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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백향목 동맹
이스라엘이 '갈릴리 평화 작전'을 선포해 레바논 영내로 직접 군을 밀어넣은 지 세 달 남짓 지난 1981년 12일, 레바논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우익 성향의 기독교 민병대조직 '레바논 전선(LF)'와 함께 베이루트 이남의 PLO와 기타 시아파 준군사조직을 섬멸, 베이루트 내 이슬람 지역과 시리아 영토로 밀어냈습니다. 이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전에 맺었던 신사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고, 따라서 시리아 바트당 정부 역시 1981년 10월 군사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베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시리아군과 이스라엘군은 전면전을 벌였고, 승세는 무기와 군사의 질을 앞세운 이스라엘이 잡은 상황이었죠.
시리아는 레바논 내 시아파 무장조직인 희망운동(아말)을 직접적으로 후원했고, 그 밖에 제휴하는 동맹으로는 이란을 뒷배로 둔 파타당 하 PLO와 좌익 아랍민족주의 성향 단체들(레바논 국민저항전선, '잠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지하는 레바논 전선 이외에도 (지금은 명맥만 남아있는) 레바논 구정부 계열 단체들이 존재했으나, 그들은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형국이었습니다. 입장 상 구정부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서방권과 레바논 사태를 방관하던 동구권은 "중동에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적으면서도 외교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를 찾아나서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가능성을 발견, 그들에게 중재역을 맡겼습니다. 유고 연합의 외교국방특별위원이자 명망있는 외교관인 라자르 모이소프(Lazar Mojsov)는 UN 레바논 분쟁 특별 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유고의 재통합을 이루어낸 역전의 용사들 또한 핵심 실무진으로 참여했습니다.
몇 번의 조사를 거쳐, 중재단 일행들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요구가 맞물리는 지점과 상충되는 지점을 어느 정도 감별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1목표는 PLO의 지역기반 삭제, 부가목표는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권을 세워 동쪽의 적대국가들(시리아, 요르단)에 대한 안보부담을 획기적으로 경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시리아는 어떻게는 레바논에 그러한 정부가 세워져 엄청난 지정학적 열세에 처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죠. 이라크에 이란의 괴뢰정부가 세워진 판국에 서쪽에서까지 극한 안보 딜레마를 강요받는다면 시리아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시아파 신정국가인 이란이 오히려 나세르주의 잔당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는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사회민족당, SSNP)의 세를 불려 알아사드 바트당 정권과 남쪽 수니파 국가들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시리아의 전략적 선택지를 친-이란으로 한정하려는 의도가 강했습니다.
따라서 중재단이 제시한 1차 조건은 양측의 핵심 요구를 맞추어주는 한편 부가적 요구들에 대해 타협을 이루는 방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동시 철수하고 레바논에서 종교극단주의 세력을 배제한 총선거를 실시해 중립 신정부를 수립하는 안이었죠. 그 외에 종교와 민족구분에 따라 최대한의 지역자치를 부여하고 관료의 임명과정에서 종교색을 엄격히 배제하는 등 세부사항 역시 분쟁을 최대한 회피하는 쪽으로 안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후원하는) 팔랑헤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의 동생이자 온건파인 아민 제마엘을 대통령으로, 수니파이자 사회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라쉬드 카리미를 총리로 옹립한다는 합의 역시 곁들여졌습니다. 전술적 열세에 처한 시리아(그리고 이란)는 이를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죠.
그러나 수정시온주의 정권(리쿠드당) 하의 이스라엘만은 중재안을 한사코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베카 계곡을 경계로 레바논을 분할, 서부 해안지대에라도 자신들이 온전히 '지배'하는 기독교(반이슬람) 레바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우파만큼은 아니지만 무슬림에 대해 배타적이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좌파(노동당 등) 역시 굳이 적극적으로 중재안을 옹호하지는 않았죠. 유일하게 국제사회의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권평화운동(라츠)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들이었습니다. 슐라미트 알로니 당수와 이츠하크 토우마 의원은 직접 유고 중재단의 숙소를 찾아와 메냐헴 베긴 총리와 라파엘 에이탄 국방참모총장의 야합, 끝갈 데 없는 리쿠드당의 모험주의 정책을 폭로했습니다. 일행은 곧바로 리쿠드당의 집권을 종식시킬 묘안을 찾아내야만 했죠.
