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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가다의 수필세계 1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아가다의 수필세계를 읽기 위해서 그의 두 권의 수필집(희나리와 분이), 그리고 공동저자인 ‘앵무새 키우는 남자’를 읽었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감성의 바탕에 유년, 고향, 어머니를 두었다. 글쓰기의 초기는 이러한 것들이 소재가 되어 있다. 유년의 기억이 그 작가의 수필세계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나도 수필작가의 수필세계를 알아보려면 그들의 유년과 고향부터 읽기를 하였다.
김아가다의 수필을 읽고 느낀 점은 유년이나 고향 이야기가 눈에 별로 뜨이지 않았다. 그는 시골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대구이니,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과는 감성이 다르리라. 그는 2012년에 월간 ‘한국수필’에 등단하였고, 이후 ‘수필세계’에도 등단하였다. 2016년에 첫 수필집 ‘희나리를 출간하였다. 수필 입문도, 수필집 발간도 비교적 늦었다. 그의 수필에도 긴긴 옛 지난날은 거의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그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은 생략해 버린 듯이 인생 전부를 가지고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기는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글의 틈새로 얼핏얼핏 옛 이야기도 비추고 있어서 미루어 복원해 보았다.
그의 첫 번째 수필집 희나리에 제일 먼저 실려 있는 글이 ‘꽃’이다. 꽃을 찬미하는 글이 아니고, 너무 일찍 시들어버리는 꽃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글이다. 수필 ‘꽃’에서 남편과 사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수필은 남편 사별한 이후의 사건들을 아주 많이 다루었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는 6년 전의 그날부터 펼쳐진다고 보아야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꽃’은 그런 사실들을 이야기 한다. ‘꽃’에서 보여 준 만만하지 않았던 그의 삶이 수필세계를 형성하였다.
희나리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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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혼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와 춤을 추고 있다. 진솔한 나의 알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 겹씩 나를 벗겨 내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백의 문학이고, 성찰의 문학인 수필을 통해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할까.
수필은 나의 숨구멍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듯이 자신이 겪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사고함으로, 다른 사람도 겪는 고통이다, 라고 성찰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뜻으로 읽어진다. 이렇게 생각함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방법이 된다는 뜻으로 읽어진다. 그렇다면 수필쓰기는 단순히 글쓰기가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김아가다 작가는 수필을 자기의 숨구멍이라고 표현하였다. 왜 숨구멍이 되었을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냄으로 치유의 효과도 가져왔다고 본다. 독백이고, 성찰이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그런 방식으로 자기치료를 하였다고 본다.
자기의 내면을 독백 형식으로 풀어내면 ‘진실’이 담길 수밖에 없다. 김아가다의 수필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기로 하였다. 작품 ‘꽃’은 자기를 진실하게 드러냈다고 보여, 여기에 소개한다.
꽃
김 아가다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꽃들의 모습이 화사하다. 그 중 길가 쪽에 맵시 좋은 꽃봉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에 취한 듯 미소 머금은 연꽃이 고혹적이다. 행여 누가 볼까 살피면서 꽃을 꺾어 품에 안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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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하루였다. 화병 속의 꽃은 하루 만에 고운 모습과 빛깔이 누렇게 변했다. 이승과 저승의 구릉을 오가듯 꽃 한 송이로 인해 기쁨과 서글픔의 혼돈이 왔다. 떨어진 꽃잎을 모아 불을 지폈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남편이 떠난 지 여섯 해가 되었다. 세상의 인연을 다 내려놓고 그가 떠난 날 뜨거운 불가마 앞에서 모든 것이 정리된 줄 알았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안내하는 장의사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망자 떠나십니다. 인사 올리세요.”
꽃으로 맺은 인연 서른 해를 함께 했던 우리는 불 앞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시든 꽃잎을 태우는 동안 불가마 속으로 뛰어 들어가던 그 장면이 왜 그리 가슴 따갑게 떠오르는지, 먼저 가서 기다리면 곧 뒤따라가겠다고 울부짖던 나는, 아직 이승의 삶에 묶여 서성이고 있다
꺾인 꽃은 자유롭지 못하다. 가정이라는 꽃병 속에 물을 부어주면 그 물로 살면서 한 번도 물 밖으로 나다닌 적이 없었다.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지켰지만 내 안의 나는 담 너머 세상이 궁금했다. 틈만 나면 깨금발로 바깥을 기웃거렸다. 깨진 사발만 보고 살았는지 여자와 사기그릇은 밖으로 돌리면 금이 생긴다고 주장한 남편이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존재였다. 그의 존재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제는 자유로워 졌지만, 그 구속이 사랑인 줄 알고 나니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목적 없는 이정표에 나를 맡긴다. 설마 잊었거니 했는데 아직 떠나보내지 못했나 보다. 어제도, 오늘도 닮은 사람을 찾아 헤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내가 그를 붙들고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 했던 혼인서약을 파기한 죄라면서 옭아매고 있다. 그 언약은 하늘에서도 풀렸다는데 왜 거머쥐고 있는지 모르겠다.
