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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참고자료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온 호남지역은
유배문화(고산,추사,다산,우암등)의 본산지로
약무호남 시무국가 라고 했다.
전라남도 해남군은 동쪽으로는 강진, 동북쪽은 영암과 연결돼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3면이 바다인 반도 행태로 돼있다. 해남읍 1개 읍과 삼산면 화산면 등 13개 면으로 주민은 7만 9,000여명.(2011년 2월말 현재)
* 고산윤선도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녹우당에서 배우는 재미있는 한옥건축 - 고산윤선도 고택
고산윤선도 고택 녹우당의 역사는 고산 윤선도((1554~1619)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윤씨를 이 지역 재지사족으로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향족인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며 분가를 하게 되자 백련동에 터를 잡고 그 가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초은은 해남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금남 최부의 밑에서 공부했으며,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시키는 등 해남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윤구(尹衢)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지냈으며 유성춘, 최산두와 함께 호남 3걸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국문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단가문학의 최고봉인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다.
이와 함께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1626~1694)는 조선후기 삼재중 한명인 문인화가로 국보 ‘자화상’을 그렸으며, 아들 낙서 윤덕희와 청고 윤용의 3대에까지 그 예술적 재능이 이어진다.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학자와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유교문화와 문화예술의 중심공간이 되었던 곳이다
* 녹우당의 자연과 풍수형국
녹우당은 덕음산(德陰山)을 배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에 하나다. 덕음산을 뒤로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어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짜여진 명당자리로 손꼽히고 있다.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문필봉)이 원경(朝山)으로 펼쳐져 있어 수려한 형국임을 말해준다.
* 연못에 우주를 심다 - 백련지와 소나무 숲
선조들은 연못을 작은 우주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늘을 뜻하는 동그란 작은 섬과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섬을 연못 안에 함께 조성했다.
녹우당 연못은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했던 해남윤씨 집안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백련지 옆의 소나무 숲은 연못을 조성할 때 나온 흙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소나무숲과 연못의 형태는 마음심(心)자를 이룬다.
* 고산 유물전시관
녹우당의 풍수를 거스리지 않고 한옥과 옛 건축의 조화를 이룬 고산유물전시관에는 해남윤씨 어처은공파의 약600여 년 간의 집안역사가 고스란히 전시 돼 있다. 해남윤씨어초은파의 종가 댁은 전란이 일어나면 선조들의 유물을 지키고 보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유물관 안에는 고산윤선도의 시문학과 공재윤두서의 자화상 및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삼대화가그림, 집안을 지키기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했던 종부들의 글 등 약 5천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 해남윤씨 녹우당 : 사적 167호
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의 구성요소도 풍부하여 한국 상류주택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고가이다. 당대의 문헌이나 기문이 없어 그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해남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C 중엽에 시창된 건축물로 여겨진다.
전체적인 집의 구조는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지나 사랑마당이 나오고 앞면에 사랑채가 있으며 서남쪽 담 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고산에게 지어준 집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 것을 현종 9년(1668)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 사당 등이 있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에는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이나 중부지방의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어 특징적이며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했으나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 있다.
* 서울, 경기 양반가 닮은ㅁ자 모양 고택 - 녹우당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경기, 서울지방 양반가 고택 처럼 건물모양이 ㅁ자이다. 추운지방도 ㅁ 건물모양이 ㅁ자이다. 처음에는 ㄷ자 모양이었는데 이후 녹우당 사랑채가 더 지어지면서 ㅁ자가 됐다. 남쪽지방 집모양은 -자형이나 ㄴ자이다. 녹우당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처음에 ㄷ자로 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함풍8년무년4월병오초8일계축시중주 상목양 」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 녹우당에는 여자 남자 공간이 따로
사랑채(남성들의 공간) -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와 양반과 상민과의 차이가 건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채는 주인집 남자와 손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찾아오는 사람들과 또 사랑채와 마주보고 있는 행랑채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동적 공간이다.
* 안채(여성들의 공간)
여성들의 공간이자 정적인 공간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안채들은 모두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사랑채를 통해 연결돼 있지만 안채를 향하는 문이 따로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문을 따로 둬 여성과 남성공간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했고 또한 서로 붙여있으면서도 문을 따로 둬 독립성을 두고 있다.
* 처음에는 99칸 집 지금은 55칸 남아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대왕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 되던 1668년 이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현재 이 집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다. 원래 호남 양반집의 건축양식은 ‘ㄱ’자이거나 ‘ㄴ’자 집인데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서울지방 양반가와 같이 'ㅁ'자 집이 되었다. 이 집은 아흔 아홉 칸이었다고 하는데 별채가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55칸만 남아 있다.
* 임금님 집만 100칸 또는 1000칸
조선시대는 계급사회여서 아무리 높은 양반들도 100칸 집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100칸 집은 임금님만 살 수 있다.
*집 칸수는 어떻게 셀까
집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세어 몇 칸 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안채 몇 칸, 사랑채 몇 칸 등을 모두 합해 누구 집은 몇 칸 집이라고 말한다.
* 안채
안채는 현재 종손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사랑채 옆으로 들어서면 서쪽으로 트인 ‘ㄷ’자형 평면으로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서쪽으로 중앙에 3간의대청을 두고 그 좌, 우측 아래로는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그리고 툇마루는 대청 전.후면, 안방 전면, 건너방 전 후면 등 비교적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구조로는 막돌바른층쌓기의 비교적 낮은 기단상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대청과 안방 전면의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웠으며 가구는 4량가로 되어 있다. 도리(道里)는 납도리를 썼으나 종도리(宗道里)만은 굴도리를 사용하였고 대양위에는 사다리꼴의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게 했다. 그리고 대청 전면의 퇴주상부에는 장설밑으로 밑면을 굵게 조각한 보아지를 두었다. 창호는 대청에 4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들쇠에 매어 달게 하였으며 각 방에는 밖으로 띠살덧문을 달은 미닫이문을 설치하였다.