에이탄 장군이 베긴 총리와 손잡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살포하는 공작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공작은 오히려 이스라엘 내부의 '진짜' 쿠데타로 이어져 베이루트 점령 및 점령지 내 '자유 레바논 정부'의 강제수립이라는 결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옹립한 팔랑헤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은 취임식 자리에서 강경 아랍사회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분노한 팔랑헤 민병대에 의해 베이루트 인근의 난민촌이 초토화되는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1982년 1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이 학살극(사브라-샤틸라 학살)에서는 물경 1,5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를 말리키는커녕 야간에 조명탄을 발사해주는 등 오히려 팔랑헤의 만행을 방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전선/팔랑헤가 이렇게 대형사고를 쳐주면서 완전히 쫄딱 망한 줄 알았던 중재 시도는 다시금 활로를 뚫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와 이란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중재안을 옹호하며 이스라엘을 맹비난하고 심지어 반시리아 활동을 벌이던 레바논 구정부의 사이브 살람 전 총리까지 자유 레바논 정도를 비토해대자 이스라엘 국민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긴 총리와 에이탄 장군이 아무리 언론을 통제해도 난민촌 학살의 진상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죠. 무엇보다 건국 이래 30여년동안 굳건히 유지되었던 "유대민족의 보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스라엘군"이라는 신화에 큰 균열이 일었다는 것은 집권여당의 입장에서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쯤 되자 리쿠드당 내부에서도 선상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해 집권여당이 4개의 소정당(헤루트, 가할, 자유당, 민주민족당)으로 분리되고 말았죠.
결국 수정시온주의자들을 배제한 좌파, 중도파, 중도우파의 '위기관리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내각의 새로운 수장인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중재안의 전면 수용을 선언, 2월 18일 역사적인 '아브라함 조약'의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들이 레바논의 중립지대화를 강력히 지지하는 가운데 오로지 PLO와 수니파 근본주의 조직들만은 방기되었으며, 이는 세속주의 좌파 성향인 PLO의 여당 파타(Fatah)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버림받은 이들의 동맹이 이루어져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 '이슬람 저항운동(Hamas)'이 PLO 재건을 선언, 이후 중동에 다시금 피바람을 일으킬 불씨로 남게 되었죠. 그러나 이는 강산이 한두 번 더 변한 뒤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전세계는 아랍 세계의 평화와 팔레스타인-레바논 문제의 해결에 축배를 들기로 했습니다..
05. 비동맹운동 골목대장
아브라함 조약의 체결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의 비동맹운동 내 지위는 다시금 공고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동맹운동 내 주도세력들이 친소 입장이 경우가 다수(인도, 쿠바 등)인지라 동구권 2중대라는 조롱을 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방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래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중개를 담당할 존재임을 재입증한 셈이었죠. 리비아 공습으로 인해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 외교적 위기에 몰린 미국은 과감히 이스라엘을 비난함으로써 중동 관리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소련은 이란-레반트 지역 국가들과의 암묵적 연대관계를 구축하며 저변을 넓혀나갔습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포클랜드를 점령하고 영국이 대영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내는 동안, 소련에서는 사망한 브레즈네프의 후임으로 보수파 체르넨코가 지도자에 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그 서막을 알린 신냉전 기류가 불타올랐죠. 그 어느 때보다 비동맹운동의 제3자로서 역할이 중요해진 시점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개최된 1983년 제7차 비동맹 정상회의는 그간 제3세계 국가들의 느슨한 공론장에 불과했던 비동맹기구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은 아프리카 지역통합을 둘러싼 노선대립이었습니다. 기껏해야 무역 문제로 신경전을 벌여대는 유럽통합 논쟁과 달리 아프리카의 논쟁은 AK-47 소총과 기관총이 거치된 픽업트럭을 도구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장 미국이 리비아를 공습하기 전만 해도 차드에서 상호 수만명이 살상되는 '작은 의견대립'이 있었고,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각각 미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군벌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마약을 먹여가며 소년병을 양성하는 '사소한 말썽'이 벌어졌었죠.