매달 말일이면 이승과 저승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딩동’ 스마트 폰의 알림은 유족연금이 들어왔다는 메시지이다. 하늘 은행에서 나에게 보내는 돈이다. 남편이 주는 돈만큼 편한 것이 있으랴. 내가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이십만 원은 다른 사람의 이백만 원보다 크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손에 쥔 전화기에 꾸벅 절을 한다.
잠을 잘 때도 그의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 가끔 집에 오는 동생이 뜨악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지만 궁색한 대답을 하고야 만다. 편해서 그냥 편해서 이렇게 산다고 했지만, 그가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남편이 아끼던 물건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한 번씩 눈길을 준다. 언제라도 들고 나갈 준비가 된 가방이다. 금속으로 된 가방에는 카메라와 렌즈가 오밀조밀 주머니에 담겨있다. 그는 척척 자동으로 찍히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아날로그를 좋아했다. 상황에 맞는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초점을 맞추며, 피사체를 조절하는 눈으로 세상에 머물다가 간 사람이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 렌즈를 닦고 장비를 정리하던 그의 흔적을 차마 지울 수 없어 그러안고 산다.
산사에서 만난 스님이 이제는 인연의 끈을 놓으라고 했다.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 숨어 있는 추억의 조각들이 전부 공이고 허상이라 한다. 그의 카메라도, 검도를 즐겼던 목검도 또 불속으로 던지란 말인가. 움켜진 내 모습과 놓아야 하는 갈등이 천칭(天秤) 위에서 간당거린다.
단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버린 꽃에 향내가 없다. 퇴색한 꽃잎이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다. 한 송이 꽃에 매료되어 웃고 울던 어리석음이 한 줌의 재로 남았을 뿐이다. 부질없는 욕심에 매달려 집착했던 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체없는 허상을 동경하면서 살아온 삶 그만 내려놓을까 한다. 그의 넋도 이제 보내 주리라. 비록 불의 인연으로 한 줌의 재가 되었을지라도 소멸이 아닌 소박한 한 송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희나리,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16, 꽃 p1
김아가다의 수필세계 2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반적으로 가족이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리면 얼마 동안은 극도의 슬픔에 젖어서 애도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점점 옅어지고, 애도의 시간도 지나가 버린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자기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태도이다. 김 아가다도 그런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애도의 시간이 좀 길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의 넋도 이제 보내 주리라. 비록 불의 인연으로 한 줌의 재가 되었을지라도 소멸이 아닌 소박한 한 송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수필 ‘꽃’의 마무리를 이렇게 한 것이 그가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고, 기억 속에 묻어두고, 회상으로만 불러낸다. 김 아가다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의 삶을 새롭게 꾸렸고, 이처럼 건강한 삶으로 수필세계를 꾸려 간 것이다.
수필 ‘희나리’는 자신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말한다. ‘희나리’를 자기 수필집의 제목으로 삼았으니까 그 만큼 의미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자.
“난로 속에서 말없이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본다. 태울 수도 없고 탈 수도 없어 온몸으로 연기만 끌어안고 있던 희나리가 아니던가. 태우고 또 태워 재가 된 장작은 비로소 안식을 되찾으리라. 혹 아는가. 타는 동안이라도 저 스스로 몸을 열어 누군가에게 작은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지. 그 어떤 못난 것도 쓰임새가 있어서 세상에 던져졌을 터이니.
ㅡ 희나리의 부분
그는 누군가를 위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누군가는 작가의 자녀들이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는 삶을 자신의 새로운 인생행로로 결정한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으로 불러내 나의 마음을 달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행위라고 하였다. 김아가다가 회상으로 불러오는 인물은 남편이 많다. ’허락된 시간‘은 남편이 떠나갈 때의 아픈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 딸 이야기도 나온다. 남편을 떠나보낸 그 자리에 자녀들을 불러와서 자신은 그들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고, 내용도 그러하였다.
불쏘시개는 어차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희생을 상징한다. 내가 작가를 수필 공부방에서 만난 것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슬픔에서 벗어나려 수필쓰기를 시작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의 그의 글은 그의 아팠던 인생 이력을 생각하면 대체로 밝았다는 생각이다.