안채의 건물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설물로는 안방의 아래쪽 부엌과 건너방 부엌 상부에 설치한 솟을지붕형태의 환기용 시설물이다. 이러한 설비는 우리나라 전통가옥에서는 흔치 않은 시설물이라 이다. 안채의 마당 가운데에는 굴뚝과 함께 작은 화단이 만들어져 있어 단아한 느낌을 갖게 하며 여러 가지 화초들이 심어져 있다. 안채는 성종3년(147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여진다.
* 녹우당 현판 - 녹우당(綠雨堂)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공재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것으로 이로 인해 이곳이 ‘녹우당’이라는 당호로 불리게 되었다.
녹우당의 당호가 유래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됐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옥동 이서는 녹우(綠雨)가 옛 선비들의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해남윤씨가와 공재의 철학 및 학문적 사고에 견주어 ‘옛 선비들의 절개와 기상을 담아 신록의 대지에 성장과 동력의 영양분을 갖게 해주는 푸른 비’를 뜻하는 ‘녹우’를 당호의 이름으로 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녹우는 절기상 4월 20일 경의 곡우에서 6월 20일경 내리는 비를 말하고 있어 녹우당의 원림을 옥동 이서의 철학적 사고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정관(靜觀)
이 글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하였는데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와 옥동 이서가 개발하여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을 거쳐 원교로 이어졌다.
* 운업(芸業)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業)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 재미있는 녹우당 건물
*이중차양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두개 차양 설치
*까치지붕 - 부엌의 환기통
* 솟을 대문과 행랑채
* 행랑채(하인의 공간)
조선시대에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녹우당도 하인들이 거주한 행랑채가 있다.
* 행랑채 건축
행랑채는 솟을 대문을 가운데로 하고 ‘ㄱ'자형과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一’자형의 2채가 있다. 솟을 대문을 사이로 방과 곡간, 마굿간, 부엌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본 가옥에서 행랑채는 사랑채 앞쪽의 ㄱ자형 문간행랑채로서 1간의 솟은 대문간을 내었으며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일자형의 2채가 있다.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방주를 세운 3양가의 민도리집이다. 1자형은 우진각지붕의 민도리집으로 구조는 ㄱ자형과 같은 구조이다.
* 건물 안에 여름도 있고 겨울도 있다
우리의 한옥 건물에는 여름과 겨울 공간이 따로 있다. 온돌방은 겨울 공간이고 나무 마루 거실은 여름 공간이다.
* 정원은 뒤뜰에
한옥 건축에 있어 정원은 건물 뒤편에 자리한다. 건물 앞마당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동적 공간이기에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가 없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뒤뜰에 정원을 만들고 방안에 조용히 앉아 뒷문을 통해 자연을 감상한다.
* 정원수는 낙엽수
우리 선조들은 유난히도 자연을 사랑했다. 집안에 심은 나무도 활엽수 보다는 낙엽수를 심었다. 봄에는 잎이 나는 나무를 보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를,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새하얀 눈에 쌓인 나무을 보기 위해서다.
사철 변화지 않는 사철나무나 인공적인 연못은 마당에 두지 않았다.
* 사당(죽은 사람의 공간)
집안에 선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상을 중히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었다. 따라서 집안 안에 사당을 두어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가 되면 산으로 이장, 시제로 제사를 대신했다. 사당은 주로 집 맨 뒤쪽에 위치한다.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 안사당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 사당은 순종 21년(1821)에 세웠으며
안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집으로 측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두었다. 구조는 막돌허튼돌쌓기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정면 퇴주만은 원주를 세운 4양구조의 납도리집이다.
* 고산사당
어초은 사당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
고산사당은 전면에 3개의 문이 있는 정면 3칸, 측면1칸의 맛배집 건물로, 매년 ?월 ?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 어초은사당
어초은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반간폭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로는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의 퇴주초석은 상부를 원형으로 가공하였음) 방주를 세웠으며 (퇴주는 원주임)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양가이며 도리는 장설사이에는 같은 간격으로 소루를 배치하였으며 공포는 쇠서의 상면이 복잡하게 층된 2익공양식이다.
* 추원당
추원당(追遠堂)은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4대조) 어초은윤효정의 재각으로 현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1882~1950)이 1935년에 발의하여 추원당을 건립하였으며, 묘비를 조석(鳥石)으로 세웠다.
시향(時享)은 음력11월 15일 어초은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宿食)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추원당 역시 녹우당 사랑채 건물처럼 처마에 이어 설비한 겹처마의 양식이 특이하다
추원이라 먼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여 정중히 공경을 다함을 뜻 한다.
어초은은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녹우당 뒤 묘와 함께 녹우당 공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녹우당의 북쪽 숲에 위치하고 있다.
* 고산윤선도
이 곳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광해(光海)4년(1612)에 진사(進士)되고, 4년후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으로서 권신(權臣)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鄕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6년(1628)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 初試) 에 장원한 후 봉림(鳳林)과 인평(麟坪)을 모시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한성서윤(漢城庶尹)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주로 완도(莞島)의 보길도(甫吉島)와 해남(海南)의 수정동(水晶洞) 및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苑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은행나무
녹우당 집 앞과 전시관 뒤편에 3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는 1982년에 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고 수령은 500년, 수고 20m, 둘레는 48m가량이다. 나머지 2그루 중 한 그루는 나무세가 아직도 고목이 되지 않은 채 크고 우람하며 한그루는 고목이 되어 몸통이 없어지고 가지부분만 약간 남아있다. 녹우당의 당호가 이 은행나무의 잎이 비처럼 쏟아진다 하여 ‘녹우당’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 비자나무숲
어초은 묘소를 지나 호젓한 숲속 산책길을 따라가면 덕음산 자락에 자라한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을 만난다. 가장 큰 나무가 높이 20m,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 이상이나 된다. 명품 숲으로 지정된 덕음산 비자나무숲은 500여 년 전 해남윤씨 종택의 선조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해 진다'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곳 비자나무에서 나오는 비자 열매는 비자강정으로 종가의 전통음식으로 전해 내려온다.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산, 해남군, 목포대학박물관, 1986.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고산유고, 해남군문화유적길라잡이(김승기), 해남군, 2001. 땅끝해남, 해남윤씨 5백년요람지 녹우당,
이용안내
* 개장시간: 09:00 ~ 18:00
* 요금안내
개인 : 어른 1,000원 / 청소년 : 700원 / 어린이:700
단체(20명이상) : 어른 : 700원 / 청소년: 500원 / 어린이:500 (어린이:7세이상 ~청소년18세 까지)
무료입장 : 만 65세 이상 경로, 장애인, 광주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 해남군민
천년고찰_대흥사(大興寺)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그리고 별원의(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수 존재한다. 호국도량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대웅보전 삼존불(보물 제1863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북암기(北菴記)』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23) 간행된『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역사를 총정리해놓은 중요 자료이다.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부도전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대흥사 법고체험
두륜산의 명품 숲 아홉굽이 십리 숲 터널을 지나 골짜기 골짜기로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는 일순 마음을 울리며 우리를 청정의 세계로 이끈다.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진행되는 대흥사 예불시간은 불교예술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소리가 주는 느낌과 감동, 자연과 소리와의 화합을 통해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대흥사 숲 터널을 지나 만나는 예불시간을 권하고 싶다.
