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어느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유서에 대하여 말하길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 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나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글 같지만
생의 백서가 유서가 되려면 일어설 준비만 하고, 정작 일어나야 할 때
이런 저런 이유가 많으면 무슨 의미나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준비만
하고 있기보다 삶 자체가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런 말은
탁상공론 처럼 삶이 아니라 글만 남는것 같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때문에 무소유의 대명사가 된 법정스님의 무소유 논리와 주장을 보자
선물받은 난초 관리에서 나만의 자유함인 무소유 위하여
그냥 양지바른 곳에 심으면 될 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줌으로, 그 난초를 물려받은
그 사람의 자유함인 무소유는 왜 무시하는 것일까?
무소유가 좋고 정답이면 그 사람에게 난초보다
무소유를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타인의 소유가 없으면 사찰의 운영은 어떻게 되는가?
타인의 소유로, 나의 무소유를 향유하는 것은 좀 어색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소유가 집착이면, 무소유 역시 집착 아닌가?
결국 같은 집착을 두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 아닌가?
수필집 서문에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고 했는데
얽혀 있음의 많고 적음도 인연을 따른 것인데 인연을 끊으면
무소유로, 그게 바로 해탈이란 말인가? 아니면 혹시 적정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적정의 정답은 어디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인연에 의지하여 살면서 정답처럼 무소유 주장은 비겁함 아닌가?
무소유의 본문중에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고 했는데
인연을 따른 당연한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래도 무소유가
정답이라면 먹지 않으면 화장실 가는 불편함이 있으니 금식이
정답이란 말인가?
또 무소유의 본문중에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고 하는 무소유가 정답이면
본이 되어야 할 종교는 어떠한가? 헌금이란 이름으로 내물을 받고,
오히려 많은 소유가 복처럼 앞장서서 축복을 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이런 논리의 주장은 적반하장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 되는 것 아닌가?
또 무소유의 본문중에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돌아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가 정답이면, 종교 지도자들의 추악한 일탈은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수련과 수도는 왜 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싸움음은 왠말인가? 공수래 공수거인데 결국 내로남불 아닌가?
또 무소유의 본문중에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라고 하는 말이 참이면
결국 소탐대실 하지말란 말인데 이것이 무소유인가? 권모술수의
영업전술이지 따라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 논리와 주장은 보암직도
하고,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탁상공론으로 무소유의
본질을 가리고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정 스님은 무소유는 분별지혜를 따른 것으로 불교의 핵심 논리인
중도와도 다른 것일뿐 아니라 무분별 지혜의 무주상을 말하는 금강경과도
다른 것으로 그런 식의 무소유 주장은 내로남불이 될뿐 아니라
뜬구름 잡으려는 희망사항이기에 올바른 무소유는 있고 없고나, 많고 적음의
분별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하여 무주상 하는 무분별 지혜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