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를 깨닫고 자연을 닮은 삶을 살다’
삶과 죽음은 누구나가 겪는 일이지만 누구나 다 삶과 죽음이라는 본원적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고민을 한다 해서 모두가 다 그에 대한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데, 그 중에는 우주의 본원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몰두하여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은 이들도 있다.
▲화담(花潭). 조선시대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린 그림이다. 1757년 개성을 유람하고 제작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에 실려 있다. 서경덕이 태어나 살던 개성부(開城府) 화정리(禾井里) 계곡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서 못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진달래가 비치는 것을 보고 못의 이름을 화담(花潭)이라 하였다. 서경덕은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호(號)를 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난한 집 꼬마, 생각에 잠기다
조선 성종(成宗)에서 명종(明宗) 연간에 살았던 성리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선생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철학자가 태어날 때에는 신이(神異)한 태몽이 있는 법. 화담의 어머니는 화담을 임신하기 전에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한다. 태어난 아이는 과연 영특하였고, 조금 자라 독서를 하면서는 글을 보기만 하면 다 욀 정도로 총명했다 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느 봄날, 화담의 부모는 그에게 밭에서 나물을 캐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밭에 갔다 돌아온 화담은 매일같이 늦게 오는데도 광주리에는 나물이 다 차 있지 않았다. 부모가 이상해서 연유를 묻자 화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물을 캘 때 새가 나는 것을 보았는데, 첫날에는 땅에서 한 치 정도 떨어졌다가 다음날엔 땅에서 두 치 정도 떨어졌어요. 또 그 다음날에는 세 치정도 떨어졌다가 점차 위를 향해 날아올랐어요. 저는 이 새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늦게 돌아오면서도 나물도 못 채운 거예요.” -《화담집(花潭集)》 卷3 유사(遺事) 중에서-
무엇이든 골똘히 생각하기를 좋아했던 화담은 《대학(大學)》을 읽으면서부터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일삼았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을 말한다. 화담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格物)을 하지 못한다면 독서를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벽에 천지만물의 명칭을 써 붙여 놓고 날마다 그 글자의 본질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한다. 풀리지 않을 때에는 밥 먹는 것도 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 채 방에 꼿꼿이 앉아 의심이 풀릴 때까지 골몰하였다. 그러다 보니 병이 났는데, 수년을 이렇게 한 뒤에 이치가 환해졌다 한다.
그러나 그가 이런 공부 방법을 택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다. 그는 늘 “나는 스승을 만나지 못해 지나치게 힘을 들였지만 후인들이 내 말을 따르면 나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하며, 지난날 자신이 그런 공부 방식을 택한 것을 후회했다. 만약 화담이 명문가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 밑에서 글을 배웠다면 과정을 밟아 가며 차근차근 학문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벼슬보다 산수(山水)가 좋아라
화담은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보낸다. 31세에 조정에서 실시한 천거과(薦擧科)에 응시해 장원을 했고, 43세에 모친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해 합격했고, 56세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및 성균관 유생들의 추천으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낳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에 응시할 것을 명한 것을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특한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화담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산수를 유람하기를 즐기고, 더러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날 밥을 짓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중에도 늘 편안한 모습이었고, 애써 빈천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이웃을 대해 이웃들도 그의 덕을 존경하여 이웃 간에 갈등이 있으면 관아에 가지 않고 먼저 그에게 와서 물었다. 그는 벼슬살이 대신 자신의 삶을 자신에게 맞는 일들로 채워 나갔다. 성현의 글을 읽는 일, 자연을 즐기는 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 웃는 얼굴로 이웃을 만나는 일이 그가 벼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일들이었다.
그의 가난했던 생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려 했던 뜻이 담긴 두 편의 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이른 아침 우는 새 도마질하라 권하는데 有鳥凌晨勸鼓刀(유조릉신권고도) 도마질 소리는 요리하는 부엌에서나 나야지 鼓刀應有割烹庖(고도응유할팽포) 근년 들어 상 위에 소금 없어진 지도 오래니 年來盤上無鹽久(연래반상무염구) 초가집을 향해서 괴로이 울지 마라 莫向茅齋苦叫號(막향모재고규호) -《화담집(花潭集)》 권1 문고도(聞鼓刀)
이 시는 산에서 우는 딱따구리 소리에서 도마질을 연상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 도마질할 수 없는 가난한 신세를 돌아본 작품이다.
