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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
특집 영해교조신원운동 150주년
도차주(道次主) 강수(姜洙)의 생애와 업적
덕암 성강현_대동교구
1. 신유년(1861)에 입도
강수는 영덕 직천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동학혁명 당시인
1894년의 청주전투에서 환원하였다.
강수 이외에
강사원(姜士元)·강방준(姜方俊)이라고도 불렸으며,
교단에서는 강시원(姜時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강시원이라는 이름은
포덕16(1875)년 10월 해월신사께서
「용시용활(用時用活)」의 법설과 함께
이름을 시형(時亨)로 고칠 때 함께 개명한 이름이다.
강수의 부친은 강정(姜錠)이다.
부친은 해월신사가
수운의 순도일과 탄신인을 위한 계를 조직할 때
계장으로 참여하였다.
동생은 영해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해
영해부로 진입할 때 선봉에 섰다
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리고 아들은 강위경이다.
해월신사께서 강수와 함께 영남행을 할 때
달성군에서 강수는 신사와의 영남행에서
달성에 사는 아들 위경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3대가 동학에 입도해 활동하였을 알 수 있다.
지난 5월 29일
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
영덕과 영해일대를 답사하면서
강수의 출신지인 영덕 직천을 찾았다.
직천의 현지명은 영덕군 강구면 원직리였다.
마을 앞을 지나는 작은 내가 곧게 뻗어
직천이라는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원직리는 야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이장인 74세 김순현씨는
원직리에 현재 강씨가 살고 있지 않고
자신도 어른들로부터 강씨가 살았다는 내용을
전해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의 최고령자인 92세 김추열옹은
마을 앞산에 강씨의 묘가 2군데가 있다고 하면서
노구를 이끌고 가까운 강씨의 묘를 직접 알려주었다.
김옹의 안내로
마을 앞산의 중턱에 비석이 없는 2기의 봉분을 찾았다.
다만 묘비가 없어
정확하게 확증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김옹의 구술을 통해
강씨가 마을에 살았다는 점을 확인해
강수가
직천 출신이라는 것을 잠정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강수가 동학에 입도한 동기는 알 수 없으나
입도한 시기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후서』에서
“於戲 時元 自丈席以來
進於學者爲今十八年矣”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만든
1879년이 입도한 지 18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강수는 수운대신사의 신유 포덕 시기에
입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운대신사 시기의 강수에 관한 기사를 통해
강수의 활동에 대햐 살펴볼 수 있다.
1) 四月 盈德人 姜洙 來問于道修之節次 先生曰
只在誠敬信三字云云
2) 時歲六月
分付于各處道人額字一張特以書之頒佈于各處
其時姜洙來謁 先生以十餘張中 有性者 此君持去
又書敬齋二字授之
3) 先生曰 興比歌前有頒布矣 或爲孰誦之耶
各爲面講也 茅次講之後 姜洙獨出座中
對先生而面讀問旨先生節節句句
先生爲問旨洙黙黙不答 先生笑戲曰
予誠墨房之人也 洙亦反位問旨則先生指東指西也
洙亦問蚊將軍之意 先生曰 君爲心通可知矣
洙亦問無窮之理 先生曰 其亦心通知之
1)은 포덕4(1863)년 4월 강수가
대신사를 찾아 도의 절차를 물었다는 기록이다.
강수의 질문에 대해 대신사는
다만 성경신 세 글자에 있다는 요지로
수도의 절차를 일러주었다.
이 기사에 뒤이어
’盈德有事更戒 各處道人 勿爲指目之端‘라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면 강수로부터
영덕에서 동학도들이 관의 탄압이 받았음을 전해듣고
각지에 지목의 단서가 없도록 조심하라고
각지에 통보하였다.
이렇게 강수가 용담을 찾아 도를 닦는 절차를 묻고
영덕의 교단 동정을 상의하였다는 점에서
수도와 교단일에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2)는 포덕4(1863)년 6월에 다시 용담을 찾아
수운대신사로부터 글을 받은 내용이다.