특히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찾으면 좋은 소리체험을 할 수 있고 불교 사물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다.
대흥사 산사에 울려퍼지는 소리체험은 예불시간인 오후 6시 법고를 치는 것부터 시작된다. 3명의 스님이 돌아가면서 치는 법고는 소리도 동작도 장관이다.
법고는 짐승을 비롯해 땅에 사는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불교사물 중 제일 먼저 친다. 두 개의 북채로 마음심(心)을 또는 절 만자를 그리면서 두드리는 스님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다가온다.
웅장한 법고에 이어 잉어모양을 한 목어를 두드리는데 이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이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는 운판을 치고 가장 장엄한 소리를 내는 범종을 친다.
법고와 목어, 운판, 범종은 불교사물로 매일 오후 6시와 새벽에 불교의식으로 진행된다. 사물을 두드리는 의식이 끝나면 대웅보전에서 예불이 시작된다. 목탁소리에 맞춘 스님들의 독송도 또 하나의 소리 체험이다.
* 해탈문[解脫門]
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不二門)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한다.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으며,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며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ㆍ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대웅보전에는 영단을 비롯하여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가장 한국적인 미소 - 대흥사 석가모니불
대흥사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은 가장 한국적인 미소로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의 감동과 희열을 너무도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모든 이들을 껴안을 만큼 풍부한 감정이 묻어나는 미소, 그 미소 앞에서 우린 한없는 자유를 얻는다.
대흥사 석가모니 불상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조선 영조 때 작품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 때는 사상과 학문, 문화가 왕성하게 꽃이 피던 시대이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은 그 대표적인 경우로 당시의 자신감과 풍부한 예술성을 미소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 대흥사 대웅보전 석가모니부처님은 미소 때문에 가장 잘생긴 부처라고도 부른다. 이 잘생긴 부처는 영험하기로도 유명하다. 영험하면서도 어찌나 잘생겼는지 지금도 이 부처님의 영험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흥사를 찾고 있다.
*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
* 명부전(冥府殿)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낮은 기단 위에 초석 없이 두리기둥을 세워서 정면 3칸, 측면 2칸을 구획하고, 상부 맞배지붕을 얹혀 세운 건물이다.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외부는 1ㆍ2분합의 빗살문으로 단장하고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공포는 주심포의 2익공 양식이다. 특히 어칸 상부에 걸려 있는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구한말 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건물 내부는 5량가로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수장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ㆍ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좌우로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과 판관ㆍ녹사ㆍ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으며, 지장보살 뒷면에는 1901년 금어 경선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건축 양식상 주심포식 맞배집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20세기 초의 명부전 양식의 한 예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불화로는 1901년에 조성된 지장후불탱화가 있다. 그 밖에 1906년(광무 10)에 쓴 <두륜산대흥사명부전헌답기> 현판이 걸려 있다
* 응진당· 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2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2익공으로 건물 전면에 1ㆍ2분합의 빗살문을 단장하고 측ㆍ배면에 막돌과 흰줄눈친 담장과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그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한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중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어 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ㆍ판관ㆍ사자ㆍ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ㆍ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 백설당(白雪堂)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대웅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된다. 구조는 대웅전을 향한 동편이 주건물로 3칸의 고량대실(高樑大室)로 구성되어 있으며,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그 끝자락 서편에 작은 승방들이 헛간과 이어져 있다. 이외 안마당 서변을 이룬 건물에는 작은 방들이 두줄 겹겹으로 배열되어 앞뒤 툇마루와 함께 연결되어 있으며, 그 모서리에 공양간이 자리한다. 안마당에는 겹겹이 겹쳐진 사변지붕과 용마루의 겹침 등 그 꺾임이 맑고 아담한 벽체와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어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과 함께 변화있고 재미있는 외관을 보여준다.
원래 북원에는 여러 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衆寮)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세우고 두리기둥으로 그 칸을 세분화한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가 소략한 주심포집이다.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 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건물인 대중방은 절 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근래 널마루 다락을 없애고 사찰의 소임을 맡은 분들의 방명이 적힌 용상방(龍象榜)이 붙어 있다.
*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 천불전 보물 제1807호
천불전 기도 영험 유래 (千佛殿 祈禱 靈驗 由來)
이곳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흥사)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분의 부처님 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 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 줄 것을 현몽 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 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입니다.
이글을 접하시는 여러분들께서도 千佛殿 기도를 통한 영험을 성취 하시 바랍니다.
千佛殿 懸板 (천불전 현판, 조선후기 원교 이광사 친필)
千佛殿 柱聯 (1917年 오인당 안규동 전서 古 예서체 친필)
(世尊坐道場)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 마치 천개의 해가 떠서
(照耀大千界)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千佛殿 으로 들어서는 門인 가허루(駕虛樓, 懸板 글씨는 全州出身 蒼岩 李三晩先生 親筆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千佛殿 앞산의 悟道재 능선과 千佛殿 뒷산의 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세상(此岸)과 부처님의 세계(彼岸)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르는 뜻이다.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낮은 기단(基壇)에 세운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기초(基礎) 위에 일부 괴목(槐木)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보이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작(多包作)을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하였고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2짝이다.