1960년대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창설 이래 '검은 대륙'은 급진 범아프리카주의 및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카사블랑카 그룹과 (일단 범아프리카주의와 사회주의적 방법론을 따르긴 하지만) 보수적이고 친서방적인 노선을 따르는 몬로비아 그룹으로 갈려 '뜨거운 냉전'을 치렀습니다. 한때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지도자 격이었던 가나의 국부 콰메 은크루마, 그 이후에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카사블랑카 그룹을 주도하고 있었죠. 그러나 리비아가 미국의 따끔한 한 방으로 만신창이가 되자 기회를 잡은 프랑스는 미국의 비호 아래 구 식민지 영역의 국가들을 완전히 포섭하려 했습니다. 토마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 샤들리 벤제디드의 알제리 등이 아직도 아프리카의 친서방화에 가열차게 저항하는 가운데, 비동맹기구의 오피니언 리더나 다름없는 유고슬라비아가 기구의 효능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능숙하게 "모름지기 서방으로 균형추가 쏠린 상황에서 소련의 이익을 맞춰준다"는 사고에 기반해 행동하려 했던 일행들은 밀카 플라닌츠 사바-드리나 공화국 대통령의 제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도구가 아닌 '비'동맹기구의 수장이 되어야 하며, 관성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실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얼른 정신을 차린 역전의 용사들은 전략을 재수립, 프랑스(그리고 영국)의 플랜에 맞춰주면서도 아프리카의 독자성을 지켜낼 작전을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반제국주의를 주장했던 유고슬라비아가 '그 누구보다 제국주의에 열심인' 프랑스와 제한적으로나마 합작하기 위해서는 밑작업이 필요했기에, 프랑사프리크 내에서 가장 큰 견제를 받는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와 주변국들 간의 반목과 불일치를 해소해주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다만 원래의 계획과 달리 '밑작업'과 '본 게임'은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프랑스 주도의 조직에는 죽어도 참가하기 싫으며 남아공 백인우월주의 정권을 지원하는 서구와 타협하는 것도 싫다는 상카라 대통령 이하 반서구세력의 입맛을 맞추어주려 영국-프랑스 대표단까지 참관하는 테이블을 마련했던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은 영국 외무상 프랜시스 핌의 폭탄 제안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안의 골자라 함은 쉽게 말해 1) 프랑코포니와 영연방을 포괄하는 단일경제통화영역의 형성(단일통화와 유럽통화단위(ECU)의 연동), 2) '백아프리카(White Africa, 남아공과 나미비아를 지칭하는 단어)'와 나머지 아프리카 간 상호 불간섭이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한 국가가 아프리카를 입맛대로 조종하지 못하게 되어 국가들의 자율성은 어느 정도 보장되겠지만,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반인도행위를 견제할 힘은 극적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었죠.
물론 영국의 대처 정권이 딱히 아파르트헤이트를 적극적으로 선호해서 이런 빅딜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유럽통합 과정에 딴지를 걸려던 대처 특유의 유럽회의주의(Euroskepticism)가 발동한 결과였죠. 이 타협안은 상카라와 무가베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합법화 및 만델라 석방을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거의 성사될 뻔 했으나, 남아공이 제안을 걷어차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국의 폭탄제안에 기겁한) 프랑스가 재빨리 유럽 6개국이 공동보증하는 서아프리카-중앙아프리카 단일경제권 형성 및 남아공 백인정권 지원 중단이라는 양보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상카라 등 좌익 지도자들을 일행들이 극적으로 설득해내면서, 아프리카 경제공동체(AEC)가 출범하게 되었죠. 이들은 비동맹주의와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친유럽기조를 따르는 기묘한 행보를 보였고, 비동맹운동의 취지대로 그 어느 쪽에도 일방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물론 실상은 유럽의 공동경제관리구역이었지만) 연합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프리카에서의 성공은 유고슬라비아의 외교적 영향력을 그 어느 때보다 신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비동맹기구가 실체를 갖추고 유고슬라비아가 냉전의 균형자로 거듭나는 동안 베이루트에서는 수니파 극단주의자(또는 PLO의 여당 하마스)에 의해 유엔 평화유지군 기지가 공격받아 2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 스타워즈 계획(SDI)과 플류스 계획이라는 허무맹랑한 발상을 내세우며 치킨게임을 벌여댔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고 서맨사 스미스 양의 소련 방문이 무산되는 가운데, 인도차이나에서까지 대리전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세계는 다시금 불길에 휩싸일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06. 백열상태(White Hot)
작금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최상의 경계심, 저항력, 강인함, 그리고 국가의 방위능력 강화에 대한 꺾이지 않는 관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전후(戰後)시대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수위의 긴장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동지들! 지금의 국제정세는 백열(白熱, накал), 완전한 백열의 상태입니다.
