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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얼리스트 100 원문보기 글쓴이: 리얼리스트 머슴
씩씩한 희정 씨
서른일곱 이희정, 이제 한 살이에요
- 네, 장한평역이요. 그리로 가겠습니다.
‘할 말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한마디에 전화를 하고 말았다. 창신동 여성봉제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쓴지가 훌쩍 반년이 지났다. 그저 글감이 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너무 쉽게 덤빈 일이 내게 너무도 큰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인터뷰가 이어지고 글이 쌓여가며, 나는 멈춰야한다는 다짐을 숱하게 했다.
아침마다 신문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오는지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인터뷰를 하고 만난 사람은 누구하나 허튼 삶이 없다. 누구하나 지워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삶뿐이다. 세상에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이들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진짜 주인공들이다. 어느 순간 글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이 지워졌다.
글이 아닌 마음을 그리고 싶었다. 삶을 부둥켜안고 싶었다. 맑은 눈물이 되고 싶었고, 그 환한 웃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멈추고 싶다. 나의 글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 한 장도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리 쉽게 글로 쓴다는 게 미안하고 죄스럽다.
‘이제 그만 하겠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할 말이 참 많은 사람이 있어요’라며 내 말을 가로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미련하게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8시30분에 일이 끝난다고 한다. 약속장소인 지하철 5호선 장한평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다. 잔업을 하고 있으니 저녁은 먹었겠지. 조용한 찻집에서 인터뷰를 하면 되겠다.
어떤 사람일까. 할 말이 많다고 했으니, 마흔 중반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아마 머리는 보글보글 파마를 했겠지. 염색도 했을 거야. 흰머리가 많을 테니 진갈색 염색을 했을 것이다. 눈가에 주름살을 그려본다. 몇 개를 넣어야 할까. 손은 아마 클 거야. 삶이 굴곡질수록 손이 클 수밖에 없잖아. 손으로 벌어먹어야 하니.
온갖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신호등이 바뀐다. 분홍빛 챙 긴 모자를 쓰고 자주빛 블라우스에 청치마를 입은 사람이 씩씩하게 걸어온다. 꼭 나를 만나러 걸어오는 것 같다. 내가 지금껏 상상하고 있던 모습과 어느 한 곳도 같지 않은 사람.
- 이희정 선생이세요.
내가 그를 왜 이희정이라고 생각하며 엉거주춤 일어나서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 네. 안녕하세요.
이희정이다. 아무리 나이를 부풀려도 마흔이 도저히 될 수 없는 얼굴이다. 이게 아니잖아.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식사는 하셨어요.
- 아뇨.
난감해진다. 당연히 밥을 먹었으리라 생각하고 찻집만 찾아봤는데. 나는 이미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 식당을 찾아보았다. 술집은 많은데 밥집은 없다. 골목을 헤매다 밥이 있음직한 술집을 찾아들어갔다. 구석자리에 앉아 가격표를 보니 만만찮다. 나는 이미 저녁을 먹었지만 2인분을 시켰다.
-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이게 뭐람 말인가. 첫 질문으로 나이를 묻다니. 꼬이기 시작한다. 내 인터뷰가 사는 이야기를 듣는 거라 나이는 물을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나이부터 물으며 시작하는 것은 상대방의 삶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지 못한다. 궁금한 게 있어도 될 수 있으면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 끊겨 침묵이 길어져도 그것마저 그 사람의 삶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는데. 하지만 너무 알고 싶었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유일한 단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희정은 서른일곱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 명선과 4학년 아들 명훈이의 엄마다.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니 할 말이 전혀 없을 것 같다. 한 번도 기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처럼 눈은 초롱초롱하다. 야무진 입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당당하게 말할 것 같다.
이희정의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다. 어려움 없이 자라온 희정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아버지가 폐병을 얻고 나서부터다. 어머니는 품팔이를 다니며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희정은 동생의 손을 잡고 광주까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오갔다. 어머니의 나이 스물일곱, 남동생의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는 가족의 염원을 뒤로 하고 돌아가셨다.
스물일곱의 어머니는 선택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남겨둔 것은 가난과 보이지 않는 미래였다. 개가를 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는 동생 셋을 더 낳았다. 농사를 지으며 다섯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희정은 집안 살림을 도맡다시피 해야 했다. 남동생도 학교 가는 날보다 논과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중학교를 마친 희정은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어머니께 말을 하였다. 숟가락 하나를 덜어주는 게 어머니를 돕는 일이고, 한 푼이라도 버는 게 남동생이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일천구백팔십육 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서울로 온 열여섯 희정. 몸무게가 29킬로다. 요즘 초등학생의 몸무게보다 적게 나갔다. 삐쩍 마른 몸으로 희정은 제품공장에서 미싱을 배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코피를 흘렸지만 돈을 번다는 목적하나로 버텼다.