내부 중앙에 목조(木造)의 본존불(本尊佛)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주위에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千)의 작은 불상을배열(配列)한 것이 특이(特異)하다. 기록에는 순조(純祖) 11년(1811) 불탄 것을 동(同)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 가허루(駕虛褸)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駕虛褸)’라는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다.
* 용화당(龍華堂)
대흥사 천불전 서쪽에 있는 요사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에 준공하였다. 그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건물의 남쪽은 ‘ㄱ’자로 꺾여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남쪽에는 온돌방 3개와 부엌을 놓고 건물의 가운데에는 큰 선방과 그 북쪽으로 작은 방 2개가 있다. 이 선방의 동서면에는 큰 퇴와 작은 툇마루를 두었고, 부엌 쪽에는 넓은 다락방을 위쪽에 두어 부엌 한쪽에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다.
건물 외벽에는 세살문, 붙박이 살창, 판벽 등을 만들었다. 기둥 일부의 주두(柱頭) 위에는 연화(蓮華)를 조각한 주심포작(柱心包作)을 꾸몄다. 전면 외부포작의 공법이 초익공인데 그 초각이 매우 간략하여 좌로부터 다섯번째까지만 익공양식이다.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왼쪽에서 여섯번째 기둥만이 네모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을 두었다. 전면 처마도리는 각을 둥글린 납도리인데 받침장혀를 대고 덧장혀로 받쳤으며 소로를 끼워 창방을 보냈다.
종도리도 역시 각을 죽인 납도리로 장혀만 받쳤으며 동자주대공으로 지지되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사용하였다. 후면 처마도리는 모접이 납도리를 장혀가 받치도록 한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 일로향실(一爐香室)
천불전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낮은 기단 위에 ‘ㄷ자형’ 건물로서, 자연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7칸, 측면 6칸의 맞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데,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 는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 표충사 (表忠詞)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다.
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ㆍ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ㆍ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ㆍ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끌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
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암사, 송광사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되었다.
한편, 서산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 발우와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풍 등이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은 헌종 7년(1841)에 초의선사가 건립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갖는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아한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기단상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 원주를 세웠으며, 가구는 5량구조로 되어 있다. 공포는 행공첨차가 외목도리의 장설을 받고 있는 주심포계의 익공형식으로 익공의 형상은 기둥머리로부터 둥근 판형으로 되어 있고 그 단부에는 복잡하게 조각된 쇠서 2개를 내었다.
건물 정면의 창호는 어간에는 3짝, 양 협간에는 2짝의 빗살창을 달았다. 천장은 종량 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그 외에는 판자를 댄 빗천장으로 되어 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천장의 반자 단청문양과 공포 사이에 예스러운 벽화들이 은은한 고풍을 보여주고 있다. 본 전각에 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중앙부분이 위로 굽은 동형의 대들보 2개로 그 형상이 몹시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이하다.
여기 대광명전 일원에서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 일매의 선생활을 하며 쇠미해 가던 대흥사를 다시 한번 중흥케 하였다고 전한다.
보수과정중 1841년초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당시 전라수군절도사였던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와 소치 허유가 초의스님과 합심하여 당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의 방면과 축수를 위해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 동국선원(東國禪院)’
선방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으로서,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이 쓴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는 편액은 선원(禪院)에 걸맞는 편액으로 백지에 흑서로 반양각하여 추사의 꾸밈없는 필체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해남의 미륵불을 찾아서
해남지역에 조성된 석불 중에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외에도 석불은 주로 미륵불의 형태로서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남의 미륵불로는 고도리 호천리미륵, 계곡 성진미륵, 해남읍 남천리미륵, 산이면 송천리미륵, 산이면 업자리 미륵등과 또 해남읍 신안리에는 입상의 석불이 있으며 이외에도 황산면 연당리와 산이면 송산리에도 석불이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민 불의 형태를 하고 있어 조선시대 불교가 민중화되면서 나타나는 불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에는 석굴암 본존불 - 대흥사에는 북암마애여래좌상
경주에 풍부한 표정과 미소 입체감을 지닌 석굴암의 본존불이 있다면 대흥사에는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대흥사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마애 여래좌상 중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운 표정과 입체감을 간직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 정상 바위에 이 거대한 불상을 누가 새겼을까? 이렇게 단단한 바위에 섬세하게 조각한 이는 누구일까?. 아마 이 불상을 새겼을 장인은 미륵불이 도래하길 간절히 원했나보다. 미래불이 빨리 와 우리를 구원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커 이렇게 큰 불상을 조각하지 않았을까? 이 불상의 전각은 용화전이다. 용화전은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전각으로 용화수 밑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불이 미륵불이다.
*북암 마애여래좌상은 최근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그동안 자신의 몸짓보다 작은 전각에서 살았기 때문에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표정의 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용화전의 해체 보수로 그의 전면이 드러났다. 그 신비함에 모두 숨을 죽이고 말았다.
그토록 풍부한 표정과 입체감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 딱딱한 돌에 저토록 풍부한 질감과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었던 장인의 대단한 정신에 압도됐다. 마애여래좌상은 그 신비함 만큼 신비한 전설이 전한다.
*천녀가 새긴 마애여래 좌상
아주 옛날 옛적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는 천동과 천녀가 살고 있었다. 부족함이 없는 천상생활은 천동과 천녀에게는 낙원이었다. 매일 매일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던 천동과 천녀는 어느 날 천상의 계율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천상의 계율을 어기는 행위만큼은 옥황상제로부터 용서받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들은 천상에서 가장 큰 벌인 하늘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고 말았다. 대신 하늘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제시해 줬다.