당시 대신사께서 글자를 써서
각지의 도인들에게 보냈는데 강수가 용담을 방문하자
대신사께서 10여장의 글 중에서
’성(性)‘자가 들어있는 액자를 하나를 준 후,
다시 ’경재(敬齋)‘라는 액자를 써서 주었다.
즉 강수는 이날
대신사로부터 두 개의 액자를 받았는데
이는 강수가 용담을 자주 찾아
대신사로부터 인정을 받은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3)은 포덕4(1863)년 10월 28일
수운의 탄신일의 면강에서의 강수에 관한 기사이다.
생신상을 물리고 대신사는 각지에서 모인 제자들에게
일전에 ‘흥비가’의 뜻을 물었다.
이때 강수가 홀로 나와
흥비가를 외우며 뜻을 말하였으나
대신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대신사는 강수를 보고
“묵방(墨房)의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묵묵부답으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질타하는 것으로 일종의 유머라고 할 수 있다.
강수가
묵방의 뜻과 문장군, 무궁의 이치 등을 물었으나
대신사는
심통(心通)하면 알게 된다고 말하고 마무리 지었다.
이상의 대신사 시기 강수와 관련된 기사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입도는 포덕2(1861)년에 하였지만
수도를 본격화한 겻은
포덕4(1863)년 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포덕3(1862)년 접주제를 시행할 때
강수가 접주로 임명되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임명된 영덕접주는 오명철(吳命哲)이었다.
둘째,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신사에게 수도의 절차와 무궁의 이치를 질의하고
흥비가를 해석할 정도로 강수는 상당한 수준의
지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음을 할 수 있다.
셋째, 적극적인 성향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대신사의 질문에 홀로 일어나 대답을 하고
의문점을 질문하는 당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신사 시기에는
교단에서의 입지가 크지 않았다.
2. 영해교조신원운동과 강수
대신사는 대구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신사에게
’고비원주(高飛遠走)‘를 명했다.
스승을 잃은 해월신사는
김춘발과 함께 태백산중으로 피신하면서
영덕을 찾아 강수를 만났다.
신사가 대구를 출발해 처음으로 찾은 인물이
강수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덕이 북도(北道)라서 신사의 관할이었고
지역적으로 검곡과 멀지 않아
강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강수가 용담을 찾을 때는 검곡을 지나게 되어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강수와 헤어진 신사는
영해, 죽변, 예천 수산리 등을 전전하다
영양 용화동 윗대티에 자리를 잡았다.
포덕7(1866)년 9월
신사의 은거지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강수는
우연히 영덕에서 전성문을 만나
신사의 소재를 알아내고 윗대티를 찾았다.
이때부터 강수는 신사와 생사를 같이하며
교단의 발전에 주력했다.
신사는
대신사의 탄신제와 순도제를 지내기 위한
계를 제안하자 강수의 부친인 강정(姜錠)이
계장이 되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무진년조)
포덕11(1870)년 10월에
이필제가 사람을 보내 신사를 뵙자는 요청을 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이인언, 박군서, 박사헌, 권일언 등 4명이
신사를 찾아 이필제를 뵙기를 권하였다.
이필제는 포덕10(1869)년 10월부터
영양 형제봉 아래 박사헌의 집에 머물며
교조신원운동을 계획하였다.)
교인들의 요청에 신사는 이필제를 만났는데
이필제는 교조신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사는 시기상조라고 만류하였지만
이필제의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필제를 만난 후 신사는
강수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강수로 하여금
이필제의 심중을 파악해보기 위해서였다.
신사는 이필제를 만나는 데 강수를 동행한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강수는 이필제를 만나 비범함은 알았으나
허황된 면이 있어 여러 도인을 만났지만,
이미 이필제와 뜻을 같이하기로 하여
3월 10일을 기해 동국의 가장 동쪽인 영해부에서
교조를 신원하기로 정하고 각지에 통문을 돌려
교도들을 모았다.
