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소재로 한 역사 드라마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MBC의 주몽은 절찬리 종영했고 SBS 연개소문은, 비록 숱한 잡음이 있었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며,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이야기가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하다 종용했다. 주몽이 종영되자 MBC 는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일생을 그린 MBC태왕사신기를 제작방영했다. 중국의 파상적 동국공정에 반발한 국민정서의 역풍을 타고 연일 인기몰이에 나선 이들 드라마는 자라나는 세대와 사실(史實)에 목마른 성인 시청자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교과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영상은 활자보다 국민 접근성에 있어 그 매체의 특성상 본질적 우월성을 가진다. 따라서 TV 드라마가 갖는 지식 전파자로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방송 3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차원에서 고구려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무척 가상한 일이며 마땅히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BC 37년 동명성왕 주몽(또는 추모)에 의해 창업돼 서기 668년 멸망하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했던 부강한 나라였다.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진 고구려는 서토(西土, 중국)의 여러 나라와 맞서 싸우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당당한 나라로 각인돼 있다. 우리는 이런 역사물을 통해 과거를 공부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 민족사학의 선구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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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實 무시, 국민 무시 문제는 이들 드라마에 고증을 무시한 틀린 사실(史實)이 버젓이 섞여 방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드라마도 픽션인 까닭에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며 재미있는 허구의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다. 극의 구성도 충분히 가공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 연대기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 그와 연관된 사건들, 이미 검증이 끝난 중요한 팩트(fact)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 팩트들이 마구 가공되면서 지금 각급 학교의 국사 교사들은 엄청난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양만춘이 아니라 연개소문이 아니냐는 둥,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조영이 앞장섰냐는 등 학생들은 드라마에 나온 내용을 사실인 양 착각한 나머지 교사의 말이나 교과서의 내용보다 드라마의 내용을 더 신봉한다. 교사에게 묻기라도 하는 학생은 차라리 나은 편이다. 만약 드라마에 나온 잘못된 사실이 대입 수학능력시험이나 국가 공인 시험에 나온다면 그 피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드라마 작가들이 ‘원작(原作)’ 없이 대본을 쓰는 것도 문제다. 이들은 내친 김에 드라마의 내용을 바탕으로 ‘원작’을 만들어 책장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역사 소설은 애정소설이 아니다. 역사 소설은 사서(史書)에 대한 정확한 학습과 사실에 대한 확인, 현지 취재 등 십년 아니 수십 년 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되는 거대한 결과물이다. 최근 ‘대발해’를 발간한 김홍신씨는 20년간의 고증기간을 거쳤다고 하고, 김 훈 선생은 ‘칼의 노래’를 쓰면서 치아가 8개나 빠졌다고 한다. 역사소설은 절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드라마 작가들은 하루빨리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풍부하고도 독창적인 극본을 쓰려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드라마에 나타난 잘못된 사실은 무엇일까.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도 없지만 국사 교과서나 정사에 반하는 내용, 그 중에서도 자라나는 세대들의 역사 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만 열거해 보기로 하자. 우선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대조영부터 살펴보자.
뒤죽박죽 드라마 대조영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매국노 집단들이 지나치게 미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연시되고 있기도 하다. 혹은 과장되게 사대화(事大化)하는 경향도 있다. 이럴 경우 시청자들은 스스로 우리 역사를 비하하게 되며 패배주의로 빠질 가능성도 있다. 또 드라마에서 대조영의 출생년도를 너무 일찍 설정했기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드라마는 대조영의 출생년도를 서기 645년(실제는 663년으로 추정)으로 설정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 대조영은 이미 24세의 청년이 되는 셈이다. 고대 및 중세시기에 15세는 성년으로 인정하는 나이였으므로 24세라면 충분히 장수의 직을 갖고 활약할 수 있었다. 드라마도 이에 맞추어 고당 전쟁의 영웅으로 대조영을 묘사하며 극을 전개했다. 그러나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어디에도 대조영이 고당전쟁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이렇듯 드라마 대조영은 역사적 인물의 연대기가 뒤죽박죽돼 무엇인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구분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걸사비우는 대조영의 의제(義弟)가 아니다 드라마에서 걸사비우가 대조영의 의제로 나온다. 이는 매우 잘못된 설정이다. 신당서에 대중상이 696년 요서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걸걸중상(대중상)을 ‘진국공’으로 책봉해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는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같은 반열에 있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걸사비우를 대중상의 동료나 의제 정도로 처리했어야 했다.