하루 낮 동안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정말로 고되고 힘든 방법 이었다. 지상에 내려온 둘은 두륜산에 있는 천년수를 발견한다.“그래 저 나무에 해를 매달아 놓는 거야.”이들은 재빨리 하루해가 지지 못하도록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붙잡아 천년 수에 매달았다. 그리고 천녀는 북쪽바위인 북 암에 불상을 조각하고 천동은 남쪽바위인 남 암에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서쪽으로 져야할 해를 언제까지 천년 수에 매달아 놓을 수는 없는데 불상 완성은 더디기만 했다. 북암에 불상을 새기기로 한 천녀는 정성을 다해 앉아있는 불상을 새긴다. 불상이 완성되자 천녀는 서둘러 해가 매달려 있는 천년수 나무 밑으로 달려가지만 천동은 오지 않는다.
그 시각 천동은 해 서 있는 불상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조각한다. 그러나 서 있는 불상의 완성은 쉽게 되질 않는다. 그 시각 천년 수 아래서 천동을 기다리는 천녀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어 천년 수에 매달린 해의 끈을 자르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천년 수에 매달린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버리자 천동은 눈물을 머금고 일손을 놓아야 했다.
그가 조각하기 시작했던 불상도 완성되지 못한다. 실지 남 미륵 암에 조성된 미륵은 희미한 음각의 표현이어서 그런지 미완의 미륵처럼 보인다.
*국보 - 해남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천녀가 새겼다는 대흥사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국보(308호)로 지정돼 있다.
얼굴이나 각 부위의 조각된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불상의 전체높이가 5.2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마애여래좌상은 4구의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연꽃위에 앉아있고 수인(손모양)은 항마촉지인(악마를 굴복시키는 수인)으로 석가여래가 모든 망상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자태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육계(肉髻)와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나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며 굵고 짧아진 목에는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 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 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하는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한 연화대좌로 불신(佛身)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三重圓)으로 꾸밈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火焰紋)가 장식되어 있다,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북안마애여래좌상은(국보308호) 고려불교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사찰미륵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바라보는 모든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호족세력이 득세하거나 무인정권이 들어섰을 때의 작품들은 조화보다는 크기로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울 때는 가장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작품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했을 때도 작품을 남긴다. 몽고의 침입 때 만들어진 고려팔만대장경과 화순 운주사 석불상 등은, 불심의 힘으로 어려운 현실을 타계하려는 의지가 담겨진 작품들이다.
그 외 문화유산 중 대흥사 석가모니불의 미소와 너무도 닮은 석굴암본존불의 석가모니상과도 아름다운미소로 정평이나 있으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 일본국보1호인 광륭사의 불상 등도 한국인의 미소를 알린다. 또 백제의 상징으로 온화하고 넉넉한 표정을 담은서산의 마애삼존불의 미소도 우리를 환희로 이끈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어떤 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해맑고 티 없는 미소이다.
*미륵이란
미륵이라는 말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로서 자씨(慈氏)보살이라고 불린다. 무승(無勝) 또는 막승(莫勝)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뒤를 이어 오실 부처님으로 현재에는 도솔천 내원궁에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시다가 56억 7천만년 후에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에 걸쳐서 설법을 하시어 300억의 중생을 제도 하신다고 한다.
이 때 이 용화삼회에 참석하여 깨우침을 얻으려는 모임이 미륵하생 사상이며, 이 시간이 너무 긴 것을 알고 미리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에 올라가 모시고 있다가 미륵부처님으로 내려오실 때 따라 내려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상이 도솔상생 신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미륵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서산마애삼존불중 좌우협시보살이 유명하다.
❍그 외 해남의 미륵불
이 외에도 석불은 주로 미륵불의 형태로서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남읍 고도리 호천마을 뒤 밭 가운데에는 두 동강이 난 석불이 음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두 동강난 호천리미륵
해남읍 고도리 호천마을 뒤편인 말매봉 서쪽 기슭아래 밭에는 두동강이나 겹쳐져 있는 미륵이 있다.
고도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 하지만 조각기법이 도식적이고 간략화 되어 있어 조성시기를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 초로 보고 있다.
이 미륵은 평평한 바위면에 음각으로 좌상(坐像)을 표현하고 있으며 음각으로 새긴 조각기법이 대흥사 남미륵암에 새겨진 미륵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조각기법 때문인지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말기나 조선초기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가로1.1m, 세로 1.8m크기로 음각으로 조각한 탓인지 선명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두 동강 나있어 전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미륵이 두동강 난 데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미륵은 원래 남쪽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나 이 미륵이 자기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어서 재앙이 발생한다고 생각한 남쪽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이 미륵을 쓰러뜨려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미륵이 서 있어야만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긴다하여 미륵의 북쪽인 고도리 사람들이 다시 미륵을 일으켜 세웠고, 그러자 다시 남쪽마을 사람들이 와 쓰러뜨리면서 가슴부분이 깨어져 두 조각이나 지금은 일어서지 못하는 미륵이 되어버렸다.
이곳도 흔히 미륵이 있는 곳에 붙여지는 지명인 ‘미륵등’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어 아주 오래 전에 미륵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들 점지해 준 미륵불 - 계곡성진마애불
계곡면 성진리 속칭 말삼정이란 곳에는 큰 바위에 희미하게 조각된 미륵불이 있다. 성진리 마애불은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민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들 점지해 준 미륵불 설화
아들을 점지해 주는 부처로 유명했던 계곡면 성진리 미륵불 그 미륵불 덕에 000씨 집안은 대대로 아들 복이 터졌다고 한다.
길가에 세워졌던 이 미륵불은 계곡출신 민영남씨 모친과 부인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부처로 유명하다.
민영남씨(전 국회의원이자 전남도지사) 모친은 내리 딸만 8명을 낳게 되자 계곡 성진의 미륵불을 찾아가 아들을 점지해 달라는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치성을 드린 후 이 부인은 기적적으로 아들 셋을 두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딸 하나를 더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인 민영남씨가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데 아들도 내리 딸만 다섯을 낳으니 이것을 본 모친이 안타까워 며느리에게 미륵불에 가서 치성을 드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며느리도 치성을 드린 후 내리 5명의 아들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때 추운 날씨에도 아들을 얻기 위해 미륵불에 치성을 드리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시아버지가 미륵불 옆에 건물 한 채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관리사에는 미륵불을 관리해줄 관리인을 두었는데 민씨 집안에서는 관리인에게 미륵불을 잘 봉안하라는 의미에서 밭과 논까지 주었다고 한다.
