음에 드는 자에게는 모두 벼슬을 주었다. 어느때 최충헌이 손님을 초대하고 연회를 차렸는데 중방의 힘센 자들로 수박(手搏)을 붙이고 이긴 자에게는 그자리에서 교위 대정 벼슬을 상으로 주었다. 노관은 최충헌의 외친으로 시정배 출신이라 성질이 약삭빠르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최충헌이 매우 총애하였다. 이로 인해 수년 만에 벼슬이 이부랑중으로 뛰어 올랐으며 문앞에 (뇌물을 바치는) 수레와 말이 밀리고 그 기세는 날로 성하였다. 친척이 모두 현관으로 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먹었다.....충주 판관 최효기는 최충헌의 애첩 월부를 통해 서대를 최충헌에게 뇌물로 주었다가 최충헌이 만족하여 특별히 최효기를 내시 직에 등용했다.
ㅇ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왕이 즉시 내시에 속하게 하고 교지를 내려 임시로 각문지후 벼슬을 주었다. 박진재가 호사로운 축하연을 열자 최충헌이 손님들을 데리고 갔다. 임효명의 문전을 지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불러 들여 술상을 차려 주었는데 그것이 아주 사치스러웠으며 고달고개에서 가조리에 이르는 사이의 길에는 채붕을 매달고 기악과 잡희를 크게 벌려 놓아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
ㅇ 희종 2년 최충헌을 진강후로 책봉하고 부를 설립하여 흥녕부라 하였으며 소속관리를 배치하고 흥덕궁에 속하게 하였다. 최충헌이 남산리 자택에서 왕명을 맞을 때 종친들이 그 집으로 축하하려 왔다. 예식이 끝난 후 책사를 위하여 연회를 열고 또 선물로 서대,은,능견,안마 등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 밤이 깊도록 종친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책봉 정부사를 하룻밤 묵어가게 하였는데 그 휘장장식,꽃과 과일,풍악,가무의 성대함이 삼한이 생긴 이래 신하의 집으로는 으뜸이었다.....최충헌이 일찌기 활동에 자택을 지었를 때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되도록 굉장하고 화려하도록 힘써서 집둘레가 몇 리나 되었으며 규모가 대궐과 비슷하였다. 그리고 북녘으로는 시전을 향해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다. 이 공사에서 토목 부역이 극심해서 국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ㅇ 최충헌의 권세가 임금을 압도하고 위엄이 온나라를 흔들게 되었으며 자기 뜻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즉시로 죽였으므로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대장군 노준의 아들 노인우가 최충헌의 인척으로 그 좌우에 있으면서 미친 척하고 여러번 입바른 소리를 하였으므로 최충헌의 미움을 받아 인주의 원으로 강등되었다.
ㅇ 최충헌이 별도의 저택으로 이사하였는데 무장한 위병이 몇 리 사이에 가득찼으며 조정의 관원들도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그전에는 재상으로서 수행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 때에는 첨서 추밀원사 금의와 추밀원부사 정방보가 처음으로 최충헌을 수행하였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ㅇ 최충헌의 여종 동화는 용모가 아름다워서 마을사람들과 사통하는 일이 많았으며 최충헌도 역시 간통하였다. 하루는 최충헌이 동화더러 누구에게 시집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흥해의 공생인 최준문이라 대답하므로 최충헌이 즉시 최준문을 불러 집에 두고 사환으로 쓰다가 대정으로 임명하고 그 후 대장군 벼슬까지 주었다. 나날이 최충헌의 신임이 두터워지니 최충헌에게 청할 사람들은 모두 와서 부탁하게 하였다.
ㅇ 최충헌은 사람에게 관직을 주면서 뇌물의 많고 적음을 보았는 바 그 때 8품을 구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으나 정원이 적었으므로 5부 녹사를 8품으로 끌어올렸다. 또 사관한림의 녹이 5부 녹사들보다 많았으나 역시 8품으로 끌어 올렸다.
ㅇ 백관이 최이(최우)의 집으로 가서 정부를 올리니 최이는 대청에 앉아서 그것을 받았으며 6품관이하는 재배하고 당아래 엎드려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 최이는 이때부터 정방을 자기 집에다 두고 문사를 선발해서 소속시켰는데 그들을 필도적(必도赤)이라 불렀다. 백관의 전주를 하고 비목을 써서 바치면 왕은 단지 그것을 내려 보낼 뿐이었다.
