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6월의 일이다. 이탈리아의 북동쪽 구석, 슬로베니아(당시는 유고슬라비아)에 둘러싸여 겨우 한자리를 얻고 있는 트리에스테(Trieste)항에 냉장(冷藏) 참치류를 싣고 입항하게 되었다.
트리에서테항의 위치. 로마.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름이 보인다.
08:00시 부연 안개가 수평선을 덮고 있는 속에 Trieste만(灣)에 진입했다. 3-4마일 저쪽의 육지가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평온한 바다. 두서너 척의 날렵한 요트가 항구를 미끄러져 나간다.
새로운 항구에 입항할 때마다 가져지는 짜릿한 긴장감, 그리고 호기심, 또한 이유 없이 부푼 기대, 마치 반겨주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듯이-.
언젠가 ‘츄바스코(Chubasco)’라는 영화에서 보았듯이 사랑하는 연인이 기다리다 입항하자마자 서로를 알아본 선원이 힘끗 달려가서 부딛치듯 두 팔을 휘감으며 하나가 되어 빙그레 돌던 그런 감격스런 장면이 있기라도 하듯이-. 만약 이런 곳에 아내가 와 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에 대한 표현방식이 다른 이런 곳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결국 그것은 도덕이나 윤리관의 차이가 아닐까. 그것이 무제한의 것이 아닌 어느 정도의 규범을 스스로가 지킨다면 -.
트리에스테항과 베네치아항
이 항(港)의 항내에 크지는 않으나 아담한 인공 해수욕장이 있고 외항에는 요트 훈련장이 있음을 입항하면서 선교(船橋)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위도(緯度)가 북위 45-40도이므로 한국의 함경북도보다 높아서인지 더운감이 없다. 딱 지내기 좋을 만하고 일광욕하기 좋은 우리의 가을처럼 햇살이 다사롭다.
말이 부두이지 바로 시내의 도로변에다 계선주(繫船柱 : mooring post)를 박았다. 경계도 없고 출입도 자유로운 상태였다. 마침 입항하는 날 휴일이라 오후에 해수욕장엘 가 봤다. 해수욕장이라기 보다 일광욕장이 맞을 듯 했다. 선텐을 즐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남자보다 부녀자들이 몇 배나 더 많고, 아가씨 같아 보이는 축보다 아주머니나 할머니 축에 드는 쪽이 더 많다. 유모차에 갖난 애기를 태우고 나와 말리는 것(?)을 보면 역시 이곳도 평소 일광(日光)이 부족한 듯 짐작된다.
거리와 광장 끝에 계선주(파란 원안의 것)을 설치, 바로 선박을 계류할 수 있다.
수영복은 베로 만든 것이 아니고 끈으로 만들었고, 입었다기 보다 묶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낫겠다. 그러나 그놈이 용케도 몸에 붙어있다.
입구 매점 앞에는 언제 왔는지 2/E(이등기관사)와 R/E(냉동사)가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몇몇 아가씨들의 맨살과 절반만 가린 hip, 또한 꼭지만 안 보이는 젖무덤에 온 정신을 팔린 체 멍하니 앉았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하다. 그렇게 탐스러운 나신(裸身)의 여체(女體)도 장소와 시간에 따라 그 느낌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한밤을, 빚까지 얻어서 그걸 찾아 체면도 없이 묻고 더듬어 가기도 했는데, 바로 눈앞에 풍요하게 거리낌도 없이 보아달란 듯이 홀랑벗고 팽개쳐 있는데도 도무지 욕심은 고사하고 말초신경의 자극 같은 것도 전혀 없다. 어쩌면 눈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태양 빛이 너무 밝아서일까? 오히려 궁상스럽고 스물스물하게 흉물스러워 보이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그런데도 저게 어둠이 스미기만 하면 온통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인가. 요상스럽기 짝이없다.
배 뒤로 보이는 공장에서 거품이 발생했다.
입항 후 며칠 지난 아침의 일이다. 아침부터 본선의 냉각수(冷却水) 배출구 부근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흰 거품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퍼져 주위의 바다를 덮어나간다. 결국 말썽이 났다.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다. 해양오염 사고인 셈이다. 해운(海運)당국에서 조사가 나오고 쓰레기 소해선(掃海船) 2척이 거품을 걷어낸다.