설인귀는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졸장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당 태종에 의해 발탁되어 나중에 안동도호까지 역임했지만 사료에 나오는 그의 활약상은 매우 초라하다. ‘삼국사기’에 이르면 645년 고당전투에서 잠깐 승리했을 뿐 658년 고당전투에서 고구려에 크게 패한 것으로 기술된다. 물론 고구려의 패색이 짙어지는 667년과 668년 고당전쟁에서는 당군이 승리했다. 하지만 그 얼마 후 675년 신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으며 676년에 신라와의 기벌포 전투에서도 서전은 승리했으나 결국 신라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게다가 설인귀는 평양과 신성에만 머물지 않고 당나라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와 있듯 설인귀는 670년 티벳의 총사령관 논 흠릉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10만 대군이 전멸하는 대패를 당했다. 게다가 ‘구당서’에 이르면 설인귀는 말년에 광서성 상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 보면 그는 675~6년 나당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숙청당했을 공산이 크다. 따라서 그가 안동도호를 계속 역임했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점으로 봐도 드라마에서 나온 식의 거물이었을 확률은 거의 없다. 또한 적국의 장수를 사실과 다르게 미화하는 것 또한 큰 문제다.
제1차 고당전쟁(645년)의 요동성주는 고사계가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당의 요동성주로 고사계가 나온다.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건너가 하서군의 사진교장이 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고선지는 20세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 지역으로 출전하기 시작해 755년 모함에 의해 40여세의 나이로 죽는다. 요동성은 고구려에서는 평양성 다음의 큰 성으로 나이가 최소한 40대 중반의 욕살이 성주를 역임했을 터이다. 드라마의 설정대로라면 고사계는 730년경 130세의 나이에 20세인 아들 고선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안서로 출정했다는 말이 된다. 요동성주로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당의 강하왕 도종은 고구려에서 죽지 않았다. 드라마 대조영에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은 안시성 전투 후 퇴각하는 당 태종을 구하려다 연개소문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설정됐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화왕 도종은 이후 설연타 정벌에 참가한 후 서기 653년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무고에 의해 상주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사료에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제2차 고당전쟁, 방효태 총관을 5세인 대조영이 죽였다? 당군의 총관 방효태는 서기 662년 7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쳐들어 왔다 연개소문에게 대패해 13명의 아들과 함께 7만 군사가 전원 죽임을 당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수대첩이다. 한편 평양성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던 소정방은 방효태의 패전 소식에 놀라 김유신이 배달해 준 쌀로 밥을 지어 먹고 황급히 퇴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총관 방효태가 설인귀의 일개 부장으로 나온다. 설인귀는 이미 658년 고구려 전투에서 패했기에 이 전투에는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한낱 무명의 장수였을 뿐이었다. 별 다섯 개짜리 원수급 사령관이 별 두 개짜리 소장의 부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이때 대조영의 나이는 5세 정도의 유아였을 것인데 방효태를 죽인 장군으로 나온 것은 무식의 극치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663년 10월쯤 죽은 것으로 보는 게 요즘 역사학계의 견해다. 드라마에서는 연개소문이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는 것으로 나오는 데, 어느 사료를 보더라도 그가 설인귀의 독화살에 맞았다는 기록은 없다. 연개소문의 지위는 태왕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한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였다. 그런 그가 당나라 일개 장수와 맞서 싸웠다는 가설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실 연개소문이 그와 맞닥뜨렸을 확률마저도 거의 없다. 고구려를 당에 비해 너무 작은 소국으로 바라본 사대적 시각에서 나온 오류이다.
할아버지 연남생이 소녀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었다? 드라마에서는 남생이 대막리지 취임 전후의 시기에도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고 청혼하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큰 아들 남생이 국내를 순시할 때 자신의 아들 헌충이 남건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다른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남생의 아들은 이미 살해를 당할 만큼 장성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동생도 사신을 갈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연남생은 당시 유부남이자 장년이 아니라 노년의 시기로 봐야 옳다. 그런 연남생이 젊은 공주 고숙영에게 연정을 품고 결혼을 청했다는 설정은 사실에 배치된다.