수필집 ‘희나리’에 실린 여러 글도, 특히 뒤로 갈수록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가 많다. 김아가다의 글을 읽으면, 투덜투덜하면서도 삶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왜냐면, ‘명의’, ‘삼대공덕’, ‘텃밭에서’ 등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평범한 삶의 모습이고, 더러는 농담도 나누고, 텃밭처럼 자연의 작은 움직임에서 우리 모습을 찾아보기도 하는 일상의 이야기로 읽어진다.
수필집 ’희나리‘의 2부에 실린 글들은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면서도, 무언가 의미를 읽어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수필 쓰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사유라고 할까. ’살아가는 이유‘는 자식을 그리는 모성이 실린 글이다. 모성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장애인을 통해서,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전통예술의 공연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반추해보지만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관념의 세계이다. ‘버들강아지’의 글은,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들이지만 독자 앞에 펼쳐서 보여 주었다. 깊은 의미를 담으려 하기 보다는 내가 경험하였던 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본다. 사실 나는 수필쓰기에서 너무 관념적이고, 사유 중심의 이야기보다는 경험하였던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주장한다. 이런 표현은 소설의 표현 방식과 유사하며, 독자가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는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필쓰기에도 소설의 기법을 가져오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수필에서도 현상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하자는 주장을 해왔다.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서, 작가가 선택한 현실의 삶이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한 가운데에 있다. 현실의 삶 한 가운데에 아들과 딸이다. 100세가 되어서 돌아가신 어머님도 작가를 지켜주었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삶도 그가 걸어가는 길에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대니 보이‘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아들 이야기이고,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까지 요리사로 성공하는 아들 이야기이다. 한국 사람이 아닌 싱가폴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을 기를 쓰고 막아 보았지만 어쩔 수 없더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의 글에 유난히도 어머니와 아들 사이를 다룬 내용이 많다. 불쏘시개의 역할도 하면서, 한편으로 아들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인간심리가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남편과의 이별도 애도의 단계로 끝을 내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시어머님이 입원한 요양 병원을 드나들면서 인간사의 달고, 쓴 맛을 경험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것들은 꼭히 그만의 수필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는 자신의 아픔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그만의 수필세계가 되었다. 아들의 결혼식에 문화가 다른 양가 부모가 만났던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김아가다 수필의 한 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함으로, 내용이 밝고 재미를 준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 싶었다.
ㅡ 오리와 닭.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생김새는 비슷한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서로 입만 쳐다보고 표정만 살피는 꼴이 오리와 닭이다.
미국에 사는 아들이 싱가포르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인구 60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섬나라이다. 그곳에는 거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 며느리네 조상들은 중국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중국인이라고 하면 몹시 싫어한다고 하였다. 엄연히 싱가포르 공화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공용어로는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 타밀어를 쓰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을 인정하는 신부측의 배려로 결혼식은 우리식으로 치렀다. 성당에서 예식을 마친 다음 연회장에서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씌우고 폐백을 받았다. 대추를 던져주며 덕담하는 문화를 사돈댁에서 이해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귀국하기 전날 중국 레스토랑에 초대했다.
---뒷부분은 생략했습니다.---
-희나리.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16.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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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수필집에서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이 글이 김아가다의 가족 모습을 잘 나타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지향점을 자녀를 위한 불쏘시개라고 하였지만, 그의 가족들이 미국과 한국으로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의 그의 삶은 혼자였고, 성당에 다니면서, 종교가 그의 의지처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지난날의 한국적 가족관계에 깊이 묶여있다. 미국에서 삶의 터를 잡은 아들네와 관계를, 그리고 아들 세대와 다름을 폐백이라는 우리의 전통으로 통합하였다. 이 수필은 노년의 작가 모습을 잘 요약하였다고 읽었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 3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작가를 가족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주는 또 한 사람은 시어머니이다. 100세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누워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자신의 생일인 이월 열사흘을 기억하더라고 하였다. ’이월 열사흘‘은 작가에게도 강한 의미를 가진다. ’허분이‘라는 이름을 갖는 어머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뒤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김 아가다의 수필세계에서 큰 몫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그 중에도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은 음으로, 양으로 그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
사업에 실패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과거사를 안고 살아가는 작가에게 돈도 그의 수필세계에서 한 몫을 차지한다. 돈에 대한 욕심이 아니고, 돈에 대한 이것저것의 사유를 펼치므로, 우리의 삶을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의 가족사는 카톨릭과 뗄 수 없다. 4대 째 이어오는 카톨릭 신앙은 노후를 보내는 지금의 그의 삶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집의 마지막에는 자기의 종교를 이야기한다. 성당 앞에서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에는 따뜻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고(그날은 언제쯤), ’오지랖‘에서처럼 자기를 속이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그런 것이 세상사이지만 작가는 자기가 오지랖이 넓어서라고 뚱치고 넘어간다. 넓은 오지랖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한 순간의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카톨릭이라는 종교적인 삶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만큼 카톨릭은 그의 생활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2023년에 두 번 째 수필집 ’분이‘를 출판하였다.
