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의 곡예 - 세종과 양녕대군
세종도 사람이다. 그에게는 장점만 아니라 단점도 있었다는 말이다. 자꾸만 세종을 칭찬하다 보니 은연중에 선의(?)의 피해자도 나온다. 가령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이제(李禔)만 해도 그러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양녕대군을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방탕하고, 공부도 못하는 바보 양녕대군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큰아들이었다. 덕분에 일찌감치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부왕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충녕대군(세종)을 향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대군의 곁을 떠나자 문무백관은 앞 다퉈 그의 허물을 들춰냈다.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해 조선왕조 역대의 공신(功臣)들까지 나서서 날마다 폐세자를 요청하였다. 하라는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도무지 왕자의 덕(德)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태종이 못이기는 척하며 그들의 요청에 따랐다. 당시 신하들은 태종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서 폐세자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왕통은 양녕대군을 비켜갔다. 그래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양녕대군이 동궁에서 쫓겨날 때 훗날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는 힘써 항변했다. 그로 인해 황희는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훗날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도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하자고 대신들이 앞장서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감히 세자의 자질을 운위하며 폐위를 주장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이익, <<성호사설>>)
역사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양녕대군은 용렬한 왕세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1407년 9월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명 태종은 조선국 사신으로 중국에 온 양녕대군을 환영하였다. 명태종은 기쁜 마음에 시를 지어 선물하고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의 서책까지 선물하였다. 당시 양녕대군은 15세에 불과하였지만 외교사절의 수반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조금도 차질 없이 수행하였다.(<<태종실록>>)
뿐만 아니라 양녕대군은 문장에도 뛰어났다. 만년에 어느 스님의 시축(詩軸)에 이렇게 썼다.
“산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山霞朝作飯)
여라(女蘿)에 걸린 달로 밤의 등불을 삼는다네(蘿月夜爲燈)
홀로 외로운 바위 앞에 자노라니(獨宿孤巖下)
겨우 한 층짜리 탑이 있도다(惟存塔一層)”
이 시에 대하여 김시양(金時讓, 1581-1643)과 이긍익(李肯翊, 1736-1806) 등 조선의 내로라는 후대의 문인들이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는 글씨에도 빼어났다. 2008년 불탄 우리나라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어엿한 사실이다. 실학자 이수광(李晬光, 1563-1628)도 그것이 사실이라 주장했다. 훗날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세조 때 문신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라고 말했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지만 정난종이 썼다고 확언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는 없다.
양녕대군은 태조 이성계를 닮아서 활 솜씨도 탁월했다. 언젠가 까마귀 때문에 대궐 안 감나무에 열매 하나 구경하기 어렵게 되자, 활시위를 당긴 것도 그였다. 그를 미워하던 부왕도 그 솜씨에 반해 웃었다.(성현, <<용재총화>>)
이처럼 다재다능했지만 양녕대군의 최고 장점은 넓은 도량과 해학이었다. 자신의 복을 자랑하면서, “내가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아니냐”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넓은 도량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말년은 세조 치하였다. 세조는 왕자와 대신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다들 벌벌 떨었지만, 양녕만은 우스갯소리로 늘 왕을 편하게 대했다. 그는 천수를 누리며 난세를 무난히 헤쳐 나갔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배짱을 부러워한 것은 당연하다.
16세기부터 조선의 문사(文士)들은 정사(正史)가 외면한 양녕대군의 재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진실을 온전히 숨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자질을 제대로 평가하고 보니, 한 가지 난제가 생기고 말았다. 왜, 왕위를 아우 세종에게 빼앗기고 말았는가 하는 문제였다. 후세는 그럴싸한 답을 만들었다.
양녕대군은 동생(세종)이 자신보다 월등히 현명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바보짓을 하여 왕위가 그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을 비롯해 여러 문헌에 이런 주장이 실려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설명은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양녕대군이 진심으로 아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이 일단 왕위를 이어받은 뒤에 물려주어도 그만이었다. 하필 무리하게 폐세자의 고난을 자초할 이유가 없다. 폐위는 그와 그 자손의 사회적 위신을 추락시키고 처가와 미래의 사돈 집안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녕대군이 양위하기 위해 스스로 폐위를 유도하였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오히려 역사적 진실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경쟁과정에서 양녕대군 측이 패배했다는 것이다.
아우 충녕대군(세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훨씬 강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충녕대군과 그의 처가인 심씨들이 있었다. 그때 사정이 정사에 기록된 것보다는 훨씬 복잡 미묘하였기에 태종은 세종의 손을 들어주고서도 그가 즉위하자마자 국구 심온을 처형한 것은 아니었을까.
왕위쟁탈전에서는 실패했지만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렸다. 골치 아프게 세사에 시달리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한평생을 멋지게 잘 살았다.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가면 썩기 마련인데 용케 잘도 피해 나갔다.
그러나 양녕이 왕이 되었더라면 우리 역사에 세종이란 왕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사람들이 양녕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다.
양녕과 세종의 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역사의 우연을 거듭 생각한다. 0.7%의 변수만 없었더라면, 지겨운 윤석열 정권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의 배신이 못내 원망스럽다. 안철수가 윤씨와 야합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들보다는 100배 나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금의 한국을 이끌어나갈 터인데. 그랬으면 현재의 혼란과 국가적 몰락은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닐까. 우연과 필연은 흑백으로 선명하게 양분되지 않는다는, 또는 양분할 수 없다는 점에 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