구만 이천 원을 받아 팔만 오천 원을 저축하였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리 힘들어도 잔업과 특근을 빠지지 않고 했다.
공장 옆 건물에 있는 기숙사에서 잠을 잤고, 하루 세끼를 공장 식당에서 먹으며 살았다. 돈은 버는 것이지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공장에서는 억척스럽고 야무지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숙사에는 공동 세면장이 있다. 겨울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아침 7시부터 30분간 나온다. 이 시간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씻어야 했다. 7시 전에 출근하는 사람이나 전날 야근을 하고 10분이라도 더 자고 싶어 뭉그적거리는 사람은 한겨울에 찬물로 씻어야 했다. 공장에서 따뜻함을 찾기는 이리도 차가웠다.
기숙사라도 있는 곳은 천국이다. 작은 공장은 더욱 비참하다. 공장에 합판을 걸쳐 다락방을 만들고 그곳에서 자야했다. 다락방 아래에서는 하루 종일 미싱이 돌며 뜨거운 열기를 위로 올린다. 여름에 다락방에 올라가면 한증막처럼 땀이 주르륵 타고 흐른다.
힘든 날이 거듭될수록 고향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깊어갔다. 사춘기였다. 명절에도 집에 내려가지를 않았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개가를 했다고 했지만, 그 나이에 내가 든 생각은 엄마를 위한 거지, 어떻게 우리를 위한 거냐며 원망을 했어요. 엄마로서 해 준 게 뭐 있냐, 엄마 편하려고 간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며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아예 고향에도 가지 않고 지냈어요.”
팔십년 대 후반에는 민주화의 열기와 함께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희정이 있었던 가리봉공단도 비껴가지 않았다. 공장 언니의 소개로 야학을 다니게 되었고, 야학에서 공부만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게 되었다. 지역의 노동단체에 가서 사물놀이도 배우며,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는데 뒤에서 작은 힘이라도 되고자 했다. 언니들을 따라 집회하는 곳에도 가봤고, 최루탄을 흠뻑 뒤집어쓰고 울기도 했다.
희정은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는 공장으로 옮긴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조합을 만들 때 한 표라도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여린 몸으로 올라온 희정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몸이 아파 고향에 내려가게 된다. 요양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곳으로 다시 가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분들이 생각나요. 참 많이 알고, 말도 잘하시고, 헌신적인 분들이었어요. ‘남부노련’인가, 그때 위원장과 놀러가서 찍은 사진을 가끔 꺼내보곤 해요.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참 궁금해요.”
- 아, 집이 어디세요?
시간을 보니 인터뷰를 시작한지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두 시간이 다 되어갔다. 아직 이야기는 반도 되지 않았는데. 한창 술집이 무르익을 시간에 들어와 술은 시키지 않고 밥만 먹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주인의 인상도 곱지가 않다.
- 광명이에요.
- 광명이요? 지금 가도 엄청 늦겠는 걸요.
-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어떡하지. 여기서 인터뷰를 접어야 하나. 다시 시간을 잡는 일도 쉽지 않다. 그때 광명에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전화를 했다.
- 지금 한 잔하고 있는데, 광명에 와서 전화해라. 늦지 말고.
- 댕큐.
지하철을 타고 광명으로 간다. 가는 길을 동행하며 못다 한 인터뷰를 이어간다. 희정은 지하철 소음을 누르고 씩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몸을 추슬러 다시 미싱 일을 시작한 그에게 프러포즈를 한 직장 동료가 생겼다. 의지할 곳 없던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는 동료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고, 살림을 시작했다.
둘 다 배움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다. 젊은 몸과 미싱 기술이 전부였다. 둘이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피우며 단칸셋방에서 잠을 잤다.
신랑은 미싱 기술을 가지고 자그마한 공장을 시작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수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차츰 사업이 어려워졌다.
희정은 임신을 하였고 첫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유를 먹이고 눕힌 아이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이는 병원까지 가지도 못하고 숨을 멈췄다. 태어난 지 50일만이다.
공장도 문을 닫아야 했고, 첫 아이도 떠났다. 하지만 희정은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너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라며 희정을 일으켜 세웠다.