ㅇ 최이가 이웃의 가옥 1백여 동을 빼앗아 격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수백보요 평탄하기가 바둑판같았다. 매양 격구할 때면 반드시 동리 사람을 동원시켜 먼지가 일지 않게 물을 뿌렸다. 그후 또 인가를 허물어 구장을 넓혔는데 강제로 빼앗은 인가가 무려 수백호에 달했다. 날마다 도방의 마별초를 모아서 격구를 하거나 혹은 창쓰기,말달리기,활쏘기 등을 하게 하고 재추,원로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하면서 구경케 하였는데 어떤 때는 5-6일간을 계속했고 재능있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그래서 도방 마별초들이 안마,의복,궁시를 달단 풍속을 모방하였으며 항상 그 미관을 경쟁하고 과시하였으므로 장안의 젊은 사람들도 또 호사스런 차림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처가 가난하다고 소박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ㅇ 최이의 처 정씨가 죽어서 왕의 명령으로 관비로 장사 일체를 구비하되 순덕왕후의 전례를 따르게 하였다. 장례식에 3궁과 여러 종친 재추 승선이하의 관원들이 전(奠)을 차렸는데 될수록 사치스럽고 아름답게 하였으므로 저자의 물가가 폭등하였다. 장례일에 변한국대부인으로 추증하고 경혜라는 시호를 주었다. 백관과 제영부에서도 장례에 모두 참가하였고 감실에까지 금,은과 비단으로 장식했고 수리를 좌우에 붉은 촛불을 열을 지어 세웠으며 석실은 극히 기교하였다. (이때 몽고가 쳐들어오고 있었다)
ㅇ 최이가 발에 부스럼이 생겨 앓았는데 양부에서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기도 혹은 재를 올리고 소지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장안의 종이값이 올랐다. 허다한 의원들도 최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으나 합문지후 임정의 처가 고약을 붙여 효험을 보았으므로 왕이 임정에게 공부낭중의 벼슬을 주어 최이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ㅇ 왕이 최이가 강화천도에 공이 있음을 들어 진양후로 봉해주었다. 이 때 자택을 신축하면서 도방과 4령의 군사를 사역하되 옛 서울에서 재목을 수송했고 또 소나무,잣나무를 많이 가져다 후원에 옮겨 심었다. 이런 물자를 모두 배로 수송해 들여 오느라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 꾸민 원림은 너비가 수십리나 되었다. 최이는 서산의 백성을 동원하여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하였으며 또 싫어했다. 또 강화로부터 2-3일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는 안양산으로부터 잣나무를 캐다 뒷뜰에 옮겨심게 하였는데 때는 엄동설한이라 역군중 동사한 사람이 생겼으며 연변의 고을들에서도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다. 어떤 사람이 승평문에 방을 붙이기를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것이 더 중한가' 하였다.
ㅇ 고종 32년 4월 8일 최이가 연등회를 하면서 채붕을 가설하고 기악과 온갖 잡희를 연출시켜 밤새도록 즐겁게 노니 도읍안의 남녀 노소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 또 5월에는 종실의 사공이상과 재추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산처럼 높게 채붕을 꾸미고 수놓은 비단 장막과 능라 휘장을 둘러치고 그 안에 비단과 채색 비단 꽃으로 장식된 그네를 매었으며 은과 자개로 장식한 큰 분 4개를 놓고 거기다가 얼음산을 만들었고 또 큰 통 4개에다가 10여종의 이름난 생화를 꽂아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악과 온갖 놀이를 연출시켰는데 악공 1350명이 성대한 옷차림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니 각종 악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고통받는 농민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한평생 일해서 벼슬아치 섬기는
이것이 바로 농사꾼이다
누더기로 겨우 살을 가리고
하루종일 쉬지 않고 밭을 가누나
벼가 파릇파릇 자랄 때부터
몇 번을 가꾸어 이삭을 맺었지만
아무리 많아야 헛배만 불렀지
가을이면 관청에서 앗아 가는 것
남김없이 몽땅 빼앗기고 나면
내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네
풀뿌리 캐먹으며 목숨을 이어가다
굶주려 마침내는 쓰러지고 마는구나
서울의 호강스런 부자집엔
보배가 산더미처럼 쌓여
구슬같이 흰 쌀밥을 개돼지가 먹어대고
기름같이 맑은 술을
심부름꾼 아이들도 마음대로 마시는구나
이것이 모두 다 농사꾼이 이룩한 것
그들이야 본래 무엇이 있었으랴
농민의 피땀을 빨아 모아선
제 팔자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네
- 이규보, 나라에서 농사꾼이 맑은 술과 쌀밥 먹는 것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동국이상국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