신사는 영해교조신원운동를 허용했지만
직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수는 직접 가담하였다.
洙及其日 曉諭妻子 與弟同往厥處 聚集近於五百餘人
弼濟以爲設壇 體行天祭.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신미년조)
위의 글을 보면 강수는 동생과 함께
영해 박사헌(朴士憲)의 집으로 가서
천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천제에는 신사께서 천제에 참여한 후
윗대티로 돌아와
(성주현, 『초기 동학 교단과 영해지역의 동학』,
『1871년 경상도 영해 동학혁명』,
모시는사람들, 2014, 112쪽.)
실질적으로 시위대의 책임자는
강수와 이필제였다.
강수는 이필제와 함께 영해부를 점령하였다.
영해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동생인 강문(姜汶)이 사망하였다.
강수는 영해부를 점령할 때
영해관아의 인부(印府)를 탈취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나 영해부 점령 이후 이필제가
본래의 목적인 교조신원과 달리
농민봉기로 선회하여 영덕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였다.
탐관오리인 부사 이정을 처단하고
창고를 헐어 곡식과 돈을 나누어주었다.
시위대는 11일 정오 무렵에 영해부성을 빠져나와
해산하여 교조신원운동을 끝이 났다.
시위대를 해산시킨 강수와 이필제는 윗대티로 향했다.
그러나 관군이 신사와 이필제를 체포하기위해
윗대티로 들이닥쳤다.
신사와 강수, 이필제는
힘겹게 포위망을 뚫고 일월산을 벗어나
영월을 거쳐 단양 정기현의 집에 은신하였다.
이후 신사는 정석현의 집 머슴으로,
강수와 전성문은
영춘 김용권(金用權)의 집으로 숨었다.
이때가 포덕12(1871)년 4월이었다.
5월에 강수가 신사를 찾아와
영월의 정진일의 집으로 숨었다.
이렇게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사와 강수는
호형호제하고 도원의 결의를 맺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신미년조.
“主人與洙自此以來呼兄呼弟結爲桃園之義”)
8월에 이필제가 문경에서 봉기를 일으켜 체포되었다.
그 여파가 영월까지 미쳐 신사와 강수, 황재민 3인은
태백산중으로 피신하여 한 달여를 보냈다.
이때 신사와 강수는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교단 조직이 무너지자 힘들어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스승인 대신사의 신원을 위해
다시 일어서자는 다짐을 하였다.
문경 농민봉기가 잠잠해지자 신사와 강수는
영월 직동의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여
49일 기도를 통해
교단 재건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영월과 정선의 교세 증가로
교단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박용걸 형제와 유인상의 도움이 컸다.
포덕13(1872)년 10월 신사와 강수는
적조암에서 전성문, 김해성과 같이 49일기도를 하며
교단 재건을 염원하였다.
이 시기는 대신사 가족의 수난기이기도 했다.
포덕13(1872)년 5월 12일
세정이 양양옥에서 장살되었고,
포덕14(1873)년 12월 9일
박씨 사모가 정선 싸내에서 사망하였다.
대신사의 둘째인 세청도
포덕16(1875)년 1월 22일 급사하여
대신사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대신사 가족의 사망으로
교단은 신사 중심으로 일원화되었다.
신사 중심의 교단 확립으로 강수의 역할도 커졌다.
1874년 4월
신사는 단양 도솔봉 아래 절골에 집을 장만했다.
이후 옆 마을인 송두둑으로 옮겨 단양 시기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적조암 기도 이후 강수는
단양에 정착해 강연(講演),
즉 서당을 개설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신사는 성장하는 교단 활성화를 위해
치제(致祭) 의식을 시행하였는데
이때 강수의 역할이 컸다.
치제의 명칭은
고천제, 구성제, 인등제 등으로 변했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의 의식을 차용하였다.