- 소비에트 연방 군수산업부 장관 겸 정치국 위원, 그리고리 V. 로마노프
1983년 10월 4일, 버마 공화국의 국부 아웅 산 묘소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버마를 국빈 방문하던 대한민국의 김종필 대통령을 노린 테러였습니다. 이 테러로 각료진 절반이 사망하고 김 대통령 역시 큰 부상을 입는 참상이 펼쳐졌죠. 테러를 실행한 것은 북한의 공작원들로 밝혀졌습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권한대행을 맡던 노신영 국무총리는 급하게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전쟁 분위기는 점점 가속화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미국과 소련은 당연히 기겁했습니다. 세계적 긴장이 전례없이 고조된 이 순간에 극동에서 전면전이 발생한다는 것은 20년 전 쿠바 사태보다 더 심각한 핵전쟁 위기가 도래한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그 무렵과 달리 지금은 미소 양국이 세계를 수십 번은 더 멸망시킬 만큼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북한 모두가 최고 경계태세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안보리 비상회기가 소집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역시 비상임이사국으로서 참석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양 진영의 치킨게임이 극에 달해 '물러서는 것'은 곧 냉전 패배를 의미하는 미친 세상에서, 비동맹기구의 명실상부한 수장 유고슬라비아는 마치 폭발물처리반이 폭탄을 해체하듯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합리적인 자세로 대화에 나서기에는 그동안 전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 냉전의 경계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양측의 의심을 확증으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했죠. 미국은 소련이 북한발 테러를 이용해 전방위 공세를 준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야금야금 재무장과 영토확장을 용인받으면서 전세계를 상대로 정복전쟁을 일으켰던 과거를 연상시켰죠. 반면 소련에서는 자신들이 몹시 수세에 몰려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애초에 북한 공작원의 테러는 자신들이 지시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때마침 NATO에서 계획 중이던 '에이블 아처 83' 훈련은 선제 핵공격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소련은 이 일을 빌미로 미국과 서방세계가 자신들에게 "죽음 또는 불명예"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건 조사 결과, 테러를 직접 지휘한 인물은 북한 조직지도부 선전국장 장성우와 조선로동당 국제비서 허담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김영주 등 최고수뇌부의 관여 여부는 매우 불투명했죠. 따라서 (이제는 연합의 최고 실무진에 오른) 일행들은 '꼬리자르기의 유용성'을 위해 소련과 중국에 거짓 정보를 퍼뜨렸습니다. 김일성이 직무를 수행하기도 힘들 정도의 사실상 유고상태이며(물론 6-70년대에 비해 매우 쇠약해진 건 맞는 정보였습니다) 북한 내부에서도 이번 사태에 몹시 당황해 비판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는(어느 정도는 맞는 정보였습니다) 내용이었죠. 두 공산열강은 이 정보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북한 관련 첩보와 대조한 뒤 이를 '사실'로 판단, 제각기 나름대로의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이번 테러사건을 해프닝으로 규정, 이 틈을 타 김정일을 실각시키고 친소주의자들을 물밑에서 지원할 계략을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소련은 미국과의 타협에 더욱 전향적인 자세를 갖추게 되었죠.