또한 대를 이어 아들을 점지해준 미륵불이 너무도 고마워 민영남씨 부친이 보호 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논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던 미륵불은 이때 집을 마련했고 그 후 민영남씨에 의해 다시 한 번 새 집으로 단장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민영남씨 가족도 서울로 떠나자 이 미륵불의 건물은 쇠퇴하기 시작해 얼마 전 아예 주저앉고 말았었다. 이에 군이 서둘러 새 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미륵불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아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영험하다는 소문까지 퍼져 초파일 때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한편 커다란 바위 등에 새기는 미륵불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없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당시 민중들은 미륵이 하생 해 새 세상을 열어줄 것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길거리 여기저기에 미륵불을 세웠었다.
❍황산면 연당리 미륵불의 영험(靈驗)-
연당리 미륵불은 연당리 입구 우측 도로변에 용화당에 모셔져있다.
이곳 미륵불은 입상으로 높이 205cm, 두고 54cm, 흉폭 43cm, 견폭 85cm, 이다. 미륵불의 수인은 여원인, 선정인이라 하지만 손상이 심해 선명하지가 않다.
원래 미륵불은 암, 수 한 쌍이였으나 암 미륵은 땅에 묻히고 현재는 수 미륵만 남았있다. 수 미륵이 워낙 영험한지라 전라 우수영의 우수사가 이곳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가다가면 다리가 부러진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곳 황산면은 옛날에 통신 및 도로관리, 군사정보를 위한 남리 역이 있었고 관리의 여행이나 숙식, 행정 연결수단으로 활용하던 삼지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 미륵불 전설
미륵불은 왼쪽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데 여기에 따른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아주 잘 나가던 양반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 50이 넘어 가는데도 그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그는 국 방방곡곡 명산대천 천지신명은 물론 모든 사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하며 아들하나 점지해 주실 것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반의 꿈에 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전라우수영으로 가서 미륵불을 조성하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기이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조정에 해남으로 갈 것을 자처하고 전라우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전라우수사로 부임하던 중 마을 입구에 연꽃이 곱게 피어난 곳을 보고는 이곳에 미륵불을 조성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러나 욕심이 많았던 우수사는 자기 돈은 내지 않고 마을 주민들에게 전액 부담을 주어 미륵불을 조성하게 했다.
그 후 우수사는 아들을 갖게 되어 매일 매일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은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이에 화가 난 우수사는 미륵불을 산산조각을 내려 했으나 왼쪽 귀만 떨어져 나가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음이 더욱 화가 났다. 화가 난 우수사는 완전히 깨 없애려고 하인들을 시켜 "아주 부셔 버려라"하고 호령하자 갑자기 하늘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일어나드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날 벼락이 일어 인부들이 죽고 만다.
이 후로는 사람들은 감히 미륵불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전라우수사 만 이곳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졌다는 설화가 전한다.
*미륵불: 미륵부처라고도 하는데 도솔천에 살며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불로 나타나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전해온다.
*도솔천(兜率天) :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며 석가모니 부처가 보살로 계실 때 이곳에 계신 곳이며 미륵보살도 미륵부처가 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수행을 한다고 한다.
*수미산(須彌山) : 불교에서의 우주관으로 수미산이 그 중심이다.
❍송천리 미륵불
산이면 송천리 미륵은 면소재지인 초송리를 약간 못 미친 송천리 마을의 도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사찰인 미륵사에 모셔져 있다. 대부분의 마을미륵이 들판에 서있는 것처럼 송천리 미륵도 들판에 있었다. 미륵불 주변에는 일곱석상(일명 칠성바위)이 있었으나 밭 개간시 매몰되었다고 한다.
이곳도 여느 곳처럼 미륵불 앞의 언덕진 곳을 미륵 등이라고 하며 미륵불을 모신 전각 옆에는 불당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 모셔진 미륵불은 높이 2.4m, 폭 2m의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바위에 좌불을 하고 있는 불상을 새겼으며 미륵불의 얼굴과 상체부분은 마모되고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힘들다.
이곳 미륵사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이 계곡면 말삼정 미륵처럼 자연석 위에 엷게 음각의 좌불로 조각된 미륵이어서 매우 일치된 형식을 보여준다.
이 미륵불에도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이곳 송천마을의 미륵불이 영암군 미암면에 소재한 미륵불과 마주보고 있어 이를 마주보면 산이면 총각은 문등병, 미암면 처녀들은 정신병에 걸린다고 믿어 마을에서는 영암의 미륵불이 보이지 않도록 앞쪽 구릉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현재 영암군 미암면의 경계인 학계리에는 민가의 정원에 입상의 미륵불이 있다.
❍산이면 업자리 미륵 등 전설
산이면 업자 마을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 목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미륵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아주 옛날 이 마을에는 부(夫)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씨 노인은 소문난 부자였지만 심술이 고약했고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이었다. 부씨 노인 집은 부자 집 이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 십 명씩 구걸하러 오는 걸인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부씨 노인은 성격이 인색하고 포악했기 때문에 적선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부씨 노인에게 동냥을 구걸하러 왔다. 이 노인은 부씨노인이 구두쇠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냥을 청했다. 대문간에서 동냥을 청하는 소리에 부씨의 마누라가 나왔다. 부씨 마누라 또한 부씨노인에 못지않게 인색하기로 유명해 동냥하러 온 노인을 마구 구박하며 하인을 시켜 내쫓아 버렸다.