치제는 당시 민중들의 생활에 익숙한 의식을 통해
교세를 확산시켜는 방안이었고,
치제의 비용을
교단 운영의 자금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치제는 포덕16(1875)년 8월
정선의 유시헌가에서 처음 시행하였다.
10월 18일
단양 송두둑 신사의 집에서 치제를 행할 때
강수는 도차주로 아헌(亞獻)을 하였다.
이는 치제에서 강수가
도차주(道次主)로 참여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차주(道次主)는
수운이 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해
후계자로 삼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교도들은
‘북도중주인’을 줄여 도주인(道主人)이라고 불렸다.
도차주는 도주인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도주인을 도와
교단을 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강수의 도차주 임명으로 동학 교단은
‘도주인(道主人)-도차주(道次主)-
접주(接主)-일반교도’의 조직으로 계통화하였다.
해월을 강수를 도차주로 임명해
늘어나는 교인의 관리와
새롭게 시행하는 제례의식의 집행을 맡겼다.
도차주의 임명으로
강수는 공식적으로 교단의 2인자가 되었다.
이날 「용시용활」의 법설과 함께
’시(時)‘ 자를 넣어 이름을 고쳤는데
강수는 시원(時元)으로 고쳤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을해년조. 이름을 고치면서
강수가 시원(時元)으로 고친 것을 보면
신사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포덕16(1875)년을 넘어서 교세가 안정되는 데
강수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해 7월에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개접(開接)을 할 정도로 교단이 성장하였다.
개접에서 강수는 “다시 용담의 줄거움을 일으키고,
구미산에서 놀던 운을 여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신사 시기의 교단의 위상을 회복하였음을 밝혔다.
요컨대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위기에 빠진 교단을 재건하는 데 강수의 역할은 컸다.
강수는 신사와 호형호제하며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태백산중의 고난을 신사와 함께 견디어 내었고,
적조암 49일 기도를 통해
교단 재건의 방향 설정에 동참하였다.
이후 치제를 통한 교단 의식의 정비와
교세 확장에 앞장섰으며,
신사를 도와 개접을 재개하여 대신사 시기의 교단으로
위상을 회복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3.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과 경전 간행 주도
강수의 가장 큰 업적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수는 『후서(後序)』에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 경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흐르는 세월이 물과 같이 빨라서
기묘년(己卯年) 가을에 이르러 나와 주인이
선생님의 도원(道源)을 잇고자 하는 뜻이 있어,
이에 선생님의 일과 자취를 수단(修單)한즉,
두미(頭尾)가 착잡(錯雜)하고 전후가 문란하여,
쓰되 능히 붓을 범하지 못하여
혹 잘못할 단초가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먼 것을 궁구(窮究)하여 잇고자 하였으나,
이치가 기연에 가깝지 않고,
근원을 탐색하여 근본됨을 캐고자 하였으나
불연에 같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기연을 알아 기록하고자 하였으나
또 그 끝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윤석산 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도원기서』,
신미년조 신서원 2000. 279-281쪽
신사와 강수는 1879년 가을에
도원을 밝히기 위해 자료를 모아
교단의 역사를 정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미비로
대신사의 생애와 초기 교단의
역사의 전모를 밝히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신사는 방시학의 집에서 수단소를 차리고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에 들어갔다.
편찬의 책임은 강수가 맡았다.
11월 5일 방시학의 집에서 인등제를 행했는데
이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을
한울님께 고하는 치제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편찬한 후
강수가 『후서』를 지은 것은 11월 10일에
정서를 마친 후 봉인해 유시헌에게 맡겼다.
(권병덕, 『천도교실사집편』,
『천도교회월보』 통권제144호,1922.9)
강수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편찬에서
자신의 역할을 『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 수찬(修撰)하여 기록하는 것은
감히 칭찬을 받고자 함이 아니요,
시원(時元)의 박식천견(博識淺見)이
또 능히 본말시종의 근본을 가지런히 하지 못했으니,
더욱 이것이 마음이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
내 어찌 다시 쓰겠습니까?