쌀독은 비었고, 남편은 꽁초를 주워 담배를 피웠다. 다시 미싱을 밟으며 쓰러진 남편을 다독였다. 먹고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희정은 임신을 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아이를 낳을 수가 있다고 한다. 수술비는 희정네 가정에 만만치 않은 돈이었다. 임심 칠 개월 때까지 공장에 다녔다. 남편의 월급은 몇 달째 체불이 되었다. 병원비가 모이기는커녕 희정이 벌었던 돈마저 살림살이로 쏙쏙 빠져나갔다. 한 푼 없이 병원으로 가야했고, 남편은 돈을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야 했다. 겨우 빚을 얻어 병원비를 치루고 나왔다. 남편이 다니던 공장은 문을 닫았다. 결국 밀린 월급은 받지 못했다.
둘째를 낳고는 채 젖도 떼기 전에 세 살 난 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집 옆에 있는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점심 때 집에 들려 밥을 차려주고, 다시 공장에 가서 미싱을 했다.
남편은 돈과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점차 돈 곁에 가는 걸 두려워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으니 의욕을 점점 잃은 모양이다. 직장도 들쭉날쭉하였다.
희정은 십 원이라도 싼 두부를 사기 위해 몇 정거장을 걸어 재래시장을 다녔다. 양 손에 장바구니를 가득 든 날도 버스를 타지 않았다. 몇 십 원 싸게 사려고 왔는데, 차를 타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희정이 삶에 억척스러워질수록 남편은 희정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다. 직장에 다니는 것조차도 싫어했다. 같은 기술을 가졌기에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 생활은 감옥과 같았다. 웃어도 간섭을 하고, 동료와 농담을 해도 야단을 친다. 희정은 남편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기에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힘든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남편의 벌이가 없으면 희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진다. 심지어 굶어죽더라도 일을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다. 희정은 희망을 잃어갔다. 하지만 남편을 잃는 것은 더욱 싫었다. 결국 희정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다.
설상가상이다. 남편은 차마 이곳에 옮기기 힘든 일을 벌려 구속이 되었다. 희정은 가진 것이 없으니 손으로 빌고 발로 뛰어다니며 피해자들을 만나 합의서를 받았다. 그 덕에 남편은 석방되었다.
석방이 되자 남편도 달라졌다. 희정은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다. 몇 년 고생하면 빚도 갚고 생활도 안정되리라는 희망을 갖았다.
어느새 광명 철산역이다. 마무리를 해야 했다.
- 신랑은 요즘 뭐 하세요?
- 이혼했어요. 올 3월에.
- 네? …, 괜한 걸 물었네요. 죄송해요.
- 괜찮아요. 나는 괜찮은데, 죄송하다고 하니까 이상해지네요. 다른 사람 시선은 어쩔까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냥 편하게 말한 것은.
이혼이라는 말에 왜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죄송하다고 했을까. 그렇게 말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또 다른 편견으로 이희정을 재단한 거다. 이혼한 이희정과 지금껏 나와 이야기한 이희정은 같은 이희정인데 말이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 지 막막했다. 내 입은 닫히고 말았다. 씩씩한 이희정이 입을 연다.
석방된 뒤 둘은 함께 취직을 했다. 공교롭게도 취직한 공장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공장으로 함께 옮겼다. 이번에는 사장이 여성이었다. 보통 성격이 까다로운 게 아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간섭하였다. 10원 싼 물건을 사려고 시장을 헤맸던 희정처럼 공장 살림을 운영했다. 남편은 참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참자, 그래도 월급은 제대로 나오니 참자고 했으나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었다.
정말 힘들게 정말 어렵게 희망의 밑불을 다시 지피려고 했는데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이였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일이다. 남편은 동반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정말 죽고 싶었어요. 죽을 생각을 하니 자식도 생각나지 않는 것 있죠. 우울증이 깊어지고 원형탈모가 생기고 먹으면 소화가 안 되요. 한의원에 갔더니 모든 맥이 죽어가는 상태래요. 기쁜 날보다 아프고 기억하기 싫은 날만 계속되었어요.”
이혼을 결심했고, 이혼을 했다. 아이들을 희정이 키우기로 했다. 양육비는 받지 않기로 했다. 신랑이 진 빚은 희정이 모두 갚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위자료도 줬다. 남편이 고마웠다.
아이 둘과 단칸셋방, 그리고 희정만 남았다. 하지만 이제 희망이 피어난다. 지금껏 자신의 미싱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배우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이제는 다르다고 한다. 나 이희정이 세상을 뚫고 나가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기술이라고 말을 한다. 아이들과 이희정에게 희망을 지펴 줄 값진 기술이라고 주장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이 일하는 미싱을 보여주었다. 엄마의 기술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 기술로 너희들을 밝고 희망차게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이들도 좋아했다. 엄마가 이토록 기운차고 기쁜 모습을 여태 보지 못했다. 엄마가 너무 씩씩해서 좋단다.
