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본문 : 히 2:1
8)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하여 방황하는 영적 부주의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서론 — 요란하지 않은 위험
사람이 신앙을 잃어버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분명한 결단으로 신앙을 등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본인도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예전에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던 말씀이 더 이상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예전에 그렇게도 사모하던 기도의 자리가 낯설어져 있고,
예전에 그렇게도 분명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배는 닻을 올려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닻을 내리지 않아서 떠내려갑니다.
강물 위에 매어두지 않은 배는 폭풍이 오지 않아도, 누가 밀지 않아도, 물결을 따라 조용히 흘러갑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처음 있던 자리에서 한참 멀어져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하는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배교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떠나지 말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아니, 더 정확히 묻는다면 — 우리는 지금 매여 있기는 합니까.
I. 그러므로 —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만드는 필연성 (히 1장 → 2:1)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를 그냥 지나치면 오늘 본문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1:2).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1:3).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신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고, 천사들은 오히려 그分을 경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1:4-6).
그분은 만유를 붙드시며, 영원히 동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1:8-12).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장 2절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마지막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실 계시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말씀이 이제 아들 안에서 주어졌다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다른 계시, 다른 중보자, 다른 말씀은 없습니다.
아들이 마지막입니다.
그렇다면 2장 1절의 "그러므로"는 이런 뜻이 됩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분, 창조주시요 천사보다 뛰어나시며,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그 아들에 관한 복음을 우리가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에 더욱 유념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경고의 출발점입니다.
이 경고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일반적인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 경고의 근거는 우리의 의지력이나 신앙의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위대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오해하는 가장 흔한 방식 하나를 미리 짚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내가 더 열심히 붙들어야겠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오늘 본문은 결국 자기 노력을 강조하는 율법적인 메시지로 끝나고 맙니다.
본문의 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는 힘은 우리 자신의 붙듦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입니다.
1장이 없이는 2장 1절의 경고도 힘을 잃습니다.
II.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 태만이 만드는 조용한 표류
이제 본문의 핵심 동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땅하니라"(δεῖ) —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십시오"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라는 강한 필연성의 표현입니다.
"더욱 유념함으로"(περισσοτέρως προσέχειν) — προσέχω는 마음을 두다, 집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더욱"이라는 부사가 붙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시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들은 복음에 더욱 각별하게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들은 것"(τοῖς ἀκουσθεῖσιν) — 이것은 막연한 종교적 지식이 아닙니다.
2-4절에서 밝혀지듯, 이것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들은 자들이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로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παραρυῶμεν)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흘러 지나가다", "미끄러져 지나가다"입니다.
흔히 설교에서 "닻이 풀린 배가 떠내려가는 항해 용어"로 소개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단어의 본래 의미 영역은 더 넓습니다
— 반지가 손가락에서 스르르 빠지는 것, 물이 그릇에서 새어 나가는 것, 무언가가 손아귀에서 저절로 빠져나가는 것.
이 모든 이미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강제로 빼앗지 않았다는 것.
그저 붙잡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의 무서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을 거부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위험의 출발점은 반역이 아니라 부주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 누구도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오늘부터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이 식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이런 식입니다.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처음에는 바빠서, 다음에는 익숙해서, 나중에는 그냥 그렇게 되어서.
기도가 형식이 됩니다.
예배가 습관이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은 어느새 정보가 되고, 정보는 어느새 배경 소음이 됩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복음이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립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위험을 다른 말로 반복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3:12),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짐(3:13), 말씀을 듣는 것이 둔해짐(5:11), 진리를 안 후에 고의로 죄를 범함(10:26).
이 모든 경고가 2장 1절에서 시작됩니다.
태만은 배교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태만은 배교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III. 이같이 큰 구원을 어찌 피하리요 —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경고 (히 2:2-3)
그렇다면 이 경고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신학적으로 바르게 서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곧바로 이렇게 논증을 이어갑니다.
옛 언약, 곧 천사들을 통해 중보된 율법조차도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는 정당한 보응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선포하시고, 사도들이 확증하고,
성령의 은사로 증언된 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논증입니다.
옛 언약도 이러했다면, 하물며 새 언약이야.
여기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이 본문을 "구원받은 사람도 노력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성도의 견인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경고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십니다.
경고는 견인의 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견인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방편, 곧 은혜의 수단입니다.
참된 신자는 이 경고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이 경고를 통해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붙잡게 됩니다.
경고를 들을 때 마음이 찔리고, 다시 말씀 앞에 나아가고 싶어지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구원받았는가 못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질문은 "나는 지금 무엇에 시선을 두고 있는가"입니다.
결론 — 무엇을 붙들 것인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배 자신이 애를 써서가 아닙니다.
닻이 강바닥의 견고한 지점에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는 힘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아무 할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더욱 유념하라", "마땅하니라"고 명령합니다.
다만 그 유념함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다시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오늘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지금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흘러가고 있습니까.
그 답은 극적인 사건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답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 드러납니다 — 오늘 아침 말씀 앞에 앉았던 시간, 이번 주 기도의 자리,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자리. 요란한 배교만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조용한 부주의도 우리를 처음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떠내려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 곧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큰 구원,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