최근에 발간한 책인 만큼, 작가의 최근의 모습을 읽을 수 있으리라. 첫 번째 수필집에서는 그의 말마따나 인생에서 슬픈 시기를 보내며 쓴 글이어서 내용에서는 인생살이의 신맛이 나는 이야기이다. 이번 수필집의 발간에 대하여 그가 쓴 글을 가져와 보자.
요즘은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소중한 것이 아닌 것이 없고, 귀하고 값진 것이 많습니다. 사물뿐 아니라 사람은 더더욱 아름답습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린아이나 살아있는 생명들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까요? 저는 행복해서 늘 웃습니다. 이번 수필집 ’분이‘로 인해서 행복지수가 높아졌으니까요.”
- 두 번 째 수필집 ’분이‘의 머리말에서 -
수필집 ‘분이’에 실린 글은 첫 번째 수필집에 실린 글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났을 때 눈부신 햇살을 느끼듯이, 글의 분위기가 많이 맑아졌다.
남편의 죽음이 드리웠던 무거운 그림자를 걷어내기라도 하듯이 수필 ‘자리이동’은 죽음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다루었다. 지난날의 아픔이 걷힌다는 의미도 있지만, 죽음이 아득하게만 보였는데, 어느 사이에 이웃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작가 자신이 노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심정을 털어낸 것이 아닌가도 싶다.
“친구가 이 동네에 둥지를 마련한 지 칠 년이다. 하필이면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까? 교수촌이 만들어 지기 전부터 있던 무덤들이라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라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어두운 밤에 낯선 사람이 동네에 어슬렁거리면 덜컥 겁이 나지만 죽은 사람은 무섭지 않다고 했다.”
“무덤 때문에 매일의 삶이 묵상거리라는 친구에게 교수촌이 아니고 도인촌이라 부르면 하고 너스레를 떤다. 앞집에 사는 이교수도 유방암을 앓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삼 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무덤 속 주인과 이웃사촌 하면서 다섯 해를 더 살다가 자리이동을 했다. 친구는 그리도 살갑게 지냈던 선배를 떠나보낸 슬픔을 새로운 세상에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예사롭게 말한다.”
-분이.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23. ‘자리이동’의 부분-
죽음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마음을 담아냈다. 죽음을 ‘자리이동’이라고 하였다. 작가가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을 종교나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씻어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작가가 나이 들어감을 이겨내기 위하여 성찰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찾아낸 결과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작가는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려 자기가 스스로 성찰하여 터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는 누가 무어래도 현실을 사는 인간이란 사실도 틀림없다.
그에게 감성적인 또 한 면이 있음도 보여준다. 그의 글에는 첫사랑 이야기도 하면서 감성적인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황혼 블루스’도 그런 마음이 미련이 되어서 쓴 글이 아닐까 싶다. 경상감영 주위에 황혼의 남, 녀 노인들이 모여들어 콜라도 마시고 담소도 나누고 ---, 나쁘게 보지 않고 노인들의 감성놀이로 생각한다.
“이성과 감성의 교차점이지만 노을빛이 아름다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황혼을 배경으로 내 마음이 블루스를 춘다. 붉은 태양이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 잿빛 커튼이 창공에 장막을 드리운다.”
분이.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23. ‘황혼 블루스’의 부분.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읽어야 할지, 잿빛 커튼으로 읽어야 할지, 솔직히 헷갈린다. 그러나 작가가 조금은 아름답게 바라본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을 읽기에 따라서는 작가의 생활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 4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작가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준 사람은 시어머님이다. ‘분이’는 시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자기의 수필 여기저기에 모시고 와서 흔적을 남겼다. 수필집에 ‘분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은 수필이라기보다는 전기(傳記)이다. 소설 형식에 가깝다. 나는 김아가다의 글에서 흥미를 느낀 것 중에 하나는 표현 방법에서 소설의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소설 형식이 되면, 사건이 줄거리를 만들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분이’이야기로 돌아가자. 작가가 어머님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형성에 어머님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억척같이 일하여 돈을 모았고, 자손도 번창했다는 것이 어머님 이야기의 큰 줄거리이다. 그와 같은 어머님의 삶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 모델로 삼을만한 분으로 여긴다. 그러다 어머님의 속마음을 듣는다.