(윤석산 역주, 앞의 책, 281-283쪽)
위의 글을 통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강수가 수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강수가 대신사 시기에 입도하여
대신사 시기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대신사 순도 이후 해월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여
해월과 교단의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강수가 한학에 관한 조예가 깊었던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강수는 포덕21(1880)년
인제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서 편찬한
경진판 『동경대전 (東經大全)』의 편찬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강수는 전시황과 같이 감역(監役)을 맡아
경전 간행의 감독관으로 경전 간행을 지휘하였다.
5월 9일 각판소를 설치하여
11일에 개간(開刊)을 시작하여
6월 14일에 인출(印出)을 마쳤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 제사를 지내
『동경대전 (東經大全)』의 간행을 고했다.
한 달간 30여 명의 인원이 참여한
『동경대전 (東經大全)』간행을
무리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감역을 맡았던 강수의 역할이 컸다.
강수는 특히 경전의
오탈자를 걸러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대전 (東經大全)』의 간행은
식자층의 동학 유입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말로만 듣던 동학의 교리를
서책으로 접하게 되자 입도자들이 늘어났다.
1880년대의 교세 확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한글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의 편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4.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 시기의 활동
강수가 수찬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강수의 활동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강수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수는 신사의 곁에서 신사와 함께
교단의 일을 처리하였고
해월의 법설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해월의 법설을 정리하는 것은
포덕24(1883)년 이후로
새로 입도한 손천민 등 젊은 식자층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교단의 큰 일에 자문을 맡았다.
포덕26(1885)년 6월 3일 강수는
이경교 김성집과 함께 관에 체포되었다.
당시 충청도에서 교세가 늘어나자
충청감영에서 동학탄압이 심하게 일었는데
이때 도차주 강수가
단양관아의 포졸에 의해 체포되었다.
강수는 8월에 풀려났다.
포덕33(1892)년 교조신원운동 시기 강수는
신사를 도와 신원운동을 관장했다.
7월에 서인주와 서병학이 상주 왕실의 신사를 찾아
관의 탄압으로 교인들이 힘들어하자
교조신원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신사는 시기상조라고 물리쳤으나
강수 등 핵심 인물들과 만나
교조신원에 관한 의견을 물어
추수가 끝난 가을에 하기로 하고 방침을 정하고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에 돌입하였다.
의송소(議送所)는 청주의 솔뫼 손천민의 집에 정하고
도차주인 강시원과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임규호 서인주, 서병학, 황하일, 조재벽,
장세원 등의 간부를 모아 신원운동을 주관하게 했다.
강시원은 도차주로
교조신원운동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의송단자를 손천민이 지었다는 것으로보아
강시원은 원로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주와 삼례에서의 교조신원이 무위로 끝나자
조정을 상대로 한 교조신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 2월의 별시에
광화문에서 복합상소를 하기로 하고
청원 솔뫼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를 설치했는데
이때 강시원이 소수(疏首)로 참여하였다.
(『해월선생문집』. 계사년조.
“先生不得已許之 疏首 姜時元 幹事 徐丙鶴
孫天民 金演局 忠淸道儒生 朴禹鉉 朴光浩
朴根瑞 林貞準 金汝三 朴元七 趙在壁 黃河一
孫秉熙 任奎浩 湖南儒生 金錫允 金洛鳳 南啓天
張敬夏 趙東賢 孫華中 裵奎贊 嶺南儒生李文贊
金敬化 金文入 金君五 餘不盡記”)
강시원은 서울의 최창한의 집까지 가서
광화문 복합상소를 지휘하였다.
당시 동학도의 지도부는 남산동 최창한의 집에,
광화문에서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날랜 교도 수백 명은 낙산에,
그리고 이문동에 수백 명의 교도들이 집결하였는데
강시원은 이들을 총괄하였다.