문제는 중국이 "최고지도자 유고사태 및 내부 결속력 약화"라는 메시지를 극심한 위기로 해석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방어적인 입장이었던 베이징은 이대로라면 북한 자체가 남한의 전방위 공세에 무너질 것을 우려, 선양군구를 압록강변으로 전진배치하고 군사력을 증파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의 군사행동을 조중동맹의 활성화로 해석, 오키나와에서 미군 전략자산들을 발진시켜 군산과 평택에 재배치했습니다. 누구 한 명의 명령만 있다면 한반도에서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날 기세였고, 다만 그 때와 달리 한반도를 둘러싼 세 강대국에게는 세계를 수십 번 멸망시킬 능력이 있다는 점만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같이 죽자"고 소리치는 이들은 대개 그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강대국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제안한 사라예보 회담을 못 이기는 척 수락했습니다. 남북한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5+1 회담이 되었죠. 앞서 유고슬라비아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김일성 유고, 북한 내부분열)가 과장된 정보였다는 점이 밝혀졌지만 대세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대표로 나온 그로미코 외무장관은 갑자기 북한의 정권세습 시도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북한 대표단이 당황하는 사이 중국은 이를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로미코의 '작심 발언'은 "북한 정권을 희생시켜 모두를 구하자"는, 미국을 향한 타협의 메세지였습니다. 공산권 국가의 외교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미국 대표단이 이를 중소결렬의 재림으로 오해했을 뿐이었죠.
논의가 평행선을 그리는 와중, 일행들은 면밀한 조사를 통해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이 (철저한 비공개로 진행된)의회 정보위원회에서 예산심의조차 거절당해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는 정황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소련의 플류스 계획은 공산국가 특유의 과시주의로 인해 어느 정도의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상태였죠. 애초에 공상과학에 가까운 SDI에 비해 "위성 궤도에 자탄을 흩뿌려 전세계 인공위성을 모두 박살내고 SLBM 전력을 강화한다"는 플류스 계획은 나름의 현실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즉 전면전이 발생할 시 미국은 우월한 정보 자산을 대부분 잃게 되고, 재래식 전력으로 공산권을 압도할 수 없게 되는 셈이었죠.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무조건 핵전쟁과 세계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은근히 미국과의 타협을 바라고, 중국은 한반도 북부의 완충지대 겸 영향권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습니다. 미국이 소련과의 타협을 받아들이고 미소 양측이 중국의 니즈를 어느 정도 맞춰준다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죠. 주인공 4인방은 즉각 미국 대표단을 이끄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아들과 달리, 아버지 부시는 외교적 타협의 미덕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답게 자유세계 국가의 군사독재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일행들의 정치관념을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그는 SDI-플류스 상호 포기(소련은 모르고 있었지만, 당연히 미국에게 훨씬 이득이었습니다)와 전략무기감축회의 개시, 중국의 북한 주도권 인정과 같은 유연한 사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유고를 촉매재로 한 3대 강대국들이 치열한 물밑 협상을 벌인 결과, 타협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습니다.
ㄱ) 중국은 인민해방군 선양군구 병력을 원대복귀한다.
ㄴ) NATO는 에이블 아처 83 훈련의 방식과 규모를 수비적인 내용으로 축소 및 변경한다.
ㄷ) 미소 양국은 핵평형과 ‘공포의 균형’에 의거한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i. 양측은 ABM조약을 재비준한다.
ii. 양측은 핵탄두의 수량과 위력, 배치 위치 등에 관한 군축조약 논의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개시한다.
iii. 양측은 한반도 내에서 핵물질 및 핵탄두를 유지, 생산, 보관, 이동하지 않도록 확약하며, 한반도의 완전하고 항구적인 비핵화에 동의한다.
ㄹ) 체약국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에 대한 안보리경제제재안에 동의한다. 제재의 해제는 북한 내부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 논의한다.
ㅁ) 모든 체약국들은 한반도의 두 정부와 그에 속한 시민들의 주권과 자결권을 재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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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밀약)
북한의 내부정치 문제에 관한 한 베이징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기로 한다. 사회주의의 해석 방식은 자율적이나 분명한 선을 지니며, 현 상황에 책임있는 자들은 공직에서 제외되거나 알맞은 처분의 대상이 된다.