“어머님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자식들은 내 마음 다 모른다’고 하면서 저더러 외롭게 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는 충격 받았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마흔 다섯 해를 혼자 지내셨더군요. 혼자 사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저희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자식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과부가 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별 생각을 다 했지요. 어머님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님, 당신의 일생을 대하소설로 탄생시키고 싶은데 며느리의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영정 앞에서 당신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작가는 왜 어머님을 자기처럼 생각하였을까. 노년의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어머님을 모델로 생각하더라도, 자신이 겪는 노년의 외로움을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
작가는 어머니와는 다른 시어머님-며느리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야기를 ‘우리는 이방인’을 통하여 토로한다.
ㅡ 우리는 이방인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다문화를 이해하려고 ’고부열전‘은 꼭 시청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좌충우돌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지레 겁이 난다. 같은 민족끼리 살아도 고부간의 갈등으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소식을 자주 듣는데, 문화와 풍습이 다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산다면 서로 이해하며 적응하고 사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미국에서 요리사가 된 아들이 싱가포르 아가씨와 결혼한 지 이태가 지났다. 아들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은 이방인을 새 식구로 맞아들이면서 무척 못마땅했었다. 같은 동양인이어서 피부나 얼굴 생김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자꾸 밀어내고 싶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왔으나 며느리에 대해 눈곱만한 정도 싹트지 않았다.
말이 통해야 사랑도 표현할 수 있다. 내 시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집안 내력도 이야기해주며 마음을 나눌 수 있으련만, 무관심 할 수밖에 없었다. 금쪽같은 아들을 빼앗겼으니 성에 차지 않아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이민 비자 수속을 하려고 아들과 며느리가 한국에 돌아온단다.
내 품에 안겨야 할 아들이 식구 하나 붙어서 돌아온다는 현실이 뒤숭숭했다. 시어미 노릇이 처음이라 적잖이 긴장도 되었다. 용심보가 터졌는지 아들 부부가 쓸 침대에 시트를 깔면서 눈가에 맺힌 이슬이 굵은 눈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여태 내 호적에 있던 아들이 세대주가 되어 영원히 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동지섣달 얼음장처럼 몸과 마음이 시렸다.
문화와 식습관이 다른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려니 걱정이었다. 아들은 김치찌개를 준비하면 된다지만 처음 만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밥상이 소홀해서야 할까. 다행히 며느리는 한국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지만, 이것저것 준비해서 냉장고를 채워놓고 보니 전부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드디어 십 년 만에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고약한 시어미가 되지 말고 세련된 어른 행세를 하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웬걸, 며느리부터 안아주리라 다짐 했는데 찰나의 선택이랄 것도 없이 아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아차 하는 순간 뒷덜미가 화끈했다. 못난 어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 같아 며느리를 향해 팔을 벌렸다. 제 딴에는 잠깐 사이에 서러웠는지 얼굴은 웃으면서 눈물을 찍어냈다. “어머니 반갑습니다. 사랑해요.”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다는 며느리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지만, 할 말이 없어서 갑갑했다.
어쩌다 아들과 통화를 하다가 며느리가 영상으로 보이면 “사랑”, “어머니, 사랑해요.” 그러면 끝이었다. 고부간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영혼 없는 말, 입으로만 할 수 있는 ‘I love you’는 세계 공통어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며느리가 달라졌고, 내가 달라졌다. 나는 영어를 못 하지만 미국 방송을 눈으로 보며 노력했고, 며느리는 일 년 동안 드라마와 ‘여섯 시 내 고향’을 열심히 방청하면서 남편의 나라 한국을 공부했단다. 대게를 먹고 싶다는 며느리를 데리고 강구항에 갔다. 킹크랩도, 랍스타도 영덕 대게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엄지 척을 했다. 내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는 며느리를 어찌 미워하랴. 해맞이 공원 블루로드를 걸으며 물 색깔이 너무 예쁘다며 한국의 냄새를 머리와 가슴에 담아가겠다는 며느리가 사랑스러웠다.
마침, 아이들이 도착한 다음 날이 친정어머니 기일이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 인사도 시키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 예절을 배우고 온 며느리가 어른들 앞에서 손을 가지런히 이마에 대고 큰절을 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도 하고, 친분도 쌓는다며 며느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귀여운 세 살짜리 아이가 말을 배워 어른들 앞에서 재롱부리듯 방글거리며 제법이었다.