본선에서도 원인을 찾았다. 기관실에서는 본선에서 거품이 날 이유가 없단다. 아침에 No.3 선창의 Bilge(오수)를 몇 바가지 퍼냈을 뿐이며 그것이 거품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Sea Chest(바닷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선측에 설치한 함[函])을 선저변(船底弁:배 밑바닥에 설치된 함)으로 바꾸어 보라고 했다. 안 생긴다. 그렇다면 수질(水質)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리점에서도 왔다. 아마도 당국에서 알린 모양이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일단은 본선의 책임으로 보고 소해선 비용도 Owner(선주)가 물어야 하는 데 보험회사가 어디냐고 묻는다. 몇백 만 리라(Lira : 이태리의 화페 단위)는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다 벌금까지 합쳐진다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내 밥줄이 달린 일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여기는 해수욕장과 요트장이 있는 곳이다. 쓰레기를 매일 건져내는 걸 보면 제법 까다로운 지역임에는 틀림없었다. 당국에서는 수병(水兵)과 장교차림의 2명이 와서 거품을 채취하면서 저들끼리 뭐라고 씨부린다. 답답하다. 이걸 어쩐담. 일단 과정을 보고 Owner(선주)측 Surveyor(검사관)를 부르더라도 우선 Sign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부터 굳혔다.
드디어 정식으로 항만조사관들이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왔다. 선장의 Passport와 부모의 성명까지 묻는다. 유럽쪽에서 사건을 조사할 때 부모까지 이름을 대라고 하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지만 꼭 피의자의 입장일 때만 그랬다. 스페인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다.
경력부터 조사하기 시작한다. 본선도 해수(海水)를 냉각수로 사용하는 System임을 설명하고 흰거품이 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지금은 왜 안 나는냐?”고 묻는다.
“나도 모르겠다. 냉각수를 선저변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질(水質)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니 해수(海水)의 수질부터 검사하자.”고 맞섰다.
한데 아침 일찍 조깅하면서 언뜻 본선 선수(船首) 오른쪽 부두의 큰 공장 폐수구(廢水口)에서 허연 거품물이 조금 나오는 걸 본 기억이 번쩍 떠올라 거길 한번 가보자고 했다. 어거지라도 떼를 써보자 싶었다. “그게 사실이냐?”며, 7~8명이 함께 가 보았다.
어라! 아침 일찍 내가 본 것보다 더 큰 거품덩이가 뭉텅뭉텅 나오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게 현행범이었다. 공장에서 나온 하수(下水)에 거품을 일으킬 수용성(水溶性) 물질이 녹아 있다가 이 물이 본선의 수면에 가까운 Sea Chest로 빨려 들어와 다시 배출되는 과정에 거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사이다나 맥주를 저으면 거품이 생기는 이치와 같았다. 그러니 수면에서 깊은 선저변으로 바꾸자 표면의 해수가 펌프로 빨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어거지가 아니고 명쾌한 과학적 설명이 된 셈이다.
그러면 그렇지! “봐라. 이게 원인이지 본선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 그 거품이 본선 선수 부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고 밖으로 밀려 나오지도 못한 채 모여 있어 마치 본선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가슴에 뭉친 큰 응어리 하나가 쑥 내려간다.
만약 이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더구나 선령(船齡)이 20년이 다 돼가니 덤터기 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선박자체의 결함이나 잘못이 없다면 해수(海水) 수질검사를 해야한다. 물론 항내(港內)라고는 하지만 그 너른 면적의 수질을 어떻게 검사하고 판단할 것인가. 애매하면 만만한 게 뭐라고 입항선에 떠넘기는 수가 많음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예이다. 경우에 따라선 몇 달 혹은 해를 넘길 수 있는 소송사건이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대리점, 항무국, 소해선 등 자기네들끼리 목청을 돋운다. 대리점 녀석에게 “나는 아는 바 없으니 간다” 했더니 “그래 얼른 꺼지”란다.” 이런 땐 당사자가 안 보이는 것이 상책임을 그도 알고 나도 알기 때문이었다..
귀선하여 각부 책임자들에게 아예 쓰레기도 Sign하고 미리 쓰레기 수집선에 버리고 기름의 유출도 적극 방지하라고 강조했다. 까딱하다간 큰일 날 일이었다. 손바닥에 진땀이 났다.
제때에 제대로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적어도 수 만 내지 수십 만 달러를 배상하거나 소송사태로까지 번질뻔했던 사건이었다. 통상 이런 상황을 두고 선박에서는 ‘선장의 수덕(水德)이 있다.’라고 한다. 쉬운 경상도 말로 ‘재수가 억수로 좋다’는 소리다.
