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고통 중에 탄식하며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도움을 구하지만 아무도 도울 자가 없는 시간을 견디기도 합니다. 오늘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행을 바라보고 다가간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접촉을 어기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을 퍼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담대한 믿음으로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치유와 사죄의 선포를 받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이 여인의 행동이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습니다. 부인병은 부정한 질병으로 분류되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의료체계는 매우 원시적이었고 당연히 병은 깊어가고 자산은 나날이 줄어갔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파산한 여인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 내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나간 줄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은 누가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다. 이례적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상황에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과의 상의없이 성령님의 치유를 허락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들은 것을 말하고 본 것을 행함으로 임의로 행하심이 없으셨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시는 통로이십니다.
여인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능력은 아들의 인지함없이 독단적인 처사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도는 여인의 믿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구조적 장치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허락이나 손길없이도 오직 믿음만으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뛰어넘어 이루어진 사역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접촉함만으로도 거룩이 전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열린 하늘의 문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가교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음으로 그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의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 성육신 이전과 부활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능력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큰 그림입니다. 원죄의 뿌리를 넘어서서 개인의 행위와 선택과 책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은혜와 회복과 용서가 여인의 치유를 통해 선포되고 있습니다.
슬픔과 죄와 병과 번뇌와 분노가운데 앉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생위에 내리시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치유와 회복을 바라보며 우리는 소망의 빛을 만납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의 거룩한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하면, 믿음으로 그 분앞으로 달려나가는 모든 자에게 허락하시는 풍성한 긍휼의 강물로 뛰어드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손내미시는 아버지의 사죄와 회복과 용서의 강물앞에, 기쁨으로 엎드려 풍성한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그 분께서 주시는 생수의 잔을 마시고 영혼의 해갈함을 얻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