강시원은
보은 교조신원운동에도 책임자로 참여하였지만
크게 관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의 기록에
서병학을 차좌(次座)로 파악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강수는 도차주로 해월을 대리해
교조신원운동을 총괄하여
교조의 신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신사와 함께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9월의 총기포시에
호서동학군을 인솔하여 참전하였다.
호서동학군은 논산에서 호남동학군과 합류하였고
공주 점령을 위한 우금치 공략에 돌입하였다.
호남동학군은 우금치로,
호서동학군은 이인을 공략해 공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실패한 동학군은 논산으로 모였다.
이후 호서동학군은 연산과 원평에서 연패한 후
태인 전투 패배 후 호남동학군과 해산하였다.
강수는 손병희가 지휘하는 호남동학군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연로하여 전투에 앞장서지는 못하였다.
강수는 호남고 호서 동학군의 연합 작전을 위해
김개남의 부대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양호동학군은
공주로 진격하기로 하였고,
김개남은 청주로 진격해
서울로 향하려는 작전을 펼쳤는데
안타깝게도 두 전투에서 모두 패전하고 말았다.
강수는 원로로
양호동학군의 연합작전을 공조할 목적으로
김개남과 합류하였고
11월 13일의 청주전투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어
12월에 청주병영에서 피살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수의 사망에 관해 『동학도종역사』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와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대대적으로 토벌을 하여 전부 죽이려고 하였다.
고부(古阜) 전봉준(全琫準),
태인(泰仁) 김개남(金開南),
부안(扶安) 손화중(孫華仲),
양지(楊枝) 고재동(高在東),
전주(全州) 성두환(成斗煥), 차기석(車基錫),
강시원(姜時元), 박석규(朴錫奎) 형제,
오성서(吳聖瑞), 강기만(姜基萬), 김연순(金演淳),
유병주(柳炳柱), 이복록(李福祿), 박태은(朴泰殷),
성재호(成在鎬), 유근호(劉根浩), 성재석(成在錫),
김윤경(金允卿) 등
두령(頭領) 19명이 살해를 당할 때에
각 포의 접주들 가운데
아내와 자식을 빼앗기고 집이 불타며
싸움터에서 죽은 자를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東學道宗繹史』,
「第十二章 甲午東學黨革命及日淸戰役 」.
“是時、洪州牧使 李勝宇、全羅道觀察使、李道宰、
大行剿討殄滅之場、古阜全琫準、泰仁金開南、
扶安孫華仲 楊枝高在東 全州成斗煥、車基錫、
姜時元、朴錫奎兄弟、吳聖瑞、姜基萬、金演淳、
柳炳柱、李福祿、朴泰殷、成在鎬、劉根浩、成在錫、
金允卿等以上頭領、十九名、被殺時、各包接主、
等諸人、見奪妻孥、延燒家屋、
死於戰地者、不可勝紀”。
『시천고종역사』에는
강시헌(姜時憲)으로 기록되어 있음.
포덕2(1861)년 수운대신사의 제자로 입도해
신사를 보좌해
동학의 재건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도차주 강수는
이렇게 동학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까지 대도의 발전을 위해 일하다 순도하였다.
강수는 신사와 더불어 동학의 재건을 이루었다.
신사와 함께 수운대신사 순도 이후
교단의 재건에 노력했으며,
영해교조신원운동의 책임자로
이필제와 동학을 이념으로 한
최초의 정치적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가장 힘들어던 시기에 신사의 곁에서
교단의 재건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신사는 그를
도차주(道次主)로 임명해 교단의 2인자로 삼았다.
이후 강수는
치제를 통한 교단 의식의 정비에 앞장섰으며,
초기 동학의 역사를 정리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편찬을 맡았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편찬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한때 관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지만
풀려난 이후에도 신사를 보필하며
동학교단의 발전에 앞장섰다.
포덕33~34(1892~1983)의
교조신원운동의 총괄하였으며
특히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소수로 총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신사를 보필하며
동학교단의 도차주로 활동하던 강수는
포덕35(1894)의 동학혁명에서 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