1983년 10월 9일, 사라예보 협약(Sarajevo Accords)이 체결되었습니다. 약 70년 전 이곳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대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장소였지만, 지금은 상호 파멸을 막아낸 역사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협약은 공개조약인 1) 미-소 전략군축합의서와 2) 남북기본합의서 및 3)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중소 삼국 양해각서, 그리고 비공개 밀약인 4) 중-소 베오그라드 합의로 구성되었죠. 실제로 다음 날 선양군구 병력이 압록강 북안에서 차례차례 철수절차를 밟으며 협약의 이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다. 미 국방장관이 의회 청문회에서 “그럼 스타워즈 예산은 루카스필름에 줘버린거냐”는 의원들의 집중포화를 맞는 사소한 말썽이 있었지만 세계가 불타는 일이 사라졌으니 아무튼 모두(북한 지배층 제외)가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계는 가까스로 멸망을 피한 채 "우리 시대의 평화"를 향해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이 시작되고 중국이 인민지원군 부활(즉 '주조선 중국군')이라는 강수를 두어가며 북한을 안정화시키는 동안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세계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밀약을 맺은 군부가 세계 멸망에 일조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종필 대통령이 야당과 손잡고 (자신이 파괴했던)한국의 민주주의를 되살린 끝에 남북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재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 4인방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양보와 타협의 미덕을 유지하며 세계의 균형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멸망이 예정되었던 연방은 연합으로 재구성되어 세계 멸망의 문턱에서 인류를 구해낼 수 있었고, 언제까지고 독자적인 깃발을 휘날리며 서있게 된 것입니다.
Epilogue: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
프라뇨 라디치, 스보보다 예디나, 율리야나 크네제비치, 다보르 야르니. 유고슬라비아의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이 4인방은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격렬한 분쟁의 시대인 20세기의 마지막까지 세계체제의 조정자이자 설계자로 남았습니다. 연합 의장과 구성국(사바-드리나, 슬로베니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1993년 이후)불가리아) 수반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하며 국가경제와 민생에 역점을 두고 각종 정책들을 펼쳐나갔다면, 4인방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공식-비공개 위원회는 발칸 영역을 넘어 전세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갔습니다. 그 덕에 80년대의 신냉전 시대는 90년대의 탈냉전-데탕트 시대로 이행할 수 있었죠. 물론 전세계인들이 이 '세계 평화의 수호자'들을 입 모아 칭송하고 무수한 악수 요청을 건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외교관들 또는 국제관계학을 연구하는 이들이야 그들의 활약을 편린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겠습니다만, '수호자들'은 굳이 전면에 나서 박수갈채를 받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신천년기(New Millenium)의 여명이 밝아오는 지금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양대 축, 그리고 중국이라는 제3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톱니바퀴는 사라예보라는 균형추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죠. 앞으로의 세계가 계속 평화로울 지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최악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것을 해결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아나요? 또 다른 '4인방'이 혜성처럼 나타나 다음 세기의 위기를 해결할 지혜를 발휘할 지를 말입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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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행이나 개인사정으로 인한 피로(…)가 겹치지 않았다면 내정 이벤트의 비중이 조금 더 늘어났겠지만… ㅋㅋㅋ
덕분에 프리메이슨 그림자 정부 외교승리 엔딩이 튀어나왔네요(?)
오... 수고하셨습니다. 오랫만에 확실한 해피엔딩이네요 ㅋㅋㅋ...
예비 차기작(?) 유럽 지도입니다. 하게 될지 어떨지는 생각해봐야겠지만...
(수정)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근데 불가리아는 왜 가입했냐 ㅋㅋㅋㅋㅋ
수고하셨습니다~!
불가리아까지 있는 모습을 보니 불가리아 제국이 눈에 아른거리는군요(?)
차기 예비작을 보아하니... 디플로머시..아니네, 빅3의 시대네요(?) 저도 하게 될지 봐야겠지만, 어떤 시나리오일지 기대됩니다 ㅋㅋ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랑 짝짝꿍하는게 맞지않나 싶지만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