의형제까지 만들면서 왜 친동생을 버렸을까? 대조영에게는 친아우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대야발(大野勃)’로 훗날 그의 후손은 발해 10대 왕인 선왕(宣王) 대인수가 돼 발해의 왕계를 이었다. 그는 특히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연대기로 유명한 단기고사를 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버지 뻘인 걸사비우와 흑수돌을 대조영의 의형제로 만들어 드라마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정작 역사적 사실에 드러난, 그리고 발해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대야발을 누락시킨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대조영은 검모장-고안승 정권에 참여한적이 없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 일가는 영주로 옮겨 기거했다’고 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군은 고구려의 주요 인물들을 상당수 당나라로 끌고 갔으며 이 중 일부는 요서 영주에 정착했다. 이 때 대씨 일가도 영주에 정착했다고 보아야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비슷한 시기, 지리적으로 정반대쪽에 위치한, 황해도 지역에서 일어난 검모잠-고안승 정권의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중상-대조영 부자를 등장시킨다. 그리고는 검모장과 고안승의 간에 벌어진 알력 싸움의 최대 피해자가 대조영 세력인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대중상 일가는 시간과 지리학적으로 검모장-고안승 정권에 도저히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도 전무한 상태다.
보장태왕은 설인귀의 부하가 아니다 고구려의 마지막 태왕인 보장태왕은 677년 요동주 도독인 조선국왕으로 부임한 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그 4년 후인 681년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공주로 유배됐다. 조선국왕이 된 것도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 사이에 이간 책동을 벌이기 위한 허수아비술책일 따름이다. 하지만 태왕인 그는 죽는 날까지 당당했다. 그런 그가-비록 고구려 부흥운동을 위해 일부러 속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당나라 일개 졸장인 설인귀의 부하로 나온다는 설정은 역사 왜곡을 넘어 보장태왕에 대한 모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 베낀 드라마 연개소문SBS 연개소문의 경우 MBC의 주몽과 달리 정통사극을 표방하였기에 사태가 보다 심각해진다. 이 사극의 대본 작가 이환경씨는 연개소문 방영에 앞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기획 드라마”라며 기염을 토했다. 이 말은 그가 고증에 근거해 자주적인 한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기 위한 대본을 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드라마 연개소문은 우리에게 흔히 삼국지로 알려진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베낀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대학자 기대승이 선조 임금에게 아뢰기를 “중국의 삼국지는 믿을 수 없는 자가 쓴 나쁜 책”이라 했다. 과연 이런 대본을 가지고 중국의 음흉한 술책에 맞설 수가 있겠는가? 우리 삼국의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훌륭하다. 굳이 저들의 책을 베끼지 않더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것이 우리의 고대 역사이다. 연개소문 드라마는 비록 종영이 됐지만 그에 나타난 각 사건과 장면의 진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갇혀 있었고 안시성의 군사들은 굶주림에 갖은 고생을 한 것으로 나온다. 또 안시성을 공격하는 당나라의 무기로 포차가 등장했다. 알다시피 안시성 전투는 제1차 고당전쟁의 끝맺음 전쟁이다. 그 당시 연개소문은 평양성에서 군사들을 총 지휘하고 있었으며 고정의 고연수 고혜진 등의 장수에게 15만의 군사를 내줘 안시성 옆에 있는 주필산으로 보냈다. 어떻게 일국의 총 지휘관이 조그만 안시성에 갇혀 있었겠는가? 그 어떤 사료에도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거나 안시성 안에 연개소문이 갇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더구나 성주인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은 풍부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 안시성은 5만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산성으로 요동성과 같이 식량의 보급처였다. 게다가 안시성 공격에 포차가 등장했는데 안시성은 험한 산위에 있는 산성으로 평지형 공성무기인 포차는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중상이 130세에 발해를 세웠다? 대중상(대걸중상)은 대조영의 아버지로 서기 696년 요서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일으켜 만주 동모산에 발해를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수 문제가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며 위협하는 시기인 서기 600년에 30-40세 쯤 되는 장군으로 나온다. 그러면 대중상은 696년 나이 130-140세에 유민들을 이끌고 봉기했더란 말인가? 대중상은 보장태왕이 당나라에 잡혀간 후 요동주 도독인 조선국왕으로 봉해지는 677년에 청장년의 나이(35-40세)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을지문덕과 강이식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드라마에선 을지문덕 장군과 강이식 장군이 동 시대 사람으로 나이도 비슷하게 나온다. 또 1차 고수전쟁에서 두 사람 모두 공을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강이식은 제1차 고수전쟁 때 활약한 사람이고 을지문덕은 제2차 고수전쟁(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1차 고수 전쟁 당시 을지문덕은 강이식 장군의 부관 정도인 젊은 장교로 나왔어야 했다. 아니면 을지문덕의 출현을 제2차 고수전쟁으로 미루어야 했다. 이 대목에서 잠깐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이 있다. 드라마에서 을지문덕 군영의 문지기 장수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며 왕을 제지하는 컷이 바로 그것.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왕은 국군의 최고 통치권자이다. 특히 영양왕은 수나라와 4번 싸워 모두 이겼을 정도로 강단 있고 전략이 뛰어났으며 훌륭한 태왕이었다. 을지문덕은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다. 진짜라면 을지문덕을 포함해서 그 문지기 장수는 3족을 멸해야 했다.