소통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느낌(feel)이 통하면 눈빛만 봐도 알아서 척척 행동하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며느리의 성격이나 성향을 몰랐을 때는 아들이 결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다였는데, 눈치코치로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에 다문화가족이 된 나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문화상대주의란 무엇인가. 다른 나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환경과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날 때마다 싱가포르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며느리에게 내가 이방인이고 나에게는 며느리가 이방인이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모니를 이룬다.
‘고부열전’을 볼 때마다 항상 조마조마 했는데 우리 집은 며느리가 시어미의 나라를 방문하면서 집안 내력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다가갔다. 다름을 같음으로 인식하면서 내 자식이 사랑스러운 만큼 가족이 된 새아기를 가슴으로 크게 안아 주었다. 며느리는 예쁜 여우다. 틈만 나면 나를 껴안고 애교를 부리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누었다. 아이들이 머물다간 빈 방에 그리움 한자락 드리운다.
-분이. 김아가다. 수필세계사. 2023. 우리는 이방인. p103-107.-
이 수필은 아들 내외와, 특히 문화가 다른 며느리와 가깝게 지내려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읽어진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읽어보면, 외국인인 며느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해도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노력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이 느껴진다고 할까. 작가가 이 수필을 쓴 의도는 ‘나는 이처럼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썼다고 하자. 그러나 독자인 나는 또 다르게 읽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화의 벽은 노력만으로 허물어질까.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는 가까운 척 해야 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라고 믿는다. 작가와 독자인 나의 차이라면, 작가는 ‘노력하여 가까이 간다.’라면, 독자인 나는 ‘노력한다고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노력해야 하고, 가까운 척 해야 한다. 이다. 같은 말인 듯 하면서도 다를 것이다. 작가는 인간살이를 말하였다면, 독자인 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말하였다. 어쩌면 작가가 제목을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라면,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고독을 즉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 5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작가는 ’분이‘에서 시어머님이 한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자식들은 내 마음 다 모른다’고 하면서 저더러 외롭게 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는 충격 받았어요.”
작가가 충격 받은 이유는, 어머님이 작가의 속마음을 꿰뚫듯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과 인간사이는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있다. 벽은 고독을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고독한 것이다. 수필집 ‘분이’에서 작가의 한결 밝아진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외로움까지는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지금껏 그의 수필세계를 말하였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를 쓰면서 느낀 점이라고 할까. 이제 내가 보았던 나의 시선으로 요약해보자.
작가의 인생살이에 비극이 덮쳐왔을 때 그는 수필을 썼다. 수필에 의하여 자신의 아픔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고, 고통을 헤쳐 나갔다. 이 말은 그의 첫 수필집의 머리말에 나온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녀들과는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되고,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의 수필세계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기에, 헤쳐 나갈 방법을 찾아 나선다.
수필집 ‘분이’에서는 나름대로 보통사람이 살아가는 보통의 삶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 나이가 들면서 미련처럼 남아 있는 것들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에 빛을 준 것은 종교이다. 카톨릭이다. 그리고 수필쓰기이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살지만 마음으로 끈을 잇고 있는 자녀들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근원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 즉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그 외로움이 작가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음을 자각한다. 이것이 내가 요약해본 김아가다의 수필세계이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에서 결코 지나쳐서는 안될 요소는 카톨릭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4대 째나 카톨릭 신앙을 지키는 가문의 출신이다.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생활을 규정하는데 아주 엄격하다고 알고 있다. 종교적 또는 도덕적 금기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김아가다의 생활도 종교적 규범을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카톨릭 신앙은 틀림없이 그의 수필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을 것이다. 종교 생활에 너무 충실하다 보면 종교적 억압을 작가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가 표현해 낸 수필에는 화선지에 먹물이 스며서 번져나가듯이 그의 생활 속에 퍼져 있으리라.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듯이 살고 있는 여러 모습들에는 작가의 억제된 욕망이 알게 모르게 녹아 있으리라고 생각해 보았다. 남편을 만났던 이야기며, 첫 사랑 이야기를 수필로 표현한 이유며, 노인들이 경상감영의 콜라 텍을 찾아가는 이야기 등에서 얼핏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김아가다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은 카톨릭 신앙이고, 카톨릭 규범이다. 그는 수필쓰기를 통하여 이 규범을 살짝살짝 벗어나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카톨릭인의 엄격한 생활에서 수필이 그의 숨통을 틔어 주었으리라. 이건 순전히 독자인 나의 생각이다. 카톨릭 신앙이 주는 억압에서 수필쓰기를 통하여 탈출구를 찾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작가에게 ‘수필세계 쓰기’를 해보고 싶다면서, 작품집을 원하자. 그는 공동집필자로 되어 있는 ‘앵무새 키우는 남자’를 먼저 보내왔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니, 이건 완벽한 소설이었다. 수필 형식은 도무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독자들이 수필을 읽지 않는 이유가 재미가 없어서라고 믿는다.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하자, 라는 주장을 해왔다. 김아다가의 작품집에 실린 글은 대부분이 완벽한 수필형식이다. 그러나 작품 ‘분이’는 소설 기법으로 쓰려고 한 작품으로 보았다.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뒤엉켜 있다. 읽어서 이해하기도, 재미도 갖추지 못하였다 싶었다. 그러나 지문보다 대화체를 많이 사용하였고, 사용된 언어들이 수필의 언어로 순치되어 있지 않아서 소설적 표현이라고 보았다.