부씨 노인부부는 날마다 이렇게 찾아오는 걸인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의 등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묘안을 짰는데 그것은 주둥이가 좋은 항아리에 쌀을 반쯤 넣고 걸인들이 오면 마음대로 한줌씩 퍼가도록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후 부씨노인 집에 한 스님이 동냥을 하러왔다. 그리고는 적선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부씨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스님에게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에서 손을 넣고 쌀을 가져가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손을 넣었으나 주둥이가 좁았기 때문에 쌀을 빼낼 수 가 없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부씨노인은 욕심이 많아서 쌀을 너무 빼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놀려댔다. 스님은 그제야 부씨 노인이 얕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대청마루 밑에 있는 미륵불을 산 위에 세워놓으면 지금보다 더 훨씬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텐데...”하고 혼잣말을 하며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씨노인 부부는 더 부자가 된다는 소리에 하인들을 시켜 마루 밑을 파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그곳에서는 서기가 서리더니 미륵불이 나왔다. 두 부부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인들을 시켜 산 위에 미륵불을 세운 다음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씨 노인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부씨 마누라 마져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부씨노인부부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씨노인 부부가 세상을 뜨자 가세도 점점 기울어 나중에는 집터만 남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노인의 집터가 있었던 곳을 큰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부씨노인 부부가 너무 못되게 굴다가 벌을 받아 죽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세워진 미륵불이 마을 앞산 기슭에 옮겨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고 미륵이 있었던 곳에 ‘미륵등’이라는 지명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남천리 미륵
해남읍 남천리 미륵은 어찌 보면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돌 하루 방같이도 보이며 어찌 보면 석 장승 같기도 한 미륵으로 남각산 아래 남천마을 서쪽입구 길가에 서있다.
약 1.2m 높이의 자연석 바위에 새긴 모습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미륵이다. 마을 사람들은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자연석 바위에 얼굴부분과 상체가 양각으로 꽤 뚜렷하게 조각돼 있다.
둥그런 두눈을 또렷하게 뜬 모습에 아래 부분은 치마를 내려뜨린 형태로 돼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을 암 미륵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마을 건너편 서쪽 오인리에 있는 수 미륵과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천리 미륵은 해남에서 가장 전형적인 민 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불상하고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소박한 모습이 해남인의 모습같이도 느껴진다.
소개
❍가장 한국적인 불상의 미소를 보다
해남지역에 조성된 불상 중에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은적사 철불을 비롯하여 대흥사, 미황사, 서동사의 본존불 등 주요사찰에는 우약사(右藥師), 좌미타(左彌陀)의 좌우에 불상을 거느린 삼존불 이면서 여래상(如來像)을 하고 있다.
* 대흥사 부처님의 영험함
1899년 대흥사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한다. 대흥사는 그 화재로 대웅보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그 화재 속에서도 유독 대웅보전의 불상만이 안전하게 보존됐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날 주지스님인 육봉 선사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난다. “육봉아, 부처님이 너무 뜨겁구나. 빨리 일어나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느냐... 어서 일어나 부처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거라 ” 하며 호통을 친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육봉 스님은 급히 대웅보전으로 달려가 활활 타고 있는 건물 안에 봉안된 부처님을 밖으로 옮긴다. 부처님을 밖으로 옮긴 순간 대웅보전에 불이 붙어 삽시간에 전 건물이 전소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육봉선사는 가까스로 부처님을 모셨다.
현재 대웅보전 건물은 육봉선사가 한양을 12번을 걸어서 다니며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완공된 건물이다고 전해온다.
*대흥사 삼존불
대흥사 대웅보전 본당에 모셔진 삼존불을 보면 상호(相好)는 원만상(圓滿相)으로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가 보주(寶珠)처럼 적당히 솟아있고, 양미간의 모습, 코, 입 등이 정적감을 주고 있다. 귀는 길게 늘어뜨려 위엄이 있게 보이면서도 양쪽 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나타낸 피부감이 안정감을 주고 있는 모습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 U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가부좌를 한 무릎 밑으로 군의(裙衣) 자락이 덮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인(降魔印)을 결하였다. 좌측의 협시불도 나발을 한 여래상으로 중앙 본존불과 유사한 양식인데 다만 수인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였다.
이러한 삼존불의 배치는 서동사, 미황사 등에서도 같은 형식이며, 대흥사에서는 이 삼존불을 우협시에 약사여래, 좌협시에 아미타여래라 전하고 있다. 조성 시기는 대체로 조선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나의 미소를 찾아보자 - 대흥사 천불상
천불상의 표정은 인간의 표정이며. 천불상의 미소는 인간의 미소라고 한다.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상에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미소와 표정이 모두 담겨 있다. 천개의 불상 표정을 모두 달리 표현한 이 작품을 보면 장인의 풍부한 그 솜씨에 먼저 머리가 숙여진다. 또한 천불의 다양한 표정을 보면 저절로 웃음도 함께 지어진다.
천불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기 이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며, 단순히 천불이라 할 때는 현겁(現劫)의 천불을 말한다. 즉 이 세상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하며,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천불의 표현이다.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보물 승격)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불 천불상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상의 영험함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흥사(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근래에도 영험함을 보인 천불상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 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 대체로 대흥사 본존불과 함께 서동사 삼존불, 도장사 삼존불, 미황사 삼존불은 그 재료가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木材)이며 만들어진 조성시기도 조선시대 후기작으로 보고 있다.
* 미황사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164
삼존불
대웅보전 중앙 불단에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이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모셨다.
중앙석가모니불의 크기는 136cm이고 좌우 협시불은 이보다 조금 작다. 본존불은 볼이통통한 계란형의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낮은 육계와 반달형의 계주를 갖추었다. 이마에는 백호가 묘사되었고 작은 눈은 반개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명상에 잠긴 표정이다.
코와 입은 반듯하며 귀는 길게 목까지 늘어 뜨렸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 식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흐른 옷자락은 가슴아래서 U자형을 이룬다.
좌우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취한점만 본존불과 다를 뿐 얼굴의 생김새나 법의 착의 형식은 동일하다. 삼세불의 대좌는 3단의 중앙 불단위에 3개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팔각대좌이며 대좌의 문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연화대좌에는 채색을 했으며 팔각대좌에는 금채를 하였다.
삼세불의 각각 앞에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약사여래불의 화려한 불패를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로는 1993년에 조성한 것으로 삼세불과 그 권속들을 묘사한 삼세불탱화를 모시고 있다.