죽은 귀신과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연개소문 드라마에 나오는 주요 인물의 나이는 서력 600년을 기준으로 연개소문이 17세 쯤, 신라의 김유신이 18세 정도, 그의 딸인 문희(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와 보희가 15-6세,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 16세, 대걸중상이 30~40세 쯤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연개소문은 비록 여러 견해가 있지만 서기 605-17년 쯤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에는 이설이 없다. 알다시피 수 양제는 604년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후 612년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 유명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그 때의 일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연개소문은 수 양제의 아버지인 수 문제 때부터 등장해 활약을 펼친다. 김유신의 출생년도는 595년, 김흠순은 599년, 문희와 보희는 608년 어귀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열왕 김춘추는 604년생. 드라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걸음마를 뗀 아이가 청장년으로 나와 이미 죽은 귀신들과 쌩 쇼를 벌이고 있다. 606년에 죽은 미실이 김유신의 애인 ‘천관녀’의 수양어머니로 나온 게 대표적인 사례다.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몸종이나 적수가 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동부 대인 연태조의 아들로 귀하게 태어났다. 그는 불과 10대 초반의 나이로 벼슬길에 올랐을 정도로 화려하게 성장했다.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하인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김유신이 10대 중후반이었던 시절 연개소문은 태어나지 않았거나 갓난아기였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연개소문이 신라의 화랑 김유신의 하인이며 그의 여동생 보희를 사랑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김유신을 높이며 연개소문을 비하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왜(倭)는 백제를 침범한 적이 없다 드라마에서는 제1차 고수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가 천하의 제국들을 모아놓고 복창을 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강이식 장군은 백제를 침략하는 왜의 사신을 준절히 꾸짖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아니 ‘일본서기’ 또 ‘수서’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백제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무령왕의 동생인 남백제왕 사아가 그 당시 왜에서 폭정을 일삼던 가야계의 대화국왕을 축출하고 왜를 통일해 계명왕(계이타이천황)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전부터 왜는 백제의 속국 혹은 분국(分國)이었다.
설인귀가 연개소문과 1대1 대결을 했다? 드라마에서 설인귀는 만고의 영웅으로 나온다. 대조영 드라마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대본 작가들은 어떤 영문인지 침략자들을 미화하기에 바쁘다. 이는 스스로 우리가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패배주의에 빠지는 행위다. 대체 설인귀는 누구인가? 그는 한낱 이름 없는 소졸 출신으로 운 좋게 당 태종의 눈에 띄어 장수가 된 자 일 뿐이다. 그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력 부재의 산물이다. 사료에는 소정방, 이세적 등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 중국에서 횡행하는 설인귀와 연개소문의 경극에 연개소문을 물리치는 설인귀의 활약상이 나온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연개소문이 설인귀를 만났을 가능성마저도 없다.
연개소문이 도교 유입을 반대했다? NO! 오히려 숭배했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영류왕이 서토에서 도교를 받아들이려 했을 때 도교가 민족정신을 말살한다며 반발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나오듯 연개소문은 앞장서 도교를 받아 들였고 불교를 탄압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한 명분은 연개소문의 거사였지 도교 탄압이 아니었다. 이는 한반도의 종교 유입에 대해 학생들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잘못된 설정이다.
12세의 연남생이 제1차 고당전쟁에서 활약? 드라마에서는 연남생이 청장년으로 서기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당군과 싸우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서기 634년 태어났다. 제1차 고당전쟁 당시 연남생의 나이는 불과 12세에 불과했다.
연남생은 중국 여자의 아들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연개소문은 수나라의 군웅이자 반란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이 밀의 조카딸과 결혼해 큰 아들 남생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야사와 정사 사료 그 어디에도 연개소문이 중국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이는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남생의 생모가 중국인이었다면 연개소문의 후계자로 행세할 수 있었겠는가? 그 개연성은 전혀 없다. 더욱이 드라마에서 이 밀과 양현감 등 수나라 시대 인물들의 삶은 거의 사실 그대로 보여주면서 연개소문을 이 밀의 사위로 설정한 것은 학생들에게 연남생이 중국인의 자식이었다고 오해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구려는 압록수 전투에서 이겼다드라마에서 계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이 압록수 전투에서 남생의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야말로 중국측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만약 계필하력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당시 왜 소정방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평양으로 내려가지 않고 당나라로 소환되어 갔겠는가? 계필하력은 압록수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해 천진에 머물러 있다 당 고종의 용서를 받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사수전투에서 대패한 것도 압록수 전투에서의 패전 때문이었다.