김아가다의 수필세계 6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에 비하여 미니픽션 ‘호텔로 간 골드 미스’는 완벽한 소설이다. 수필의 냄새는 거의 맡아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필도 이처럼 소설 형식을 차용해 와서 쓸 수는 없을까. 소설 형식이더라도 수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 그의 작품 ‘호텔로 간 골드 미쓰’를 소개만 하겠다.
수필쓰기보다 소설쓰기에 더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호텔로 간 골드 미쓰
“ 63000원 밖에 없는데, 어쩌죠?”
여주는 프런트 위에 천 원이 모자라는 숙박비를 올려놓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에누리라니 어림도 없다는 태도다. 애원과 거부의 눈빛이 부딪히며 서로를 밀어낸다. 조용하고 긴장된 순간, 여주가 애교로 눈빛을 바꿀까 갈등하는데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검지로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309호 실입니다.”
여주는 얼떨결에 열쇠를 받으면서 재빨리 남자를 훑어봤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중저음 목소리와 쭉 빠진 키, 다비드 상을 닮은 갈색 곱슬머리의 젊은 남자. 남자는 무심한 듯 자신의 방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와우! 연말연시 여행이 헛되지 않기를. 여주는 두 마리 토끼를 향해서 팔을 마구 흔들고 싶다.
며칠 전, 칼럼 원고 마감일을 지키라며 박기자가 전화를 했다. 자신은 연말에 남친과 남해로 여행간다고 자랑질까지 하며 은근히 압박을 가해왔다. 여주는 MZ세대의 연말 휴가와 이를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사회적 담론이나 여론형성 패턴에 대한 칼럼을 쓰는 일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처지였다. MZ세대가 사는 법을 어른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구직과 결혼, 출산과 내집 마련에 대한 고민 앞에 불안감이 가중된다. 어차피 미래는 깜깜하고 그 탈출구로 현실을 더욱 중시하는 문화가 그들 사이에 만연하게 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라서 이것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박기자의 전화는 여주의 가슴에 겨울바람을 몰고 왔다.
마흔 중반을 지나면서 그녀는 부쩍 외로움을 많이 탔다. 일 때문에 남자를 만날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결혼이라는 틀에 박힌 삶의 방식이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성격 탓도 있었다. 집에서 차로 두 시간이나 달려 A호텔에 온 이유는 마감이 코 앞에 닥친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첨단 지식단지가 근처에 있어 소위 물이 좋다는 소문에 혹해서였다. 재수 좋으면 벤처기업 젊은 대표? 나이는 비슷하면 좋겠지만 연하면 금상첨화다. 상상만 해도 온 몸의 세포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A호텔은 국가 기관 기탁업체라 신용카드만 사용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루만 묵을 것이라 지갑에서 카드만 달랑 꺼내 패딩 코트에 미리 넣어 두었다. 그런데 아뿔싸! 호텔이라 패딩 코트보다 캐시미어가 격에 맞을 것 같아 옷을 바꿔 입은 것이 문제였다. 코트 주머니에 오만 원 권 두 장과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3장이 들어 있었다. 호텔에 묵으려면 방 값을 계산하고도 오 만원은 꼭 남아있어야 했다. 조식 후 커피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으니 말이다.
남자의 천 원이 보태진 열쇠로 여주는 309호실 문을 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얼굴이 자꾸 그녀의 머릿속을 해작거렸다. 이자를 듬뿍 붙여 율곡 선생으로 같을까. 세종대왕으로 갚을까.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시 쉬려는데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자판에 손을 얹었다. 마감이 임박한 칼럼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손가락은 허공에서 천 원짜리를 만지작거렸다. 기혼일까? 그럴 리 없잖아. 연말에 혼자 호텔에 오는 남자라면 아내나 애인이 없다는 이야긴데------ 나처럼 일에 치여 사는 능력있는 돌싱? 40대 초, 중반? 천 원을 내밀 때 얼핏 보았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말하는 직업은? 묻지도 알려고도 않는 시크한 표정, 바로 여주가 찾는 이상형이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다 말고 여주는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혹시 자동차 동전 통에 천 원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녀는 프리랜서 작가의 밥줄인 노트북을 들고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쓰다만 칼럼 몇 줄이라도 긁적일 작정이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천 원으로 인해 두뇌가 오작동에 걸린 걸까. 마감에 쫓기며 잡지사에 메일을 전송할 때와 같은 증세다. 이럴 땐 달착지근하고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카푸치노가 당긴다.