맑은 세상에 숨어 사는 사람된 것 스스로 기뻐하고 自喜淸時作逸民(자희청시작일민) 명함 내밀어 임금 뵙는 일 도리어 꺼린다네 還嫌投刺謁邦君(환혐투자알방군) 풍토에 맞춰 나라를 바로잡을 재주 없어 無才醫國趨風土(무재의국추풍토) 흰구름 베고 누우며 산에서 살기로 했네 有約棲山卧白雲(유약서산와백운) 세상의 공명을 얻지는 못했지만 世上功名雖不做(세상공명수불주) 도리와 관계된 것은 그래도 분간할 줄 안다네 道中糟粕尙能分(도중조박상능분) 졸다 일어나 뜻밖에 좋은 시구 받고서 睡餘忽被垂佳句(수여홀피수가구) 선생께서 다시 문(文)을 숭상하심에 감사드리네 爲謝先生更右文(위사선생갱우문) -《화담집(花潭集)》 권1 차유수심상국언경운(次留守沈相國彦慶韻)
이 시는 개성 유수 심언경(沈彦慶)이 보낸 시에서 차운해 지은 작품인데, 벼슬살이는 자신과 맞지 않아 하지 않지만 도리를 분별하는 일만큼은 잘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개성 북부 박연리(朴淵里)에 있는 박연폭포이다. 허균이 지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 보면, 황진이가 화담에게 송도삼절(松都三絶)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면서 자기와 화담과 박연폭포라고 하자, 화담이 이를 듣고 웃으며 일리가 있다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파주시청 소장.
#사상의 정수(精髓)를 세상에 남기다
화담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그리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자 화담은 마음이 바빠진다. 《화담집(花潭集)》 권2에 실린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서 그는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설이 생사(生死)와 귀신(鬼神)의 정상(情狀)을 다 논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된 소이연(所以然)의 극치를 설파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대강만 알지 아주 정밀한 것은 알지 못하게 된 후학들이 천고(千古)의 의심을 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짓는다고 밝혔다. 이때 이 작품 외에 <원이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태허설(太虛說)> 등 화담 사상의 정수(精髓)가 담긴 3편의 저술을 함께 남겼다.
이밖에도《화담집》에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수록된 <성음도(聲音圖)>를 풀이한 <성음해(聲音解>, 《황극경세서》<관물외편(觀物外篇)>에 실린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수리(數理) 철학을 해설한 <황극경세수해(皇極經世數解)>, 복희(伏羲) <육십사괘방위도(六十四卦方位圖)>를 해설한 <육십사괘방원지도해(六十四卦方圓之圖解)>,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중 <괘변도(卦變圖)>를 풀이한 <괘변해(卦變解)> 등 화담 사상의 연원(淵源)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철학 작품들이 실려 있다.
후학에게 천고(千古)의 귀한 선물을 남긴 화담은 임종 전에 곁에서 모시던 자에게 못에 데려가 달라고 하여 목욕을 한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한 식경(食頃)쯤 지난 뒤에 “생사의 이치를 오래 전에 알았기에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에 대해 탐구했던 대학자 화담, 그는 학문을 통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고, 자신이 얻은 답을 후학들에게 알려준 뒤,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가 지은 '유물(有物)'이라는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존재가 오고 또 와도 다함이 없어 有物來來不盡來(유물래래부진래) 다 왔는가 싶은 때에 어디선가 또 오네 來纔盡處又從來(내재진처우종래) 시작도 없이 오고 또 오거늘 來來本自來無始(래래본자래무시) 그대는 아는가, 애초에 어디서 오는지를? 爲問君初何所來(위문군초하소래)
존재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감이 없어 有物歸歸不盡歸(유물귀귀부진귀) 다 돌아갔나 싶은 때에도 돌아간 적이 없네 歸纔盡處未曾歸(귀재진처미증귀) 끝도 없이 돌아가고 또 돌아가거늘 歸歸到處歸無了(귀귀도처귀무료) 그대는 아는가, 어디로 가는지를? 爲問君從何所歸(위문군종하소귀)
▲《화담집》 표지와 내지. 1786년(정조 10)에 조유선(趙有善)ㆍ마지광(馬之光)이 개성에서 4권 2책의 목활자로 간행한 오간본(五刊本)이다. 본집 2권ㆍ부록 2권 합 2책으로 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화담집(花潭集)
조선 시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문인 박민헌(朴民獻)ㆍ허엽(許曄)이 수집ㆍ편차하여 명종ㆍ선조 연간에 10행 20자의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을 시작으로, 1786년에 조유선(趙有善)ㆍ마지광(馬之光)이 개성에서 4권 2책의 목활자로 간행한 오간본까지 모두 5개의 판본이 있다. 5간본은 본집 2권ㆍ부록 2권 합 2책으로 되어 있는데, 본집 권1에는 부(賦) 1편과 시(詩) 100여 수가 실려 있으며, 권2에는 소(疏)ㆍ서(書)ㆍ잡저(雜著)ㆍ서(序)ㆍ명(銘)이 실려 있다. 부록에는 연보(年譜)ㆍ신도비명(神道碑銘)ㆍ유사(遺事)ㆍ문인록(門人錄)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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