내게는 그 보다도 이미 작고하신지 오래된 어머님의 이름을 대면서 찰라이지만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그 분이 도와주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참 동안 했다.
항내의 조정 연습장
인근 요트 연습장에서는 청년 혹은 초·중 학생 같은 소년들이 직접 배우며 실습을 한다. 조정(漕艇)도 있고 돛을 한 개 사용한 소형 돛배도 여러 척이 있다. 바다에 거꾸로 쳐 박히면서도 다시 기어 올라와 날렵하게 조정해가는 그 모습도 대견스럽지만 어려서부터 바다를 상대로 저러한 모험적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정신적 자세가 가상했다.
실제로 범선(帆船)의 조정은 어렵다. 맞바람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여러개의 돛으로 풍향을 만들어 동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돛의 방향과 길이 등을 조정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다.
소년들이 몸소 노를 젓고 돛을 펼치며 바다에 도전해 가는 정신이 곧 성장하면서도 항상 무엇인가의 커다란 모험심을 기르고 나아가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이자 항해자인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곳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제노바 출신이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다.
좀 더 활달하고 진취성 있게 되려면 어려서부터 보다 넓고 스케일이 크며 어느 정도의 모험이 있는 놀이를 경험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딱지나 치고 땅뺏기나 하고 노는 우리의 애들! 위험하다고 자전거도 마음대로 못 타게 하는 우리 사회의 부모들이 좀 더 먼 훗날을 바라보는 의미에서도 고려해야 할 문제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삶이란 경험이나 감각에서 벗어나 사유(思惟)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글을 상기시킨다. 우리도 항상 부단한 노력과 함께 스스로 찾아 움직여 가는 생활의 습관을 기르고 익혀나가야 할 것이다.
이 항구에 정박 중에 난생 처음으로 세계적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Roma)와 물의 도시 베니스(Venezia)를 다녀왔다. 로마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녁 8시 트리에스테(Trieste)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다음 날 아침 8시에 로마 중앙역에 도착, 하루 종일 구경하고 저녁에 다시 기차를 차면 그 다음 날 아침에 트리에스테(Trieste)항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수상(水上)도시 베니스는 기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로마와 베니스의 얘기는 따로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첫댓글 흐미~~~상단 지도를 보니 가보고 싶은 곳, 슬쩍 가본 곳, 도시가 주루룩~~~ 입 맛이 아니고 눈 맛이 가득.
세계를 누빈 늑점이님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미워지는 건 어쩐 일인감.ㅋ
다음 회에 왁자지껄 눈팅 할 수 있게 해 준다니 기대만발^^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눈팅만 할 수 있는데 늑점이님은 영혼팅을 하니까 설렘까지 한 몫입니다요.ㅎㅎ
"수영복은 베로 만든 것이 아니고 끈으로 만들었고"에 웃음 가득 물었습니다.
이런 재미로 늑점이님을 따라다니는 겁니다.ㅎㅎㅎ
그게 말임다. '미워지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사x하곱'다는 말 같 은데.... 함부로 미워하면 그렇소. ㅎㅎㅎ. 부산넘
좋은 경험담 감사합니다. 잘못하면 바가지를 쓰고 고심하셨을 텐데... 선장으로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배를 운항하자면
지혜로운 대처로 필요하겠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홍집, 늘 관심가져주셔서 고맙소. 사실 사범교육이 제 승선기간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단순하고 위험한 해상조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데 그랬습니다. 혹시 사범 시절 박정수 선생인 기억하시나요?
입에 거품을 물며 천장만 쳐다보고 알아 묵지도 못하던 심리학을 설파하셨는데, 그게 문득문득 떠올랐지요.
지금도 가끔 심리학 영상을 봅니다. 건강하세요. 부산넘
@늑점이 사범학교시절을 떠올리면 3년간 뭘 배웠는지? 아니 뭘 가르쳐 주셨는지?
참으로 혼돈의 시절이었지요.^^
@김능자 지금 무신 소리하는겨? 가랑비에 옷 젖듯. 혼돈 속에서도 남는 게 있었으니 지금 카페 주인장도 하고 '혼돈의 시절'도 알잖소? ㅎㅎㅎ 부산넘
@늑점이 아침7시인데 밖은 깜깜하고 외등만 추위에 스물스물하네요.ㅎ
송하는 반야심경 필사하고
바람새는 성경 필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