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아쉬운 사람과 작별할 때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아주 특별히 기억될만한 것들을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송별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신부가 돼 처음 사목을 했던 성당을 떠나던 날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환송을 나왔는데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성당 마당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차 유리창을 막 두드리며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창문을 열었더니 시커먼 봉지 하나가 쑥 들어왔습니다. 뜨거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옆 좌석에 놓고 할머니와는 변변히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새 임지 성당에서는 환영 인사로 분주했고, 이틀이 지난 뒤 짐정리 도중에 그 봉투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만두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시장에서 만두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제게 이별 선물로 갓 쪄낸 뜨거운 만두를 한 봉투 가득 담아오셨던 것입니다. 이틀이나 지났기 때문에 만두는 모두 상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께 얼마나 고맙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이별의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지금도 제일 기억나고 잊히지 않는 선물 중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셨습니다.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손수건이나 반지, 책이나 필요한 물건 등은 줄 수 있지만 내 몸과 피를 선물로 내준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를 모시면서 그분과 일치되고 한 몸이 돼서 그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성체의 삶을 다짐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을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김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동시입니다. 꽃잎도, 꿀도, 향기도 남김이 없이 다 나눠줬지만 정작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꽃은 노래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기뻐합니다. 꽃의 신비에 대한 이 노래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아낌없이 내어줄 때 나는 성장하고, 풍성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남기신 예수님의 선물, 성체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가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마더 데레사는 성체를 하루에 두 번 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하루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며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씩 만난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소외받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이야기하던 마더 데레사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오늘은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과의 나눔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6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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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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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대부분은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외치고, '밤비 내리는 영동교'에서도, '제3한강교'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설렘과 수줍음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도저히 사랑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봐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외면하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안 되면 의도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헌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큰사랑을 생각하며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담고 살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뛰어넘는 참사랑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나를 외면하고 반대하며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든 이웃을 배려하는 이러한 우리 노력이 하늘에서는 열매가 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실천하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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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주님승천 대축일-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선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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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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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昇天)'이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오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하늘에는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이 사는 나라가 있고 땅 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 승천입니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러한 승천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61년 세계 최초 우주 비행사로서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 일주에 성공한 옛 소련 우주 비행사 가가린은 "하늘에 올라가 우주 공간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기에 신은 없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에 반해 아폴로 15호를 타고 네 번째로 달에 간 미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하늘에 올라보니 우주의 광대한 모습과 아름다움에 하느님께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듯이 주님 승천의 뜻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천사들과 함께 좌정하고 계신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시인 고 천상병은 시 「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하늘나라임을 시인은 예리한 감수성으로 남다르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이제 예수님 생전의 이스라엘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처럼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은 하늘나라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한계 있는 인간 삶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승천 신앙인 것입니다. 2000년 7월 30일, 대학 4학년이던 아리따운 처녀 이지선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로, 응급실을 향해 달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환자 곁을 지키던 오빠는 "살 가망이 없으니 동생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지선의 상태는 4~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중상환자로 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한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7개월간 입원, 11차례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 화상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이지선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사는 것은, 살아남는 것은, 죽는 것보다 훨씬… 천 배 만 배는 힘들었습니다. 그 귀한 삶을 동정하지 마십시오. 넘겨짚지도 마시고 오해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절망이 얼마나 사람을 죽이는 것인지, 희망은 얼마나 큰 힘이 있는 것인지, 행복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정말 세상에 부질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아무리 힘들 때에도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네게 희망이 있다'는 하느님 말씀이 들려와 참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를 살려주신 섭리가 있으실 테니까요." 살더라도 사람 꼴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지만 외국으로 유학 가 재활상담과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이지선의 이야기입니다. 이렇듯이 부활과 승천을 믿는 신앙인들은 세상을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를 희망하면서 삶의 어려움들을 극복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살고 선포하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실천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완성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계신 하늘나라에서 이뤄질 것이며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생활 속의 복음] 일치되어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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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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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와 타종교 신자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십자성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모든 기도의 시작과 마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시작하기에 멀리서도 알아보는 표지가 됩니다. 십자성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짧고 중요한 기도이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늘상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또 천주교 모든 예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이름으로 진행되며, 주일과 대축일에 신자들은 사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세례예식에서도 사제는 세례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물을 부으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 외에도 성사와 준성사의 모든 능력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면서 삼위일체이십니다. 오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묵상하고 삼위일체 신비를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되새기는 하느님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하느님 메시지는 당신께서 사랑으로 일치해 계시듯이 당신을 믿는 신자들 역시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충남 예산군에 가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좋은 형제'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석은 조선 연산군 3년(1497년)에 세워져 500여 년이나 된 이성만 형제 효제비(孝悌碑)입니다. 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시대 예산군 대흥면에 이성만ㆍ이순 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는데, 형제는 성년이 돼 분가했으나 같이 논을 경작했다. 그 해도 예년처럼 형제가 힘을 합쳐 부지런히 일하여 풍성한 가을걷이를 하게 됐다. 누렇게 익은 벼를 형제가 논 양쪽 끝에서 마주보면서 베기 시작했다. 땀에 흠뻑 젖으면서 내기를 하듯 열심히 베어 어느덧 훤한 벌판이 됐다. 형제는 각자 벤 벼를 쌓았는데 둘 다 낟가리가 똑 같았다. 형제는 서로 한 더미씩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그날 밤 동생은 '형님 댁엔 식구가 많으니까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없다'며 깜깜한 논으로 가서 형님 몰래 많은 양을 형님 쪽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날 밤 형님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시작했으니 소용되는 곳이 많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밤중에 논으로 나가 자기 벼를 동생 낟가리에 갖다 쌓았다. 날이 밝아 논에 나간 형제는 낟가리 높이에 조금도 변함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날 밤에도 형제가 지난밤처럼 했으나 그 이튿날에도 낟가리 높이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그래서 셋째 날 밤에도 형제가 벼를 옮기기 위해 논에 나왔다가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서로 마주쳤다. 이때서야 비로소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는 까닭을 알고는 볏단을 내던지고 한참 동안 얼싸안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일치입니다. 우리 시대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으로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는 사랑으로, 형제간에는 우애로, 부모와 자식간에는 효와 감사로, 선생님과 학생간에는 존경과 사랑으로 일치해야 하는데 부정한 돈이나 편애, 욕심 등 속된 것들이 자리 잡으며 왜곡되고 상처받아 깨어져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대축일은 사랑과 믿음, 존경으로 일치해야 치유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일심동체를 이루신 것처럼 모두가 사랑으로 일치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6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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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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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대부분은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외치고, '밤비 내리는 영동교'에서도, '제3한강교'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설렘과 수줍음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도저히 사랑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봐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외면하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안 되면 의도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헌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큰사랑을 생각하며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담고 살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뛰어넘는 참사랑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나를 외면하고 반대하며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든 이웃을 배려하는 이러한 우리 노력이 하늘에서는 열매가 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실천하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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