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와 우거지, 그리고 봄나물
4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겨울에는 기본적으로 염장식품에,
무말랭이, 시래기, 산나물 등 건조해둔 것들을 반찬으로 한다.
지금이야 시설재배로 겨울에도 마트에는 싱싱한 채소가 가득하니,
계절에 상관없이 원하는 채소나 과일을 언제든지 사먹을 수가 있다.
묵은지는 목포, 해남 등지에서 담가 먹는 ‘묵은 김치’라는 방언인데,
김장김치보다 소금을 더 넣어 오래두어도 무르지 않게 하는 게 비법이다.
땅에 묻은 항아리에 빈틈없이 차곡차곡 넣어 2,3년 동안 보관했다가 꺼내먹는데,
아삭아삭 씹히는 것이 만능조미료와 같이 여러 음식에서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2년째 되는 묵은지)
홍어 삼합에 내놓는 백김치 같은 것이 바로 묵은지를 빨아 썰어 놓은 것이고
또 묵은지로 회를 싸먹으면 상추와는 다르게 회에 감칠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붕어찜을 할 때 넣어주면 비린내를 잡아주고, 돼지고기에 넣으면 육류냄새를 없애준다.
흰 접시에 수북이 쌓인 묵은지를 바라보면 걸쭉한 막걸리나 흰 쌀밥이 절로 생각난다.
내가 집에서 즐겨 해먹는 음식 중에는 묵은지를 이용한 것들이 많다.
돼지 등뼈를 사다가 묵은지로 덮어 푹 우려내면 깊은 국물 맛이 일품이고,
가끔은 담백한 고등어에 칼칼한 묵은지를 얹어서 조린 고등어묵은지찜도 해먹고,
묵은지를 들기름에 살짝 볶아 두부에 얹어 먹는 그 환상적인 궁합은 애들도 좋아한다.
북경에서 사는 동포 후배는 서울에 출장 오면 ‘돼지고기 묵은지탕’을 찾는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걸 먹으려고 숙소를 잠실로 정해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이다.
나 역시 묵은지 열성팬이기는 하지만 우리 고향에는 해를 넘기는 김장김치는 없었다.
김장을 끝내고나서 남은 양념으로 게국지를 담거나 무청으로 꺼먹지를 담그는 정도이다.
꺼먹지는 수년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솔뫼성지 방문 때 밥상에 올라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
우리집도 즐겨먹는 음식이었으며, 요즘은 김장할 때 우거지를 별도로 담아 곰삭기를 기다려
늦은 봄부터 듬성듬성 곰팡이기 핀 우거지를 물에 헹구어 쌀뜨물을 받아 끓여 먹는다.
아마도 외국인이 이 광경을 보면 배추를 썩혀서 씻어 먹는다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김장 후에 담근 우거지)
하여간 긴 시간의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조화롭게 숙성된 묵은지의 깊은 맛은
조미료를 넣지 않았어도 먹을수록 자꾸만 찾게 되는 중독성이 강한 음식이다.
그런데 20여 년 전에 우연히 눈에 쏙 들어오는 칼럼기사 하나를 접했다.
필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도 한의사 또는 음식연구가가 아닌가 싶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국 사람들은 유독 봄철에 몸살을 많이 앓는데 그 이유는
겨울 내내 소금에 절인 김치 장아찌 젓갈 등 염장식품을 계속 먹어
체내에 독이 쌓이고 한계에 이르면 누구나 몸살이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학적 접근이나 데이터분석 등에 근거한 글은 아닌데,
동양의학적인 두루뭉술한 서술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다.
매년 4월이면 어김없이 몸살이 찾아와 초죽음이 되는 나에게는
눈에 번쩍 띄는 내용으로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봄나물을 충분히 섭취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서
체내의 노폐물과 독이 빠져나가 몸살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이와 달래가 그렇고 쑥과 미나리가 저렇고 봄동과 시금치도 이러하니,
제철음식을 먹는 것이 건강의 열쇠로 봄에는 봄채소를 즐겨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고 나서 나는 식단에 변화를 도모했다.
묵은지를 이용한 음식을 줄이고, 열무김치도 일찍 담그는 등
의식적으로 봄볕에 광합성작용을 한 푸른 채소나 봄나물을 많이 먹었다.
그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몸살로 앓아누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몸살이 나지 않으니 봄철음식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언 땅을 뚫고 나온 봄쑥은 쑥버무리나 도다리쑥국으로 취하고,
쪽파는 다듬어 살짝 데쳐서 한입거리로 돌돌 말아 초장에 찍어 먹고,
푸른 봄미나리는 붉은 고추장에 푹 찍어 날로 먹는데 그 맛이 상큼하다.
나는 식약동원(食藥同源) 이란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음식과 약은 같은 데서 나왔다는 뜻으로 음식이 곧 보약이다.
여자들에게 좋은 쑥이나 남자들에게 좋은 원추리 등등,
봄나물이나 채소들은 어느 것이든 먹으면 약이 되는 것 같다.
(형수가 채취한 봄쑥) (고들빼기와 씀바귀)
이제 봄나물 채취는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고향 당진에 내려가서 고채(苦菜), 즉 쓴 나물인
씀바귀, 고들빼기, 민들레 등을 어마어마하게 캐서
다듬고 데쳐서 냉동해 두고는 1년 내내 무쳐 먹는다.
주말을 즐겁게 보냈다.
아내가 나물 캐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힘들면 쉴 수 있는 별장 부럽지 않은 농막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듬어 놓은 나물, 가운데 바구니는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