❍ 서동사 목조삼존불상
서동사 삼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불상으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개금불사원문에 의해 불상의 조성 절대연대가 확인됐을 뿐아니라 조성양식에 있어서도 불상의 군의자락의 자형 문양이 나주 심양사불상, 죽림사 아미타불과 유사하는 등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존불은 크기가 120㎝내외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법의를 감싼 옷 주름이나 무릎을 덮은 군의 등의 양식이 명쾌하고 활달한 감이 있다. 중앙의 본존불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낮고 작게 표현되었다. 나발 중앙의 계주는 크고 반달형이며,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있고 코는 오뚝하다. 호형의 눈썹에 눈은 가늘게 뜬 정안이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귀는 짧은 편이며 귓볼은 뭉뚱하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잇다.
법의는 통견이며 밑으로 쳐진 옷 주름은 매우 두껍다. 우측어깨를 덮은 법의 자락은 팔의 반쪽만 덮고 있는 반라 식을 하고 있고 배꼽위로 나타난 승각 기는 일자형의 띠 줄과 그 위에 연화형의 의문이 묘사되어 있다. 무릎을 덮은 군의자락은 부채살 처럼 펴지고 좌측 무릎 주위에 자형의 문양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일자형의 띠줄 바로 앞 하단에 뾰쪽하게 솟아난 두 개의 돌출점이 주목된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측 손은 구품 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좌우협시불은 모두 여래형으로 머리와 육계와 나발을 표현하였다. 좌측의 여래상은 그 양식이나 기법이 거의 흡사하며, 우측 손에 약호를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보이며, 우측의 여래상은 아미타여래로 추정된다.
*서동사: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절골길 244
❍도장사 삼존불상
1935년 주지 이춘익이 목수 박난초와 함께 대웅전을 중건할 무렵 절의 이름은 성주사(聖住寺)로 기록된다.대웅전 내부에 있는 목조삼존불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상호는 원만상이나 경직되어 굳어진 얼굴이며 눈썹은 기운차게 호형을 그렸으나 반개를 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나타나있고, 법의는 통견 인데 가슴 중앙부분에서 내의 주름이 가로 지르고 있다.
협시불은 좌우 모두 보관을 쓴 보살인데 오른편 보살은 오른손에 약병을 들고 있다. 이 삼존불은 모두 그 재료가 목재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며,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져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표현 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후기쯤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본존 좌상 고 1.2m이다.
*도장사 금동불상 전설
도장사에는 금동불상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이곳의 대웅전이 오래되어 다 허물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주지에게 이르기를 법당에 모셔진 부처를 모시고 빨리 피하라고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주지가 다음날 부처를 밖으로 모시자 법당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 불상에 대한 행방을 알지 못하다가, 1935년 대웅전을 다시 중수하던 한 목수가 기둥 안에 들어있는 한지에 쌓여있는 주먹만 한 정도 크기의 금동불상을 발견했고, 주지는 이 금동불상을 대흥사 주지 박영희에게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금동불상은 다시 도난당한 것으로 전해져 박영희스님도 돌아 가셔서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도장사: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내산길 143 (관춘리 780)
❍은적사 비로자나철불좌상
고려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비로자나철불좌상은 볼륨 있는 얼굴에 비해 눈은 길게, 코는 작게 표현하여 단정하면서도 다소 근엄한 인상을 준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어깨는 둥글며 전체적인 신체 표현은 양감과 활력이 줄어든 느낌을 준다. 양 어깨에 두른 옷에는 규칙적인 평행 계단식의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는데, 기하학적으로 추상화된 느낌을 준다. 이는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그 맥이 계승된 것이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싸 쥐고 있는데 일반적인 불국사나 증심사의 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왼손이 오른손 위로 올라간 지권인의 손 모양과는 반대로 되어 있다.
법의의 형태나 두 팔에 걸쳐진 옷 주름 등은 858에 만들어진 장흥보림사 철불이나 865년에 조성된 강원도철원도피안사 비로자나 철불과 닮았으며 신라하대비로자나불의 전형양식을 일부 고수 하면서도 오히려 고려시대로 연결되는 작품성을 나타낸 것으로 조설 시기는 10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불상은 당시 유행하던 철불좌상의 비로자나불로서 신라말 고려초의 철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은적사: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은적사길 404 (장촌리 66)
* 명승 59호 달마산 미황사
명승 59호로 풍광이 뻐어난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489m) 은 호남의 금강이라 일컬으며,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달마산은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이 두륜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 달마산이다. 해남군 현산면, 송지면, 북평면에 걸쳐져있고 천년사찰미황사와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이름은 경전(dhama,達摩)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지형도에서 달마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 능선은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기암괴봉이 약8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남해의 금강산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풍광이 수려하고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빛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특히 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는 남도 제 일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황홀하다.
이렇듯 수려한 산세가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품고있 다. 미황사는 신라경덕왕 8년(749년) 창건됐다고 전해오며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온다.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현 갈두항 부근)에 닿자 의조화상이 이것을 소의 등에 싣고 오다가 소가 드러누운 산골짜기에 절을 지어 미황사라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미황사는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고 기록 마져 없어졌다. 이후 조선후기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다시 번성했고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승풍을 크게 떨쳤다. 현재 경내에는 해남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해남 미황사 응진당(보물 제1183호), 미황사 괘불탱(보물 제1342호)등 국가지전문화재 3점 있다.
발굴조사 등 고증을 통해 옛 가람배치를 확인하고 정비계획에 따라 복원불사도 활발하게 이우러지고 있다.
❍달마산 금 샘
달마산은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누른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 샘이다. 금 샘은 문바위 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있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하나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이 금 샘에 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主)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 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 만 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 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과 응진당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삼성각, 자하루등과 요사채 들이 남아있으나 예전에는 크고 작은 누각이 20여채나 있었던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 문화재 정보
종 목: 명승 제59호
명 칭: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海南 達摩山 美黃寺)
분 류: 자연유산 / 명승/ 역사문화명승/
수량/면적: 4,619,039㎡
지정(등록)일: 2009.09.18
소 재 지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247 등
위치 : 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길 42 외 (맴섬 앞 시작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