시나몬 가루를 뿌린 카푸치노에 하트가 그려져 나왔다. 그녀는 하트 모양을 시답잖은 유치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트 문양을 보자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졌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하트는 이내 상상으로 바뀌었다. 남자와 여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입술에 붙은 거품을 ---, 애써 머릿속 잔영을 지우면서 그녀는 탁자 위 카푸치노를 몽롱한 눈에 담았다.
서너 테이블 건너, 카키색 재킷에 베이지 머플러를 두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에 반짝이는 파티 라이트가 켜지는 것 같다. 그 남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 엄동설한에 아이스커피라! 나처럼 심장이 뜨거워졌을까? 혀로 입술을 핥던 여주가 카푸치노를 들고 남자의 테이블로 갔다.
“앉아도 될까요. 아깐 고마웠어요.”
남자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 같다. 좋은 조짐이 분명하다. 여주는 흥분하려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꼭 64000원을 맞춰 달라잖아요. 오 만원 두 장도 안 된다고, 거스름돈이 없다더라고요. 꼭 갚을게요.”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카드만 있을 때도, 카드가 없을 때도 난감할 때가 있죠. 갚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이해심 깊은 남자라니. 여주는 재빨리 다음 멘트를 장착했다.
“내일 모닝커피는 제가 쏠게요.”
여주는 평소에 헌팅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여겨왔다. 괜찮다는 남자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 것, 여주는 상체를 숙이면서 농염한 자세로 노트북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의 알 듯 모를 듯 흘리는 미소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얼굴인지 가슴인지 헷갈렸다. 여주는 자동차 열쇠를 슬쩍 떨어뜨리고 자리를 떴다.
룸으로 돌아 온 여주는 마음이 바빴다. 밑밥을 던졌으니 곧 그가 올라올 것이다. 화장을 고치고 립스틱을 발랐다. 거울에 비친 쌍꺼풀 짙은 커다란 눈을 응시하며 얼굴을 좌우로 살짝 돌려 보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걸.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 어쩌나 아무리 뒤져도 입을 만한 옷이 없다. 실내복 한 벌 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막심이다. 하지만 여주는 이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글래머러스한 몸뚱이가 자산이라고 늘 자만해 오지 않았던가. 브레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가운데로 볼록하게 모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남자는 감감무소식이다. 창 밖에 산그늘이 드리우고 어둠이 짙어 가는데도 기척이 없다. 여주는 앉았다 일어섰다 방안을 서성거렸다.
“딩동”
그러면 그렇지 여주는 살금살금 다가가 현관문 렌즈에 눈을 바짝 붙였다. 부드러운 조명이 비치는 복도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남자가 고개를 약간 외로 꼬고 엄지와 검지로 턱을 괸 자세로 서 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여주는 남자가 들어 설 만큼 공간을 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공기마저 집어 삼킬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듯 옆으로 몸을 조금 더 비켜섰다. 여주의 입에서 ‘잠간 들어올래요?’라는 말이 장전된다.
빙긋 웃으면서 남자가 열쇠를 들어 보였다.
“자동차 열쇠를 ---.”
여주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뜨고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남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여주의 손에 열쇠를 건네는 동시에 휴대폰을 연다.
“거의 다 왔다고. 알았어. 기다릴게.”
열쇠가 손바닥에 얹히는 순간 여주의 입에서 ‘땡큐 -.’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돌아서는 남자의 등을 보며 여주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비틀어 손에 쥔다.
귓불이 붉어지고, 뒤통수까지 열감이 올라왔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눈이 시릴 만큼 매서운 바람이 쳐들어왔다. 바람을 맞은 커튼이 휘날리며 방안을 휘저었다. 열쇠가 여주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여주는 열쇠를 노려보았다.
해바라기 샤워기를 최대로 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을 뒤집어쓴다. 이번 연말도 호텔에서 마감 임박한 원고만 쓰고 갈 것 같은 억울함이 느껴진다.
첫댓글 박경선 선생님도 아가다 선생님의 작품 감상을 써주셨지요.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