이희정은 늘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미안해하며 살았다. 자식들에게 엄마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 엄마가 힘든 것도 표현하고, 기쁜 것도 표현한다. 희정의 말처럼 ‘이희정은 이제 1살로 다시 시작’하는 거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 목표를 적어 책상 앞에 붙였다. 희정도 당연히 썼다. ‘영어회화 배우기, 일주일에 책 1권씩 읽기, 수영배우기.’
희정은 어려서부터 물을 무서워했다. 통나무를 잡고 물놀이를 하기도 했지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고, 수영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로 남겨두었다. 희정의 수영배우기는 자신의 인생에서 불가능의 영역을 없애겠다는 결의일 거다.
다시 웃음을 찾았고, 다시 야무지게 살고, 다시 씩씩하게 살아간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 씩씩한 희정씨를 보내고 돌아서야한다. 이제 잠을 자러 가야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술에 취했는지, 잠에 곯아 떨어졌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미 버스도 지하철도 끊겠다. 택시비를 아무리 적게 가늠해도 2만원이 훌쩍 넘을 거리인데, 지갑 안에 돈은 달랑달랑하다. 난감하다. 어디서 자야 하나.
난감한 것은 또 있다. 이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다. 내가 이희정을 그릴 수 있을까. 씩씩한 이희정을 그릴 수 있을까.
이희정의 이야기는 씩씩함보다는 이혼으로 읽힐 것이 분명하다. 열여섯 희정이 서른일곱 희정이 될 때까지의 씩씩함보다는 이혼이라는 한 부분에 눈이 갈 것이다.
이혼을 다루는 영화, 드라마, 소설을 보면 답답하다. 이혼을 비참한 종말이나 질타하는 부정의 눈으로 그린다. 한쪽에선 이혼을 하여 당당한 여성으로 태어나는 긍정의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들이 부딪히는 사회적 편견과 숱한 걸림돌에 대해서는 애써 감추고 있다. 상업성만이 가미되어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 편견과 걸림돌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써야하는 나 자신도 그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쓰지 말자.
인터뷰를 하고 일주일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써야 한다와 쓰지 말아야 한다 사이에서 고민만 하였다.
시를 잡고 문학이네 하며 헤매고 있을 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보라고 길을 찾아 준 누님한테 마침 전화가 왔다. 고백을 했다.
- 누나 너무 힘들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너무 아퍼. 이걸 글로 쓴다는 것은 더 힘들어. 이제 그만둬야겠어. 이토록 소중한 사람의 삶을 내가 감당한다는 게 힘들어.
- 그러니까 해야지. 시인도 소설가도 수필가도 못하는 일을 니가 하고 있는 거야.
다시 누나에게 물었다. 인터뷰 내용을 이야기 했다.
- 그 사람이 이혼 1년차라서 그래. 이혼 15년차인 내 이야기를 쓰면 편할 거야. 들은 그대로 쓰면 돼. 니가 이야기 하려고도 하지 말고, 무엇을 던져주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의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기기만 해. 편견과 걸림돌도 그 분이 극복할 과제야. 읽는 사람의 한계도 지금의 우리 모습이고, 그 분을 씩씩하다고 믿지 못하는 니가 문제 아니니?
맞다. 이희정은 씩씩하다.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이희정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이희정은 그마저도 씩씩하고 즐겁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두 번 결혼을 하고, 두 번 이혼한 선배가 있다. 이혼할 때마다 자식의 손을 잡고 국립묘지를 찾아가 묵념을 했단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도 있는데 이깟 일에 기죽지 말고 살자. 일 년 전 이혼을 한 뒤 네 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인도로 떠나야 했던 친구를 공항에서 배웅하던 기억이 살아난다. 얼마 전 이혼을 하고 내게 전화를 해서, 나 씩씩하게 살 거야라며 자기체면을 걸던 후배의 취한 목소리도 맴돈다.
- 유명한 작가님이 되셔야죠. 그래야 제가 작가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자랑을 하죠.
- 무슨 말씀을. 제가 이희정이라는 최고의 패션기술자를 최초로 인터뷰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해야죠.
첫댓글 씩씩한 희정씨는 아주 행복할거예요. 걱정을 털쳐버리고 다함께 차차차! 칠순이 다 되어 가는 우리 엄마도 아직 미싱일을 하시는데요.^^ 가끔 청계천 이야기를 하시면요, 재미있어요.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저는 듣는 이야기가 힘든데 엄마는 정말 환하게 웃으면서 행복하게 얘기하세요. 희정씨도 아마 그러지 싶어요.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과 함께 피어난 희망. 아마 희정씨가 이혼에 다다랐을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고 내린 결정이었을거다. 그러니까 희정씬 정말 괜챦을걸꺼야.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도 새로운 희망을 가꿔가는 희정씨가 참 예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