북한산성 전투의 주인공은 연남생이 아니라 뇌음신 드라마에서는 북한산성 전투(보장왕 661년)의 장군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사료에는 분명히 북한산성에 출전한 장수를 뇌음신(惱音信)이라고 하고 있다. 뇌음신은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당군의 고구려 침입으로 인해 군사를 물렸다.
고·백·신 삼국은 삼한이 아니라 삼국이다 드라마에서는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삼한(三韓)이라 부르고 있다. 삼한이라면 마한, 진한, 변한 등 충청도 공주 이하에 있는 나라들의 총칭이다. 우리나라를 삼한이라 부른 것은 대표적인 일제의 식민사관의 결과물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래로 부여, 고구려, 낙랑국, 예맥 그리고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삼한은 우리 민족과 넓은 땅의 일부 일뿐이다.
부여 죽이고 한나라 치켜세운 드라마 주몽 MBC주몽 드라마를 끝까지 지켜본 초등학생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이 부여는 아주 나쁜 나라이고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부여는 동명성왕 주몽을 학대하고 죽이려 한 적대국으로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립국가인지도 의심스러울 만큼 한나라의 주구(走狗)나 신하 나라로 묘사돼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부여는 한나라의 한 지방쯤으로 인식된다. 토끼 잡으려다 송아지를 잃어버린 격. 굳이 사료에 나온 사실을 뒤바꿔가며 같은 민족을 원수로 만들어 놓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살해했다?드라마에서는 금와왕이 칼로 유화부인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설정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료에는 금와가 유화부인을 사랑했고 후궁인 그녀와의 소생으로 주몽이라는 왕자를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금와는 정실 소생인 대소태자와 그 형제들이 주몽을 시기하자 여러모로 주몽을 돌봐주었다. 금와왕은 고구려 동명성왕 14년, 서기전 24년 8월, 유화부인이 죽자 태후의 예로 장사까지 지내준 후덕한 사람이다.
온조의 생부는 해부루왕 서손 우태? 드라마에서는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를 우태라고 설정한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편에 보면 ‘주몽이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라고 쓰여 있다. 더 확실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현재까진 이것이 정설(定說)이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 권3 남부여, 전백제편에도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태는 해부루왕의 서손(庶孫)으로 나오는데, 해부루왕은 자식이 없어 금와를 양자로 들인 사람이다.
한나라에는 철기군이 없었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한나라의 군사로 철기군을 등장시켰는데, 당시의 한군은 두루마기나 걸친 농민병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중국인들은 역사상 철기군을 가진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북선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과 싸웠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태다. 철기군은 서력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동천왕이 철기군을 이끌고 맞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권 동천왕 편에 처음 등장한다. 철기군은 우리나라의 전매(轉賣) 특허였다.
현토 태수가 만주의 패자인 부여왕을 오라 가라 한다? 우리의 부여가 한(漢)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드라마는 상정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 현토(현도)의 태수라는 자가 부여 금와왕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나온다. 현도 태수라 하면 지금의 강화군수쯤 되는 자이다. 한나라의 태수 따위가 상고시대 만주의 패자인 부여왕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는가?
재미는 재미, 역사는 역사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은 서토의 많은 지역을 점유하며 당당한 삶을 살았다. 때로는 전쟁으로 중국을 괴롭히고, 국력이 약해지는 시기는 외교로 이를 돌파하며 동북아 패자로서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 때 고증을 완전히 무시한 천박한 대본으로 우리 역사를 모욕해선 안 된다. 스스로 고증을 할 수 없다면 고증이 잘 된 원작 소설을 선택해 그것을 기준으로 드라마 대본을 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재미는 재미고, 역사는 역사다. 재미있게 하기 위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역사를 제멋대로 바꾸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것이 역사 드라마가 일반 드라마와 다른 유일한 차이점이자 그것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임동주(林東主 ) ●1954년 서울 출생
●1978년 서울대 수의대 졸업,
●1997년 서울대 초빙교수
●現 역사연구가, 소설가, 서울대 초빙교수, 도서출판 마야 대표이사, 수의학박사.
●저서 : 우리나라 삼국지, 고구려를 세운 주몽, 발해를 세운 대조영 등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