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최은희 대표님의 글에서 언급된 글의 내용의 가장 핵심적 용어는 ‘소명’이란 단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용어에서 우리사회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학문적 배경을 통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태동에 대한 ‘존 막스 베버’ 이론에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베버의 관점은 18세기 종교개혁의 흐름에서 ‘캘빈’에 의해 시작된 캘빈주의자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태동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회학 연구방법의 커다란 틀을 제시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연구의 관점을 “왜 서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남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 비해 빠른 자본주의적 발전과 산업혁명을 이룩하였는가?”에서 출발합니다. 베버는 이러한 발전이 단순한 우연이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체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판단을 가지고 이러한 결과를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려 시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를 대조하고 분석한 결과 베버는 이러한 경제적 발전이 개신교인, 그 중에서도 청교도(캘빈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국가에서 주로 발생하였다는 실증적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고, 청교도인 들이 가진 ‘소명의식’ 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게 됩니다.
소명의식이란 간단히 말해 “인간은 신이 부여한 사명을 따라 내세 보다 현세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소명의식이 캘빈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충직과 열정을 가질 것을 요구했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의 결과는 천박한 것(부를 천시하고 청빈을 강조하는 것이 과거 유럽인들의 사고관념)이 아니라 신의 축복이며 정당한 결과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수반되는 캘빈주의자(청교도)들의 생활태도는 개인의 사치나 쾌락 등을 금하였고 이러한 청교도적 윤리에 의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정당하게 축적한 경제력’이 헛되이 사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이렇게 축적된 ‘정당한 부’는 새로운 부를 창출해 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부의 축적’이란 결과가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라는 것이 베버의 분석인 것입니다.
따라서 베버의 결론은 “개신교인들의 청교도적 윤리와 직업정신이 근대적인 자본주의 정신인 ‘합리성’ 과 ‘청빈주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심리적 요인(캘빈의 신학에서 강조하는 구원의 예정설로 인한 현실 생활 속에서 금욕과 직업(calling)에의 헌신이다. 이는 구원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자기 확신을 위한 금욕적 생활을 낳고, 이러한 절제와 검약은 결국 자본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테제(These)이다)을 통해 근대 서유럽의 자본주의 태동과 산업화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스베버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 모습에 대한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바로 ‘천민자본주의’입니다. 그가 말한 천민자본주의란 근대사회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는 유대인계 천민 출신의 자본 축적을 막아왔었는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천민과 상류층의 벽이 허물어지고 상업, 금융업을 이용해 기하급수적인 자본을 획득한 중세 시대 천민 출신 유대인계 자본주의자들이 수익에 비례한 자본주의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한 것입니다.
또한 중세와 근대를 걸쳐 여러 국가의 교육은 자본을 수중에 넣는 주체들을 만들어내었으며 이들은 배운 지식을 자본화하여 오히려 우월주의를 불러 일으켰는데 그 때문에 천민자본주의를 앞당긴다고 말 합니다
이와 같은 베버의 자본주의 분석은 우리사회에 두 가지 질문을 던져줍니다. 첫째, 과연 한국사회는 베버가 강조한 자본주의 경제윤리가 존재했는가의 문제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영리 추구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금욕적 직업윤리에 기초하기보다 오히려 무한한 욕망 충족의 수단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현재 자본주의가 직면한 문제는 베버가 강조한 금욕적 태도의 고갈이 아니라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함에 따라 사회 불평등의 심화에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점증하는 사회 불평등은 사회통합을 약화시켜 민주주의의 기반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마저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라고 봅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세계를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 세 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서 원초아(id)는 선천적인 본능적 충동의 덩어리로서 일차적 원시 과정이라 말합니다. 자아(ego)는 원초아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통제하기 위해 발달한 것으로 인간 의식의 일부가 된다고 하며 이를 현실적 원리에 따르는 이차적 과정으로 분류하며 초자아(super ego)는 사회문화적인 제 규범이 내면화된 것으로 외부의 영향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 영역은 양심과 이상을 대표하는 기능으로도 분류합니다.
위에 언급한 최은희 대표님의 글에 따르면 인간의 자기발전 단계를 기본적 욕구충족의 단계인 원초아(id)에서 현실적 원리에 따라 발전된 욕구충족을 추구함으로 자아(ego)를 인식하는 단계가 자기계발 이론가들의 동기부여 이론의 기초로 해석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삶의 동기부여를 초자아(super ego)단계를 추구하려는 노력으로 가져와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주장의 뒷받침으로는 위에서 살펴본 막스 베버의 청교도 자본주의 해석에 나타난 ‘소명의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프로이드의 심리분석 단계에서 원초아(id)로부터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를 향한 내면적 변화의 추구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론을 접목시켜 살펴보면 결론적으로 ‘나’ 중심적 사고에서 ‘집단’ 중심적 사고로의 자기발견의 축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마이크로에서 매크로적 사고전환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거대한」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어 매크로(macro), 「아주 작은」이란 뜻의 접두어 마이크로(micro).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는 macroeconomics(거시경제학), microeconomics(미시경제학)이란 용어로 사용. 최근에는 매크로가 「전체」, 마이크로가 「개별」이라는 의미가 되어 사용되며 또 다른 예로 매크로는 GNP, 마이크로는 기업으로 비유해 사용되기도 한다.”
첫댓글 역시 최고십니다.
토론을 해야하는 까닭을 경제학자들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주시다니....?
와우~ 너무나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강의십니다. 퍼다가 많이많이 읽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